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주식회사
잭 런던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온 건 지난해 여름이었다. 그런데 다른 책에 밀려 한참 동안 책꽂이에만 꽂혀 있었다. 내심 별로 읽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하도 읽을 책이 없어서 손에 집어들었는데, 의외로 재미있었다. 그리고 깨우쳐준 것도 많았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암살자들이 있다. 그들이 모인 조직이 바로 암살 주식회사. 이 조직을 세운 이는 사회주의자이면서도 사업가이다. 그는 청년 시절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미국으로 이민을 온 사람. 그는 “자신이 사회를 위해 생각하고, 사회를 위해 결정하고 사회를 움직인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의뢰인들이 암살을 요청하면, 자체 내에서 조사를 한 뒤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그 일을 허락한다.


그런데, 이 조직의 논리가 참 재미있다. 그들은 그야말로 완벽한 도덕주의자들이다. “세상은 도덕에 기초해 돌아가는 것이오. 도덕이 없다면 세상은 멸망할 것이오. 세상의 기본 요소가 바로 그 정의라는 것이니까요. 도덕을 없애는 것은 중력을 없애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도덕이 없다면 바위조차 산산조각나 흩어져버릴 거요.” “도덕주의자들, 이들을 경멸해서는 안 됩니다. 이들은 자신의 믿음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도덕주의자들은 모든 못 박힘과 순교를 기쁘게 받아들였소. 그것이 그들의 가르침에 힘을 실어줄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지요. 신념! 바로 그것이오!”

위의 인용구에서 보는 것처럼 이 암살 주식회사의 조직원들은 모두 행동가이자 사상가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철학과 원칙을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다. 설사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롭더라도 그 정의의 원칙을 배반하지 않는다. 그 원칙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이 사회가 완벽해지는 것이니까. 세상은 그 원칙들이 흐트러져서 망가졌으며, 부의 분배가 불균형해져서 올바르게 돌아가지 않는 것이니까. 이 소설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정의와 도덕의 기준에 맞기만 한다면 즉각 살인을 감행한다. 그리고 그 행동이 실패하게 되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고, 의뢰인에게 돈을 되돌려주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의도대로 사회를 움직이고 있었다. “세상의 희망! 더 고귀한 인류! 진화의 최고봉! 공정한 통치자들과 최고의 사상가들! 모든 꿈과 열망한 실현! 악취 나던 것들이 빛을 향해 나아가리라! 신의 조화와 약속이 이루어지리라!”


그러나 이 조직은 어느 날 큰 위기에 봉착한다. 사회주의자 윈터 홀이 그 조직에 접근한 것. 그는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는 암살이 사회의 혼란만 부추긴다고 판단한다. 사회의 실체는 바꾸지 못하면서 사람만을 살해하는 암살단. 이는 사회 전체로 보면 정당하지 못한 행동이다. 그래서 그는 이 조직을 창설한 드라고밀로프를 살해해달라고 암살 주식회사에 찾아온다. 앞서 말했듯이, 암살 대상자는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홀은 이 조직을 창설한 드라고밀로프의 죄악을 밝히려 당사자인 드라고밀로프와 장시간 논쟁을 벌인다. 결국 홀의 논리, 즉 살인은 사회적 이익에 반하는 행동이라는 명제가 승리를 거두었고, 드라고밀로프는 조직원들에게 자신을 살해하라고 명령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드라고밀로프와 조직원들 사이의 기나긴 싸움이 시작된다. 그들은 철저히 원칙을 바탕으로 움직인다. 일반적으로 보이는 범죄 소설과는 다른 양상으로 소설이 전개되는데, 그들의 행동과 철학들을 바탕으로 긴장감 넘치는 추격전이 벌어진다.


그런데, 지은이 잭 런던은 이 과정에서 소설을 그만두고 말았다. 도대체 결론을 어떻게 내려야 할지 잘 몰라서였다. 그때가 1910년이었다. 이것을 추리소설 작가 로버트 피시가 1960년대에 완성했다. 결론은 애초에 잭 런던이 설정해놓았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끝이 났다. 잭 런던이 구상한 것은 치밀한 논리 싸움을 끝으로 드라고밀로프가 죽는 것이고, 로버트 피시의 결론은 모든 조직원들이 다 죽고 나서(마지막 조직원들은 자연재해와 어처구니없는 사고사로 죽고 만다) 드라고밀로프가 자살하는 것이다.


그 결론의 차이는 확연하게 다르다. 내가 궁금한 것은 왜 잭 런던이 집필을 그만두었느냐이다. 이 소설의 전개는 앞서 말했듯이 철학적인 담론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아마도 잭 런던은 암살 주식회사의 정의 논리가 그리 치밀하지 못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들은 철학자이며 암살자들이지만, 그들의 가치판단의 기준은 사회 전체의 가치관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옳은지, 아니면 잘못된 것인지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 반면, 조직과 그 구성원인 자신들의 행동은 옳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 가치판단을 살인이라는 행동으로 실행한다. 이렇게 그들은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어떤 영웅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파시즘이나 전체주의 원리와 비슷하다. (물론 다르긴 하지만.) 그래서 잭 런던은 소설 집필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이에 반해 로버트 피시는 이들 조직의 철학을 좀더 단순화한 뒤 추격전으로 소설을 전개한다. 로버트 피시의 전개는 스릴러 소설의 전형적인 구성을 띄고 있다. 이 부분도 재미는 있지만, 잭 런던이 고민하던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 듯하다.


아무튼 이 소설을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간만에 많은 생각을 하면서, 또 열광하면서 읽은 듯싶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구절을 인용하며 이만 총총.


“죽음을 하찮게 만드는 우정! 정의의 법칙! 올바른 것에 대한 숭배! 이런 게 바로 희망 아닌가요? 이것이야말로 미래가 우리 것이라는 것을 입증해주지 않습니까? 미래가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육체에 대한 동물적인 갈망들, 이기심, 혈육에 대한 애정 같은 것들이 정의감이라는 더 높은 정신의 태양 아래서 새벽안개처럼 사라지지 않나요? 이성이, 분별 있는 이성이, 마침내 승리할 것입니다! 모든 인간 세계는 언젠가, 육신과 진흙탕의 나락이 아니라, 분별 있는 이성에 의해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정당함. 도덕심과 정당함. 우리가 가진 건 그게 전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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