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의 지하실에서 듣는 빗소리
90년대 포크를 대표하는 엘리엇 스미스, 〈New Moon〉의 미발표곡으로 다시 만나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출처 : <한겨레 21> 제 662호 2007년 5월 31일


1990년대 대중음악을 열었던 화두가 시대정신이었다면 90년대 중·후반을 지배했던 말은 ‘취향’이었다.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음악이 그런지로 촉발된 얼터너티브 혁명이었고, 포크는 취향을 리스너들의 입에서 꺼내게 했다. 전통적인 포크가 아닌, 90년대의 감성을 담아낸 새로운 포크 말이다. 벨 앤드 세바스천과 엘리엇 스미스가 선봉에 있었다. 록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 순진하게 믿었던 90년대 초반의 소년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음에 좌절했다. 청년이 되어 방구석에 틀어박힌 그들의 귓가를 적셔주던 음악, 벨 앤드 세바스천과 엘리엇 스미스는 필청의 리스트와 마찬가지였다.

전사 커트 코베인, 패잔병 엘리엇 스미스



△ 엘리엇 스미스는 언제나 상처투성이었다. 마지막 안식처로 삼을 법한 가족마저도 그에게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둘은 엄연히 달랐다. 벨 앤드 세바스천이 마음 한구석에 사랑과 낭만을 간직한 이들의 음악이었다면, 엘리엇 스미스는 사랑과 낭만에 마지막 좌절을 경험한 이들의 음악이었던 것이다. 1969년 스티븐 폴 스미스란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 2003년 10월 엘리엇 스미스란 이름으로 자신의 심장에 스테이크 나이프를 꽂았다. 그 순간까지 35년. 그의 인생은 단 한 번도 행복하지 않았다. 아니, 행복해지는 걸 누구보다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때론 인터뷰에서 자신이 불행하지 않음을 항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그의 가장 내밀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던 노랫말은 그렇지 않았다. 언제나 상처투성이였고 상처를 두려워했지만 결국 제 발로 상처 곁으로 걸어가는 게 음악 속에서 그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지친 영혼일지라도 안식처로 삼을 법한 가족마저도 그에게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증’ 쪽이 훨씬 많았지만.

엘리엇 스미스의 목소리에는 언제나 옅은 안개가 끼어 있었고 마음속 세상에는 언제나 빗줄기가 후드득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네가 원할 때 네가 원하는 걸 하라. 비록 그게 아무 의미도 없을지라도. 거대한 허무일지라도’라고 끝을 맺는 〈Ballad Of Big Nothing〉. 음악평론가 성문영이 ‘거대한 허무의 발라드’로 해석한 이 노래의 제목은 어쩌면 그의 모든 노래에 담긴 주제어일 것이다. 사방이 온통 막다른 골목인 궁지의 공간, 엘리엇 스미스는 그곳의 지하실에서 노래했고 이야기했다. 도피할 곳 없어 세상의 틈새에서 방랑하는 이들에게 그의 노래만큼 위로의 담요 구실을 해주는 도구는 없었다. 소통에 힘겨워하고 혼자 있을 때 비로소 위안을 얻는, 세대의 틈바구니 속에서 억지로 웃음짓는 개인들에게 엘리엇 스미스라는 이름은 가장 강력한 프로작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1994년 커트 코베인의 죽음이 군단을 진두지휘하던 장수의 전사였다면, 2003년 엘리엇 스미스의 죽음은 억지로 전쟁터에 끌려나와 몸부림치던 낙오병의 고립된 사망과 같았다. 그와 심정적으로 연결된 개인들만이 조용히 추모할 뿐인 쓸쓸한 죽음.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일반화된 인터넷 때문에 더 이상 ‘모여서 음악을 듣는 행위’가 사라진 이곳에서 그의 죽음은 오프라인 음악 공동체의 부고장이기도 했다.

