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음녀가 있는 풍경(2) - 이택광
'그림으로 읽는 근대 3'

 

월간말 editor@digitalmal.com

 

이택광 | 문화평론가

우리는 매음녀를 공공연하게 사랑도 없이 돈에 몸을 파는 여자로 규정한다. 그런데 이런 규정에 하나 보태야 할 사항이 있다. 매음녀는 그렇게 무수한 익명의 개인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는 일시적 관계 이외에 다르게 삶을 연명해 나갈 방도가 없다는 사실 말이다.” 프랑스 시인 앙리 뚜로의 말이다. 이 말에 이어 뚜로는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어떤 가혹하고 포악한 형벌로도 이 사랑의 프롤레타리아를 처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사실 이런 주장을 오늘날 누군가 한다면 분명히 논란이 될 만한 내용이다. 언뜻 보면 뚜로는 매음녀를 “사랑의 프롤레타리아”로 찬미하면서 성매매 행위를 인정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성매매 문제로 남성중심주의와 한판 일전을 불사해온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뚜로의 말은 에누리 없이 마초의 발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꼴이다. 그러나 뚜로가 이 문제의 발언이 담긴 책 『사랑의 프롤레타리아』를 출간할 1904년 당시는 페미니즘이 그렇게 주요한 이슈로 부각될 무렵이 아니었으니, 뚜로의 발언에서 이를 문제 삼는 것도 좀 우스운 일이 아닐까 싶다.

내 생각은 이렇다. 뚜로의 말을 일반적인 의미에서 불행한 운명에 처한 존재에 대한 옹호로 읽는다면, 이 말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다. 말하자면, 뚜로는 매음녀를 ‘타락한 악녀’로 보는 일반적 상식에 대항해서, 매음녀는 성매매 이외에 다른 생계 수단이 없는 존재이기에 기존의 도덕기준으로 가혹한 처벌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할 요량으로 이 글을 썼던 게다. 나는 이렇게 성매매를 둘러싸고 인터넷이나 기타 여러 매체에서 진행되는 논쟁에서 이런 선의에 기반해 각자의 말들을 들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자 김영민의 말처럼, 진정한 대화는 어떻게 잘 말하는가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잘 듣는가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의 연원

나는 이런 뚜로의 말이야말로 당시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파리지앵들의 인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본다. 프롤레타리아는 무엇인가?
한국처럼 반쪽 날개로만 위태롭게 날아온 나라에서 이 말은 곧 ‘불온세력’이나 ‘좌경용공세력’이라는 말과 연상작용을 일으키는 요주의대상의 기표이다. 어느 학술대회에서 나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을 맑스가 만들어내었다고 주장하시는 한 교수님 덕분에 조금 즐거웠던 적도 있었지만, 여하튼 아직까지도 프롤레타리아라는 용어는 한국 사회에서 무엇인가 장벽을 느끼게 만드는 말인 게다.

어원적으로 보자면,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은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라틴어 proletarius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 로마제국 시절에 가난한 하층계급 시민을 지칭하던 말이었다. 글자 그대로 드러나는 뜻을 헤아려보면, 이 말은 “먹여 살릴 능력도 없는 주제에 애새끼들만 줄줄이 까놓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한마디로 로마의 귀족이나 상류계급이 하류계급을 벌레 취급하면서 내뱉던 욕인 셈이다. 이런 말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에서 놀부가 흥부한테 하던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맑스에 이르면, 이런 일반적 의미에서 ‘가난뱅이’를 비하해서 지칭하던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이 전혀 다른 뜻으로 거듭난다. 여기에 우리 맑스 할아버지의 탁월성이 있는 게다. 기존의 언어사용법을 뒤바꿔버림으로써 습관적으로 그게 그거 아니냐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혼란을 야기하는 게 맑스의 특기였다. 내가 맑스를 탁월한 문화비평가로 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문화비평이란 것은 이렇게 기존의 문화적 습속을 멋있게 뒤집어 놓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습관에 찌든 삶을 한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지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맑스는 이런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의 용법을 전복시켜 사회의 양지를 갉아먹는 곰팡이 정도로 취급당하던 이들에게 돌연 ‘해방자’라는 후광을 선사해 버렸다. 프롤레타리아를 향해 비웃음이나 날리던 부르주아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주의사항이 하나 있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를 가난뱅이와 동일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숙지해야 한다는 거다. 맑스의 용어사용법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노동력을 팔아서 수입을 얻는 산업 임금노동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을 재산 없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무산자’ 또는 ‘무산계급’이라고 번역해온 관습 때문에 대개 가난한 사람이라고 이 말의 의미를 새기는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원래 뜻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자본주의의 특성상 프롤레타리아를 구성하는 절대 다수는 가난할 수밖에 없지만, 고도의 기술을 연마한 숙련공이나 한때 한국에서 이른바 노동귀족이라고 왈가왈부되었던 대기업 노조원들이야말로 맑스가 사용한 말뜻 그대로 프롤레타리아에 해당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맑스 할아버지의 뜻은 헤아리지 않고, 상대적으로 임금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당신들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고 면박을 주는 것은 완전히 코미디일 수밖에 없다. 이런 까닭에 앞서 뚜로가 말하고 있는 ‘사랑의 프롤레타리아’는 맑스의 용어법과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고 봐야 한다.

