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물만두 > 암살 주식회사 중에서...

라파르그 [Lafargue, Paul, 1842.1.15~1911.11.25]

프랑스의 사회주의운동가.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쿠바 산티아고
주요저서 《역사에 있어서의 관념론과 유물론》(1895)

쿠바 산티아고 출생. P.J.프루동의 영향을 받아, 학생시절부터 사회주의운동을 하다가 대학에서 쫓겨나 영국 런던으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마르크스와 알게 되어 1869년 그의 둘째 딸과 결혼하였다. 파리코뮌시대에는 대단한 활약을 하였으나 실패한 후에는 에스파냐로 망명하였다.
1881년 대사령(大赦令)으로 파리에 돌아와 J.게드와 함께 프랑스노동당을 결성하여 1905년까지 당을 지도하였다. 1891년 하원의원이 되었으나, 1911년 염세관(厭世觀)에 빠져 드라베유에서 부부가 함께 자살하였다. 마르크스·엥겔스의 저작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등 마르크스주의를 프랑스에 보급하는 데 큰 몫을 하였다. 주요저서로 《역사에 있어서의 관념론과 유물론》(1895) 《소유권, 그 기원과 발전》(1895) 등이 있다.

곤차로프 [Goncharov, Ivan Aleksandrovich, 1812.6.18~1891.9.27]

러시아의 소설가.
국적 러시아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볼가강 연안의 심비르스크(지금의 울랴노프스크)
주요저서 《평범한 이야기》(1847), 《오블로모프》(1859), 《단애》(1869)


볼가강(江) 연안의 심비르스크(지금의 울랴노프스크) 출생. 모스크바대학교 문학부 졸업. 1835년부터 30년 동안 재무성·내무성 등의 관료생활을 하였다. 1952년에는 푸차친 제독의 비서로 전함(戰艦) 팔라다호를 타고 세계를 주항(周航)하였으며, 특히 1854년 4∼5월에는 한국의 거문도와 동해안 여러 곳에 상륙하였다.
그 여행기를 귀국 후에 출판한 《전함 팔라다 Fregat Pallada》(1858)에 자세히 담았는데, 특히 이 책에는 한·러 사이의 첫교섭을 빠짐없이 서술하였으며, 작가 특유의 유머와 페이소스로 당시 쇄국 체제하의 한국의 모습을 잘 그려내었다. 만년에는 창작을 그만두고, 그리보예도프의 《지혜의 슬픔》을 논평한 《백만의 가책》(1872)과 자서전적 고백 《늦었지만》(1879) 등을 썼다.
《오블로모프 Oblomov》(1859)와 《단애(斷崖) Obryv》(1869)는 최초의 장편 《평범한 이야기 Obyknovennaya istoriya》(1847)와 더불어 3부작을 이룬다. 그의 철저한 사실주의는 러시아 작가 중에서도 특이한데, 대표작 《오블로모프》의 주인공에 대한 성격묘사는 그 전형(典型)이다. 우수한 소질을 타고났으나, 농노제도(農奴制度)하에서 아무 어려움 없는 생활을 하는 동안에, 모든 결단력과 행동력을 빼앗긴 교양 있는 '무용자(無用者)'의 모습이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다.
그 때문에 무기력하고 게으른 성격을 나타내는 대명사로 '오블로모프 기질'이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였다. 장편 《단애》에서도 라이스키라는 주인공을 통하여 이 시대의 '무용자'의 한 변형을 추구하였으며, 또 러시아 생활의 부정적인 면을 그려내었다.

책표지 :  René Magritte. The Return of the Flame. 1943

제이콥 리스의 사진들

1910년대 미국... 잊었나보다. 이들은... 자기들도 이랬음을... 그리고 어디나 이런가 싶어 서글프다.

