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오후에 쉬다가 지평선을 등지고 서 있는 산이라든가 자신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나뭇가지의 윤곽을 좇는 것은 곧 그 산과 그 나뭇가지의 ‘분위기(AURA)’를 숨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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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무대를 뒤흔든 영혼의 탱고

라틴아메리카 하면 떠오르는 예술가들이 여럿 있다. 현대사회에서 진리라는 이름으로 수용되거나 이성적으로 포장된 모든 것이 결국은 인간이 만들어낸 또 다른 허구임을 깨닫게 해준 보르헤스, 남미의 역사를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문학형식으로 환상과 현실 사이를 넘나든 마르케스, 소설, 희곡, 평론, 수필 등으로 중남미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모색해온 바르가스 요사. 그리고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축한 빌라 로보스와 카를로스 조빔. 이들의 공통점은 삶과 죽음, 사실과 환상이 뒤범벅된 남미의 서정을 그들만의 독특한 음악과 언어로 재창조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두 라틴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세계를 대표하는 일급의 예술인들이다. 그렇다면 아스토르 피아졸라는 어떤가? 최근 발매된 벨라 무지카의 10종의 피아졸라의 음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슬프면서도 드라마틱하며, 감각적이면서도 종교적인 면을 보이는 탱고에 평생동안 영혼을 불태운 인물, 또한 앞에서 언급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남미 특유의 예술혼으로 세계 무대를 뒤흔든 음악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아디오스 노니노'(Adios Nonino),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4계' 등의 걸작을 발표하면서 탱고에 독창적인 화음개념을 이끌었다. 현대음악가 존 아담스는 이런 피아졸라의 음악을 두고 "어떻게 탱고와 같은 작은 형식에 이토록 깊고 넓은 표현을 담아낼 수 있단 말인가"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피아졸라는 모든 음악가들이 그렇듯이 천재적인 유년기를 보냈다. 13세의 나이로 명가수 카를로스 가르텔의 반주를 맡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여러 카바레에서 반도네온을 켜며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우연히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을 만났고, 그 뒤 그는 '일초마다 백만개의 음표를 쏟아내는' 열정으로 수많은 클래식 곡들을 작곡하게 된다. 이러한 작업으로 피아졸라는 유럽의 음악계에서 새로운 별로 떠오르지만, 그의 진정한 음악성은 한 프랑스 여인에 의해 180도 변하게 된다. 바로 그 여인은 피아졸라의 진정한 스승 나디아 불랑제. 나디아 불랑제는 수십곡에 달하는 피아졸라의 악보를 보고 불과 몇 분만에 "이 부분은 스트라빈스키 같고, 이 부분은 바르톡, 또 여기는 라벨 같은데, 피아졸라는 없군" 하고 간단히 평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마치 FBI처럼 피아졸라에게 온갖 질문을 한 끝에 피아졸라 자신이 창피하게 여겼던 반도네온을 연주했던 기억, 탱고에 대한 기억을 이끌어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바로 거기에 피아졸라가 있군."
이 시리즈의 특징은 피아졸라의 위대한 정신이 10장의 음반 속에 다양한 곡들로 망라되어 있다는 점이다. 피아졸라 자신이 직접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피아졸라 앙상블을 주축으로 실내악곡, 콘서트 실황, 영화음악 등을 담고 있다. '사계' '기억' 등의 피아졸라의 모음곡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마리아', '아디오스 노니노'를 비롯 '새벽의 토카타' '고독의 세월' '리베르 탱고' 등 발표할 때마다 음악계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던 곡들이 음반 하나하나에 오롯이 담겨있다. 또 명가수 아메리타 발타르와 호세 앙헬 트렐레스가 부르는 노래는 탱고의 참다운 맛을 더해준다. 이밖에 피아졸라의 이탈리아 데뷔 음반 '로마 1972'와 밀라노 콘서트 실황을 담은 '밀라노 1984' 또한 활기차면서도 서글픈 탱고의 맛을 맘껏 만끽하고도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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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tella.K > [퍼온글] <오마이뉴스> 나비와 전사 저자 고미숙 인터뷰

근대와 싸우자, 그 위로 날아오르자
<나비와 전사> 낸 고전평론가 고미숙씨 "공부는 원초적 본능"
텍스트만보기   조성일(sicho) 기자   
▲ <나비와 전사> 낸 고전평론가 고미숙.
ⓒ 조성일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고마녀'로 통하는 고미숙(46)은 자신의 직업을 '고전평론가'라고 소개한다.

