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세계, 개인의 행복을 찾아나가는 여정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에 뉴에이지 음악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것은 한때의 거품이 아니라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뉴에이지 음악은 언제,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간략한 역사와 뉴에이지 음악의 철학, 국내에 불고 있는 뉴에이지 열풍 현상을 진단해본다.
199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 뉴에이지 음반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이젠 뉴에이지 음악을 다루지 않는 음반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이 장르의 시장 규모가 커진 상태다. 매달 새로운 음반이 수없이 쏟아지고, 이와 함께 낯선 연주가들이 새롭게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뉴에이지 음악을 모은 편집 음반이 대거 늘어난 것도 과거에 살펴볼 수 없는 현상이다. 발빠른 음반사는 국내에서 유독 이름 높은 연주가의 음원만을 모아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성공률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 이 중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음반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수많은 음반이 차가운 외면을 받으며 쉬 잊혀지기 일쑤인데도 음반이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까닭은 무엇일까.
작금의 뉴에이지 음악은 음반사의 상업적인 의도와 맞물려 상당히 왜곡되어 있는 상태다. 검증 받지 않은 연주가의 음반을 너도나도 들여오며 이것이 마치 영혼을 울리는 음악인 양 포장하는 데만 급급하다. 여기에서 한몫 건지면 금상첨화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식의 생각이 뉴에이지를 병들게 하고 있다. 또 뉴에이지가 피아노 음악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도 문제다. 원래 뉴에이지는 폭이 넓은 장르인데도 마치 피아노가 뉴에이지의 전부인 것처럼 홍보하는 음반사가 계속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현상에는 뉴에이지 음악이 아주 단순한 대중음악일 뿐이라는 편견이 숨어 있다. 또 이것이 뉴에이지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단순히 팔기 위해서만 음악을 다룰 뿐 장르에 대한 세심한 분석과 배려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뉴에이지 음악도 어엿한 장르 음악의 하나이므로 제대로 된 비평과 분석, 정보 제공이 뒤따라야 한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대인 만큼 뉴에이지를 뉴에이지로 자리매김하는 데 관계자들이 각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때이다.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사실 뉴에이지 음악은 말 그대로 새로운 시대의 음악은 아니다. 우선 형식만 해도 1950년대에 이미 유행한 연주 음악의 형태를 빌리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과 서유럽에서는 무드 음악 장르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는 정식 음악으로서가 아니라 장소와 분위기에 따라 음악이 달라지는 부수 음악의 하나였다. 라운지 음악, 슈퍼마켓 음악, 엘리베이터 음악 등이 유행했고, 사람들은 이를 기분을 좋게 해주는 음악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뉴에이지 음악을 지탱하고 있는 사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1960년대 후반 바야흐로 세계는 저항의 물결이 거세게 불었다.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대규모의 학생운동이 일었고,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음악계도 이 격동의 시기를 비껴갈 수 없었다. 우드스톡으로 상징되는 반문화 운동이 록 음악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이 안에 담겨 있는 권위에 대한 도전과 저항 정신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뉴에이지 운동도 처음에는 이런 개념에서 시작됐다. 서구의 가치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동양의 영적 신비주의에 경도되며 차츰 기독교를 배격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 자유와 사랑을 위해 명상에 잠겼고 자연회귀를 주장했다. 음악과 문학, 미술 작품에서 이와 같은 동서의 만남이 자주 이뤄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저항하던 히피족의 생각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된 것이다.
그러나 뉴에이지 음악은 뉴에이지 사상과 조금 차이가 있다. 모든 틀을 거부하고 자연회귀를 부르짖은 뉴에이저와는 달리 뉴에이지 음악은 안정된 도시에 살고 있는 여피족을 위한 음악이다. 1970년대 후반에 본격적으로 뉴에이지 음악이 시작됐고, 주 수요층은 1950년대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도시인들이었다. 소위 엘리트 신세대로 자리잡은 이들은 시끄러운 록 음악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활과 정신에 위안을 주는 음악을 찾았다. 꽉 짜여진 도시에서 벗어나 음악을 통해 잠시 동안만이라도 자연의 정서를 맛보고 싶었던 것이다.
