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cia O`Callaghan / Real Emotional Girl
워너뮤직(WEA)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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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예술가라면 누구나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틀에서 벗어나기를 꿈꾼다. 이런 울타리를 벗어나기 위해 대개 음악인들은 크로스오버라는 장르로 눈을 돌린다. 자신의 음악적 표현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또는 확장하기 위해 크로스오버라는 장르는 때로 예술가들의 자유를 맘껏 발산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하곤 한다. 물론 상업성만을 추구하는 음악가들도 많고, 각 장르마다 있을 법한 진정한 정신과 정신의 만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교류에 그치고 만 경우도 많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도는 여러 장르간에 존재하고 있는 불화를 더욱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계속 시도될 것이란 걸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캐나다 출신의 소프라노 패트리샤 오캘런. '리얼 이모우셔널 걸'(Real Emotional Girl)이라는 앨범을 국내에 정식으로 선보인 그녀는 콘서트 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 바나 나이트 클럽 같은 곳을 더 선호하는 신세대 가수이다. '카바레 뮤직'이라고 불리는 노래들을 담고 있는 이 음반은 오캘런이라는 또 한 명의 유능한 크로스오버 가수의 탄생을 알리고 있다. 오캘런은 이 음반에서 고급스런 예술적 향취를 담은 '진지한' 레퍼토리와 20세기의 다양한 대중 음악의 흐름을 녹록치 않은 깊이와 해석으로 들려주고 있다. 단순히 흉내내기에 급급한 것이 아니라 세밀하게 다져진 음악성을 바탕으로 오캘런식의 해석을 담고 있다.


오캘런은 캐나다의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누가 음악을 가르쳐 줄 사람도 없어 스스로 피아노를 치고, 스스로 노래를 배웠다. 음악은 그녀의 성장기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또한 음악은 그녀의 꿈이기도 했다. 이런 꿈을 향한 여정은 그녀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지방 록 밴드에 참여하게 했다. 록 음악은 그녀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때문에 그 당시 그녀의 꿈은 록커가 되는 것이었다. 그 꿈은 심지어 기도를 할 때도 오지 오스본과 롤링 스톤스의 톤으로 내뱉게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런 그녀가 성악을 시작한 건 16세 때. 클래식 레퍼토리가 잠재돼 있던 예술혼을 건드렸던 것이다. 꿈은 금세 록 가수에서 오페라 가수로 바뀌었다. 그녀는 이 꿈을 키우기 위해 토론토 대학에서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게 된다. 그러나 시골에서 대도시로의 이동은 그녀를 또 다른 욕망에 사로잡히게 했다. 돈도 필요했다. 란제리 모델도 했고, 다시 록 밴드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 솔리스트로서 카바레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런 경험들은 오늘날 그녀의 음악에 록과 카바레 송, 뮤지컬, 클래식 등을 아우를 수 있는 다양성을 확보하게 해주었다. 그녀는 바로크 음악에서부터 현대 오페라에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다. 또 아방가르드 앙상블인 재브라 슈벙크(Zebra Schvungk)의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고, 토론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카바레 송이다. 특히 오캘런에게 중요한 레퍼토리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독일 작곡가 쿠르트 바일이 만든 노래이다. 바일의 곡은 그녀가 이제껏 발표했던 3장의 앨범에 여러 곡을 수록했을 정도로 큰 애착을 가지고 있다. 밥 딜런, 펄 잼, 오지 오스본 등 1970∼80년대의 저항적 록 가수들의 곡 또한 그녀가 즐겨 부르는 레퍼토리 중 하나다. 1997년 그녀는 쿠르트 바일, 에릭 사티, 프랑시스 풀랑크 등의 노래를 담은 'Youkail'이라는 앨범을 발표한다. 이 앨범은 곤궁했던 그녀의 삶에 도움이 됐고, 여러 장르의 음악을 혼합하여 소화해내는 그녀만의 독특한 능력을 인정받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녀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떠올린다.

"그제서야 노래를 내 품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청중들이 항상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요. 관객들이 내 노래를 듣고 즐거워하고, 동요하고, 기뻐한다는 것이 그렇게 놀라울 수가 없었어요."
이어서 발매된 두번째 앨범 '슬로우 폭스'는 그녀의 이름을 캐나다뿐만 아니라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레오나르드 코헨, 쿠르트 바일, 쇤베르크의 노래를 담은 이 앨범은 각 음악가들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음악성을 그녀 특유의 퓨전 정신으로 폭넓게 소화해내 많은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았다. 또 1999년 CBC 드라마 '바보같은 마음'은 오캘런이라는 이름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 시리즈에서 그녀는 쿠르트 바일의 노래를 불렀고, 드라마의 성공과 더불어 그녀의 매혹적인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수로서의 인지도를 확실히 심어주었다.