아무 분야든 뒤에 붙여 자칭 평론가로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어서 고미숙의 '고전평론가' 역시 같은 범주에서 생각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3년 전 펴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그린비 펴냄)이 4만여 부나 팔려나가며 인문서치고는 공전의 히트를 쳤던 기록을 들춰보면, 이름붙이기는 자칭이었지만 그 만만치 않은 내공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타칭으로도 '고전평론가'가 되었다.

그런 고미숙은 이번에도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 문제작을 내놓았다. <나비와 전사>(휴머니스트 펴냄). 제목만 봐서는 요즘 말로 '대략난감'이다. 낯선 제목 위에 얹혀진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이라는 부제를 보고 나서야 근대성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미숙은 이 책에 대해 지금까지 해온 공부에 대한 하나의 마디를 맺게 된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면서 묻는다. 이제 그동안 잡고 있었던 물음들을 놓아버려야 새로운 길을 나설 수 있지 않을까?

고전을 공부하다 근대에 도달했다던 고미숙. 이제 다시 근대를 통해 고전을 탐사하고 싶다고 말하는 고미숙을 지난 25일 서울 원남동에 자리잡은 연구공간 '수유+너머' 2층 찻집에서 인터뷰했다. 인터뷰 도중 이 곳에서 최근 새 책 <미래의 맑스주의>(그린비 펴냄)를 낸 이진경 서울 산업대 교수, 연구소의 추장 고병권씨의 얼굴도 마주칠 수 있었다.

푸코와 연암, 그리고 고미숙

"푸코가 고고학적 탐사를 무기로 근대성의 지축을 뒤흔든 전사라면, 연암은 그 위를 사뿐히 날아올라 종횡으로 누비는 나비다!"

▲ 10년 공부의 한 마디를 맺었다고 말하는 고미숙.
ⓒ 조성일
낯선 책제목을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나비와 전사>의 책등에 박아놓은 문구다. 푸코를 '전사'로, 연암을 '나비'로 비유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연암과 푸코'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은데, 어쨌든 연암과 푸코를 씨줄과 날줄로 삼아 근대의 심연을 탐색한다.

탈근대·근대·18세기라는 세 개의 그물망을 교차시켜 새로운 앎과 삶을 찾아나서는 이 책의 여정은 기차가 우리의 전통적 시공간을 어떻게 해체하고 근대적 시공간을 만들었는지를 탐색하는 것을 시작으로 '시공간-인간-성(性)-몸-앎-글쓰기'의 순서로 진행된다.

물론 각각의 주제가 따로 놀지만, 다른 주제들에 인접해 있으면서 때로는 엇갈리기도 하고 때로는 겹치기도 하면서 함께 어우러져 근대의 출구를 향해 나간다. '입구'에서 '오늘 여기에서의 삶'의 이야기를 물음으로 던지고, '출구'에서 '미래 거기의 삶'으로 날아가는 비전을 담아내는 형식이다.

"처음 공부를 시작하며 이 책을 구상할 때는 '근대성에 대한 계보학적 탐구'였는데,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사유가 달라져 처음 의도와는 사뭇 다른 책이 되었습니다."

그렇다. 고미숙이 텍스트로 삼은 근대가 우리에게 준 것은 균질화된 지식과 사유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이 균질화된 근대적 사유에서 고미숙이 일탈(?)할 수 있었던 것은 고미숙이 코뮌적 지식인 공동체 공간 '수유+너머'의 정서적 분위기를 한껏 타면서 강의·발표·세미나를 거치는 동안 이질적인 것들이 다양하게 섞여들어와 비빔밥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일 터이다.

연암의 내공은 유머에서 나온다

"잘 다듬어지고 완결된 학술적 보고서가 아니라, 이질적인 말과 사물들이 충돌하는 '활발발(活潑潑)한' 다큐멘터리로 감상되기를 기원한다."

고미숙은 많은 사람들이 근대나 푸코, 연암과 같은 용어 때문에 딱딱한 학술서라는 선입견을 가질까봐 그런 책이 아니라고 먼저 선을 긋는다.

그러면서 고미숙은 이 책을, '앎과 혁명'을 다시 구성하는 길 위에 설 수 있도록 매혹적인 갈림길을 마련해준 두 사우인 연암과 푸코에 대한 '헌정 앨범'이라고 했다.

