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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의 죽음
C. J. 샌섬 지음, 나중길 옮김 / 영림카디널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헨리 8세가 앤 블린과 이혼하기 위해 교황에게 등을 돌리고 종교개혁을 단행해서 자신이 교회의 수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사실이고 이런 역사를 다룬 작품은 많다. 하지만 헨리 8세의 측근으로 토머스 크롬웰이 있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당시 수도원을 몰수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어지럽고 모두가 힘들었던 격변하는 그런 시대를 배경으로 이 작품은 그런 크롬웰이 국왕의 뜻에 따라 수도원을 몰수하고 수사들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스칸시 수도원에서 크롬웰이 파견한 특사가 살해당하는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꼽추 변호사 매튜 샤들레이크가 다시 특사로 파견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당시 상황과 함께 잘 묘사하고 있다.
매튜 샤들레이크는 농부의 아틀로 태어나 꼽추인 자신의 외모를 사십 평생 콤플렉스로 여기고 살았다. 하지만 유능한 변호사로 권력의 핵심인 크롬웰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인물이다. 그런 배경에는 어린 시절 수도원에 있는 학교에 다니다가 수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수사에게 의논하려했다가 자신의 외모때문에 비난을 받고 상처를 입은 것도 한몫을 했다. 그는 자신의 외모로 인해 수도원의 성물도 믿지 않고 수도사들 자체를 부패한 이들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폐쇄적인 수도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일은 쉽지 않다. 누구든 범인처럼 보이고 누구든 범인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궁에서 사건을 일으켜 환수재산처리법원에서 쫓겨난 매튜는 또 다시 수도원에서 간호 수사일을 돕는 앨리스에게 연애감정을 품는다. 매튜도 앨리스에게 연정을 품었기에 질투를 느낀다. 여기에 매튜 일행이 도착하자마자 수련 수사가 벌을 서다가 쓰러져 사망하는데 아랍인의 외모를 지닌 간호 수사인 가이 수사는 그가 독살당했다고 한다. 수련 수사는 죽기 전에 매튜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자 했고 그걸 막기 위해 누군가 다시 살인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살인자는 그들 안에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보게 되는 것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비슷한 설정이다. 매튜와 그의 시종 마크, 배경인 수도원, 거기다 그 작품을 연상하게 만드는 소재까지 등장시키고 있다. 작가는 이처럼 <장미의 이름>과 비슷한 면을 보여주면서 이 작품의 토대가 된 작품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마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경의를 표하며 시작하는 것 같은 점에서 <장미의 이름>과 비교의 대상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좋은 선배 작가의 소재를 가지고 자기가 쓰고 싶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 작은 도전을 하고자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렇게 작가는 비슷한 소재를 사용해서 전혀 다른 자기만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 대담함이 이 작품이 좀 더 높이 평가받아야 하는 점이다. <장미의 이름>과 대놓고 비교되기를 바라는 점이 말이다.
여기에 자신의 신체적 콤플렉스를 인간적으로 드러내는 매튜 샤들레이크의 성격과 수도원과 수도사 한명 한명의 특징을 그 시대에 맞게 잘 배치한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수도사인지 귀족인지 알 수 없게 된 사냥을 즐기는 원장 수사,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는 부원장 수사, 남색을 즐겼지만 교회 보수와 음악에 조에가 깊은 가브리엘 수사, 잔돈 하나에도 벌벌 떨며 가브리엘 수사마찰을 빚는 회계담당 에드위그 수사, 의과대학을 나왔지만 외모가 아랍인인 간호 담당 가이 수사, 그리고 그밖에 그 시대 수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수사들의 묘사가 사실감을 더해줬다. 또한 거리감있는 마을에 대해서도 그 시대를 잘 느끼게 해주었고 더불어 영국과 스페인, 프랑스의 관계까지 알기 쉽게 표현하고 있다.
수사들은 배불리 먹고 있고 마을의 치안 판사 코핀저는 수도원이 몰수될때 그 땅을 자신이 차지하기 위해 크롬웰에게 잘 보이고자 애를 쓴다. 그리고 쫓겨난 수사들은 적은 연금으로 연명을 하게 되고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은 수도원이 있을때나 없을때나 상관없이 전혀 나아지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 오히려 수도원에서 일하던 이들만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점차 크롬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던 매튜는 이런 사실에 눈을 뜨게 된다. 그러면서 크롬웰이 어떤 인물인가를 새삼 알게 된다. 자신이 그의 신임을 잃는 것을 왜 그토록 두려워했는지도. 자신의 편견이 사건을 빨리 해결하지 못하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권력자가 더 나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편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부는 가진 자의 손에서 또 다른 가진 자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일뿐 분배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작품은 1537년이라는 500년도 더 지난 영국의 종교개혁이라는 혼란기를 무대로 살인 사건과 미스터리를 선보이고 있지만 결국 작가가 매튜를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은 역사를 통해 인간이 얻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하루하루를 근근히 살아가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역사는 언제나 사회가 변하고 권력자가 변하고 세상이 변하더라도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고 그들을 생각하는 권력자는 없기 때문이다. 눈보라 속을 뚫고 말을 타고 달리는 꼽추 변호사 매튜를 내세운 것은 그 당시 상황과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억압받고 짖눌린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어울림을 느낀다. 매튜의 굽은 등, 다시는 펴질 수 없는 등은 인간의 역사가 만들어낸 불변하는 것들은 아닐런지... 마지막에 그들이 말하는 '이 세상은 어디를 가든 안전한 곳이 없다.'는 것을, 나아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저럼 말이다.
정말 뒤로 갈수록 한 시대를 권력자의 눈에서 평민의 눈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 사건이나 미스터리보다 오히려 이런 역사적인 부분이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 꼭 한번 읽어봐야 하는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튜 샤들레이크의 행보가 주목된다. 그가 앞으로 어떤 사건을 맡아 어떻게 처리하고 또 어떤 관점에서 그 시대를 보여줄지 C. J. 샌섬의 앨리스 피터스상을 수상한 작품을 비롯해서 이 시리즈는 정말 모두 출판되었으면 좋겠다. 정말 보고 싶은 시리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