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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엔 지루했었다. 500페이지가 넘는 책. 게다가 처음엔 진도가 거의 나가지 않았었다. 이러다간 또 읽다 그만두겠는걸. 헛기침을 한번 하고 그래도 읽어나갔다. 그러면서 차츰 소설에 빠져들었다. 지하철에서도 읽고, 잠자기 전에도 읽고, 화장실에서도 읽고, 직장에서 몰래 일하다가 읽고, 시간만 나면 읽고... 그러다가 이제 곧 끝이네, 아까워라, 천천히 읽어야지 하다가 단숨에 끝까지 읽고 말았다.
재미있었다. 가끔 눈물도 났다. 숨도 막혔다. 손에 땀도 배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도 많았다.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서, 전쟁에 대해서, 또 다른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브리오니는 과연 속죄를 했을까? 두 남녀의 비참한 운명과는 다르게 브리오니의 속죄는 너무 더디게, 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속죄란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미 운명은 개인이 속죄하기엔 너무 깊고, 너무 멀게 가버렸다. 시대가 개입하고, 자본이 끼어들고, 또 여러 사람들이 걸림돌이 되었다. 그것이 아마 이 세상에서 사는 법칙일 것이다. 브리오니는 끝내 자신의 상상력으로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또 그 상상력으로 속죄를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 방법이란 것,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일 듯하다.
이 소설은 묘사가 굉장히 치밀하다. 그래서 약간 지루한 면이 있다. 또 그래서 초반 장면을 읽기가 힘들다. 하루 사이에 일어난 일이 거의 소설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그러나 읽다보면 어느새 그 묘사에 휘둘리게 되고, 자신이 사건에 개입하는 느낌이 든다. 곧 작가가 치밀하게 묘사해놓은 행간의 의미는 두고 두고 되새김질할 만하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욱 빛을 발한다.
작가는 중간 중간에 앞으로 벌어질 끔찍한 일에 대해 조금씩 언급을 하며 소설을 전개한다. 그 부분이 참 마음에 들었고, 나중에는 그것 때문에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현대적인 면보다는 예전 자연주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