흑수단 [Black Hand]

1890~1920년 뉴욕·시카고·뉴올리언스·캔자스시티를 비롯한 미국 여러 도시의 이탈리아인 거주지역에서 강탈과 협박을 일삼던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이민 갱단.
이들은 지역 상인과 여러 부유한 사람들에게 검은 손이나 비수 또는 다른 위협적인 상징을 그린 협박장을 보내어 죽음과 재산 파괴를 위협해 돈을 갈취해갔다.
이 갱단은 금주법이 제정되고, 풍부한 자금을 가진 주류밀매업자가 등장하면서 쇠퇴했다. 흑수단원 가운데 가장 악명 높았던 사람은 이그나치오 사이에타로 맨해튼의 '소(小)이탈리아' 주민들에게 루포(늑대)라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1920년 그는 화폐위조죄로 연방 당국에 체포되어 30년 징역형을 받았다. 흑수단의 가장 유명했던 적수는 뉴욕 경찰국의 조지프
페트로시노(1860~1909) 경감이었다. 그는 수백 명의 갱들을 체포·구금하거나 추방시켰는데, 1909년 시칠리아를 방문하다가 팔레르모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크로포트킨 [Kropotkin, Peter]

정식 이름은 Pyotr Alekseyevich Kropotkin.
1842. 12. 21(구력 12. 9) 모스크바~1921. 2. 8 모스크바 근처 드미트로프.
러시아의 혁명가, 지리학자, 무정부주의 운동의 일급 이론가.

지리학·동물학·사회학·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명성을 얻었지만 세속적인 출세의 길을 버리고 혁명가의 생애를 택했다.