이 '리얼 이모우셔널 걸'은 오캘런 나름대로의 관점이 확실히 투영된 앨범이다. 그녀가 3집에 걸쳐 이뤄낸 성과는 예술 가곡과 프랑스의 샹송, 아메리칸 팝 등 꾸준히 레퍼토리를 확대해가면서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켰다는 데 있다. 이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은 오캘런의 음반에서 새로운 것으로 재탄생한다. 곧
단순한 재생이 아니라 창조적인 편곡과 해석력이 있다는 얘기다. 이 앨범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역시 편곡의 미학에 있다. 오캘런이 빛나는 가수로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된 것도 이런 색다른 해석과 매혹적인 목소리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여러 록 밴드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밥 딜런의 불후의 걸작 '라이크 어 롤링 스톤'은 의외로 잔잔한 첼로 반주로 시작된다. 원곡에서 느낄 수 있는 저항적이면서도 활달한 뉘앙스와는 다르게 전체적으로 차분하게 소화하고 있다. 철학적인 노랫말로 밥 딜런 등에게 영향을 끼친 레오나르드 코헨의 '아임 유어 맨' 또한 마찬가지다. 읊조리면서 저음으로 내뱉는 코헨과는 달리 오캘런은 흥겨운 비트를 느낄 수 있도록 한다. 매력적인 고음 처리는 원곡과는 다른 또 다른 깊이를 담고 있다. 역시 코헨의 '잔다르크'는 부드러운 예술적 향취를 만끽할 수 있도록 해석했다. 이밖에 그녀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바일의 '나나의 노래' 등 두 곡과 펄 잼의 '배터 맨'(Better Man), 랜디 뉴먼의 '리얼 이모우셔널 걸', 번스타인의 '럭
키 투 비 미'(Lucky to Be Me)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앨범에는 20세기의 다양한 음악 형태와 흐름이 존재하고 있다. 오캘런은 이런 음악들이 지니고 있는 다양성과 창조성을 그녀 자신의 강렬한 개성으로 조화시켜 예술적인 멋스러움을 자아낸다. 이는 곧 오캘런이 단순간에 빛을 발하고 사라져버릴 가수가 아님을 말해준다.
"아마도 나는 여전히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는 비트와 함께 작업을 계속 해나갈 것 같아요. 팝, 재즈, 전위적인 현대 음악의 영향을 내 것으로 소화시켜 앞으로 더 많은 실험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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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의 검은 고양이
아라이 만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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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자꾸 빼 나가는 겁니다. 군더더기 음표, 쓸데없는 음표, 장식에 불과한 음표, 요컨대 군살 같은 음표는 가차없이 잘라냅니다. 그러다 보면 맨 마지막에는 도저히 잘라낼 수 없는, 그러니까 없어서는 안될 음표만 살아남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음표지요. 그래서 내가 만드는 작품들은 모두 악보가 얄팍합니다."

늘 검은 모자에 검은 옷과 검은 고양이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박쥐 우산을 들고 파리를 배회했던 에릭 사티(1866∼1925). 그는 동시대의 작곡가 라벨과 드뷔시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그들과는 달리 프랑스 음악의 중심인물이 되었던 적은 없었다. 19세기 말 유럽 음악계의 표상과 같았던 바그너의 '과장된 표현'에 반기를 들며 아주 단순한 작품들을 생산했다. 그의 작품들은 '배 모양의 세 작품'과 같은 이상한 제목을 갖고 있거나 악보에 이상한 지시어를 붙이고 조롱하는 듯한 인물을 등장시키곤 했다.


사티의 음악이 없었다면 자신도 작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가 아라이 만이 에릭 사티 서거 75주년을 맞아 펴낸 이 소설은 사티의 예술적 개성이 강하게 풍겼던 20대 후반까지의 삶을 다루고 있다. 특히 19세기 말 몽마르트에 모여든 쉬잔, 위트릴로, 르누아르, 로트레크, 모리스 등 사티와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었던 다양한 예술인의 풍부한 일상을 엿볼 수 있어 20세기 초 이들에 의해 펼쳐질 다양한 예술운동을 선 체험할 수 있다.


