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빌 게이츠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창조적 자본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필자가 이에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돈만을 최고의 가치로 아는 한국의 속물적 경제관계 인사들에게 게이츠의 지적은 큰 충격으로 다가서리라는 점이다. 둘째는 그의 패러다임이 필자가 줄곧 주장해온 견해와 흡사한 면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2006년 게이츠와 흡사한 견해를 한국사회경제학회 학회지 ‘사회경제평론’에 두 차례에 걸쳐 ‘공동체의 경제학’이란 제목으로 게재했고, 이를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바 있다.

게이츠는 이타심을 강조한 애덤 스미스의 ‘도덕정조론’에 관심을 촉구하면서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경쟁에서 탈락한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그는 신자유주의를 뒷받침해온 신고전파경제학의 실패의 근원이 그 이론의 기본적 전제 속에 잉태되어있다는 점을 지적하지는 못한 것 같다.

현재 대학 강단을 지배하는 신고전파의 자본주의 경제학은 개인을 독립적 존재로 보고, 효용의 극대화와 이윤의 극대화를 절대적 가치라고 믿는 ‘경제인’을 전제로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바로 이런 자본주의 주류경제학의 기본 패러다임을 현실에 옮겨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피도 눈물도 없는 ‘경제인’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자비심이 더 크게 작용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본질이 공동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는 이기심의 효능을 강조했지만, 그에 훨씬 앞서 출간한 ‘도덕정조론’에서는 사람의 본성이 이타적인 것이며, 이타심이 없는 이기심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이런 그의 강조는 인간이 고립해서는 살 수 없고, 반드시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게이츠는 이기심만으로는 안 되고 이타적 행위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창조적 자본주의”를 제창했지만, 경제학 교과서의 패러다임을 피도 눈물도 없는 ‘경제인’을 전제로 한 것으로부터 ‘공동체’를 출발점으로 한 그것으로 바꾸어야만 한다는 점에 생각이 미치지는 못한 것 같다.

필자가 앞의 논문에서 강조한 것은 인류가 수만년 이상 공동체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객관적 인식을 출발점으로 하여 경제학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사람은 결코 공동체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개인의 독립성이 강해졌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동체를 벗어날 수 없다. 돈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은 이기적인 습성을 키웠지만, 이타적 공동체성을 저버리면, 수전노로 낙인 찍힌다. 경제정책도 이기적 영역은 사적 영역에 맡길 수 있지만, 이타적 공동체적 영역은 사회공동체, 즉 국가의 책임이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은 이기적 사적 영역을 지나치게 키운 나마지, 이타적 공적 영역을 경시한다는 점에 있다. 종전의 경제학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론’은 중요한 문제 제기다. 이를 계기로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학 패러다임으로서 ‘공동체의 경제학’에 관한 토론이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 주종환 / 동국대 명예교수

출처 : 경향신문
날짜 : 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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