자, 이제 한번 생각을 가다듬어 보자.
지금까지 내가 늘어놓은 맑스의 계급론과 뚜로의 매음녀 찬미, 그리고 마네의 그림들은 어떤 관련성을 갖고 있는 것일까? 겉으로 본다면, 별반 특기할 만한 관련성이 눈에 띄지 않는다.

 

맑스가 매음녀를 찬미한 적도 없고, 마네가 맑스의 초상을 그린 적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직접적 관련성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뜻으로 내가 이렇게 나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둘 사이에 개인적 친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맑스와 마네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동시대의 파리를 고스란히 함께 경험했다. 맑스가 유명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완성한 1852년에서 7년이 지난 뒤, 마네는 「압생트 취객」이라는 그림을 그려서 처음으로 프랑스 살롱에 출품한다. 맑스가 문학적 수사학을 총동원해서 훗날 구조주의자 레비-스트로스가 격찬했던 고전적 팸플릿을 쓰기 시작했던 1851년은 루이 보나파르트가 그의 숙부이기도 했던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동일한 방식으로 자신을 민주적으로 선출해준 공화정을 뒤엎고 제정을 다시 부활시켰던 해이기도 하다. 맑스의 팸플릿은 이런 역사적 상황 뒤에 숨어 있는 의미들을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시리도록 냉정한 문학적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압권이다.


프랑스판 새마을운동이 남긴 것


이런 맑스의 진술은 마네의 그림을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맑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정책을 일종의 신화 만들기로 본다. 그러니까, 자신을 나폴레옹의 재림으로 대중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깜짝쇼를 펼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게다. 이런 깜짝쇼는 최소한 나폴레옹에게 흔적으로나마 남아 있었던 역사적 진정성을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좀 과장을 섞어서 말하자면, 시뮬라크르의 시대가 바야흐로 19세기에 도래한 셈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깜짝쇼의 일환으로 루이 보나파르트 황제가 착수했던 일은 파리의 ‘근대화(물론 당시로 보면 현대화이기도 했지만)’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근대화라는 말은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전통은 박대당하고, 새것은 대접받는다. 이런 루이 보나파르트의 뜻을 받들어 파리를 완전히 ‘새마을’로 만들어버리는 데 주역을 담당했던 사람이 조르주 오스망이다.

이런 오스망의 과감한 근대화 사업 때문에 파리는 올망졸망한 다른 유럽의 대도시와 달리 그 규모 면에서 오늘날 각국의 여행객들로부터 경탄을 한 몸에 받는 처지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밝은 면에 가려진 그늘은 생각보다 깊다. 파리의 근대화를 위해 희생되어야 했던 것은, 한국의 경우에도 역사적으로 확인되듯이, 도시빈민들이나 노동자들이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배낭 하나 메고 가서 사진을 찍어대던 개선문이나 에펠탑 주변은 이렇게 창졸간에 집과 세간을 잃고 길거리로 나앉아야 했던 19세기 파리 노동자들의 설움이 배어 있는 공간인 셈이다. 겉으로는 그럴싸한 근대화라는 명분을 달긴 했지만, 오스망이 궁극적으로 바랐던 것은, 끊임없는 폭동의 진원지였던 노동계급의 거주지역을 부르주아의 거주지역으로부터 완전히 격리시켜버리는 것이었다.

파리 중심가에 위치한 광대한 도로와 광장은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 고안된 공간배치이다. 요즘 알 만한 사람들의 입에 전설처럼 오르내리는 독일의 문예학자 발터 벤야민의 『파사주 기획』은 이런 오스망의 근대화 기획과 그에 따른 문화 충격에 대한 소상한 보고서이다. 벤야민은 이런 파리의 근대화를 ‘오스망화’라고 정의하면서, 이것이 예술형식을 기술에 종속시키는 일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벤야민이 보기에, 이런 방식은 언제나 문화적 키취만을 양산해낼 뿐이다.


“넝마주이를 그리다니!”

이쯤에서 우리는 마네의 그림들을 향해 쏟아졌던 살롱의 비난에 대한 어렴풋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마네가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했다가 욕을 바가지로 들어먹은 「압생트 취객」을 한번 들여다보자. 이 그림은 장-앙트와네 와토의 「범부」라는 그림의 구도를 그대로 빌려온 작품이다. 와토가 「범부」를 통해 전하고 있는 메시지는 한마디로 술 먹지 말라는 훈계다.

언뜻 살피면, 마네 역시 「압생트 취객」을 통해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듯하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기분 좋게 취한 저 취객은 당시 루브르 일대를 배회하던 넝마주이였다. 압생트는 당시 프랑스에서 유명했던 독주로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판매금지 처분을 내릴 정도로 사회문제를 일으키던 술이었다. 알코올중독은 19세기 파리의 주요 이슈이기도 했는데, 유명한 자연주의 소설가 에밀 졸라는 압생트와 같은 독주에 의지해서 삶을 파탄지경으로 몰아갈 수밖에 없는 노동계급의 처지를 묘사하고자 소설 『목로주좀을 썼노라고 진술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마네는 과연 이렇게 알코올중독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압생트 취객」이란 그림을 그린 것일까?


