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키노 > 뮤지션들의 인생을 바꾸게 한 앨범들 2



Dave Matthews
Tom Waits, Blue Valentine (Elektra, 78)
그의 음악을 접했던 것은 아마도 12살때 쯔음이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제까지 그러한 음악을 결코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Dimebag Darrell(Pantera)
Kiss, Alive! (Casablanca, 75)
키스는 내가 락커로 갈 수 있도록 만든 우상이었고 지금도 내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이 앨범은 내가 하드락쪽으로 관심을 갖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Dweezil Zappa
Van Halen, Van Halen (Warner, 78)
밴 헤일런의 이 데뷔앨범은 그야말로 나에게는 폭풍처럼 다가오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에드워드 밴 헤일런의 기타솔로는 나에게 일렉트릭 기타의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피킹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도 기타의 눈부신 솔로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앨범이었다. 또다른 인식세계의 지평을 열어준 고마운 앨범이다.


Eric Carr ( Kiss)
Led Zeppelin, Presence (Atlantic, 76)
레드 제플린은 정말로 위대한 그룹이다.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 모든 섹션의 조화는 그야말로 완벽한 것이다. 드럼을 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존 보남의 연주에 대해 한두번 감탄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인데 특히 이 앨범을 들은 나는 드럼비트에 대해 근본적으로 숙고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멋진 드러밍의 정수를 보여주는 앨범이다.


Gary Lee Conner(Screaming Trees)
Love, Forever Changes (Elektra, 68)
이 앨범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어릴때 접했지만 지금 들어도 여전히 뛰어난 음악이란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놀라운 음반인 것이다.




Harold Chichester(Afghan Whigs)
Sly & The Family Stone, There's A Riot Goin' On (Epic, 71)
연주적인 측면이나 접근방식 등 이 음반에서는 그야말로 전 분야에 걸쳐 고루고루 배울 것들이 많다.




Ian Hill( Judas Priest)
Pink Floyd, Wish You Were Here (Capitol, 75)
핑크 플로이드는 프로그레시브락의 금자탑이다. 이 앨범은 내가 음악에 대해 생각하던 사고방식을 크게 넓혀준 걸작이다.




James Hetfield(Metallica)
Stryper, To Hell With The Devil (Hollywood, 86)
좀 색다르게 여길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 앨범을 듣고 대단한 감동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순수한 느낌을 받았고 뮤지션으로서 나를 고무시켰다.




James Iha(Smashing Pumpkins)
The Beatles, White Album (Capitol, 68)
비틀즈에 대한 평가는 말해 무엇하랴만은 특히 이 앨범은 위대한 곡들과 위대한 보이스 등으로 꽉 찬 역작이다.




Jason Newstard(Metallica)
Kiss, Alive (Casablanca, 75)
키쓰는 어릴때의 내 우상이었다. 어렸을 때 키쓰의 이 앨범을 듣고는 뮤지션이 되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키쓰는 나의 가슴을 설레이게 한다. 이 앨범의 현장감이나 공연의 열기 등은 모든 락커들에게 영원히 ‘흥분’으로 자리할 것이다.


Jimmie Vaughan(블루스 기타리스트)
Freddie King Sings (Modern Blues, 61)
B. B. King, Greatest Hits
아마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블루스를 들은 걸로 알고 있다. 주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곡들을 들으며 감동을 받곤 했는데 그 가운데에 특히 인상적인 것이 비비 킹과 프레디 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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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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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물들을, 풍경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지만 읽는 나는 지치고 힘들고 눈물겨웠다. 참 산다는 것이 그런 건가 보다. 그렇게 늙고 그렇게 살다가 가는 건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책장을 덮었다. 회사 책상에 우두커니 앉아, 그야말로 멍하니 앉아 돌이켜보고 곱씹어봤다. 가슴속에 뭔가가 응어리지지만 그것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배고픔일 수도 있고 목마름일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이 소용돌이 치며 나를 짓눌렀다.