초년기와 무정부주의로의 전향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크로포트킨 공의 아들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상류층의 자제들만 다니는 수습기사단(修習騎士團)에서 교육을 받았다. 1년 동안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부관으로 근무했다. 1862~67년 육군장교로 시베리아에 배속되어 군무 이외에 동물의 생태를 연구하고 지리학적 탐사활동에 열중했다. 자신의 탐사결과에 기초하여 산맥구조선(山脈構造線) 이론을 전개했고, 이 이론은 동아시아의 지도작도법을 수정하게 했다. 또한 빙하시대에 아시아와 유럽에서의 빙하작용에 관한 연구들을 발표했다.
연구결과를 즉시 인정받은 크로포트킨에게는 과학자로서 대성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1871년 러시아 지리학회의 회장직을 거절한 후 귀족세습권을 포기하고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시베리아 복무중에 그는 이미 모든 정부는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폐지되어야 한다는 무정부주의 이론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1872년에는 스위스의 쥐라 산맥에 있는 시계제조업자들을 방문했는데 이들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한 자발적 결사체에 감탄하여 자신의 자유주의적 신념을 확고히 했다. 러시아로 돌아온 후 혁명단체에 가입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노동자·농민 들에게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1874년 경찰의 대량검거 때 투옥되었으나 2년 후 극적으로 탈출하여 서유럽으로 달아났으며, 서유럽의 급진파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부상했다. 그후 몇 년 동안 스위스에서 지내다가 1881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혁명가들에게 암살당한 후 러시아 정부의 요구로 스위스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프랑스로 건너갔지만 폭동을 주동했다는 날조된 혐의로 체포되어 3년 동안 감금되었다. 1886년에 석방되어 30년 동안 영국에서 살다가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하자 고국으로 돌아왔다.
장기간의 망명생활 동안 크로포트킨은 자신의 자유주의적 철학을 피력한 영향력 있는 저서들을 집필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어느 반항자의 이야기 Paroles d'un révolté〉(1885)·〈러시아와 프랑스의 감옥에서 In Russian and French Prisons〉(1887)·〈빵의 정복 The Conquest of Bread〉(1892)·〈들판·공장·작업장 Fields, Factories and Workshops〉(1899)·〈어느 혁명가의 회고록 Memoirs of a Revolutionist〉(1899)·〈상호부조 Mutual Aid〉(1902)·〈러시아 문학 Russian Literature〉(1905)·〈1789~93년의 프랑스 대혁명 The Great French Revolution 1789~1793〉(1909) 등이 있다. 그가 종종 밝혔듯이 그의 목표는 과학적 기반 위에 무정부주의를 정립하는 것이었다. 걸작으로 널리 인정받는 〈상호부조〉에서 그는 적자생존이라는 다윈의 개념에도 불구하고 종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라고 주장했다. 풍부한 실례를 들어 사교성이 동물세계의 모든 수준에서 지배적인 특징임을 증명하면서 인간 세계에서도 상호부조가 예외적이기보다는 일상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원시부족, 농촌 마을, 중세의 코뮌에서부터 강압적인 관료제 국가의 대두에도 불구하고 상호지원을 계속 실천하고 있는 현대의 각종 협동체(노동조합·학회·적십자사 등)에 이르기까지 자발적 협동결사체의 진화과정을 추적했다. 그는 현대사의 추세는 사람들이 지배자·성직자·군인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그들의 창조적인 기능을 개발할 수 있는 지방분권적·비정치적·협동적 사회로의 복귀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사유재산과 불평등한 소득 대신 물자와 용역의 무상분배가 이루어지는 '무정부적 공산주의' 이론을 정립함으로써 크로포트킨은 무정부적 경제사상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임금의 원리를 필요의 원리로 대체했는데 그것은 각자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판단하여 노동에 참여했건 안 했건 관계없이 필요한 물건을 공동의 창고에서 꺼내 쓰도록 하는 원칙이었다. 크로포트킨은 사람들이 공업과 농업에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함께 하는 사회를 마음 속에 그렸다. 각 협력공동체에서 구성원들은 20~40대에 안락한 생활을 하기에 충분한 하루 4~5시간을 일하며 분업 대신 여러 가지 일을 즐겁게 함으로써 중세의 도시생활에서처럼 인격의 균형이 잡힌 유기적인 인생을 즐길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보다 행복한 생활을 준비시키기 위해 청소년교육을 강조한 그는 정신적·육체적 능력을 골고루 개발시키는 '통합교육'을 실시하여 균형잡힌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철학). 또한 수학·과학의 기본원리와 인문학의 학습을 중요시하면서도 책만 가지고 가르치기보다는 적극적인 야외교육을 통한 실험관찰학습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방법은 현대의 교육이론가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자신이 직접 겪은 형무소 생활을 토대로 크로포트킨은 형벌제도의 철저한 수정을 주창하기도 했다(→ 형벌학). 그는 형무소는 범죄자를 교화시키기는커녕 잔혹한 벌을 가함으로써 범죄 습성을 굳혀주는 '범죄의 온상'이라고 말했다. 상호부조를 바탕으로 한 미래의 무정부사회에서 반사회적 행동은 법과 형무소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이해와 공동체의 도덕적 압력에 의해서 해결될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과학자와 윤리학자의 자질에다 혁명조직가와 선전가의 자질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애로운 마음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에서 폭력의 사용을 용인했다. 또한 무정부주의의 투사로 활약하던 초년에는 인민의 반항본능을 일깨우기 위해 말과 글을 통한 선전활동을 보완할 목적으로 '행동을 통한 선전'인 폭동행위를 열렬히 지지했다. 영국과 러시아에서 무정부주의 운동을 창시했으며, 프랑스·벨기에·스위스의 무정부주의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중에 그가 연합국을 지지하자 많은 동지들이 그를 떠났다. 그의 결정은 독일의 전체주의가 사회의 진보를 파멸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비롯되었지만, 그것은 무정부주의의 반군사적인 전통을 위배한 처사였으며, 이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 그가 거의 반세기에 걸쳐 구축했던 운동은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발발과 함께 사태는 호전되었다. 75세의 고령인 크로포트킨은 서둘러 조국으로 돌아왔다. 1917년 6월 망명한 지 40년 만에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임시정부의 교육장관직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퉁명스럽게 거절했다. 1917년 그가 국가 없는 사회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코뮌과 소비에트(병사·노동자 위원회)들이 자발적으로 구성되자 자유주의적 미래에 대한 그의 기대는 한껏 부풀어올랐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의 감격은 비통한 실망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혁명의 매장이다"라고 그는 친구에게 말했다. 크로포트킨은 혁명이 자유주의적 방법이 아닌 전체주의적 방법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이유를 볼셰비키가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년을 윤리학사의 집필에 몰두했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1921년 모스크바 근처 드미트로프에서 죽었다. 수만 명의 추종자가 참가한 그의 장례식은 무정부주의를 상징하는 검은 깃발이 러시아의 수도를 누빈 마지막 기회가 되었다. 크로포트킨의 생애는 자신이 일관성 있게 주장한 높은 윤리기준 및 사상과 행동의 결합을 예증한 것이었다. 그에게서는 다른 많은 혁명가들의 이미지를 손상시킨 이기주의나 이중성 또는 권력에 대한 탐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동지들의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무정부주의를 "단검과 폭탄에 불과하다"라고 매도한 사람들에게도 찬탄을 받았다. 프랑스의 작가 로맹 롤랑은 그만이 톨스토이가 주창했던 삶을 살았다고 말했으며, 오스카 와일드는 자기가 이제까지 알고 있는 진정 행복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크로포트킨이라고 말했다.