젊은 시절 '무슈 르 포브르'(가난뱅이 씨)로 불렸던 사티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에서 해운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신을 유일하게 인정해주는 어머니를 일찍 여윈 그는 반항적인 소년으로 자란다. 피아노 선생이었던 계모의 강요에 의해 국립 파리음악원에 진학했지만, 학교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고 군에 입대함으로써 학교를 자퇴한다. 그러나 군대는 반항적이고 자유로운 성격의 사티와 애초부터 맞지 않았다.
사티는 의도적으로 폐병을 일으켜 1년도 안 돼 제대하고, 몽마르트에 있는 카페에서 '시인의 자작시 낭송이나 샹송 가수의 노래를 반주하는' 피아니스트로 일한다. 그곳에서 사티는 모델이자 화가였던 쉬잔 발라동과 평생의 단 한번뿐이었던 연애를 하게 된다. 그 자신이 화가이기도 했던 쉬잔은 당대의 유명 화가 르누아르, 샤반, 로트레크 등의 모델이자 애인이었고, 20세기 초를 장식하는 풍경화가 모리스 위트릴로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사티는 그런 그녀와 반년 동안의 동거를 했지만 자유분방한 쉬잔은 그를 떠나고 만다. 사티는 이 충격에 "여자란 기어오르는 독사입니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으며 평생을 고양이, 새와 함께 독신으로 지냈다.

소설은 지극히 간단한 선율을 '840번 반복해서 연주하시오'라는 지시문이 붙어있는 '벡사시옹'(Vexations)을 작곡함으로써 연애의 실패와 자살충동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덧셈의 시대에 철저히 뺄셈의 논리로 장식음들을 제거했던 사티는 프랑스 현대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6인조(오릭, 뒤레, 오네게르, 미요, 프랑크, 타이유페르)는 사티의 이런 가치를 발견하고 자신들의 정신적인 아버지라고까지 했다.
이 소설은 사실을 토대로 작가의 상상력으로 사티의 젊은 시절을 재미있게 재구성했다. 자주 튀어나오는 감상적 문체가 흠이기는 하지만 사티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또 사티와 다양한 관계를 맺었던 화가들이 그에게 그려준 초상, 사티가 쉬잔에게 보낸 편지, 쉬잔을 모델로 한 르누아르, 사반 등의 그림도 실려 있어 당대의 예술정신을 폭넓게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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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와 베토벤 - 시성과 악성의 운명적 만남과 사랑
로맹 롤랑 지음, 박영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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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괴테와 베토벤. 이 두 이름은 인류 역사에 '영원한 시성'(詩聖)과 '불멸의 악성'(樂聖)이라는 수식어로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이들은 각자의 예술 영역에서 최고의 작품을 쏟아냈고, 인류는 그들의 작품을 대하며 경건함과 감동으로 대하고 있다. 달리 사족을 붙일 필요도 없이 이들의 작품은 그 자체로 거장적 세계이다. 그러나 이 두 거장이 불과 21년의 차이로 같은 시대를 살았으며, 서로 만나기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베티나라는 한 여인을 두고 연적 관계 에 있었다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로맹 롤랑이 지은 '괴테와 베토벤'은 단순히 상상력으로만 이뤄진 소설류가 아니다. 이미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베토벤의 생애'와 같은 빼어난 전기를 쓰기도 했던 로맹 롤랑은 수년에 걸친 발굴과 조사 끝에 이 작품을 완성시켰다. 우선 베토벤과 괴테가 만난 장면부터 묘사해보자. 평소 괴테를 무척이나 존경하고
있었던 베토벤은 1811년 4월 12일 괴테에게 '에그몬트'에 부치는 곡을 보내겠노라며 아주 겸손한 편지를 보낸다.

"혹시 제 곡을 비판하시더라도 그것은 저와 제 예술에 무척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판의 말씀이라도 기꺼이 최상의 찬사로 받아들 이겠습니다."

