“이제 토플책 덮고 거리로” 자각하는 침묵의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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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들이 지난 10일 서울 이랜드 앞에서 비정규직 탄압에 항의하는 모임을 갖고 있다. |프레시안 제공 |
- 권익을 위해 싸우는 프랑스 청년들-
지난달 초 프랑스의 파리1·4, 툴루즈, 루앙, 페르피낭, 렌 등 전국 10여개 대학 학생들은 각 캠퍼스에서 시위를 했다. 등록금 인상과 기업 기부금 모금을 허용하는 내용의 ‘대학 자치법’이 대학을 사유화하고 대학 평준화를 깬다는 이유였다.
지난해 1월 프랑스 정부가 최초고용계약법(CPE)을 발표했다. 20인 이상 사업장에서 26세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사용자는 최초 고용 2년간 특별한 사유없이도 노동자를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첫 취업하자마자 해고에 직면하게 된 청년들은 법안 철회를 요구하며 대대적 시위를 벌였다. 3월에는 100만명이 대학과 거리에 모였다. 그리고 3개월 뒤 정부는 법안을 폐기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악조건 하에 있는 한국의 88만원세대는 조용하다. 교육권·노동권과 밀접한 등록금 문제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다. 초·중·고 때부터 사회 과목에서 노동기본권은 물론 플래카드 작성법, 모의 노사 교섭까지 가르치는 독일·프랑스 등 유럽 국가와 달리 노동 문제를 거의 가르치지 않는 한국의 제도권 교육을 주요 원인으로 꼽는 이들이 많다. 교육부와 전경련이 함께 만든 경제교과서가 등장하고, 기업이 대학을 평가할 정도로 과도한 시장주의도 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조한혜정 교수는 이렇게 분석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같은 책을 읽으며 자란 이들 세대는 ‘모든 게 너 하기 나름’이라는 규칙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젊은 인재들은 자기 주도적으로 노동시장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저 삼성을 바라면서 시스템에 그대로 포섭돼 버립니다.”
- 88만원세대 책읽기로 시작된 자각 -
최근 발간된 ‘88만원세대’는 이런 침묵과 순응, 체념에 맞서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라”고 제안했다. 88만원세대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저항하고 조직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요구는 너무나 얌전하고, 기성체제에 안주하는 88만원세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88만원세대가 그런 것은 아니다. 여전히 소수이지만, 이런 문제 인식에 대해 공감하고 자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공감은 우선 ‘88만원세대’라는 책을 사서 읽는 작은 운동에서 발견할 수 있다. ‘88만원세대’는 출간 4달 만에 2만5000부를 돌파했다. 사회과학 분야에서 ‘꿈의 1만부’라는 판매량을 2배 넘어섰다. 지난 5일 8쇄로 1만부를 더 찍었다. 출판사 레디앙의 이광호 대표이사는 “젊은 세대를 소비 주체가 아닌 사회 경제적 의미로 분석한 이 책이 광고를 낸 것도 아닌데, 젊은 층에서 입소문을 타며 꾸준히 잘 팔리고 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사회과학 서적의 20대 구입 비율은 20%. 그런데 ‘88만원세대’는 40% 이상이다. 20대에게 인기 있는 책이 ‘부자학’ ‘처세술’ ‘취업교재’라는 점을 고려하면 ‘88만원세대’의 판매량이나 판매 추세는 이례적이다.
20대 블로거들이 온라인에 올린 ‘독후감’도 수백 건에 이른다.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시민독서프로젝트 교재로 사용하는 등 각 지역의 여러 독서모임, 문화사랑방에서도 책 읽기가 활발하다. ‘수유+너머’ 독서프로젝트 매니저 김연숙씨는 “우리의 ‘불안정한 삶’이 독서프로젝트의 키워드였는데, ‘88만원세대’는 사회 비정규직 문제와 세대 문제를 지식이 아닌 현실로 다루고 있어 교재로 선택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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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들이 이랜드 비정규직 문제에 항의하며 쓴 구호, ‘비정규직 악법이 뿌린 저주, 다음은 우리 차례예요’라고 적혀 있다. |프레시안 제공 |
- 21세기의 의식화 교재로 -
성공회대·연세대·인천대 일부 수업에서도 ‘88만원세대’를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인천대에서 ‘한국사회노동문제’라는 이름의 교양 강의를 맡고 있는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은 “이 책은 지금의 20대들에게 가장 적나라하게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조한혜정 교수는 “학생들이 아주 공감한다. ‘이제 내가 정말 왜 불안한지 알겠다. 책 읽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짱돌을 드는 것’이라고 말하는 학생들이 많다. 대부분 똑똑하게 핵심을 간파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조교수 수업에 들어간 학생들이 과제로 써 낸 서평에서는 상위권 대학 학생들도 ‘88만원세대’로서 느끼는 불안감이 드러난다. 다음 학기 졸업을 앞둔 박모씨(25)는 지원 회사 10곳 중 7곳 정도가 서류 전형에서 떨어졌다. “(회사를) 골라가기는커녕 백수를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는 시점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정말 88만원을 받고 회사를 다니게 되는 것은 아닌지 겁이 나는군요.”