"푸코의 고고학적 삽질을 보고 역사를 보는 눈을 배웠고 그러면서 연암을 만났는데, 푸코를 통해 '열하일기'를 보니까 이건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푸코는 근대성이 얼마나 견고한 요새로 둘러싸여 있는지를, 연암은 그 요새를 돌파하는 것이 얼마나 유쾌한 질주인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고미숙은 단지 명문장가나 실학자 정도로만 여기던 연암을 천의 얼굴을 가진 지식인으로 평가하면서, '천재와 범부의 경계를 깨뜨린 존경과 감동의 인물'로 치켜세운다.

"연암의 내공은 어깨에 힘주고 비분강개하는 것이 아니고 평이한 일상을 통해 세상의 심연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그래서 연암의 시선은 어떤 대상과도 만나고 접속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가로지르기에 능수능란한 선비였습니다."

고미숙이 말하는 연암의 이 범접할 수 없는 내공의 힘은 유머다. 자기를 틀에 가두지 않는 그런 유머를 구사한다. '세상 사람들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유머'라는 달라이라마의 사유와도 맞닿아있다.

"한·미 FTA라니, 우리는 근대적 '욕망의 노예'인가"

▲ 삶과 앎이 일치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고미숙.
ⓒ 조성일
20년째 앞을 보지 못하다가 갑자기 눈을 뜨게 되자 정작 집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어서 울고 있는 사람이 쉽게 집을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은?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연암의 산문에 소개된 서경덕의 이 일화에 나오는 사람은 그동안 세상을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반대로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은 그저 우리의 시각에 의해 구성된 것일 뿐 '본래 면목'이 아니라는 의미일 수 있고, 그걸 확대하면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그만큼 달라진다는 뜻이 될 터이다.

그래서 고미숙은 그동안 우리에게 들씌워져있던 근대에서 과감히 벗어나 세상을 보자고 한다.

"새만금이나 한·미 FTA를 한번 보세요. 한·미 FTA의 궁극적 목적이 결국 미국 중산층과 똑같이 되겠다는 것인데, 그건 지금의 삶의 다양성은 다 깨지는 것을 의미하고 젊어서부터 노후대책을 세워야 하는 비참한 삶으로 가자는 겁니다. 이건 근대의 구조화한 욕망의 노예가 된 우리가 새로운 비전을 찾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동안 "사회적 참여가 없다"는 비판을 받아왔던 '수유+너머'는 최근 연구소 외벽에 'FTA 결사 반대'라고 적힌 현수막을 걸어놓는 등 실천적 참여에 본격 나섰다. 공교롭게도 바람이 이 현수막을 강제철거(?) 하는 관계로 카메라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텅 빈 그 자리가 왠지 남다르게 보였다.

"고병권은 장애인 이동권 문제에, 이진경은 코뮌적 방식에, 그리고 저는 새만금에 관해 끊임없이 글쓰고 발언해오는 등 개별적이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모든 회원들의 의견이 자연스레 모아지면서 한 목소리를 낸 것이죠."

'수유+너머'는 최근 인터넷 홈페이지에 "한·미 FTA, 새만금 간척사업,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한다"는 글을 올려 "모든 이슈에 모두가 싸우자"고 선언했다.

때마침 고병권이 인터뷰하는 옆자리에서 5월 10일부터 보름 동안 새만금에서부터 서울시청까지 걸으면서 여러가지 현실적 문제들을 몸으로 배우는 행사의 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하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고전으로 첨단을 말한다

고미숙은 말한다. 공부는 더이상 취미나 교양이 아니라 삶이라고. 앎이란 결국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과정이라고. 배움이란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것과 다르지 않는 '원초적 본능'이라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네 삶에서 날마다 하고 평생을 해도 변함없이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공부 말고 달리 무엇이 있는지를. 실용적 목적이 없을 때 하는 공부야말로 최고의 지식이며 동시에 자기 삶을 통찰하는 지혜의 수행이 됩니다."

최근 연구소에 개설한 청소년 고전강좌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는 고미숙은 삶에 대해 근본적으로 묻고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고전을 읽자고 했다. 역시 '고전평론가'라는 직업병(?)의 발동이다.

결국 우리가 그토록 믿어 의심치않는 근대를 과감히 벗어나 모든 것을 재구성하자고 말하는 고미숙. 그래야 비전 있는 미래와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삶과 앎을 일치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고 말하는 고미숙은 이제 근대를 갖고 글 쓸 것은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고미숙은 18세기 이전으로 가서 오래된 시대를 통해 첨단의 문제를 말할 것이라며 연암의 <답경지지삼>(答京之之三)의 한 구절을 들려주면서 인터뷰를 갈무리했다.