적나라함 때문에 싣기가 곤란했나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허무의 방랑자가 숨겨뒀던 또 하나의 일기장이 공개됐다. 1995년부터 97년까지 엘리엇 스미스가 만들었던 노래들 중 미발표 곡을 모은 음반 〈New Moon〉이다. 미발표곡 모음집은 대부분 기대를 배신한다. 만들어놓기는 했으나 음반에 싣기에는 어딘지 함량 미달인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뮤지션들이 음반 발매 일정이 잡히면 그때부터 곡을 만들고 레코딩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리엇 스미스는 일기 쓰듯, 평소에 곡을 만들고 녹음하곤 했다. 그렇게 쌓인 곡들 중에서 추려서 음반을 내곤 했다. 그에게 창작이란 곧 일상이었다. 그의 창작력이 급속도로 치닫던 시기는 1997년에 발표된 〈Either/Or〉 무렵이다. 그리고 이 음반은 그가 남긴 여섯 장의 작품 중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New Moon〉은 전작 〈Elliott Smith〉부터 〈Either/Or〉 사이의 시간 동안 만들었던 노래들을 담고 있다. 최고조로 치닫던 창작의 잉여물들이다. 그러나 잉여라는 표현은 올바르지 않을 것이다. 말이 좋아 음반에서 누락된 곡들이지, 여기 담긴 스물네 곡의 노래는 마땅히 발표됐어야 할 음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음반은 단순한 미발표곡 모음집이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정규 음반으로 추앙받아도 결코 손색이 없다. 〈New Moon〉은 어느 음반보다 감성적이고 적나라하다. 그 적나라함 때문에 오히려 정규 음반에는 싣기가 곤란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될 정도다. 서서히 차오르는 센티멘털이 한순간에 폭발한 뒤 모래처럼 바스러진다. 자물쇠로 묶어둔 비밀의 일기장에조차 쓸 수 없었던, 온갖 감정의 본원과 심연을 엘리엇 스미스는 벌거벗긴다. 그리고 노래한다. 시라고 해도 괜찮을, 아니 시 그 자체인 언어로. 음표와 단어와 목소리는 서로를 힘겹게 부축한 채,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고 이곳으로 뚜벅뚜벅 다가온다. 애도의 감정이 들기 전에, 경이가 밀려온다. 놀라운 재능과 불편할 정도의 진솔함에 대한 경이가.

돌이켜보면 그런 경이가 취향의 시대를 열었다. 네트워크의 힘으로 낙오자들은 그들만의 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커트 코베인이 ‘세대’로 90년대를 열었다면 엘리엇 스미스는 ‘취향’으로 그 시대를 마무리했다. 그들 모두 자살했다. 21세기는 20세기를 그렇게 숙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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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계 노동자들 피눈물 공정무역 통해서 보듬어야”
입력: 2008년 02월 19일 18:19:43
 
ㆍ한국공정무역연합 박창순 대표

어느 때부터인가 ‘공정무역(Fair Trade)’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제3세계 생산자들이 만든 생산품을 최소한의 유통과정을 통해 소비자가 구입하도록 한다는 개념이다. 상품에 대한 공정한 가격을 지불해 제3세계 노동자들이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아동노동으로 만들어진 물품은 제외한다고 해서 ‘아름다운 거래’ ‘윤리적 소비’라는 말로도 불린다.


