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에게 책 읽어주던 16살 소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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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봉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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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알베르토 망겔 지음·강수정 옮김. 산책자·1만원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열 여섯살 소년이 단골 손님이었던 예순다섯살 노 작가를 만난다. 그는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이자 세계적인 문학 거장이었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였다. 이미 시력을 상실해 제 눈으로는 무언가를 읽을 수 없었던 보르헤스는 소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일이 끝난 뒤 자신의 집에 와서 책을 읽어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소년은 1964년부터 1968년까지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고 대화를 나누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소년의 이름은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와 〈나의 그림 읽기〉 같은 책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편집자이자 작가다.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은 망겔이 이 무렵을 돌이켜 쓴 책이다. 대작가이자 국립도서관장이라는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게 보르헤스의 서재는 평범하고 소박했다고 망겔은 회고한다. 그 이유의 하나는 보르헤스의 엄청난 기억력에 있었다. 한번 읽은 책은 스캐닝을 한 것처럼 머릿속에 고스란히 저장되었던 것이다. 보르헤스의 방에는 자신이 쓴 책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쓴 모든 글을 암송했다. 영국 여행길에는 “신을 조금 놀래주려고” 고대 영어로 주기도문을 암송할 정도로 어학적 재능도 뛰어났다. “보르헤스에게 현실의 정수는 책 속에 있었다.”(36쪽)
1948년생인 망겔은 어느덧 그 자신 소년 시절 만났던 보르헤스와 비슷한 나이에 접어들었다. “그의 아파트 계단을 오르던 소년은 과거의 어딘가에서 길을 잃었고, 이야기를 좋아했던 현명한 노인네도 사라졌다.”(98쪽) 그러나 생전의 보르헤스가 그에게 했던 말마따나 “아무것도 결코 사라지지 않”(96쪽)는다.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에는 노년의 보르헤스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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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기와 칼은 손의 확장이다. 소우주(小宇宙)는 눈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그 이상이다. 책은 기억의 확장인 것이다.'
20세기 환상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꼽히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걸어 다니는 도서관으로 불렸을 정도로 방대한 양의 책들을 머리 속에 저장했다. 보르헤스는 시인·소설가로 활동하면서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을 지냈고, 말년에 시력을 상실한 뒤에도 독서를 멈추지 않았다. 찾아온 손님마다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던 그는 책 읽어주는 아르바이트생도 고용했다. 이 책의 저자 알베르토 망구엘은 서점 직원으로 일하던 열여섯 살 때부터 4년 동안 매일 저녁 보르헤스의 서재에서 책을 읽어주고, 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면서 성장기를 보냈다. 보르헤스로부터 영혼의 세례를 받은 망구엘 역시 방대한 독서량을 바탕으로 국내에도 번역된 '독서의 역사' 등의 책을 펴내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있다.
망구엘은 이 책을 통해 보르헤스의 서재는 예상과는 달리 책이 그리 많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백과사전과 각종 사전,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등이 서재 귀퉁이에 얌전하게 꽂혀 있었다고 한다. 기억의 천재였던 보르헤스는 굳이 집을 도서관으로 꾸밀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보르헤스에게 책읽기는 '수천 년 전에 시작해서 한 번도 끝난 적이 없는 인류의 대화'를 뜻했다고 망구엘은 적었다. 한 권의 책은 그 책을 읽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확장될 수 있다는 '텍스트의 무한성' 개념을 바탕으로 보르헤스는 우주를 도서관에 비유했다.
-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는 책을 반드시 끝까지 읽을 의무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조이스의 소설 '피네간의 경야'를 완독하지 않았으면서도 그 책을 주제로 언어학 강연을 하기도 했다. 줄거리를 알고, 백과사전의 도움을 받은 덕분이었다.
보르헤스는 추리소설을 사랑했다. '추리소설의 공식이 소설가로 하여금 그 나름의 경계를 설정하고 말과 그 말로 만들어낸 이미지의 효율성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이상적인 서술구조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는 실명하기 전에 서부영화나 갱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대중영화를 좋아했다.
"보르헤스는 예민한 몽상가였고, 꿈 얘기를 즐겨했다… 특히 잠들기 전의 짧은 시간, 의식이 사라지는 것을 의식할 수 있는 잠과 깸 사이의 시간을 좋아했다"고 망구엘은 회상했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꿈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어. 그런데 성공한 적이 없는 것 같아"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입력 : 2008.01.04 22:38
보르헤스에게 책 읽어주던 소년 老 작가의 '도서관 낙원' 엿보다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ㆍ강수정 옮김 / 산책자 발행ㆍ163쪽ㆍ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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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어느날 초저녁,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구미문학 전문서점 ‘피그말리온’에 단골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가 찾아왔다.