머핸 [Mahan, Alfred Thayer, 1840.9.27~1914.12.1]

미국의 해군제독·역사가.
국적 미국
활동분야 군사, 역사
출생지 미국 뉴욕주 웨스트포인트
주요저서 《해상 권력사론(1660∼1783년까지의 역사에 미친 해군력의 영향)》(1890) 《1793∼1812년의 프랑스혁명 및 그 제국에 미친 해군력의 영향》(1892) 《넬슨전》(1897)

뉴욕주(州) 웨스트포인트 출생. 컬럼비아대학교 및 해군사관학교에서 수학하고, 해군대학에서는 해군사와 해군전략을 가르치다가 1886년에 학장에 취임하였다. 주저 《해상 권력사론(1660∼1783년까지의 역사에 미친 해군력의 영향) 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 1660∼1783》(1890) 《1793∼1812년의 프랑스혁명 및 그 제국에 미친 해군력의 영향 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the French Revolution and Empire, 1793∼1812》(1892) 《넬슨전 The Life of Nelson》(1897) 등은 모두 해상권력의 역사적 임무와 지배적 영향력을 밝힌 것으로 해군병학뿐만 아니라, 근대 국제정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실천적으로는 대해군주의를 제창하고, 미국 해군의 끊임없는 강화를 주장, 제1차세계대전 후까지 미국의 팽창정책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H.G.웰스 [ Herbert George Wells ]

H.G.웰스은 1895년 <타임머신>이란 소설을 발표하여 '타임머신'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한 작가.
영국작가 H.G.웰스는 교사를 거쳐 문필생활에 뜻을 두고, 일생동안 1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였다.
처음에는 자연과학적인 넓은 교양과 상상력을 결합, 과거와 미래를 여행한 시간 여행가의 보고 형식으로 된 <타임 머신 The Time Machine>(1895) <투명인간 The Invisible Man>(1897) 등과 같은 공상 과학소설을 썼고, 이어 원자폭탄을 예언한 <우주전쟁 The War of the Worlds>(1898)을 썼다. 그러다가 차차 풍자와 유머가 넘쳐흐르는 인생소설 <연애와 루이셤씨 Love and Mr.Lewisham>(1899) <킵스 Kipps>(1905) 등을 썼다.
그가 쓴 고전 SF 소설 <타임머신>은 1960년대 조지 펄 감독의 오리지날 <타임머신>, 이후 2002년 사이먼 웰스 감독의 2002년판 <타임머신>으로 새롭게 탄생하였다. 사이먼 웰스는 원작소설의 작가인 H.G.웰스의 증손자이기도 하다.

미스터 폴리

Ukiah Indian Basket

폴딩 포켓 카메라 (Folding Pocket Camera)

무무 [ muumuu ]

하와이민속의상 / 허리를 조이지 않고 색 드레스식으로 만든 옷으로 입기 편하고 시원하여 1960년대부터 한국에서도 여성용 리조트웨어나 홈웨어로서 애용되고 있다.
상하(常夏)의 나라에 어울리게 웨이스트를 조이지 않고 색 드레스식으로 만든 개방적인 옷이다. 길이는 종아리를 덮는 것과 짧은 것 등이 있다. 화려한 원색의 무명 프린트천으로 만들며 남성의 알로하셔츠나 레이(lei)와 함께 하와이의 명물 중 하나이다. 입기 편하고 시원하여 1960년대부터 한국에서도 여성용 리조트웨어나 홈웨어로서 애용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암살주식회사
잭 런던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온 건 지난해 여름이었다. 그런데 다른 책에 밀려 한참 동안 책꽂이에만 꽂혀 있었다. 내심 별로 읽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하도 읽을 책이 없어서 손에 집어들었는데, 의외로 재미있었다. 그리고 깨우쳐준 것도 많았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암살자들이 있다. 그들이 모인 조직이 바로 암살 주식회사. 이 조직을 세운 이는 사회주의자이면서도 사업가이다. 그는 청년 시절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미국으로 이민을 온 사람. 그는 “자신이 사회를 위해 생각하고, 사회를 위해 결정하고 사회를 움직인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의뢰인들이 암살을 요청하면, 자체 내에서 조사를 한 뒤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그 일을 허락한다.