첫 편의 소설을 읽고는 너무 가엾어서 더는 읽지 않으려고 했다. 웬 청승이란 말인가. 너무 냉철하지 않은가. 묘사하고 관찰하고 그리고 끝이 난다. 그러다가 몇 주 뒤 내쳐 나머지 소설들을 읽어 내려갔다.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 부질없음. 그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고 살아가고 견뎌내고 있었다. 읽는 나도 살아가고 견뎌내고. 또 사랑하고 풍요로워지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닦고, 조이고, 기름 치자.' 그의 서재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고 한다. 그는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더욱 채찍해가고 있다. 그의 글 속에는 인생과 세계가 담겨 있다. 그래서 그의 글이 계속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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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동 266번지의 '양극화 대물림'

<현장> 98세대 3백여명 주민들, 심각한 의료양극화 겪어

<사례1> 희귀병으로 인한 가정 경제 파탄

포이동 266번지에서 태어난 형준이는 심작판막증에 간 문정맥 혈관기형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4살짜리 아이다. 형준이는 2004년 ‘1종 의료보호’ 대상자가 됐지만 정기적인 지혈주사, 혈관 투시조영, MRI 등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과일장사로 한달에 60만원을 버는 형준이 아버지는 이미 아들의 수술비용으로 신용불량자가 된지 오래이고 형준이는 민간차원의 지원 없이는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사례2> 가난과 질병으로 인한 3대에 걸친 의료비부담의 대물림

김모 할머니는 포이동 판자촌에서 20년동안 손자, 손녀와 살아가고 있다. 결혼한 아들과 며느리가 도망쳐 버린 이후 할머니는 홀로 손자와 손녀를 키워오다 현재 거동이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

손자(23)는 중학교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전전했고 중학교 시절 유망한 양궁선수였던 손녀(21)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힘든 병수발을 계속하고 있다. 할머니는 기초생활수급권자이지만 남매가 성인이 됨에 따라 언제 배제될 지 모르는 불안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강남의 판자촌, 타워팰리스 아래 위치해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포이동 266번지의 빈곤은 '현재진행형'이다. 79년 강제이주 이후 어렵게 살아온 주민들의 삶은 이어지는 빈곤의 대물림으로 인해 심각한 사회양극화의 중심에 서 있었다. 빈곤은 소득의 격차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건강권을 파괴했고 현재에 이르러 이 지역의 의료양극화는 가계를 파탄시키고 그들의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포이동 주민들을 통해 본 서울시의 의료양극화

사람연대와 건강세상네트워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행동하는 의시화, 희망사회당 서울시당 등 5개 단체는 9일 오후 3시 서울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함춘회관 3층 대강당에서 ‘포이동 266번지를 중심으로 본 서울의 양극화’를 주제로 보고대회를 가졌다.

보고대회에서 공개된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에 대한 의료실태보고서는 우리 사회에서 양극화가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불투명하게 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줬다. 의료보고실태보고서는 지난 2006년 4월부터 5월까지 두 달에 걸쳐 현장 무료진료 봉사와 동시에 진행된 설문조사를 토대로 작성됐다.

포이동과 서울시, 강남구 주민을 비교분석한 보고서에 따르면 외래 및 입원 이용률이 타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은 반면 건강검진, 암검진을 비롯한 건강검진 수검율은 현저히 낮았다.

포이동 주민의 가구단위 외래 이용율은 최근 2주 기간을 기준으로 36.4%에 달했다. 이는 강남구 19.3%, 서울시 18.9%에 두 배에 달하는 수치.

반면 지난 2년간 신체검사 또는 건강검진 수검율은 남녀 모두 강남구(남 63.2%, 여 53.1%), 서울시(남 53.1%, 여 43.3%)에 비해 현저히 낮은 비율(남 31.6%, 여 30.4%)을 기록했다.

보고서를 발표한 김창보 건강세상네트워크 사무국장은 “건강진단 수검율이 낮으면서 외래 이용율이 월등히 높다는 것은 포이동 주민들이 예방을 목적으로 의료이용을 하지 못하고 각종 질병을 앓으며 질병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즉, 포이동 주민들은 불안정한 주거상황과 그로 인한 저소득으로 인해 질병이나 손상이 잦고 그때그때 일회적으로 의료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포이동 주민 3명 중 2명 “의료비 부담 때문에 병 키운다”

포이동 주민들은 지난 2년간의 위암, 자궁암, 혈압검사 등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검사받는 항목에서도 10%이상 떨어지는 수치를 기록했다.

이같은 의료이용실태는 건강보장의 미흡이 원인으로 실제 포이동주민들의 건강보험 미가입율은 10.5%로 서울시(0.7%), 강남구(0.6%)에 10배에 달하는 높은 수치를 보였다.

