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가 떨어지는 속도
류성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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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자마자 제목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참 멋있는 제목이라는 게 처음 든 생각이었다. '장미가 떨어지는 속도'라... 도대체 장미가 떨어지는 속도는 어느 정도이고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한참을 생각했다. 난 한번도 장미가 떨어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니 어쩌면 봤을지 모른다. 단지 기억에 없을 뿐이다. 벚꽃이 떨어지는 것은 많이 봤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봤으니까. 목련꽃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던 때도 있었다. 목련꽃잎으로 차를 만들어 마시고 싶어서.  

장미가 떨어지는 속도란 어쩌면 나도 모르게 사랑이 가슴에 툭 떨어지는 속도와 같지 않을까 하고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혹은 죽음을 맞이하는 속도, 후회를 하게 되는 속도, 미련을 남기는 속도, 살면서 발걸음 내딪을 때마다 무언가에 부딪히는 속도, 그 낯설음의 속도, 마음에서 무언가 깨지고 무너지고 사라지는 속도를 말하는 것은 아닌가 혼자 이런 저런 속도 생각을 하느라 멍해 있었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속도일지도 모르고, 언제 지나갔는 지 모르게 돌아보면 까마득해져버린 시간의 속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마다 장미가 떨어지는 속도는 아마도 다르게 느껴질 것이리라.   

작가의 단편 모음집 <나는 사랑을 죽였다>에 <봉선화 요원 & 384요원>이라는 단편이 실려 있다. 이 작품의 토대가 된 작품이다. 사실 이 작품이 장편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좀 더 다른 작품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사랑과 미스터리, 작가의 작품에 가장 기본이 되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다룰 작품으로는 또 이만한 소재도 없다 싶다.   

384요원과 봉선화요원이라는 남한에서 각기 어릴 적부터 길러낸 테러리스트 강승혁과 송다혜는 서로 다른 조국을 위해 일하는 동류의 인물들이다. 강승혁은 북을 위해, 송다혜는 남을 위해. 그런 이들이 서로 운명적으로 만난다. 국정원에서 알아낸 강승혁이 간첩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송다혜가 접근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송다혜를 사랑하는 어린 시절 또 다른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강승혁의 친구이자 국정원 직원인 한동희가 삼각관계로 얽히게 된다.  

강승혁과 송다혜를 내세워 분단 국가가 처한 현실과 인간 자체에 대한 인식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작품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눈을 뗄 수 없는 속도감과 과연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하는 상상만으로도 가슴 뭉클하게 만들고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스릴과 미스터리를 배치하고 있다. 또한 적절한 삼각관계와 달라지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세밀하게 담아내며 로맨스도 보여준다.
 
다시 속도로 돌아가보면 송다혜에게 장미가 떨어지는 속도는 눈물이 떨어지는 속도와 같다. 강승혁에게 장미가 떨어지는 속도는 사랑을 느끼는 속도와 같고 한동희에게 장미가 떨어지는 속도는 자신이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속도와 같다. 그들은 이미 그들이 세상에 단 둘뿐인 고독한 존재임을 알았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장미가 떨어지는 속도는 아름다우면서 무서운 속도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정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학습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라는 말인가 하는 생각을 새삼 다시 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이 아무리 냉혹해 보여도 꽃은 늘 피고, 지면 다시 피고 하기를 반복하듯이 꽃이 피는 한 인간에게 마지막 희망도 있는 거라고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역시 미스터리 로망, 사랑에 대한 미스터리를 쓰는 작가다운 작품이다.  

책 속에 봉쇄 수도원에 대해 정지용의 시 <구성동>에서 따온 한 구절이 마음에 남았다. 꽃도 귀양 사는 곳이라는 말이 너무도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그 곳은 아마도 이 시에 묘사된 이런 곳이 아닌가 싶었다. 쓸쓸하고 적막하고 고독이 켜켜이 쌓여 볼래야 볼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린 곳. 그런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다혜는 정말 꽃다운 어린 시절을 귀양 살고 꿈을 골짝에 묻어버린 것이었다. 

골짝에는 흔히
유성(流星)이 묻힌다.

황혼(黃昏)에
누리가 소란히 쌓이기도 하고,

꽃도
귀양 사는 곳,

절터ㅅ드랬는데
바람도 모이지 않고

산 그림자 설핏하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며 언제 책을 읽고 흘렸는 지 모를 눈물 한방울이 또르르 흘러 내렸다. 마흔 넘은 나이에 참 주책이다. 하지만 사랑이 시리고 아픈 것을 어쩌겠는가. 눈물이 흐르면 흘리는 거지 그것을 막을 이유 또한 없는 것이고. 삶은 선택의 연속같아 보여도 닫힌 문을 계속 열고 있는 문 열기의 연속일 뿐이다. 삶은 도돌이표같은 것이고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미스터리한 것은 그것을 알면서도 매번 잊어버린다는 거다. 붉은 장미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진다. 마찬가지로 청춘도 하나, 둘 떨어진다. 떨어지는 장미의 속도와 같이 지는 청춘을 위하여 건배를 외친다. 모든 청춘은 사랑하였기에 장미처럼 떨어져도 아름다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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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9-01-22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멋져요.

물만두 2009-01-22 12:53   좋아요 0 | URL
읽으시와요~

진주 2009-01-24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한 번 로멘틱하여라~~ㅎㅎ
이 책은 무슨 장르예요? 그..그러니까 이 책은 죽이고 살리는 제가 무서워하는 그런 장르는 아닌가봐요? ㅎㅎ 만두님 설 잘 쇠세요~^^ 만두 많이 드시고 건강하세요!

물만두 2009-01-24 16:54   좋아요 0 | URL
로맨스 소설인데 저야 늘 추리소설로 읽죠^^
사랑도 죽이고 살리는데요?ㅋㅋㅋ
언니도 설 잘 지내세요.

paviana 2009-01-24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만두님 설 잘 지내세요.맛난거는 조금씩 조금씩 자주 먹는 센스를 발휘해보세요.

물만두 2009-01-24 16:55   좋아요 0 | URL
파비아나님도 기축년 새해 잘 보내세용~
맛난거 조금씩 자주 먹는데 살은 안찌네요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