‘공정무역’이라는 낯선 개념과 그 의의가 알려지게 된 데는 박창순 ‘한국공정무역연합’ 대표(61)의 공이 적잖다. 2005년 방송본부장을 끝으로 EBS를 퇴직한 그는 지난해 4월 이 단체를 결성하면서 공정무역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그는 “1950년대 유럽에서 시작된 이후 공정무역은 날로 성장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교역량 세계 11위의 한국도 제3세계 빈곤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할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공정무역=정의로운 무역’이라고 했다. 공정무역은 유통과정에서 폭리를 취하는 다국적 기업의 개입을 배제하고, NGO 등을 통해 생산물의 거래가 이뤄지도록 함으로써, 생산자와 소비자가 모두 윈윈(win-win)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유통과정이 거의 직거래에 가깝기 때문에 생산자는 물건 가격을 20~30% 정도 더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농약을 살포해 대량생산하는 다국적기업의 농산물과 달리, 소농가에서 생산하는 공정무역 농산물은 농약을 사용하지 않은 친환경적 제품이라는 이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공정무역이 세계시장 질서를 교란한다는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있는 자가 더 돈을 벌고 없는 자는 궁핍해지는 자유무역의 폐해를 외면한 주장”이라며 “공정무역을 통해 생활이 향상된 사람이 전세계 700만명에 이른다”고 반박했다. 이어 “공정무역이 국제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0.1%밖에 안되는데 무슨 질서를 교란하겠느냐”면서 “오히려 공정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1%만 돼도 1억2800만명의 극심한 빈곤층이 혜택을 입게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퇴직 후 ‘아름다운 거래’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공정무역’에 관심을 갖게 됐다. 국내에서 농산물의 도농직거래 등을 다루는 ‘한살림운동’에 참여해온 터라 공정무역이 낯설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공정무역’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공부모임과 교육강좌를 개최하고 교재를 개발해 일선 학교 등에 보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지난 2월14일 ‘발렌타인 데이’때는 ‘피아노와 이빨’이라는 콘서트를 열고, 공정무역을 통해 만들어진 ‘착한 초콜릿’을 홍보해 성공을 거뒀다. 오는 4월에는 공정무역의 생산지인 네팔 등 제3세계 국가들을 방문하는 ‘공정무역 여행’을 떠난다는 계획이다.

〈 이용욱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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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빌 게이츠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창조적 자본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필자가 이에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돈만을 최고의 가치로 아는 한국의 속물적 경제관계 인사들에게 게이츠의 지적은 큰 충격으로 다가서리라는 점이다. 둘째는 그의 패러다임이 필자가 줄곧 주장해온 견해와 흡사한 면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2006년 게이츠와 흡사한 견해를 한국사회경제학회 학회지 ‘사회경제평론’에 두 차례에 걸쳐 ‘공동체의 경제학’이란 제목으로 게재했고, 이를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바 있다.

게이츠는 이타심을 강조한 애덤 스미스의 ‘도덕정조론’에 관심을 촉구하면서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경쟁에서 탈락한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그는 신자유주의를 뒷받침해온 신고전파경제학의 실패의 근원이 그 이론의 기본적 전제 속에 잉태되어있다는 점을 지적하지는 못한 것 같다.

현재 대학 강단을 지배하는 신고전파의 자본주의 경제학은 개인을 독립적 존재로 보고, 효용의 극대화와 이윤의 극대화를 절대적 가치라고 믿는 ‘경제인’을 전제로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바로 이런 자본주의 주류경제학의 기본 패러다임을 현실에 옮겨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피도 눈물도 없는 ‘경제인’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자비심이 더 크게 작용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본질이 공동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는 이기심의 효능을 강조했지만, 그에 훨씬 앞서 출간한 ‘도덕정조론’에서는 사람의 본성이 이타적인 것이며, 이타심이 없는 이기심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이런 그의 강조는 인간이 고립해서는 살 수 없고, 반드시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게이츠는 이기심만으로는 안 되고 이타적 행위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창조적 자본주의”를 제창했지만, 경제학 교과서의 패러다임을 피도 눈물도 없는 ‘경제인’을 전제로 한 것으로부터 ‘공동체’를 출발점으로 한 그것으로 바꾸어야만 한다는 점에 생각이 미치지는 못한 것 같다.

필자가 앞의 논문에서 강조한 것은 인류가 수만년 이상 공동체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객관적 인식을 출발점으로 하여 경제학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사람은 결코 공동체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개인의 독립성이 강해졌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동체를 벗어날 수 없다. 돈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은 이기적인 습성을 키웠지만, 이타적 공동체성을 저버리면, 수전노로 낙인 찍힌다. 경제정책도 이기적 영역은 사적 영역에 맡길 수 있지만, 이타적 공동체적 영역은 사회공동체, 즉 국가의 책임이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은 이기적 사적 영역을 지나치게 키운 나마지, 이타적 공적 영역을 경시한다는 점에 있다. 종전의 경제학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론’은 중요한 문제 제기다. 이를 계기로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학 패러다임으로서 ‘공동체의 경제학’에 관한 토론이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 주종환 / 동국대 명예교수

출처 : 경향신문
날짜 : 2008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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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 코레아협의회 최현덕 소장 “함께 가는 상호문화로”
입력: 2008년 01월 28일 18:29:08
 


“ ‘다문화’라는 말에는 방향이 없습니다. 그냥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현상을 기술할 뿐이죠. 이 바탕에 ‘상호문화’라는 내용과 가치를 채워야 합니다.”