김 국장은 “포이동 주민들은 기초의료수급자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며 “10.5%라는 미가입율 수치는 굉장히 심각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이밖에도 신체의 손상으로 주요활동을 전혀 못하거나 다소 제한이 있는 주민들은 20.8%, 이로 인해 1년간 하루 이상 입원한 경험자는 27.3%에 달했다. 또 의료비 부담으로 의료이용을 못했거나 병을 키운 경험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도 각각 67.4%, 72.7%로 주민들 3명 중 2명이 저소득으로 인한 의료차별을 경험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겪는 소득수준에 따른 양극화가 교육, 의료, 주거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방증인 셈이다.

김 국장은 “포이동 주민들의 사례는 우리 사회의 건강보장이 저소득층의 안전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며 “차상위계층에 대한 지원학대, 의료급여 수급자 확대를 통해 의료보장제도의 사각지대를 해소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김국장은 “건강권이 보장되지 못하면 치료비 부담으로 인한 빈곤과 불건강의 대물림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며 “저소득층 자녀의 불평등 해소를 위한 공공정책 수립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금민 사회비판아카데미 이사장은 “빈곤은 사회적 산물이며 빈곤이 존재하는 사회에는 이를 생산하고 확대하는 기구가 작동하고 있다”며 “국가가 탈빈곤을 위한 포괄적인 사회경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할 때만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포이동의 70, 80년대 주민수난사 해결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해오고 있는 사람연대는 대책위원회를 구성, 향후 주민등록 회복을 강남구에 요청하고 수용되지 않을 경우 정식 소송을 진행할 예정이다.

시민단체 “포이동 주민들에게 자행된 국가의 인권유린 진상규명 운동 벌일 것”

현재까지 강남구는 포이동 주민들에게 강제퇴거방침을 내리고 이들의 주민등록 전환을 10년 넘게 거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자녀교육 등의 기초생활에서 상당한 불편을 겪고 있다.

이밖에도 지금은 정부 측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70년대 말 자활근로대의 진상규명 조사를 위해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접수 등을 통해 ‘국가에 의한 강제이주와 인권유린’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할 예정이다.

포이동 주민들은 지난 1979년 박정희 정권의 빈민 강제이주 프로그램이었던 ‘자활근로대’에 포함돼 포이동 266번지로 강제이주 당해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지만 강남구청은 이들에게 강제퇴거 명령을 내리고 불법점유에 따른 수십억원의 토지변상금을 부과한 상황이다.

시민단체들은 국가권력에 의한 포이동 주민들의 강제이주가 증명될 경우 명예회복과 함께 현재 강남구청 주민들에게 부과한 ‘불법점유에 따른 수십억원의 토지변상금’ 문제도 해결될 것으로 보고 있다.

/ 최병성 기자 (1895cbs@views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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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30년대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스페인내전을 그린 어네스트 헤밍웨이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주인공인 로버트 조던은 전선에서 사랑을 꽃피운 연인 마리아를 떠나보낸 뒤, 교량폭파라는 마지막 임무를 사수하며 죽어간다.

1970년대 인류의 양심을 시험하던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의 한 여의사는 어느날 밤 의약품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가다가 100명이 넘는 미군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야전병원을 지키기 위해 혼자서 총을 쏘며 맞서다 죽어갔다. 그가 병원을 사수하는 동안 부상당한 그의 동료들은 피신해 목숨을 구했고, 이제 그의 죽음을 그의 일기를 통해 기억한다.

“훗날 당신이 사회주의의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햇살 아래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걸 위해 피흘린 사람들의 희생을 기억해 달라.”

23살에 전선에 뛰어들어 27살에 미군의 공격을 막다 숨져간 여의사의 일기가 36년 만에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을 적시고 있다.

혁명의 열정, 전쟁의 비극에 대한 성찰, 고뇌를 솔직히 다룬 북베트남 공산군의 야전병원 외과의사 당투이짬의 일기가 지난해 <당투이짬의 일기>로 출간돼 30만부가 넘게 팔렸다. 자본주의 물결 속에서 미국을 흠모하는 베트남 젊은이들에게 혁명과 전쟁의 생생한 감정이 35년 전 숨진 한 여전사를 통해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 등 미국의 언론들도 30일 이 일기를 보도하는 등 미국에서도 당투이짬의 열기가 전해지고 있다.

“바로 어제 중상을 입은 21살 병사는 내가 도울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애타게 내 이름을 불렀다. 그렇지만 나는 도와주지 못했고, 그가 무기력한 내 손 안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눈물만 흘렸다.”