베토벤은 다른 사람들에겐 자부심을 과도하게 드러내 보였으면서도 유독 괴테에게만은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괴테는 1807년에 베토벤의 곡을 처음 들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괴테는 이 당시 베토벤을 그다지 중요하게 보지 않았다. 괴테에게 "베토벤 은 미치광이나 몽유병 환자처럼 두 팔을 벌린 채 우물가에 서서 깊은 우물 속으로 뛰어들기라도 할 듯한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런 그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은 1812년 7월 19일이었다. 괴테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베토벤을 보자마자 그에게 사로잡혀버렸다. 괴테는 그날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벅찬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그보다 더 집중력이 강하고 더 정력적이며 더 내면적인 예술가는 한 명도 보지 못했소."
그러나 베토벤은 어릴 적부터 존경해왔던 시인을 직접 보니 "독수리처럼 힘찬 날갯짓으로 거센 바람을 헤쳐나가는 시인이 이제는 예의범절이나 신분 질서에만 지나치게 신경 쓰는 한 명의 추밀고문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둘의 서로에 대한 시각의 전환은 산책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괴테와 베토벤이 함께 팔을 붙잡고 걸어가는 동안 길에서 고위층 인사들과 자주 마주쳤다. 그럴 때면 괴테는 격식을 갖추어 정중하게 인사를 한 반면, 베토벤은 팔을 휘저으며 그들 사이를 거침없이 뚫고 지나갔다. 군주제와 사회적 신분 질서를 옹호하는 괴테와 새로운 시민적 질서를 예감한 베토벤과의 차이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뭐 하자는 겁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면전에서 선생님의 위치에 맞는 면모를 과감하게
보여줘야 합니다"
라고 베토벤은 괴테를 힐책했다. 이 장면은 베티나의 편지에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져오고 있다. 이는 대부분 베티나가 과도하게 꾸며낸 허구라는 게 정설이지만, 이 일화는 두 사람의 특징을 그만
큼 잘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베티나는 일찍이 예술적 소양이 깊은 여성으로 문학, 미술, 음악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베티나는 1806년 평소 존경하고 있던 괴테에게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그녀의 예술적 안목을 높이 산 괴테도 1810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둘 사이에 베토벤이 끼여들게 되는데, 이는 베티나가 베토벤과 그의 음악에 깊이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1810년 괴테가 베티나를 사랑하게 된 해에 베티나는 베토벤과의 만남을 지속시킨다. 베토벤은 베티나를 통해 괴테를 몹시 만나고 싶어했고, 그의 희곡 '파우스트'에 곡을 붙이고 싶어했다. 베티나는 괴테에게 편지를 써 둘의 만남을 주선시키고자 했으나 괴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첫 만남 뒤로 세기의 거장 괴테와 베토벤은 더 이상 만나지 못했다. 1823년 2월 8일 가난과 병마로 고통받고 있던 베토벤은 괴테에게 '장엄 미사곡'을 예약판으로 사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러나 괴테는 묵묵부답으로 침묵했다. 괴테가 침묵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뒤로 괴테는 멘델스존 등이 연주하는 베토벤 음악은 들었을지언정 베토벤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롤랑은 "그렇다고 해서 괴테가 베토벤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했다거나, 혹은 무지했던 게 결별의 이유였던 것처럼 보는 것은 오해"라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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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생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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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은 '사랑과 고독에 관한' 성찰이라고 할 만하다. 이 책은 소설이지만 딱히 소설이라고 해야 할 요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등장하고 그와의 관계가 기술되어 있으나, 그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독설에 지나지 않는다. 키냐르는 이 책을 "단 하나의 육체와도 같은 책"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 사랑에 대한 담론을 통해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근원에 대한 탐색을 추구하고 있다.

"훌륭한 음악가는 육체 안에 있는 가장 오래된 집(옛집, 공명기, 배, 자궁의 동굴)이 소리를 내게 만든다. 음악이란 틀림없이 가장 오래된 예술이다. 모든 예술에 선행되는 예술이다. 박동하면서 살에 혈색이 돌게 하는 심장, 말을 하기 위해 입이 호흡한 공기를 들이쉬고 내쉬는 폐, 이것들의 들쭉날쭉한 리듬을 연주하는 예술이다. 그리고 이 리듬을, 박자를 맞추는 다리와 손뼉 치는 손의 리듬에 결합시키는 예술이다."

이 책에는 수많은 음악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 네미는 주인공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교사이자 연주가이다. 때문에 그녀와의 관계 설정은 음악을 통해 이루어진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내가 그녀를 알기 전에, 내 마음에는 음악과 같은 근본적인 체험에 비교될 만한(혹은 책들의 매력에 비교될 만한) 세계, 벌거벗은 인간을 포용함으로써 다가갈 수 있는 사랑의 세계가 없었다."