‘다문화’라는 말이 쓰인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이 땅에서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독일 베를린 소재 민간단체인 코레아협의회 한국학연구센터 소장 최현덕 박사(49·사진)다. 그는 지난 10~12일 전남대에서 열린 상호문화철학 국제학술대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다. 국내에 ‘상호문화철학’을 처음 소개한 최박사를 지난 22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디아스포라’로 규정했다. “제 인생의 절반이 외국 생활이었죠. 오랫동안 외국에 살면서 정체성 문제로 많이 고민했습니다. ‘너는 너무 독일식으로 변했어’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충격을 받기도 했어요. 그런 말에 대해 제 입장을 갖기까지 10년이 걸렸습니다.”

디아스포라는 재일조선인 2세인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덕분에 한국 사회에도 익숙해진 말이다. 최박사는 디아스포라를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보통은 면(面)에 있어야 자리가 있다고 인식하지만 선(線) 위에 있어도 자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선 위에 있으면 면 위에 있을 때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가령, 어째서 이쪽에서 억압적인 것이 저쪽에선 아무렇지도 않고, 이쪽에서 ‘합리적’이라고 하는 것이 저쪽에서는 ‘비합리적’인 것이 되는지 말이다.

이쯤에서 상호문화철학에 대해 궁금해졌다. 최박사는 이를 “철학계 내의 대안활동”이라고 했다. “인식론, 논리학, 윤리학, 미학 등과 같은 철학의 한 분야라기보다 철학의 모든 분야를 통괄하되 ‘상호문화성’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기존 철학을 비판하고 이론을 전개하는 철학”이다. 남미 철학자 호세 마르티가 1877년 “철학의 발생지가 그리스뿐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 있으며,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전 미 대륙에 존재했던 사유전통도 같은 권리로 철학에 포함돼야 한다”고 한 데서 비롯됐다. 유럽에서는 1980년대 말 서구중심적 사유에 대한 반성적 차원에서 활발해졌다. 한국에서는 최박사의 주도로 2006년 11월 전남대에 처음 국제대회가 열리며 소개됐다. 두번째인 이번 대회에는 베트남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장과 베네수엘라 문화부 차관 등이 발표자로 나와 각각 자국의 사회적 연대의 기초와 민중교육·철학교육 등에 대해 토론했다.

“철학은 타 학문과 달리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는 도구를 가졌습니다. 서구에서 철학이 대학 강의, 연구서 출판, 철학회 결성 등의 형태로 표현되고 제도화됐지만, 아프리카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현자(賢者)의 구술로 표현되기도 했죠. 문화적 맥락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철학에도 필요한 것입니다.”

다(multi)문화와 구별되는 상호(inter)문화에 대해 물었다. “ ‘여러 문화가 한 사회 속에 공존한다(다문화)’고 할 때 그것들이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문제됩니다. ‘다문화’는 여러 문화가 있는 속에서 나오는 정책들을 얘기할 뿐, 정책의 방향성에 대해선 말해주지 않죠. 하나의 주류문화가 다른 것을 흡수하는 식으로 나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여러 문화들이 서로 게토처럼 고립돼 존재할 뿐이죠.”

이는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 여성들이 한국의 주류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최근 문화관광부 내에 ‘다문화정책팀’이 신설되긴 했지만, 정부나 주류사회가 보여주는 공식적인 태도는 좋게 말해야 ‘보듬어안기’다. 서양이 낯선 존재를 만나온 방식도 마찬가지다. 개종을 강요하며 ‘동일화’한다든지, 알카에다에 대해서처럼 맹목적으로 두려워한다든지, 타히티를 그린 고갱의 경우처럼 ‘낯섦’을 자신을 보강해주는 쉼터 정도로 삼는 것이었다.