일기는 젊은 독자들에게 역사의 한 시대에 휩쓸려 전투에 나선 베트콩 전사들이 자신들과 똑같은 인간이며, ‘인간의 얼굴을 한 이데올로기’에 떨쳐일어났을 뿐임을 보여준다는 반응을 얻고 있다.

미군의 공격 와중에 앞부분이 사라진 채 남아 있는 이 일기의 첫 부분에서 짬은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사방에서 적군의 총성이 들리는 가운데 이미 이런 광경에 익숙해진 나는 배낭을 매고 달리고, 숨는다. 전장에서 이미 2년을 보냈고 이런 일은 아무 것도 아니다”(1969년 11월26일)라고 썼다. 죽기 이틀 전에는 엄마를 부르며 “내가 이렇게 외로울 때 제발 나에게 와서 내 손을 잡아줘요. 나를 사랑해주고, 내 앞길에 놓인 어려운 길을 지나갈 수 있도록 나에게 힘을 줘요”라고 호소한다.

전사의 일기는 정치적인 구호나 영웅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인 감정과 나약함, 젊은 여성의 사랑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전선에서 헤어진 첫사랑을 부르며 “M, 어디 있어? 우리가 정말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거야? 내 사랑. 왜 나는 내 심장이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는 것처럼 느끼지?”라고 절절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고, 자신을 엄격한 전사로 단련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드러난다.

그가 숨진 곳에서 이 일기를 수거한 당시 22살의 미군 정보장교 프레드 화이트허스트는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불태우려 했으나, “이것만은 태우지 말라”는 남베트남인 통역병의 만류로 30년 동안 간직해 왔다. 지난해 그가 미국 텍사스공대에 기증한 이 일기는 결국 당투이짬의 가족에게 되돌아갔다.

지난해 이 글들이 처음으로 신문에 연재됐을 때 베트남인들은 연재된 일기를 오려내 돌려보고 서로 읽어주기도 했다. 당투이짬이 숨진 꽝찌성에는 그의 이름을 딴 병원이 지어졌으며, 하노이 외곽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안경환 영산대 베트남학과 교수가 한국어로 번역을 마치고 7월 이 책을 출간할 예정이다. 안 교수는 “지난해 베트남의 10대 뉴스로 꼽히기도 한 당투이짬의 일기는 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 세대들에게 애국심과 전쟁의 잔혹함, 휴머니즘을 느끼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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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음녀가 있는 풍경(2) - 이택광
'그림으로 읽는 근대 3'

 

월간말 editor@digitalmal.com

 

이택광 | 문화평론가

우리는 매음녀를 공공연하게 사랑도 없이 돈에 몸을 파는 여자로 규정한다. 그런데 이런 규정에 하나 보태야 할 사항이 있다. 매음녀는 그렇게 무수한 익명의 개인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는 일시적 관계 이외에 다르게 삶을 연명해 나갈 방도가 없다는 사실 말이다.” 프랑스 시인 앙리 뚜로의 말이다. 이 말에 이어 뚜로는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어떤 가혹하고 포악한 형벌로도 이 사랑의 프롤레타리아를 처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사실 이런 주장을 오늘날 누군가 한다면 분명히 논란이 될 만한 내용이다. 언뜻 보면 뚜로는 매음녀를 “사랑의 프롤레타리아”로 찬미하면서 성매매 행위를 인정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성매매 문제로 남성중심주의와 한판 일전을 불사해온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뚜로의 말은 에누리 없이 마초의 발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꼴이다. 그러나 뚜로가 이 문제의 발언이 담긴 책 『사랑의 프롤레타리아』를 출간할 1904년 당시는 페미니즘이 그렇게 주요한 이슈로 부각될 무렵이 아니었으니, 뚜로의 발언에서 이를 문제 삼는 것도 좀 우스운 일이 아닐까 싶다.