주인공에게 음악은 사랑과도 같은 것이다. 또 그가 가장 좋아하는 독서와도 같은 것이다. '나'는 소통의 세계를 믿지 않지만, 음악과 사랑과 독서는 소통을 위한 열쇠이다. 그것은 '은밀한 삶'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사랑이 인간들 사이에 소통 가능한 것으로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금기 사항을 지키라고 권유한다. 듣지 말 것, 보지 말 것, 말하지 말 것이 그것인데,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다.
언어로 인해 엿보는 자가 나타나고, 사회가 나타나서 사랑하는 사람의 결합을 깨트린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 주인공은 "네미가 피아노를 치지 않으면서도 피아노를 치고 있다고 믿는 놀라운 경험을 두 번이나 목격"하면서 사랑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있다.


"세계는 둘이다. 연주는 표면과 표면의 닮음이라는 차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힘의 윤회에 속한다. 힘, 수액, 피, 활력, 그것은 원택스트의 내벽 뒤에 있으며, 작곡자는 그것을 형상화시키고 연주자는 표현한다. 전자는 직접적인 지배력으로, 후자는 연기되거나 반복되는 지배력으로."

이 특이한 소설을 쓴 파스칼 키냐르는 우리에게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의 원작자로 알려져 있다. 책으로는 '은밀한 생'이 처음으로 번역되어 소개된 것. 현재 그는 프랑스 문학계의 새로운 소설 쓰기를 주도하고 있는 작가이다. 그것은 일상과 철학과 자아에 대한 글쓰기가 혼합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딱히 소설이라고 규정지을 수 없는 독특한 산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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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상록, 예술가의 초상 02
솔로몬 볼코프 엮음, 김병화 옮김 / 이론과실천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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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오페라(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는 무대에서 쫓겨났다. 모든 사람의 머리에 '혼돈'을 두들겨 넣기 위한 회의가 소집되었다. 모든 사람이 나를 피했다."
쇼스타코비치의 두 번째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두고 '프라우다'는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며 "서구적인 퇴폐성을 띤 형식주의자의 불협화음"이라고 비판했다. 그 뒤 쇼스타코비치는 한순간에 '국가적 영웅'에서 '타락한 예술가'로 파멸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스스로 자신을 비판하고 1937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반영된 교향곡 5번을 발표한다. 그리고 다시 명예 회복. 1941년에는 피아노 5중주곡으로 제1회 스탈린 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한 작곡가의 정신 세계는 위와 같이 일면적으로 이력을 나열한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과 시간 사이의 간격, 곧 수없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을 그 순간의 연속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쉽게 한 문장으로 비판에서 추락으로, 다시 영웅으로 등극했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간격을 놓치고 만다.
그런 면에서 솔로몬 볼코프가 쓴 쇼스타코비치 회상록 '증언'은 작곡가의 진실과 고민이 세심하게 담겨 있어 그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은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곧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에 대해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식이다.
"아니, 내 불행한 인생 이야기는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겠다. 지금쯤은 내 인생이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절대 없겠지. 내 인생에는 특별히 행복했던 순간도, 크게 기뻐했던 순간도 없었다. 내 인생은 지루한 회색의 나날이었고 그 생각을 하면 슬퍼진다. 그런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게 사실이 다. 불행한 사실이지."

그의 구술을 엮은 볼코프는 림스키 코르사코프 국립음악원을 졸업한 학자로 러시아와 소비에트 음악에 대한 역사적 미학 연구서를 다수 저술했다. 1976년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쇼스타코비치 서거 4년 뒤인 1979년 이 책을 발표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진실성의 사실여부를 두고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가장 반발을 심하게 했던 사람은 러시아 학자들이었다. 책의 주요 내용이 쇼스타코비치가 이데올로기의 피해자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국가적인 작곡가로 불렸던 쇼스타코비치가 사실은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맘에 들어하지 않았으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고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책은 쇼스타코비치의 입을 빌려 공산주의를 비판하려는 의도를 가진 책이라고 폄하되기도 했다.

쇼스타코비치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도 그 정치 체제에 순응하며 많은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괴로워했던 건 사회주의 체제 자체라기보다는 그 뒤에 자리잡은 독재 권력이었다. 사회주의 이상을 흉내내며 인간의 내면까지도 지배하려는 스탈린의 독재는 그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에게 심각한 상처를 주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 책은 이데올로기와 독재를 구분하는 관점이 모호해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쇼스타코비치의 내면의 흐름과 예술에 대한 관점, 당대의 예술가들에 관한 일화 등을 풍부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뛰어난 회상록이라고 할 만하다. 또 예술가로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생생한 말투로 묘사하고 있는 대목은 많은 감동을 자아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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