최박사는 한 쪽이 다른 쪽을 주변화하는 모든 형태의 ‘중심주의’를 배격한다는 점에서의 ‘동등성’과, 언제든 자신이 변화할 준비가 돼 있는 상태에서 임하는 ‘대화’를 상호문화의 요건으로 꼽았다. 그런데 권력관계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낯선 존재끼리 과연 ‘동등한 대화’가 가능할까. 그는 ‘낯섦의 해석학’을 언급했다. 곧 낯선 존재에 대한 이해다. 이 과정에서 해석 또는 번역이 필요한데, 낯선 존재 자신이 번역의 주체가 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낯선 자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겸허하게 인정하면서, 그 모름이 불러일으키는 호기심과 동시에 모름의 비밀스러움에 대한 경외감을 지니고 열린 태도로 임할 때 진정한 만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 교과과정에서 국민윤리 또는 도덕으로 왜곡돼 있는 시민교육 또는 철학교육이다. “디아스포라의 문제는 단지 교과과정의 내용으로 포함되는 것을 넘어, 디아스포라의 관점을 반영해 도덕 및 철학교육 자체를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게 될 겁니다. 디아스포라가 단지 소수자, 희생자인 데서 벗어나 그들의 고유한 관점으로 다수자들이 그냥 넘겨버리는 억압의 문제를 제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이 사회를 형성해가는 더욱 적극적인 주체로 나설 수 있을 때, 우리 사회는 훨씬 인간적인 얼굴을 하게 되겠죠. 이제 디아스포라의 관점이 반영된 교과과정을 고민할 때입니다.” 독일에서 조국의 민주화운동과 많은 관련을 맺었던 이 여성 철학자는 이제 선 위에 서서, 면 위에 있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예리하게 짚어낼 준비를 하고 있다.


- 최현덕 박사는? -

1980년 이화여대 철학과 졸업 후 독일 유학, 97년 브레멘대에서 ‘사회비판 개념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개념형성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80년대 후반에 한국민중판화 독일 순회전, ‘핵시대의 한국인’ 사진전, 구속 민중미술인 국제석방 캠페인 등을 벌이며 해외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했다. 박사학위 후 일시 귀국, 한일장신대 철학과 교수로 일했지만 2000년 학내 분규로 ‘쫓겨났다’. 이후 그는 역시 그리스도신학대의 학내 문제로 재임용되지 못한 김상봉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교장(현 전남대 교수)과 함께 ‘거리의 철학자’로 일했다. 2001년 이후 독일에 체류하며, 한국에 있는 김교수를 끌어들여 2006년부터 상호문화철학 국제학술대회를 한국에서 두 차례 열었다.

〈 글 손제민·사진 박재찬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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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에게 책 읽어주던 16살 소년
 
 
 
한겨레 최재봉 기자
 







 

»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알베르토 망겔 지음·강수정 옮김. 산책자·1만원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열 여섯살 소년이 단골 손님이었던 예순다섯살 노 작가를 만난다. 그는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이자 세계적인 문학 거장이었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였다. 이미 시력을 상실해 제 눈으로는 무언가를 읽을 수 없었던 보르헤스는 소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일이 끝난 뒤 자신의 집에 와서 책을 읽어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소년은 1964년부터 1968년까지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고 대화를 나누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소년의 이름은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와 〈나의 그림 읽기〉 같은 책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편집자이자 작가다.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은 망겔이 이 무렵을 돌이켜 쓴 책이다. 대작가이자 국립도서관장이라는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게 보르헤스의 서재는 평범하고 소박했다고 망겔은 회고한다. 그 이유의 하나는 보르헤스의 엄청난 기억력에 있었다. 한번 읽은 책은 스캐닝을 한 것처럼 머릿속에 고스란히 저장되었던 것이다. 보르헤스의 방에는 자신이 쓴 책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쓴 모든 글을 암송했다. 영국 여행길에는 “신을 조금 놀래주려고” 고대 영어로 주기도문을 암송할 정도로 어학적 재능도 뛰어났다. “보르헤스에게 현실의 정수는 책 속에 있었다.”(36쪽)