"아이가 나비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요. 앞발은 반쯤 꿇고 뒷발은 비스듬히 들고는 손가락을 집게 모양을 해가지고 살금살금 가다가 잡았는가 싶었는데 나비는 호로록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보면 아무도 없고 계면쩍어 씩 웃다가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바로 사마천이 글을 쓸 때의 심정입니다."

▲ 바람이 '한미FTA 결사 반대' 현수막을 강제철거한 연구 공간 '수유+너머'의 외벽.
ⓒ 조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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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 - 아도르노와 쇤베르크 현대의 지성 114
노명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음악가 아도르노? 아도르노가 한때 작곡을 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졌지만, 음악가라는 말로 아도르노를 설명한 예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 책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아도르노와 쇤베르크’에서는 음악가 아도르노의 진면목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저자는 아도르노가 베르크의 오페라 ‘보체크’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 때문에 이른바 ‘쇤베르크의 빈 악파’의 일원이 되고자 빈으로 이주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곧 베르크 밑에서 작곡을 공부하겠다는 결심은 포기했지만, 그 뒤 철학을 통해 작곡과 음악을 계속해 나갔다고 말한다.

곧 이 책은 아도르노의 음악관이 그의 복잡한 철학세계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는지를 규명한 책이다. 부족하긴 하지만 그동안 사회학과 음악학 양면에서 주도적으로 아도르노의 사상을 연구한 책은 많이 소개되어왔다. 그러나 그 책들은 음악과 철학, 사회라는 자신의 전문 분야만을 다룬 것이어서 아도르노의 전체적인 사상을 이해하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의 출현은 상당히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이 사회학 분야에서 등한시했던 아도르노의 음악학을 사회학과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며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일부 사회학자가 아도르노의 음악관을 개인적인 예술 취향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한 면을 전면 부정하고 아도르노는 음악을 통해 철학적 사유를 전개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곧 아도르노에게 음악은 “그가 행하는 사회 비판의 토대이자, 비판을 구성하는 한 모델”이었던 것이다.

아도르노의 철학관을 크게 계몽의 변증법에 대한 부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인이 말살되고 조직의 체계만 남게 되는 야만의 현대가 바로 계몽의 변증법 시대이다. 이 올바르지 못한 상황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조금 순수했던 과거로 돌아갈 것인가. 이도 저도 하지 못하는 현대인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책은 이런 단적인 아도르노의 사상을 음악을 통해 하나하나 펼쳐나간다. 즉 아도르노가 ‘신음악의 철학’에서 절찬했던 쇤베르크의 12음 기법, 그리고 쇤베르크가 스스로 12음 기법을 저버리고 음열주의로 나아간 것을 아도르노의 사회학과 연관해 설명하고 있다. 곧 아도르노의 쇤베르크 해석에 내재해 있는 사회 이론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도르노의 철학이 신음악, 특히 쇤베르크 음악과 논쟁하며 형성됐음을 여러 예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동안 사회적인 문제와 별 관련이 없어 보였던 아도르노의 미학과 음악학이 사회학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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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계, 개인의 행복을 찾아나가는 여정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에 뉴에이지 음악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것은 한때의 거품이 아니라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뉴에이지 음악은 언제,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간략한 역사와 뉴에이지 음악의 철학, 국내에 불고 있는 뉴에이지 열풍 현상을 진단해본다.


199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 뉴에이지 음반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이젠 뉴에이지 음악을 다루지 않는 음반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이 장르의 시장 규모가 커진 상태다. 매달 새로운 음반이 수없이 쏟아지고, 이와 함께 낯선 연주가들이 새롭게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뉴에이지 음악을 모은 편집 음반이 대거 늘어난 것도 과거에 살펴볼 수 없는 현상이다. 발빠른 음반사는 국내에서 유독 이름 높은 연주가의 음원만을 모아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성공률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 이 중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음반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수많은 음반이 차가운 외면을 받으며 쉬 잊혀지기 일쑤인데도 음반이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까닭은 무엇일까.