전통적 구도를 빌려와서, 근대적 풍경을 화폭에 옮겨놓음으로써 습관적 기법을 낯설게 만들어버리는 수법은 이른바 근대성을 재현하기 위한 마네의 묘수였다. 그 근대성이란 물건은 앞서 언급했듯이, 루이 보나파르트와 조르주 오스망이 만들어놓은 그 근대화 정책의 산물이었다. 이런 마네의 전략은 맑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우리가 확인했던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맑스가 습관적 용어들을 그 용법만을 뒤틀어버림으로써 전혀 다른 의미맥락으로 확장하듯이, 마네 또한 구태의연한 아카데미의 인습적 재현체계를 살짝 비틀어버림으로써 유사한 효과를 얻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네가 그린 취객이나 매음녀를 맑스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와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마네와 맑스는 공히 현란한 문화적 키취 속에 감추어져 있는 노동계급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지만, 그 노동계급에 대한 태도에서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마네의 취객이나 매음녀는 맑스가 혁명의 주역으로 보았던 임금노동자라기보다, 오히려 당시 상식적으로 프롤레타리아라고 지칭되었던 가난뱅이나 떠돌이 노동자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게다.


그림에 각인된 계급성

이런 맥락에서 그림 그리기에도 바쁜 화가 마네에게 혁명까지 요구하는 것은 좀 과한 짓이 아닌가 싶다. 당시 화가로서 마네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네의 출신배경은 굳이 이렇게 살롱 비평가들로부터 온갖 욕을 먹어가면서 19세기 파리의 밑바닥 인생들을 그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전도양양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괴테와 마찬가지로 마네 역시 자기 계급의 탕아였던 것인데, 내가 생각하기에, 「압생트 취객」은 이런 마네의 반항심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한다. 상층 중간계급 출신인 마네가 술에 취해 도심을 배회하는 한 넝마주이의 초상화를 그려준다는 것은 당시 미술계의 분위기로 본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찰스 디킨스의 유명한 소설 『위대한 유산』에서 주인공 핍은 사진술이 나오기 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까닭에 자신은 부모님의 얼굴을 모른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을 잘 음미해 보면, 19세기라는 시대가 어떤 시대였을지 충분히 상상이 갈 거다.

사진이라는 신기술 혁명의 산물이 대중적으로 유통되기 전까지 자기 조상의 얼굴을 알 수 있는 계급은 귀족이나 몇몇 부르주아에 한정되었다. 디킨스의 소설이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것은 이렇게 하나의 문화형식에 기재되어 있는 계급성이다.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논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도 이런 기술과 문화 변동의 관계에 감추어져 있는 계급성의 문제이다. 1850년대에 이르러서야 사진술이 대중화된 것을 감안한다면, 마네의 「압생트 취객」이 가진 선구적 가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게다. 마네는 사진술의 혜택으로부터도 밀려나있던 넝마주이나 매음녀를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초상을 담아내던 화폭에 그렸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행위 자체가 살롱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마네가 천착한 ‘근대의 그늘’


   
속내를 알고 보면, 이 그림은 더 재미있는 내용을 감추고 있다. 「압생트 취객」의 넝마주이는 마네가 그린 「늙은 악사」라는 그림에도 똑같이 출현하고 있다. 이 넝마주이의 이름은 콜라르데였는데, 보들레르는 이런 넝마주이의 존재를 일컬어 ‘거리의 철학자’라고 1857년에 출간된 『악의 꽃』에서 묘파하기도 했다. 따라서 마네의 그림은 여러 모로 보들레르가 말하는 바, 근대성으로 인해 그늘로 밀려나버린 삶에 대한 관심으로 볼 수가 있다. 마네가 산업 자본주의에 항의하는 방식은 이렇게 맑스와 달랐지만, 종국적으로 같은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었던 셈이다. 모더니즘이 스탈린주의에 반대해서 등장한 신좌파들에 의해 재해석되고 새롭게 평가되었던 까닭은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말하자면,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애써 대립시키면서, 전자를 후자에 비해 더욱 해방적인 양식으로 간주하고자 했던 서구 신좌파의 시도는 맑스가 해방자로 간주했던 프롤레타리아, 다시 말해서 산업 임금노동계급에 대한 회의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마네의 그림들은 이런 주류 맑스주의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던 다양한 계급들의 군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늙은 악사」에서 마네가 보여주고 있는 사람들은 오스망의 도시계획으로 인해 살 곳을 잃어버리고 정처 없이 떠도는 처지에 놓인 보헤미안들이다. 나중에 이런 보헤미안들이 한 덩어리로 뭉쳐서 1871년 파리코뮌의 해방구를 이루어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마네의 그림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닐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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