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문화’라는 말에는 방향이 없습니다. 그냥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현상을 기술할 뿐이죠. 이 바탕에 ‘상호문화’라는 내용과 가치를 채워야 합니다.”
‘다문화’라는 말이 쓰인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이 땅에서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독일 베를린 소재 민간단체인 코레아협의회 한국학연구센터 소장 최현덕 박사(49·사진)다. 그는 지난 10~12일 전남대에서 열린 상호문화철학 국제학술대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다. 국내에 ‘상호문화철학’을 처음 소개한 최박사를 지난 22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디아스포라’로 규정했다. “제 인생의 절반이 외국 생활이었죠. 오랫동안 외국에 살면서 정체성 문제로 많이 고민했습니다. ‘너는 너무 독일식으로 변했어’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충격을 받기도 했어요. 그런 말에 대해 제 입장을 갖기까지 10년이 걸렸습니다.”
디아스포라는 재일조선인 2세인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덕분에 한국 사회에도 익숙해진 말이다. 최박사는 디아스포라를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보통은 면(面)에 있어야 자리가 있다고 인식하지만 선(線) 위에 있어도 자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선 위에 있으면 면 위에 있을 때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가령, 어째서 이쪽에서 억압적인 것이 저쪽에선 아무렇지도 않고, 이쪽에서 ‘합리적’이라고 하는 것이 저쪽에서는 ‘비합리적’인 것이 되는지 말이다.
이쯤에서 상호문화철학에 대해 궁금해졌다. 최박사는 이를 “철학계 내의 대안활동”이라고 했다. “인식론, 논리학, 윤리학, 미학 등과 같은 철학의 한 분야라기보다 철학의 모든 분야를 통괄하되 ‘상호문화성’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기존 철학을 비판하고 이론을 전개하는 철학”이다. 남미 철학자 호세 마르티가 1877년 “철학의 발생지가 그리스뿐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 있으며,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전 미 대륙에 존재했던 사유전통도 같은 권리로 철학에 포함돼야 한다”고 한 데서 비롯됐다. 유럽에서는 1980년대 말 서구중심적 사유에 대한 반성적 차원에서 활발해졌다. 한국에서는 최박사의 주도로 2006년 11월 전남대에 처음 국제대회가 열리며 소개됐다. 두번째인 이번 대회에는 베트남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장과 베네수엘라 문화부 차관 등이 발표자로 나와 각각 자국의 사회적 연대의 기초와 민중교육·철학교육 등에 대해 토론했다.
“철학은 타 학문과 달리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는 도구를 가졌습니다. 서구에서 철학이 대학 강의, 연구서 출판, 철학회 결성 등의 형태로 표현되고 제도화됐지만, 아프리카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현자(賢者)의 구술로 표현되기도 했죠. 문화적 맥락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철학에도 필요한 것입니다.”
다(multi)문화와 구별되는 상호(inter)문화에 대해 물었다. “ ‘여러 문화가 한 사회 속에 공존한다(다문화)’고 할 때 그것들이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문제됩니다. ‘다문화’는 여러 문화가 있는 속에서 나오는 정책들을 얘기할 뿐, 정책의 방향성에 대해선 말해주지 않죠. 하나의 주류문화가 다른 것을 흡수하는 식으로 나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여러 문화들이 서로 게토처럼 고립돼 존재할 뿐이죠.”
이는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 여성들이 한국의 주류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최근 문화관광부 내에 ‘다문화정책팀’이 신설되긴 했지만, 정부나 주류사회가 보여주는 공식적인 태도는 좋게 말해야 ‘보듬어안기’다. 서양이 낯선 존재를 만나온 방식도 마찬가지다. 개종을 강요하며 ‘동일화’한다든지, 알카에다에 대해서처럼 맹목적으로 두려워한다든지, 타히티를 그린 고갱의 경우처럼 ‘낯섦’을 자신을 보강해주는 쉼터 정도로 삼는 것이었다.
최박사는 한 쪽이 다른 쪽을 주변화하는 모든 형태의 ‘중심주의’를 배격한다는 점에서의 ‘동등성’과, 언제든 자신이 변화할 준비가 돼 있는 상태에서 임하는 ‘대화’를 상호문화의 요건으로 꼽았다. 그런데 권력관계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낯선 존재끼리 과연 ‘동등한 대화’가 가능할까. 그는 ‘낯섦의 해석학’을 언급했다. 곧 낯선 존재에 대한 이해다. 이 과정에서 해석 또는 번역이 필요한데, 낯선 존재 자신이 번역의 주체가 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낯선 자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겸허하게 인정하면서, 그 모름이 불러일으키는 호기심과 동시에 모름의 비밀스러움에 대한 경외감을 지니고 열린 태도로 임할 때 진정한 만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 교과과정에서 국민윤리 또는 도덕으로 왜곡돼 있는 시민교육 또는 철학교육이다. “디아스포라의 문제는 단지 교과과정의 내용으로 포함되는 것을 넘어, 디아스포라의 관점을 반영해 도덕 및 철학교육 자체를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게 될 겁니다. 디아스포라가 단지 소수자, 희생자인 데서 벗어나 그들의 고유한 관점으로 다수자들이 그냥 넘겨버리는 억압의 문제를 제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이 사회를 형성해가는 더욱 적극적인 주체로 나설 수 있을 때, 우리 사회는 훨씬 인간적인 얼굴을 하게 되겠죠. 이제 디아스포라의 관점이 반영된 교과과정을 고민할 때입니다.” 독일에서 조국의 민주화운동과 많은 관련을 맺었던 이 여성 철학자는 이제 선 위에 서서, 면 위에 있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예리하게 짚어낼 준비를 하고 있다.
- 최현덕 박사는? -
1980년 이화여대 철학과 졸업 후 독일 유학, 97년 브레멘대에서 ‘사회비판 개념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개념형성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80년대 후반에 한국민중판화 독일 순회전, ‘핵시대의 한국인’ 사진전, 구속 민중미술인 국제석방 캠페인 등을 벌이며 해외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했다. 박사학위 후 일시 귀국, 한일장신대 철학과 교수로 일했지만 2000년 학내 분규로 ‘쫓겨났다’. 이후 그는 역시 그리스도신학대의 학내 문제로 재임용되지 못한 김상봉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교장(현 전남대 교수)과 함께 ‘거리의 철학자’로 일했다. 2001년 이후 독일에 체류하며, 한국에 있는 김교수를 끌어들여 2006년부터 상호문화철학 국제학술대회를 한국에서 두 차례 열었다.
〈 글 손제민·사진 박재찬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