1948년생인 망겔은 어느덧 그 자신 소년 시절 만났던 보르헤스와 비슷한 나이에 접어들었다. “그의 아파트 계단을 오르던 소년은 과거의 어딘가에서 길을 잃었고, 이야기를 좋아했던 현명한 노인네도 사라졌다.”(98쪽) 그러나 생전의 보르헤스가 그에게 했던 말마따나 “아무것도 결코 사라지지 않”(96쪽)는다.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에는 노년의 보르헤스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최재봉 기자




"나는 눈 먼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 줬다"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강수정 옮김|산책자|163쪽|1만원
박해현 기자 hhpark@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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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기와 칼은 손의 확장이다. 소우주(小宇宙)는 눈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그 이상이다. 책은 기억의 확장인 것이다.'

20세기 환상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꼽히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걸어 다니는 도서관으로 불렸을 정도로 방대한 양의 책들을 머리 속에 저장했다. 보르헤스는 시인·소설가로 활동하면서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을 지냈고, 말년에 시력을 상실한 뒤에도 독서를 멈추지 않았다. 찾아온 손님마다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던 그는 책 읽어주는 아르바이트생도 고용했다. 이 책의 저자 알베르토 망구엘은 서점 직원으로 일하던 열여섯 살 때부터 4년 동안 매일 저녁 보르헤스의 서재에서 책을 읽어주고, 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면서 성장기를 보냈다. 보르헤스로부터 영혼의 세례를 받은 망구엘 역시 방대한 독서량을 바탕으로 국내에도 번역된 '독서의 역사' 등의 책을 펴내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있다.

망구엘은 이 책을 통해 보르헤스의 서재는 예상과는 달리 책이 그리 많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백과사전과 각종 사전,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등이 서재 귀퉁이에 얌전하게 꽂혀 있었다고 한다. 기억의 천재였던 보르헤스는 굳이 집을 도서관으로 꾸밀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보르헤스에게 책읽기는 '수천 년 전에 시작해서 한 번도 끝난 적이 없는 인류의 대화'를 뜻했다고 망구엘은 적었다. 한 권의 책은 그 책을 읽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확장될 수 있다는 '텍스트의 무한성' 개념을 바탕으로 보르헤스는 우주를 도서관에 비유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는 책을 반드시 끝까지 읽을 의무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조이스의 소설 '피네간의 경야'를 완독하지 않았으면서도 그 책을 주제로 언어학 강연을 하기도 했다. 줄거리를 알고, 백과사전의 도움을 받은 덕분이었다.

보르헤스는 추리소설을 사랑했다. '추리소설의 공식이 소설가로 하여금 그 나름의 경계를 설정하고 말과 그 말로 만들어낸 이미지의 효율성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이상적인 서술구조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는 실명하기 전에 서부영화나 갱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대중영화를 좋아했다.

"보르헤스는 예민한 몽상가였고, 꿈 얘기를 즐겨했다… 특히 잠들기 전의 짧은 시간, 의식이 사라지는 것을 의식할 수 있는 잠과 깸 사이의 시간을 좋아했다"고 망구엘은 회상했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꿈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어. 그런데 성공한 적이 없는 것 같아"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입력 : 2008.01.04 22:38

 

 

 

 

보르헤스에게 책 읽어주던 소년 老 작가의 '도서관 낙원' 엿보다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ㆍ강수정 옮김 / 산책자 발행ㆍ163쪽ㆍ1만원







 