작금의 뉴에이지 음악은 음반사의 상업적인 의도와 맞물려 상당히 왜곡되어 있는 상태다. 검증 받지 않은 연주가의 음반을 너도나도 들여오며 이것이 마치 영혼을 울리는 음악인 양 포장하는 데만 급급하다. 여기에서 한몫 건지면 금상첨화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식의 생각이 뉴에이지를 병들게 하고 있다. 또 뉴에이지가 피아노 음악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도 문제다. 원래 뉴에이지는 폭이 넓은 장르인데도 마치 피아노가 뉴에이지의 전부인 것처럼 홍보하는 음반사가 계속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현상에는 뉴에이지 음악이 아주 단순한 대중음악일 뿐이라는 편견이 숨어 있다. 또 이것이 뉴에이지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단순히 팔기 위해서만 음악을 다룰 뿐 장르에 대한 세심한 분석과 배려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뉴에이지 음악도 어엿한 장르 음악의 하나이므로 제대로 된 비평과 분석, 정보 제공이 뒤따라야 한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대인 만큼 뉴에이지를 뉴에이지로 자리매김하는 데 관계자들이 각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때이다.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사실 뉴에이지 음악은 말 그대로 새로운 시대의 음악은 아니다. 우선 형식만 해도 1950년대에 이미 유행한 연주 음악의 형태를 빌리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과 서유럽에서는 무드 음악 장르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는 정식 음악으로서가 아니라 장소와 분위기에 따라 음악이 달라지는 부수 음악의 하나였다. 라운지 음악, 슈퍼마켓 음악, 엘리베이터 음악 등이 유행했고, 사람들은 이를 기분을 좋게 해주는 음악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뉴에이지 음악을 지탱하고 있는 사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1960년대 후반 바야흐로 세계는 저항의 물결이 거세게 불었다.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대규모의 학생운동이 일었고,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음악계도 이 격동의 시기를 비껴갈 수 없었다. 우드스톡으로 상징되는 반문화 운동이 록 음악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이 안에 담겨 있는 권위에 대한 도전과 저항 정신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뉴에이지 운동도 처음에는 이런 개념에서 시작됐다. 서구의 가치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동양의 영적 신비주의에 경도되며 차츰 기독교를 배격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 자유와 사랑을 위해 명상에 잠겼고 자연회귀를 주장했다. 음악과 문학, 미술 작품에서 이와 같은 동서의 만남이 자주 이뤄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저항하던 히피족의 생각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된 것이다.

그러나 뉴에이지 음악은 뉴에이지 사상과 조금 차이가 있다. 모든 틀을 거부하고 자연회귀를 부르짖은 뉴에이저와는 달리 뉴에이지 음악은 안정된 도시에 살고 있는 여피족을 위한 음악이다. 1970년대 후반에 본격적으로 뉴에이지 음악이 시작됐고, 주 수요층은 1950년대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도시인들이었다. 소위 엘리트 신세대로 자리잡은 이들은 시끄러운 록 음악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활과 정신에 위안을 주는 음악을 찾았다. 꽉 짜여진 도시에서 벗어나 음악을 통해 잠시 동안만이라도 자연의 정서를 맛보고 싶었던 것이다.

1976년 윈드햄 힐 레이블의 탄생과 함께 뉴에이지 음악의 역사는 시작됐다. 앞서 말한 도시인들은 이 레이블의 음악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기타리스트이자 창립자인 윌리엄 에커만은 재즈에 기반을 둔 상큼한 퓨전 음악을 만들며 뉴에이지 붐을 일으켰다. 1980년 그 유명한 조지 윈스턴의 ‘가을’이 발매됐고, 이듬해에는 에커만의 ‘패시지’와 최고의 기타 음반으로 명성이 높은 마이클 해지스의 ‘에이리얼 바운더리’(Aerial Boundaries)가 잇따라 선보였다. 다분히 신비주의적 요소를 띤 이 음반들은 중산층의 지식인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윈드햄 힐을 뉴에이지 음악의 대명사로 키워주었다. 윈드햄 힐에 이어 1983년 나라다 레이블이 창립됐고, 이후 잇따라 비슷한 성향의 레이블(프라이비트 뮤직, 글로벌 퍼시픽, 하이어 옥타브 뮤직)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에는 그래미상과 빌보드지에서 각각 뉴에이지 부문을 신설했다. 이는 당시 뉴에이지 음악이 대중에게 얼마나 큰 인기를 끌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데이비드 란츠, 야니, 엔야 등이 이 시기에 각광을 받았고, 록커였던 릭 웨이크먼, 브라이언 이노, 앤디 서머스 등도 뉴에이지 계열의 음악을 선보였다. 미국의 다국적인 방송망과 배급망을 타며 유럽으로 또 라틴 아메리카로 퍼지며 뉴에이지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음악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1990년대는 더욱 규모가 커져갔다. 초기 뉴에이지가 산뜻한 음의 기타나 피아노에 의해 이끌어졌던 것과 달리 80년대 후반부터는 좀더 복합적인 소리를 내는 전자 음향, 목소리, 민속 악기 등으로 점차 확대됐다. 이를테면 우리에게 다큐멘터리 ‘실크로드’의 배경음악 작곡가로 알려진 기타로만 해도 그렇다. 198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실크로드’는 동양의 사상과 동․서양의 악기가 엮은 최대의 명상 음악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후 그는 1987년 ‘정신의 빛’으로 그래미상 뉴에이지 부문에 후보로 올랐고, 2001년 발표한 ‘고대인’으로 그래미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그의 음악은 신서사이저와 전자 음, 동양의 악기 등이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동양과 서양에서 모두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서양인이 만든 전자 음악은 동양인의 것과 사뭇 달랐다. 수잔 시아니의 키보드 연주는 기타로와 좋은 비교가 된다. 시아니의 연주는 혁신적이라 할 만하지만, 정서적인 면에서는 서정적인 낭만에 가깝다. 음향기기와 새로운 녹음장비를 통해 색다른 소리를 연출해도 그 내면에는 로맨틱한 쓸쓸함과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 느껴진다. 곧 동양의 신비와 서양의 낭만적 서정이 묘한 대비를 이루는 것이다.