내 생각은 이렇다. 뚜로의 말을 일반적인 의미에서 불행한 운명에 처한 존재에 대한 옹호로 읽는다면, 이 말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다. 말하자면, 뚜로는 매음녀를 ‘타락한 악녀’로 보는 일반적 상식에 대항해서, 매음녀는 성매매 이외에 다른 생계 수단이 없는 존재이기에 기존의 도덕기준으로 가혹한 처벌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할 요량으로 이 글을 썼던 게다. 나는 이렇게 성매매를 둘러싸고 인터넷이나 기타 여러 매체에서 진행되는 논쟁에서 이런 선의에 기반해 각자의 말들을 들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자 김영민의 말처럼, 진정한 대화는 어떻게 잘 말하는가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잘 듣는가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의 연원

나는 이런 뚜로의 말이야말로 당시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파리지앵들의 인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본다. 프롤레타리아는 무엇인가?
한국처럼 반쪽 날개로만 위태롭게 날아온 나라에서 이 말은 곧 ‘불온세력’이나 ‘좌경용공세력’이라는 말과 연상작용을 일으키는 요주의대상의 기표이다. 어느 학술대회에서 나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을 맑스가 만들어내었다고 주장하시는 한 교수님 덕분에 조금 즐거웠던 적도 있었지만, 여하튼 아직까지도 프롤레타리아라는 용어는 한국 사회에서 무엇인가 장벽을 느끼게 만드는 말인 게다.

어원적으로 보자면,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은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라틴어 proletarius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 로마제국 시절에 가난한 하층계급 시민을 지칭하던 말이었다. 글자 그대로 드러나는 뜻을 헤아려보면, 이 말은 “먹여 살릴 능력도 없는 주제에 애새끼들만 줄줄이 까놓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한마디로 로마의 귀족이나 상류계급이 하류계급을 벌레 취급하면서 내뱉던 욕인 셈이다. 이런 말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에서 놀부가 흥부한테 하던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맑스에 이르면, 이런 일반적 의미에서 ‘가난뱅이’를 비하해서 지칭하던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이 전혀 다른 뜻으로 거듭난다. 여기에 우리 맑스 할아버지의 탁월성이 있는 게다. 기존의 언어사용법을 뒤바꿔버림으로써 습관적으로 그게 그거 아니냐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혼란을 야기하는 게 맑스의 특기였다. 내가 맑스를 탁월한 문화비평가로 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문화비평이란 것은 이렇게 기존의 문화적 습속을 멋있게 뒤집어 놓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습관에 찌든 삶을 한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지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맑스는 이런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의 용법을 전복시켜 사회의 양지를 갉아먹는 곰팡이 정도로 취급당하던 이들에게 돌연 ‘해방자’라는 후광을 선사해 버렸다. 프롤레타리아를 향해 비웃음이나 날리던 부르주아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주의사항이 하나 있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를 가난뱅이와 동일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숙지해야 한다는 거다. 맑스의 용어사용법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노동력을 팔아서 수입을 얻는 산업 임금노동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을 재산 없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무산자’ 또는 ‘무산계급’이라고 번역해온 관습 때문에 대개 가난한 사람이라고 이 말의 의미를 새기는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원래 뜻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자본주의의 특성상 프롤레타리아를 구성하는 절대 다수는 가난할 수밖에 없지만, 고도의 기술을 연마한 숙련공이나 한때 한국에서 이른바 노동귀족이라고 왈가왈부되었던 대기업 노조원들이야말로 맑스가 사용한 말뜻 그대로 프롤레타리아에 해당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맑스 할아버지의 뜻은 헤아리지 않고, 상대적으로 임금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당신들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고 면박을 주는 것은 완전히 코미디일 수밖에 없다. 이런 까닭에 앞서 뚜로가 말하고 있는 ‘사랑의 프롤레타리아’는 맑스의 용어법과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고 봐야 한다.

자, 이제 한번 생각을 가다듬어 보자.
지금까지 내가 늘어놓은 맑스의 계급론과 뚜로의 매음녀 찬미, 그리고 마네의 그림들은 어떤 관련성을 갖고 있는 것일까? 겉으로 본다면, 별반 특기할 만한 관련성이 눈에 띄지 않는다.

 

맑스가 매음녀를 찬미한 적도 없고, 마네가 맑스의 초상을 그린 적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직접적 관련성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뜻으로 내가 이렇게 나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둘 사이에 개인적 친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맑스와 마네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동시대의 파리를 고스란히 함께 경험했다. 맑스가 유명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완성한 1852년에서 7년이 지난 뒤, 마네는 「압생트 취객」이라는 그림을 그려서 처음으로 프랑스 살롱에 출품한다. 맑스가 문학적 수사학을 총동원해서 훗날 구조주의자 레비-스트로스가 격찬했던 고전적 팸플릿을 쓰기 시작했던 1851년은 루이 보나파르트가 그의 숙부이기도 했던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동일한 방식으로 자신을 민주적으로 선출해준 공화정을 뒤엎고 제정을 다시 부활시켰던 해이기도 하다. 맑스의 팸플릿은 이런 역사적 상황 뒤에 숨어 있는 의미들을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시리도록 냉정한 문학적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압권이다.