당시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소설가이자, 국립도서관장이었던 보르헤스는 16세의 서점 직원인 알베르토 망구엘(1948~)에게 “저녁에 집에 와서 책을 읽어주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유전적으로 약한 시력을 타고난 보르헤스는 30세 무렵부터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다가 50년대 후반엔 실명한 상태였다. 지금은 캐나다에서 손꼽히는 소설가로 활약 중인 망구엘은 문호의 청을 받아들여 일주일에 서너 번씩 4년간 보르헤스가 노모와 함께 사는 작은 아파트를 드나들었다.
이 책은 망구엘이 책을 읽어주러, 구술 작품을 받아쓰러 다니며 보고 들은 보르헤스에 관한 기록이다. 100쪽 가량의 본문 분량(남은 60여 쪽엔 보스헤스의 생애ㆍ작품 해설, 연대기, 어록이 실렸다)이 말해주듯 세세하고 정치한 기록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가 스페인어 원서를 출간한 것이 2004년, 그 시절을 40년쯤 흘려보내고 난 뒤다. 망구엘도 “이건 기억이 아니다. 이건 기억의 기억의 기억”이며 “기억들을 일으킨 사건들은 몇 개의 잔상, 몇 개의 낱말만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고백한다.
크게 실망할 일은 아니다.
책 1권을 독자 100명이 읽으면 100권의 책이 탄생한다는 것이 당시로선 선구적인 보르헤스의 지론이었다. 망구엘은 작가를 두 부류, “세계를 한 권의 책에 담아내려는 작가”와 “그보다 드물기는 하지만 세계가 한 권의 책이어서 본인과 다른 이들을 위해 그 책을 읽으려는 작가”로 나누고 보르헤스는 단연 후자라고 썼다.
보르헤스는 존재와 세계를 해석의 여지가 무한히 열린 텍스트로 본 것이고, 그 점에서 이 책은 매우 보르헤스적인 보르헤스에 관한 글쓰기다.
저자는 보르헤스의 독서를 공들여 서술한다. 그는 처음 보르헤스의 서재를 봤을 때 “낙원을 도서관의 형태로 상상한다는 사람의 서재치고는” 규모가 작아 실망했다고 말한다.
낡은 책꽂이는 키플링, 스티븐슨, 체스터턴, 조이스, 오스카 와일드, 마크 트웨인 등 영미 작가 작품과 쇼펜하우어, 슈펭글러, 기번, 리하르트 마이어 등의 철학ㆍ역사서로 소박했다. 하지만 곧 노작가에게 장서의 양은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곧 깨닫는다. 스스로 ‘쓰레기 하치장’이라 부른 놀라운 기억력 덕분에 보르헤스는 언제든 필요한 구절을 읊어 인용할 수 있었다.
나아가 그는 현실의 정수가 책에 있다고 믿는 텍스트주의자였다. 그는 책을 읽고 쓰고, 책에 대해 이야기하며 “수천 년 전에 시작돼서 한 번도 끝난 적이 없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인식했다.”
그에게 역사는 바로 책이었던 셈이다. 망구엘은 책등을 쓰다듬으며 그 제목과 저자를 정확히 알아내는 보르헤스를 묘사하며 “그와 책 사이에는 생리학의 법칙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어떤 관계가 존재한다”고 찬탄한다.
망구엘은 공정한 저자다. 문자를 편애한 탓에 보르헤스가 음악, 그림 등 다른 장르엔 별다른 조예가 없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균형 잡힌 서술 덕에 이 책은 거장의 인간적 약점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보르헤스는 자신에게 헌정하는 작품을 낭독하는 작가를 면전에서 모욕하는 심술을 부리거나, 이따금 인종차별적 발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반면 그는 좋아하는 사랑 노래를 듣고 싶어 여러 번이나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보러가자고 어린 조력꾼을 조르거나, 서부극이나 갱 영화를 보며 몰락한 영웅을 눈물로 애도하는 천진한 노인이기도 했다.
“꿈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어. 시도는 해봤지. 그런데 성공한 적이 없는 것 같아”란 몽상가적 발언을 전하며 저자는 지난 세기를 풍미한 보르헤스의 환상문학의 연원을 보여준다.
라틴문학의 또다른 거장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비오이 카사레스-실비나 오캄포 부부와의 유쾌한 잡담은 보르헤스가 어떤 일상에서 창작의 동력을 얻었는지를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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