그런데, 이 조직의 논리가 참 재미있다. 그들은 그야말로 완벽한 도덕주의자들이다. “세상은 도덕에 기초해 돌아가는 것이오. 도덕이 없다면 세상은 멸망할 것이오. 세상의 기본 요소가 바로 그 정의라는 것이니까요. 도덕을 없애는 것은 중력을 없애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도덕이 없다면 바위조차 산산조각나 흩어져버릴 거요.” “도덕주의자들, 이들을 경멸해서는 안 됩니다. 이들은 자신의 믿음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도덕주의자들은 모든 못 박힘과 순교를 기쁘게 받아들였소. 그것이 그들의 가르침에 힘을 실어줄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지요. 신념! 바로 그것이오!”

위의 인용구에서 보는 것처럼 이 암살 주식회사의 조직원들은 모두 행동가이자 사상가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철학과 원칙을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다. 설사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롭더라도 그 정의의 원칙을 배반하지 않는다. 그 원칙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이 사회가 완벽해지는 것이니까. 세상은 그 원칙들이 흐트러져서 망가졌으며, 부의 분배가 불균형해져서 올바르게 돌아가지 않는 것이니까. 이 소설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정의와 도덕의 기준에 맞기만 한다면 즉각 살인을 감행한다. 그리고 그 행동이 실패하게 되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고, 의뢰인에게 돈을 되돌려주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의도대로 사회를 움직이고 있었다. “세상의 희망! 더 고귀한 인류! 진화의 최고봉! 공정한 통치자들과 최고의 사상가들! 모든 꿈과 열망한 실현! 악취 나던 것들이 빛을 향해 나아가리라! 신의 조화와 약속이 이루어지리라!”


그러나 이 조직은 어느 날 큰 위기에 봉착한다. 사회주의자 윈터 홀이 그 조직에 접근한 것. 그는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는 암살이 사회의 혼란만 부추긴다고 판단한다. 사회의 실체는 바꾸지 못하면서 사람만을 살해하는 암살단. 이는 사회 전체로 보면 정당하지 못한 행동이다. 그래서 그는 이 조직을 창설한 드라고밀로프를 살해해달라고 암살 주식회사에 찾아온다. 앞서 말했듯이, 암살 대상자는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홀은 이 조직을 창설한 드라고밀로프의 죄악을 밝히려 당사자인 드라고밀로프와 장시간 논쟁을 벌인다. 결국 홀의 논리, 즉 살인은 사회적 이익에 반하는 행동이라는 명제가 승리를 거두었고, 드라고밀로프는 조직원들에게 자신을 살해하라고 명령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드라고밀로프와 조직원들 사이의 기나긴 싸움이 시작된다. 그들은 철저히 원칙을 바탕으로 움직인다. 일반적으로 보이는 범죄 소설과는 다른 양상으로 소설이 전개되는데, 그들의 행동과 철학들을 바탕으로 긴장감 넘치는 추격전이 벌어진다.


그런데, 지은이 잭 런던은 이 과정에서 소설을 그만두고 말았다. 도대체 결론을 어떻게 내려야 할지 잘 몰라서였다. 그때가 1910년이었다. 이것을 추리소설 작가 로버트 피시가 1960년대에 완성했다. 결론은 애초에 잭 런던이 설정해놓았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끝이 났다. 잭 런던이 구상한 것은 치밀한 논리 싸움을 끝으로 드라고밀로프가 죽는 것이고, 로버트 피시의 결론은 모든 조직원들이 다 죽고 나서(마지막 조직원들은 자연재해와 어처구니없는 사고사로 죽고 만다) 드라고밀로프가 자살하는 것이다.


