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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상록, 예술가의 초상 02
솔로몬 볼코프 엮음, 김병화 옮김 / 이론과실천 / 200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좋다. 오페라(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는 무대에서 쫓겨났다. 모든 사람의 머리에 '혼돈'을 두들겨 넣기 위한 회의가 소집되었다. 모든 사람이 나를 피했다."
쇼스타코비치의 두 번째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두고 '프라우다'는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며 "서구적인 퇴폐성을 띤 형식주의자의 불협화음"이라고 비판했다. 그 뒤 쇼스타코비치는 한순간에 '국가적 영웅'에서 '타락한 예술가'로 파멸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스스로 자신을 비판하고 1937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반영된 교향곡 5번을 발표한다. 그리고 다시 명예 회복. 1941년에는 피아노 5중주곡으로 제1회 스탈린 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한 작곡가의 정신 세계는 위와 같이 일면적으로 이력을 나열한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과 시간 사이의 간격, 곧 수없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을 그 순간의 연속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쉽게 한 문장으로 비판에서 추락으로, 다시 영웅으로 등극했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간격을 놓치고 만다.
그런 면에서 솔로몬 볼코프가 쓴 쇼스타코비치 회상록 '증언'은 작곡가의 진실과 고민이 세심하게 담겨 있어 그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은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곧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에 대해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식이다.
"아니, 내 불행한 인생 이야기는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겠다. 지금쯤은 내 인생이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절대 없겠지. 내 인생에는 특별히 행복했던 순간도, 크게 기뻐했던 순간도 없었다. 내 인생은 지루한 회색의 나날이었고 그 생각을 하면 슬퍼진다. 그런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게 사실이 다. 불행한 사실이지."
그의 구술을 엮은 볼코프는 림스키 코르사코프 국립음악원을 졸업한 학자로 러시아와 소비에트 음악에 대한 역사적 미학 연구서를 다수 저술했다. 1976년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쇼스타코비치 서거 4년 뒤인 1979년 이 책을 발표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진실성의 사실여부를 두고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가장 반발을 심하게 했던 사람은 러시아 학자들이었다. 책의 주요 내용이 쇼스타코비치가 이데올로기의 피해자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국가적인 작곡가로 불렸던 쇼스타코비치가 사실은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맘에 들어하지 않았으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고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책은 쇼스타코비치의 입을 빌려 공산주의를 비판하려는 의도를 가진 책이라고 폄하되기도 했다.
쇼스타코비치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도 그 정치 체제에 순응하며 많은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괴로워했던 건 사회주의 체제 자체라기보다는 그 뒤에 자리잡은 독재 권력이었다. 사회주의 이상을 흉내내며 인간의 내면까지도 지배하려는 스탈린의 독재는 그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에게 심각한 상처를 주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 책은 이데올로기와 독재를 구분하는 관점이 모호해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쇼스타코비치의 내면의 흐름과 예술에 대한 관점, 당대의 예술가들에 관한 일화 등을 풍부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뛰어난 회상록이라고 할 만하다. 또 예술가로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생생한 말투로 묘사하고 있는 대목은 많은 감동을 자아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