프랑스판 새마을운동이 남긴 것


이런 맑스의 진술은 마네의 그림을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맑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정책을 일종의 신화 만들기로 본다. 그러니까, 자신을 나폴레옹의 재림으로 대중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깜짝쇼를 펼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게다. 이런 깜짝쇼는 최소한 나폴레옹에게 흔적으로나마 남아 있었던 역사적 진정성을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좀 과장을 섞어서 말하자면, 시뮬라크르의 시대가 바야흐로 19세기에 도래한 셈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깜짝쇼의 일환으로 루이 보나파르트 황제가 착수했던 일은 파리의 ‘근대화(물론 당시로 보면 현대화이기도 했지만)’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근대화라는 말은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전통은 박대당하고, 새것은 대접받는다. 이런 루이 보나파르트의 뜻을 받들어 파리를 완전히 ‘새마을’로 만들어버리는 데 주역을 담당했던 사람이 조르주 오스망이다.

이런 오스망의 과감한 근대화 사업 때문에 파리는 올망졸망한 다른 유럽의 대도시와 달리 그 규모 면에서 오늘날 각국의 여행객들로부터 경탄을 한 몸에 받는 처지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밝은 면에 가려진 그늘은 생각보다 깊다. 파리의 근대화를 위해 희생되어야 했던 것은, 한국의 경우에도 역사적으로 확인되듯이, 도시빈민들이나 노동자들이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배낭 하나 메고 가서 사진을 찍어대던 개선문이나 에펠탑 주변은 이렇게 창졸간에 집과 세간을 잃고 길거리로 나앉아야 했던 19세기 파리 노동자들의 설움이 배어 있는 공간인 셈이다. 겉으로는 그럴싸한 근대화라는 명분을 달긴 했지만, 오스망이 궁극적으로 바랐던 것은, 끊임없는 폭동의 진원지였던 노동계급의 거주지역을 부르주아의 거주지역으로부터 완전히 격리시켜버리는 것이었다.

파리 중심가에 위치한 광대한 도로와 광장은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 고안된 공간배치이다. 요즘 알 만한 사람들의 입에 전설처럼 오르내리는 독일의 문예학자 발터 벤야민의 『파사주 기획』은 이런 오스망의 근대화 기획과 그에 따른 문화 충격에 대한 소상한 보고서이다. 벤야민은 이런 파리의 근대화를 ‘오스망화’라고 정의하면서, 이것이 예술형식을 기술에 종속시키는 일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벤야민이 보기에, 이런 방식은 언제나 문화적 키취만을 양산해낼 뿐이다.


“넝마주이를 그리다니!”

이쯤에서 우리는 마네의 그림들을 향해 쏟아졌던 살롱의 비난에 대한 어렴풋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마네가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했다가 욕을 바가지로 들어먹은 「압생트 취객」을 한번 들여다보자. 이 그림은 장-앙트와네 와토의 「범부」라는 그림의 구도를 그대로 빌려온 작품이다. 와토가 「범부」를 통해 전하고 있는 메시지는 한마디로 술 먹지 말라는 훈계다.

언뜻 살피면, 마네 역시 「압생트 취객」을 통해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듯하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기분 좋게 취한 저 취객은 당시 루브르 일대를 배회하던 넝마주이였다. 압생트는 당시 프랑스에서 유명했던 독주로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판매금지 처분을 내릴 정도로 사회문제를 일으키던 술이었다. 알코올중독은 19세기 파리의 주요 이슈이기도 했는데, 유명한 자연주의 소설가 에밀 졸라는 압생트와 같은 독주에 의지해서 삶을 파탄지경으로 몰아갈 수밖에 없는 노동계급의 처지를 묘사하고자 소설 『목로주좀을 썼노라고 진술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마네는 과연 이렇게 알코올중독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압생트 취객」이란 그림을 그린 것일까?


