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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와 베토벤 - 시성과 악성의 운명적 만남과 사랑
로맹 롤랑 지음, 박영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괴테와 베토벤. 이 두 이름은 인류 역사에 '영원한 시성'(詩聖)과 '불멸의 악성'(樂聖)이라는 수식어로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이들은 각자의 예술 영역에서 최고의 작품을 쏟아냈고, 인류는 그들의 작품을 대하며 경건함과 감동으로 대하고 있다. 달리 사족을 붙일 필요도 없이 이들의 작품은 그 자체로 거장적 세계이다. 그러나 이 두 거장이 불과 21년의 차이로 같은 시대를 살았으며, 서로 만나기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베티나라는 한 여인을 두고 연적 관계 에 있었다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로맹 롤랑이 지은 '괴테와 베토벤'은 단순히 상상력으로만 이뤄진 소설류가 아니다. 이미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베토벤의 생애'와 같은 빼어난 전기를 쓰기도 했던 로맹 롤랑은 수년에 걸친 발굴과 조사 끝에 이 작품을 완성시켰다. 우선 베토벤과 괴테가 만난 장면부터 묘사해보자. 평소 괴테를 무척이나 존경하고
있었던 베토벤은 1811년 4월 12일 괴테에게 '에그몬트'에 부치는 곡을 보내겠노라며 아주 겸손한 편지를 보낸다.
"혹시 제 곡을 비판하시더라도 그것은 저와 제 예술에 무척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판의 말씀이라도 기꺼이 최상의 찬사로 받아들 이겠습니다."
베토벤은 다른 사람들에겐 자부심을 과도하게 드러내 보였으면서도 유독 괴테에게만은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괴테는 1807년에 베토벤의 곡을 처음 들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괴테는 이 당시 베토벤을 그다지 중요하게 보지 않았다. 괴테에게 "베토벤 은 미치광이나 몽유병 환자처럼 두 팔을 벌린 채 우물가에 서서 깊은 우물 속으로 뛰어들기라도 할 듯한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런 그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은 1812년 7월 19일이었다. 괴테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베토벤을 보자마자 그에게 사로잡혀버렸다. 괴테는 그날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벅찬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그보다 더 집중력이 강하고 더 정력적이며 더 내면적인 예술가는 한 명도 보지 못했소."
그러나 베토벤은 어릴 적부터 존경해왔던 시인을 직접 보니 "독수리처럼 힘찬 날갯짓으로 거센 바람을 헤쳐나가는 시인이 이제는 예의범절이나 신분 질서에만 지나치게 신경 쓰는 한 명의 추밀고문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둘의 서로에 대한 시각의 전환은 산책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괴테와 베토벤이 함께 팔을 붙잡고 걸어가는 동안 길에서 고위층 인사들과 자주 마주쳤다. 그럴 때면 괴테는 격식을 갖추어 정중하게 인사를 한 반면, 베토벤은 팔을 휘저으며 그들 사이를 거침없이 뚫고 지나갔다. 군주제와 사회적 신분 질서를 옹호하는 괴테와 새로운 시민적 질서를 예감한 베토벤과의 차이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뭐 하자는 겁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면전에서 선생님의 위치에 맞는 면모를 과감하게
보여줘야 합니다"라고 베토벤은 괴테를 힐책했다. 이 장면은 베티나의 편지에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져오고 있다. 이는 대부분 베티나가 과도하게 꾸며낸 허구라는 게 정설이지만, 이 일화는 두 사람의 특징을 그만
큼 잘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베티나는 일찍이 예술적 소양이 깊은 여성으로 문학, 미술, 음악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베티나는 1806년 평소 존경하고 있던 괴테에게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그녀의 예술적 안목을 높이 산 괴테도 1810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둘 사이에 베토벤이 끼여들게 되는데, 이는 베티나가 베토벤과 그의 음악에 깊이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1810년 괴테가 베티나를 사랑하게 된 해에 베티나는 베토벤과의 만남을 지속시킨다. 베토벤은 베티나를 통해 괴테를 몹시 만나고 싶어했고, 그의 희곡 '파우스트'에 곡을 붙이고 싶어했다. 베티나는 괴테에게 편지를 써 둘의 만남을 주선시키고자 했으나 괴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첫 만남 뒤로 세기의 거장 괴테와 베토벤은 더 이상 만나지 못했다. 1823년 2월 8일 가난과 병마로 고통받고 있던 베토벤은 괴테에게 '장엄 미사곡'을 예약판으로 사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러나 괴테는 묵묵부답으로 침묵했다. 괴테가 침묵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뒤로 괴테는 멘델스존 등이 연주하는 베토벤 음악은 들었을지언정 베토벤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롤랑은 "그렇다고 해서 괴테가 베토벤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했다거나, 혹은 무지했던 게 결별의 이유였던 것처럼 보는 것은 오해"라고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