이 밖에 1994년 윈드햄 힐 레이블에서 ‘No Words’라는 데뷔 음반을 내고 팝 성향의 뉴에이지 음악을 펼친 피아니스트 짐 브릭만, 노르웨이 출신의 연주가로 구성된 그룹 시크릿 가든, 각종 행사 음악을 만들며 뉴에이지 음악을 확대시킨 반젤리스, 피아니스트 케빈 컨과 앙드레 가뇽, 유키 구라모토 등이 1990년대에 각광받은 연주가들이다.

 



동양의 신비와 서양의 낭만적 서정의 대비

1980년대에 들어서며 수없이 많은 뉴에이지 음악이 세상에 나왔지만 이 장르는 아직도 그 범위가 모호하다. 그러니까 뉴에이지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긴 하지만 처음과 끝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야니나 기타로가 자신의 음악이 뉴에이지가 아니라고 하는 것도 장르의 규범이 모호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그렇지만 내용으로 들어가면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게 많다. 이를 위해 잠시 피아니스트 케빈 컨의 작품 제목을 살펴보자. ‘정원’ ‘내 사랑 곁으로’ ‘돌아온 숲의 요정’ ‘추억’ ‘천사의 날개 위에 잠들다’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케빈 컨은 지극히 사적인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있다. 비단 케빈 컨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의 뉴에이지 음악가들이 비슷한 제목과 성향을 표출하고 있다. 이것이 자연에서 느낀 감정,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을 통해 깨달은 정감으로 변하고 때로는 지구를 벗어나 우주와 때묻지 않은 대륙을 상상하는 음악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과거나 현재, 미래를 돌아보는 음악이 많지만, 대개 희망과 낙관을 이야기하는 점이 모든 연주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곧 이들은 공동체를 지향하기보다는 개인과 가족의 행복을 꿈꾸고 복잡한 도시보다는 깨끗한 자연을 갈망하고 있다. 명상 음악 계열의 뉴에이지 음악도 물질의 가치에서 벗어나 정신의 행복, 개인의 해탈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 이들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음악을 통해 자아 찾기에 몰두한다. 때로는 이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기도 하지만 거기에서도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 더 중요한 테마가 된다.

앞서 말했듯이 뉴에이지 음악을 듣는 계층은 도시인들이 많다. 상대적으로 깨끗하지 못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도시인에게 이 장르의 음악은 많은 위안을 준다. 뉴에이지 음악인들도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들은 순음악적인 요소보다는 자연 친화적이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음을 만들어내려 애쓴다. 그래서 집중하기 좋은 음악, 슬픔을 달래주는 음악, 명상하기 좋은 음악 등의 문구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조금은 진부해진 듯하다. 상업적인 의도와 맞물려 똑같은 음악만 계속 생산되는 느낌이다. 좀더 창조적이고 다양한 형태의 음악이 만들어져야 할 때이다. 그래야 무수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이 장르가 계속 힘을 갖고 발전해나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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