기성 세대를 향한 불만도 터져나왔다. 김윤하씨(19)의 말이다. “기성 세대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고 왜 이렇게 힘들어 하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해요.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손을 내밀고 관심 가져주시면 될 텐데….” 윗세대의 관심만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서명선씨(20)는 “기성세대에게 ‘우리 불쌍하니까 가엾게 여겨서 고쳐주세요’라고 할 건가. 그들이 나누어 줄 것 같은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
- 개인아닌 사회문제로 보자-
이원희씨(20)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이는 사회적인 문제이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이제 이야기 좀 나누어 봅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잖아요.” 안슬기씨(20·여)는 “밤새 토플책을 읽기보다 하루치 토플 시험을 보지 말자. 시사 공부를 위해 신문 스크랩을 하기보다 아름다운 반항으로 신문의 기사거리가 되어보자”는 제안을 했다. 최모씨(19)는 “지금은 ‘노동 기회 소멸의 시대’다. 이제 이 판을 한 번은 엎어볼 때다. ‘배틀로얄’에서 게임의 룰을 한번 정도는 뒤집어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고, 그 용기가 존재함을 서로 깨달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88만원세대들이 작지만 의미 있는 행사도 했다. 성공회대에서는 11월27일부터 3일간 ‘비정규직 전시회 시즌 1’이 열렸다. 민주자료관과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가 주최하고 학생들도 참여했다. 유소라씨(24)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친구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다 같이 함께 노력하고 뭉치는 것이 대안임을 알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말했다. 참여 학생들은 ‘우리가 바로 미래의 비정규직’이라며 전시 참여를 촉구하는 대자보를 붙였다. 전시장에는 홈에버, 롯데호텔 노조 등 비정규직 농성장에서 기증받은 글과 영상물로 빼곡히 채웠다. 3일 동안 2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다녀갔다. “4학년으로 취업준비를 하는 동안 저 역시 불안해요. 시험 때면 예민해져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해결하려면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잖아요.” 유씨의 말이다.
- 저항하는 사이 경쟁 탈락 걱정도 -
그러나 누가 나서서 바리케이드를 칠 것인가. 김모씨(20·여)는 “내가 (책에서 말한대로) 짱돌을 드는 사이에 다른 ‘현명한’ 이들은 좁은 취업문을 벌써 비집고 들어가고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5% 정규직을 향해 뛰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김씨의 손목을 붙들어 맨다. 박모씨(22)도 “짱돌을 들었을 때 생길 수 있는 모호함보다 누군가 짱돌을 들 때 나는 GRE(미국일반대학원 입학자격시험)를 공부해 얻을 수 있는 작은 이익을 추구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김호경씨(25·성균관대)는 “20대가 처한 고민을 친구들과 나눠볼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면서도 “세대 중심으로 20대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와 닿지 않는다. 결국은 계급 문제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 아직 소수지만 곧 운동으로 확산될 것 -
이들 88만원세대들의 자각과 공감이 사회 변화의 에너지로 발전할 수 있을까. 하종강 소장은 “이랜드 신촌 본사에 와서 깃발 들고 오는 청소년들이 소수지만 있다”며 “소수의 정서가 다수가 될 수 있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1970~80년대 소수 극렬 운동권의 정서가 80년대 말 대중의 정서가 됐다”며 “지금도 대학 내에서 구조적으로 접근하는 운동권은 백안시 되지만 신자유주의가 심화되면 대중의 정서로 확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홍세화씨는 “20대들은 이념적으로 보수적인 게 아니라 탈정치 때문에 보수적이 된 것”이라며 “88만원세대가 정치에서 벗어나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정치에 관심을 가질 때 길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목·유정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