전통적 구도를 빌려와서, 근대적 풍경을 화폭에 옮겨놓음으로써 습관적 기법을 낯설게 만들어버리는 수법은 이른바 근대성을 재현하기 위한 마네의 묘수였다. 그 근대성이란 물건은 앞서 언급했듯이, 루이 보나파르트와 조르주 오스망이 만들어놓은 그 근대화 정책의 산물이었다. 이런 마네의 전략은 맑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우리가 확인했던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맑스가 습관적 용어들을 그 용법만을 뒤틀어버림으로써 전혀 다른 의미맥락으로 확장하듯이, 마네 또한 구태의연한 아카데미의 인습적 재현체계를 살짝 비틀어버림으로써 유사한 효과를 얻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네가 그린 취객이나 매음녀를 맑스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와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마네와 맑스는 공히 현란한 문화적 키취 속에 감추어져 있는 노동계급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지만, 그 노동계급에 대한 태도에서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마네의 취객이나 매음녀는 맑스가 혁명의 주역으로 보았던 임금노동자라기보다, 오히려 당시 상식적으로 프롤레타리아라고 지칭되었던 가난뱅이나 떠돌이 노동자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게다.


그림에 각인된 계급성

이런 맥락에서 그림 그리기에도 바쁜 화가 마네에게 혁명까지 요구하는 것은 좀 과한 짓이 아닌가 싶다. 당시 화가로서 마네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네의 출신배경은 굳이 이렇게 살롱 비평가들로부터 온갖 욕을 먹어가면서 19세기 파리의 밑바닥 인생들을 그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전도양양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괴테와 마찬가지로 마네 역시 자기 계급의 탕아였던 것인데, 내가 생각하기에, 「압생트 취객」은 이런 마네의 반항심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한다. 상층 중간계급 출신인 마네가 술에 취해 도심을 배회하는 한 넝마주이의 초상화를 그려준다는 것은 당시 미술계의 분위기로 본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찰스 디킨스의 유명한 소설 『위대한 유산』에서 주인공 핍은 사진술이 나오기 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까닭에 자신은 부모님의 얼굴을 모른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을 잘 음미해 보면, 19세기라는 시대가 어떤 시대였을지 충분히 상상이 갈 거다.

사진이라는 신기술 혁명의 산물이 대중적으로 유통되기 전까지 자기 조상의 얼굴을 알 수 있는 계급은 귀족이나 몇몇 부르주아에 한정되었다. 디킨스의 소설이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것은 이렇게 하나의 문화형식에 기재되어 있는 계급성이다.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논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도 이런 기술과 문화 변동의 관계에 감추어져 있는 계급성의 문제이다. 1850년대에 이르러서야 사진술이 대중화된 것을 감안한다면, 마네의 「압생트 취객」이 가진 선구적 가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게다. 마네는 사진술의 혜택으로부터도 밀려나있던 넝마주이나 매음녀를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초상을 담아내던 화폭에 그렸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행위 자체가 살롱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마네가 천착한 ‘근대의 그늘’


   
속내를 알고 보면, 이 그림은 더 재미있는 내용을 감추고 있다. 「압생트 취객」의 넝마주이는 마네가 그린 「늙은 악사」라는 그림에도 똑같이 출현하고 있다. 이 넝마주이의 이름은 콜라르데였는데, 보들레르는 이런 넝마주이의 존재를 일컬어 ‘거리의 철학자’라고 1857년에 출간된 『악의 꽃』에서 묘파하기도 했다. 따라서 마네의 그림은 여러 모로 보들레르가 말하는 바, 근대성으로 인해 그늘로 밀려나버린 삶에 대한 관심으로 볼 수가 있다. 마네가 산업 자본주의에 항의하는 방식은 이렇게 맑스와 달랐지만, 종국적으로 같은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었던 셈이다. 모더니즘이 스탈린주의에 반대해서 등장한 신좌파들에 의해 재해석되고 새롭게 평가되었던 까닭은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말하자면,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애써 대립시키면서, 전자를 후자에 비해 더욱 해방적인 양식으로 간주하고자 했던 서구 신좌파의 시도는 맑스가 해방자로 간주했던 프롤레타리아, 다시 말해서 산업 임금노동계급에 대한 회의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마네의 그림들은 이런 주류 맑스주의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던 다양한 계급들의 군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늙은 악사」에서 마네가 보여주고 있는 사람들은 오스망의 도시계획으로 인해 살 곳을 잃어버리고 정처 없이 떠도는 처지에 놓인 보헤미안들이다. 나중에 이런 보헤미안들이 한 덩어리로 뭉쳐서 1871년 파리코뮌의 해방구를 이루어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마네의 그림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닐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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