그 결론의 차이는 확연하게 다르다. 내가 궁금한 것은 왜 잭 런던이 집필을 그만두었느냐이다. 이 소설의 전개는 앞서 말했듯이 철학적인 담론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아마도 잭 런던은 암살 주식회사의 정의 논리가 그리 치밀하지 못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들은 철학자이며 암살자들이지만, 그들의 가치판단의 기준은 사회 전체의 가치관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옳은지, 아니면 잘못된 것인지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 반면, 조직과 그 구성원인 자신들의 행동은 옳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 가치판단을 살인이라는 행동으로 실행한다. 이렇게 그들은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어떤 영웅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파시즘이나 전체주의 원리와 비슷하다. (물론 다르긴 하지만.) 그래서 잭 런던은 소설 집필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이에 반해 로버트 피시는 이들 조직의 철학을 좀더 단순화한 뒤 추격전으로 소설을 전개한다. 로버트 피시의 전개는 스릴러 소설의 전형적인 구성을 띄고 있다. 이 부분도 재미는 있지만, 잭 런던이 고민하던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 듯하다.


아무튼 이 소설을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간만에 많은 생각을 하면서, 또 열광하면서 읽은 듯싶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구절을 인용하며 이만 총총.


“죽음을 하찮게 만드는 우정! 정의의 법칙! 올바른 것에 대한 숭배! 이런 게 바로 희망 아닌가요? 이것이야말로 미래가 우리 것이라는 것을 입증해주지 않습니까? 미래가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육체에 대한 동물적인 갈망들, 이기심, 혈육에 대한 애정 같은 것들이 정의감이라는 더 높은 정신의 태양 아래서 새벽안개처럼 사라지지 않나요? 이성이, 분별 있는 이성이, 마침내 승리할 것입니다! 모든 인간 세계는 언젠가, 육신과 진흙탕의 나락이 아니라, 분별 있는 이성에 의해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정당함. 도덕심과 정당함. 우리가 가진 건 그게 전부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yrra - Sweet Bossa
Myrra 노래 / 강앤뮤직 (Kang & Music) / 200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사노바는 이제 월드 뮤직이라기보다는 전 세계의 장르로 고착화되고 있다. 현재 일본과 미국, 유럽 등지에서는 브라질 출신의 가수가 아닌 자국의 가수가 부른 보사노바 음반이 많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 음반도 주로 뮤지컬 무대에서 활동해온 스웨덴 출신의 여가수 미라 말름베르그가 부른 것이다. 주로 뮤지컬 무대에서 활약한 탓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일반적인 보사노바 가수보다 약간 굵은 편이다. 하지만 나른하고 야릇한 보사노바의 음색을 나름대로 멋들어지게 표현하고 있다. 전통적인 보사노바가 너무 가볍다고 느껴지는 사람에게 조금 무거운 듯한 이 음반이 적당할 듯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행자의 노래 1 [재발매]
Various Artists 노래 / 폴리폰 (Polyphone)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래를 다 듣고 나면 조금 착잡해진다. 물론 음악 탓이다. 방구석에 처박혀 이런 음악을 듣고 있어야 하다니 원통해지기까지 한다. ‘여행자의 노래’라고 의식해서 들어서일까? 아무튼 좁은 공간을 벗어나 좀더 넓은 곳으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음악 한곡 한곡이 주는 감흥이 그만큼 남다르다. 이 노래를 전부 들은 사람들은 필시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을 게 분명하다.

이 음반을 만든 이가 과연 누구일까? 궁금해서 보니 그 주인공은 전남 강진의 바닷가에서 조그마한 교회를 이끌고 있는 목사 임의진이라고 한다. 목사와 방랑자의 노래라…. 언뜻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편견에 불과한 것이란 걸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으리라.