1976년 윈드햄 힐 레이블의 탄생과 함께 뉴에이지 음악의 역사는 시작됐다. 앞서 말한 도시인들은 이 레이블의 음악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기타리스트이자 창립자인 윌리엄 에커만은 재즈에 기반을 둔 상큼한 퓨전 음악을 만들며 뉴에이지 붐을 일으켰다. 1980년 그 유명한 조지 윈스턴의 ‘가을’이 발매됐고, 이듬해에는 에커만의 ‘패시지’와 최고의 기타 음반으로 명성이 높은 마이클 해지스의 ‘에이리얼 바운더리’(Aerial Boundaries)가 잇따라 선보였다. 다분히 신비주의적 요소를 띤 이 음반들은 중산층의 지식인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윈드햄 힐을 뉴에이지 음악의 대명사로 키워주었다. 윈드햄 힐에 이어 1983년 나라다 레이블이 창립됐고, 이후 잇따라 비슷한 성향의 레이블(프라이비트 뮤직, 글로벌 퍼시픽, 하이어 옥타브 뮤직)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에는 그래미상과 빌보드지에서 각각 뉴에이지 부문을 신설했다. 이는 당시 뉴에이지 음악이 대중에게 얼마나 큰 인기를 끌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데이비드 란츠, 야니, 엔야 등이 이 시기에 각광을 받았고, 록커였던 릭 웨이크먼, 브라이언 이노, 앤디 서머스 등도 뉴에이지 계열의 음악을 선보였다. 미국의 다국적인 방송망과 배급망을 타며 유럽으로 또 라틴 아메리카로 퍼지며 뉴에이지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음악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1990년대는 더욱 규모가 커져갔다. 초기 뉴에이지가 산뜻한 음의 기타나 피아노에 의해 이끌어졌던 것과 달리 80년대 후반부터는 좀더 복합적인 소리를 내는 전자 음향, 목소리, 민속 악기 등으로 점차 확대됐다. 이를테면 우리에게 다큐멘터리 ‘실크로드’의 배경음악 작곡가로 알려진 기타로만 해도 그렇다. 198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실크로드’는 동양의 사상과 동․서양의 악기가 엮은 최대의 명상 음악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후 그는 1987년 ‘정신의 빛’으로 그래미상 뉴에이지 부문에 후보로 올랐고, 2001년 발표한 ‘고대인’으로 그래미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그의 음악은 신서사이저와 전자 음, 동양의 악기 등이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동양과 서양에서 모두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서양인이 만든 전자 음악은 동양인의 것과 사뭇 달랐다. 수잔 시아니의 키보드 연주는 기타로와 좋은 비교가 된다. 시아니의 연주는 혁신적이라 할 만하지만, 정서적인 면에서는 서정적인 낭만에 가깝다. 음향기기와 새로운 녹음장비를 통해 색다른 소리를 연출해도 그 내면에는 로맨틱한 쓸쓸함과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 느껴진다. 곧 동양의 신비와 서양의 낭만적 서정이 묘한 대비를 이루는 것이다.
이 밖에 1994년 윈드햄 힐 레이블에서 ‘No Words’라는 데뷔 음반을 내고 팝 성향의 뉴에이지 음악을 펼친 피아니스트 짐 브릭만, 노르웨이 출신의 연주가로 구성된 그룹 시크릿 가든, 각종 행사 음악을 만들며 뉴에이지 음악을 확대시킨 반젤리스, 피아니스트 케빈 컨과 앙드레 가뇽, 유키 구라모토 등이 1990년대에 각광받은 연주가들이다.

동양의 신비와 서양의 낭만적 서정의 대비
1980년대에 들어서며 수없이 많은 뉴에이지 음악이 세상에 나왔지만 이 장르는 아직도 그 범위가 모호하다. 그러니까 뉴에이지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긴 하지만 처음과 끝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야니나 기타로가 자신의 음악이 뉴에이지가 아니라고 하는 것도 장르의 규범이 모호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그렇지만 내용으로 들어가면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게 많다. 이를 위해 잠시 피아니스트 케빈 컨의 작품 제목을 살펴보자. ‘정원’ ‘내 사랑 곁으로’ ‘돌아온 숲의 요정’ ‘추억’ ‘천사의 날개 위에 잠들다’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케빈 컨은 지극히 사적인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있다. 비단 케빈 컨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의 뉴에이지 음악가들이 비슷한 제목과 성향을 표출하고 있다. 이것이 자연에서 느낀 감정,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을 통해 깨달은 정감으로 변하고 때로는 지구를 벗어나 우주와 때묻지 않은 대륙을 상상하는 음악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과거나 현재, 미래를 돌아보는 음악이 많지만, 대개 희망과 낙관을 이야기하는 점이 모든 연주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곧 이들은 공동체를 지향하기보다는 개인과 가족의 행복을 꿈꾸고 복잡한 도시보다는 깨끗한 자연을 갈망하고 있다. 명상 음악 계열의 뉴에이지 음악도 물질의 가치에서 벗어나 정신의 행복, 개인의 해탈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 이들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음악을 통해 자아 찾기에 몰두한다. 때로는 이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기도 하지만 거기에서도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 더 중요한 테마가 된다.
앞서 말했듯이 뉴에이지 음악을 듣는 계층은 도시인들이 많다. 상대적으로 깨끗하지 못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도시인에게 이 장르의 음악은 많은 위안을 준다. 뉴에이지 음악인들도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들은 순음악적인 요소보다는 자연 친화적이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음을 만들어내려 애쓴다. 그래서 집중하기 좋은 음악, 슬픔을 달래주는 음악, 명상하기 좋은 음악 등의 문구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조금은 진부해진 듯하다. 상업적인 의도와 맞물려 똑같은 음악만 계속 생산되는 느낌이다. 좀더 창조적이고 다양한 형태의 음악이 만들어져야 할 때이다. 그래야 무수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이 장르가 계속 힘을 갖고 발전해나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