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때 본 만화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한 남자가 시한부선고를 받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나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사는 것과 어느날 갑자기 죽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나은가를 이야기하는 내용인데 남자는 자신의 처지와는 다른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모르고 살다 죽고 싶다고 하고 여자는 그래도 자신의 남은 날을 정리할 시간이 주어진다는 건 갑자기 죽는것보다 낫다고 한다. 그 대화를 하고 돌아가다가 여자는 교통사고로 죽는다. 처음 이 작품의 시작을 접했을 때 나는 이 만화 생각이 났다. 그 여자도 이 작품의 여자처럼 많이 억울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인생이 끝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사람들은 편하게 위안삼으려고 팔자니 신의 뜻이니 말하지만 피해를 당한 사람의 마음은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가해자들이 더 뻔뻔스럽게 나온다면 죽은 이는 얼마나 더 억울할까 싶다. 교통사고를 일으킨 신스케는 자신이 일으킨 교통사고로 사망한 여자의 남편에게 폭행을 당한 뒤 기억 상실증에 걸린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경찰에게서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기억을 찾기 위해 사람들에게 묻고 다니는데 그의 주위 사람들은 그저 그 사건을 들추지 말라고 한다. 잊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신스케는 자신말고도 가해자가 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 가해자는 전혀 복수를 당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이상했다. 그리고 그의 바에 찾아오는 루리코라는 여자에게 빠져드는데 그 여자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여자라는 느낌에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가 있던 바의 사장은 그에게 교통사고는 흔하다고 말한다. 아침에 텔레비전을 틀면 사건, 사고 뉴스에 빠지지 않는 것이 교통사고일만큰 흔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교통사고 가해자가 십만엔짜리 절도범죄자와 비슷한 형을 선고 받는다는 것 또한 의아한 일이다. 사람 목숨이 십만엔짜리 물건과 같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작가는 이런 교통사고로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와 그 가정이 어떻게 되었는지보다 가해자들이 얼마나 양심없이 살아가고 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교통사고 가해자가 일부러 사고를 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삶이 단절된 사람,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하는 피해자의 입장을 생각해본다면 나 좋자고 아무 거리낌없이 발 뻣고 자는 일은 있어서는 안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가해자들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작가도 이런 작품을 쓰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피해자의 죽어가는 눈이 너무 불쌍해서 말이다. 가해자에게는 그 죽어가는 눈이 공포가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건 그 사람을 통로로 한 하나의 세상, 하나의 우주의 소멸을 의미한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세상을 사는 개개인에게는 단 하나의 각각의 세상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타인에 의해 너무도 간단하게 끝이 난다면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세상이 산 사람을 위주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피해자로 죽은 사람과 그 사람을 잃은 가족의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으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영원히 죽을때까지 가해자로 사는 건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삶을 빼앗기고 미래를 빼앗기고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긴 사람의 고통에 비할 것은 없다. 제발 고통스러워 하는 가해자,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가해자들이 많은 세상이 내가 사는 세상이기를 이 책을 보면서 바란다. 책을 덮은 뒤 역시 이 작가는 대단하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간단명료하게 잘 전달이 된다. 사회의 문제를 핵심을 꼬집는데는 이만한 작가도 드물다. 탄탄한 구성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왜 히가시노 게이고 붐이 일어나는 지 잘 알게 해주는 작품이다. 간만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읽었는데 그가 바라보는 사회에 대한 시각이 가끔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곤한다. 뭐,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느끼겠지만. 제발 그 눈을 보며 양심을 갖을 수 있기를 바라고 싶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고의 걸작을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