음반에는 임의진 자신이 부른 노래와 그의 절친한 친구인 가수 김두수가 부른 ‘대니 보이’를 비롯해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노르웨이, 이탈리아, 그리스, 러시아 출신의 가수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다양한 국적의 음악들이지만 하나같이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하다. 그 나라의 민속음악이라기보다는 모던한 포크 계열의 음악들로 집단보다는 개인성에 더 어울리는 것들이다. 그래서 여행도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정에 더 알맞을 듯하다. 사비나 스큐바가 부르는 ‘카루소’와 비쇼츠키와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음유 시인인 불라트 오쿠자바가 부르는 ‘Das Lied vom Heuschreck’, 도노반의 ‘러브송’ 등을 들으며 길을 걷다 보면 가슴 찡한 무언가와 마주치게 될 게 분명하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에서 벗어나 서둘러 짐을 꾸리게 만드는 음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sia - Canto
미시아 (Misia) 노래 / 워너뮤직(WEA)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미샤의 목소리는 단순한 목소리 그 이상이다. 미샤는 자신의 훌륭한 악기 목소리로 청중들에게 갖가지 감정의 색채들을 보여주고 느끼게 해준다. 그녀가 전달하는 것은 단지 사랑이나 연민이 아닌, 바로 '애수(Melancholy)'이다."

199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소설가 주제 사라마구가 미샤를 두고 한 말이다. 이 말에서 주목할 것은 ‘목소리’이다. 그 목소리로 미샤는 다양한 감정을 이끌어내고 있다고 사라마구는 말하고 있다. 사실 미샤는 여타의 다른 파두 가수와는 달리 목소리 결이 옅은 편에 속한다. 그렇다고 아주 많은 차이가 나지는 않지만, 그녀는 노래를 결코 굵고 진하게 부르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목소리 결이 다른 가수와 차이가 나게 들리는 것이다.

또 그녀는 파두에 팝 음악의 감성을 섞어 부르고 있다. 이것은 그녀가 목소리 결을 의도적으로 옅게 내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이렇게 해야 부드럽고, 산뜻한 노래가 나오기 때문이다. 미샤의 노래와 정통 파두를 비교해보면 이와 같은 사실을 더욱 극명하게 알 수 있다. 정통 파두는 일종의 ‘청승맞은’ 노래이다. 감정이입을 될 수 있는 한 더 진하게 표현하고, 목소리를 최대한 높고, 굵게 표현한다. 듣는 사람이 부담될 정도로 파두의 표현방식은 진하고, 깊다.

그러나 미샤의 노래를 들으면 그 감정이입이 조금 완화되어 있는 느낌이다. 한 번 걸러서 표현됐다고 해야 할까. 대신 그녀는 달콤한 속삭임으로 사람들의 혼을 빼놓는다. 한껏 풀어헤친 목소리로 갖은 슬픔과 외로움을 표현하고, 이별과 아픈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미샤에게 파두는 일반화된 노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이 그녀는 정통 파두를 고집하지 않는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울려 퍼지는 그저 그런 노래의 하나로 인식하며, 노래를 쉽고 편하게 부른다. 그리고 그 표정에는 포르투갈의 파두가 아니라 세계의 파두, 현대의 파두가 담겨 있는 것이다. 

 ‘칸토’ 음반에는 미샤의 다양한 음색이 담겨 있다. 세련된 반주와, 감성을 자극하는 멜로디를 바탕으로 진한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슬픔을 슬픈 목소리로, 분노를 분노의 목소리로 표현하지만 결코 과장되어 표현하지는 않는다. 약간 거친 듯하지만, 인위적으로 변조한 목소리와는 차원이 달라 마치 슬픔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테너 라몬 바르가스는 이런 미지아의 노래를 듣고 "목을 사용하지 않고 노래를 부른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작 ‘리추얼’은 온통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노래로 채운 바 있다. 그녀는 이 음반을 통해 로드리게스를 한 번 추억한 뒤 그녀를 뛰어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실제로 그녀는 이제 로드리게스와 비교되지 않고도 그 자체만으로 자신의 창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파두가 점점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퍼져들어 가고 있다.

그녀는 어느덧 국내에도 상당한 인지도를 확보한 가수가 됐다. 1991년 첫 음반 '미샤'를 발표한 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미샤는 파두라는 장르를 확대시키고, 새롭게 재해석해왔다. 그리고 자신이 쌓아온 토대 위에서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그녀의 노래는 견고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