1964년 어느날 초저녁,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구미문학 전문서점 ‘피그말리온’에 단골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가 찾아왔다.
당시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소설가이자, 국립도서관장이었던 보르헤스는 16세의 서점 직원인 알베르토 망구엘(1948~)에게 “저녁에 집에 와서 책을 읽어주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유전적으로 약한 시력을 타고난 보르헤스는 30세 무렵부터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다가 50년대 후반엔 실명한 상태였다. 지금은 캐나다에서 손꼽히는 소설가로 활약 중인 망구엘은 문호의 청을 받아들여 일주일에 서너 번씩 4년간 보르헤스가 노모와 함께 사는 작은 아파트를 드나들었다.
이 책은 망구엘이 책을 읽어주러, 구술 작품을 받아쓰러 다니며 보고 들은 보르헤스에 관한 기록이다. 100쪽 가량의 본문 분량(남은 60여 쪽엔 보스헤스의 생애ㆍ작품 해설, 연대기, 어록이 실렸다)이 말해주듯 세세하고 정치한 기록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가 스페인어 원서를 출간한 것이 2004년, 그 시절을 40년쯤 흘려보내고 난 뒤다. 망구엘도 “이건 기억이 아니다. 이건 기억의 기억의 기억”이며 “기억들을 일으킨 사건들은 몇 개의 잔상, 몇 개의 낱말만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고백한다.
크게 실망할 일은 아니다.
책 1권을 독자 100명이 읽으면 100권의 책이 탄생한다는 것이 당시로선 선구적인 보르헤스의 지론이었다. 망구엘은 작가를 두 부류, “세계를 한 권의 책에 담아내려는 작가”와 “그보다 드물기는 하지만 세계가 한 권의 책이어서 본인과 다른 이들을 위해 그 책을 읽으려는 작가”로 나누고 보르헤스는 단연 후자라고 썼다.
보르헤스는 존재와 세계를 해석의 여지가 무한히 열린 텍스트로 본 것이고, 그 점에서 이 책은 매우 보르헤스적인 보르헤스에 관한 글쓰기다.
저자는 보르헤스의 독서를 공들여 서술한다. 그는 처음 보르헤스의 서재를 봤을 때 “낙원을 도서관의 형태로 상상한다는 사람의 서재치고는” 규모가 작아 실망했다고 말한다.
낡은 책꽂이는 키플링, 스티븐슨, 체스터턴, 조이스, 오스카 와일드, 마크 트웨인 등 영미 작가 작품과 쇼펜하우어, 슈펭글러, 기번, 리하르트 마이어 등의 철학ㆍ역사서로 소박했다. 하지만 곧 노작가에게 장서의 양은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곧 깨닫는다. 스스로 ‘쓰레기 하치장’이라 부른 놀라운 기억력 덕분에 보르헤스는 언제든 필요한 구절을 읊어 인용할 수 있었다.
나아가 그는 현실의 정수가 책에 있다고 믿는 텍스트주의자였다. 그는 책을 읽고 쓰고, 책에 대해 이야기하며 “수천 년 전에 시작돼서 한 번도 끝난 적이 없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인식했다.”
그에게 역사는 바로 책이었던 셈이다. 망구엘은 책등을 쓰다듬으며 그 제목과 저자를 정확히 알아내는 보르헤스를 묘사하며 “그와 책 사이에는 생리학의 법칙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어떤 관계가 존재한다”고 찬탄한다.
망구엘은 공정한 저자다. 문자를 편애한 탓에 보르헤스가 음악, 그림 등 다른 장르엔 별다른 조예가 없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균형 잡힌 서술 덕에 이 책은 거장의 인간적 약점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보르헤스는 자신에게 헌정하는 작품을 낭독하는 작가를 면전에서 모욕하는 심술을 부리거나, 이따금 인종차별적 발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반면 그는 좋아하는 사랑 노래를 듣고 싶어 여러 번이나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보러가자고 어린 조력꾼을 조르거나, 서부극이나 갱 영화를 보며 몰락한 영웅을 눈물로 애도하는 천진한 노인이기도 했다.
“꿈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어. 시도는 해봤지. 그런데 성공한 적이 없는 것 같아”란 몽상가적 발언을 전하며 저자는 지난 세기를 풍미한 보르헤스의 환상문학의 연원을 보여준다.
라틴문학의 또다른 거장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비오이 카사레스-실비나 오캄포 부부와의 유쾌한 잡담은 보르헤스가 어떤 일상에서 창작의 동력을 얻었는지를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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