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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소
권지예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절망과 고통을 절망적이지 않게, 고통스럽지 않게 그리는 작가가 있다. 그러면서 절망과 고통을 가슴에 각인시키는 치밀함을 가진 작가들이 있다. 반대로 절망과 고통을 토해내기만 하는 작가도 있다. 그 구토의 증거를 보며 사람들을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그 증거를 다가가서 보게 만드는 것이 아닌 외면하게 만드는. 권지예는 후자에 속하는 작가다.
<스토커>을 읽을 때까지 나는 좋았다. 아, 이 작품 추리소설로도 손색없다. 뜻밖에 좋은 작가 만났구나 싶었다. <행복한 재앙>을 읽고 나서도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 거지. 삶의 고단함이야 어차피 비루하고 남루한 것인데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폭소>를 읽으면서 이미 내 마음은 식어가기 시작했고 <내 가슴에 찍힌 새의 발자국>을 읽고 나서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런 이분법적인 생각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마치 눈물을 억지로 짜내려고 만든 삼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자폐아가 등장하고 소아마비가 등장하고 그래서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것 같은 느낌... 작가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 나는 지금 무척 불쾌하다. 삶이 힘든 건 사실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더 힘들다. 그들에게 당신은 마치 먹다가 이 정도만 줘도 만족하겠지 하는 투로 자신이 베어 먹다 남은 사과 한 알을 던져주는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풋고추>와 같은 작품은 이제 그만 나왔으면 좋겠다. 이미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다 나온 소재다. 조세희보다 더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거 아니라면 참신한 자신만의 소재를 고르기 바란다. 마지막은 참 보기에 민망했다.
<행복한 재앙>이 그나마 좋았는데 그 괜찮음이 <스토커>의 마지막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한때 티비에서 이런 카피가 유행을 했다. ‘니들이 게 맛을 알아?’ 이 말을 작가에게 해주고 싶다. ‘당신이 바닥의 남루한 삶의 재앙을 알아?’
그리고 <내 가슴에 찍힌 새의 발자국>은 구도가 영화 <고양이와 개에 관한 진실>에서의 여주인공의 구도와 같다. 우연일까? 물론 전개 과정은 다르고 다만 소재가 비슷할 뿐이지만 읽는 순간 이런 얘기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사실이라 더 예민하게 받아들인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장애인에게 뾰족한 창을 들이댈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시종일관 여자는 머리가 빈 듯, 불륜만 저지르는 듯 그리고 있다. 사과가 썩어간다. 썩은 사과에서 과연 무엇을 건질 것인지. 한 그루의 사과나무가 될 지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냄새만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