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교도섬 - 악마를 잡기위해 지옥의 섬으로 들어가다
나혁진 지음 / 북폴리오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취향이 만들어낸 놀라운 에너지

-순도 100%의 엔터테인먼트, 나혁진의 교도섬.

 

취향의, 취향을 위한, 취향에 의한. 작가 나혁진의 두 번째 작품 교도섬은 취향이라는 말을 빼놓고는 진지하게 말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취향이 만들어낸 놀라운 에너지를 선보이는 이 작품은 분명 한국 장르 소설의 새로운 성취를 이루었다앞선 주장에 당신이 어느 정도 동의할지는 모르지만, 분명 이 작품이 당신이 지금까지 접해 보지 못했던 이야기를 선보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얼마 멀지 않은 근 미래. 한국 정부는 악질적인 범죄자들을 모아 카베사라는 필리핀의 외딴 섬으로 영구 추방해 버린다. 전직 경찰 간부인 장은준은 복수를 위해 범죄를 위증하여 스스로 이 교도섬에 들어간다. 은준의 예상과 달리 <교도섬>은 일종의 자족사회를 형성하여 움직이고 있고, 은준의 복수 상대는 교도섬 지배 세력의 일부가 되어 복수를 어렵게 만든다. 은준은 전직 전문 암살자였던 추응과 도박사 이강생과 합심하여 복수에 나선다.

 

취향()의 결합이라는 흥미로운 착점에서 출발하지만, 작가는 착점의 지속력을 위해서는 굳건한 세계관이 뒷받침 돼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는 듯 하다. 나작가가 이 이야기를 떠받드는 교도섬이라는 무대를 탐구해 가는 방식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데, 그는 우선 이 교도섬의 지리적, 물리적 환경을 디테일하게 제시하고, 그 다음에는 섬의 역사와 문화를 하나씩 덧붙이며 이 존재하지도 않은 공간에 매우 그럴싸한 옷을 입히고 있다. 암중모색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이 섬의 탐색 과정에 이 교도섬에 들어온 인간들의 욕망과 인간성, 비인간성이 뒤섞이자 교도섬은 말 그대로 살아움직이기 시작한다. 철저히 고립된 섬이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가장 활발한 지점이며, 때론 주인공들에게 무자비하게 가혹하면서도 때로는 무한한 자비를 선사하는 땅.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교도섬, 그 자체이다.

 

이런 교도섬이라는 무대를 배경으로, 온갖 취향들을 마음껏 풀어놓는 작가는 말 그대로 물 만난 물고기다. 감옥 풍운을 위시한 교도소 장르물, 무협 소설, 복수극, 갱스터 물, 본격 추리 소설, 격투기, 홍콩 무술 영화, 사냥 소설 등 모든 남성미 넘치는 취향들이 분명한 자기 자리를 잡아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런 다양한 취향들의 결합에서 이 소설의 큰 줄기를 이루는 것은 결국 갱스터 장르와 무협 소설의 정신인데, 이 두 가지 장르의 태생적인 대척점에는 묘한면이 있다. 현재까지 갱스터 장르의 전통은, 결국 갱스터들의 우정과 의리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허망한가라는 주제로 귀결되고 있다. 배신과 모반이 횡횡하는 갱스터 장르에서 신뢰라는 것은 부도수표로 바뀐지 오래며, 그 고질적인 가족적 이기주의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반면에 무협 소설이라는 것은 어떤가. 여기서는 결국 생면부지의 선한 사람들이 끝까지 의리와 도의를 지켜 승리를 쟁취한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싸그리 대중적인 장르 문화라고 일괄도매로 취급당하지만, 엄연히 이 두 장르는 다르다.

 

나작가는 이 두 가지 장르에서 한 쪽에서는 미장센만 빌려오며(갱스터물의 구조), 한 쪽에서는 소설의 주제인 의리’(무협물의 주제)를 되살리는 전략을 취한다. 여기서 형님과 가족이라 부르고 불리운 대상들은 모두 몰락하며, 반대로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한 은준, 추응, 강생만이 결국에는 살아남는 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매력적인 모순이다.

 

갱스터물의 뼈대, 무협 소설의 정신이라면, 본격 추리소설은 이 작품의 동력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큰 트릭과 자잘한 추리소설의 장치들이 있다. 첫 번째 트릭은 작품의 배경과 무대의 고유성을 살렸다는 점에서 빼어나다. 반면에 두 번째 중심 트릭은 이 작품 갈무리로는 분명 미흡한 면이 있다. 오히려 추임새같이 작품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자잘한 본격 추리소설적인 장치이다. 미세한 관찰이 이루어낸 등장인물의 정체, 도박장의 집단 사기, 배신을 간파하는 추응의 관찰력들은 소소하지만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두 번째 트릭이 미흡한 점, 추응이 지나치게 전지전능하게 그려진다는 점, 그리고 표면적인 위악성에 비해 등장인물들의 정체가 알고 보면 의인이었다는 식의 구성 등 이 소설에 내려지는 합당한 비판은 여기저기 있다. 하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비판이 하나있었다. 그건 이 작품에 지나치게 많은 장르가 섞여있어 혼란스럽기 때문에, 그냥 한 가지 장르로 밀어붙였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퓨전이라는 말이 구태의연한 표현이 된 지금, 여러 장르의 요소만 모아 얼기설기 붙이는 광경은 낯설지가 않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여러 요소들을 모아놓았던 작품이 장르에 대한 통찰과 이해 없이 막무가내로 이어붙이기를 반복하는 조작을 횡행한 반면, 교도섬에 나작가는 자신의 취향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실한 접근법을 선보이고 있다. 모든 장르의 형식이 완결성을 내보이는 이 작품은 조작이 아니라 통제.

 

오히려 이 소설을 만나는 충격은 옛날 세르지오 레오네가 스파게티 웨스턴을 처음 선보였을 때, 그리고 쿠엔틴 타란티노가 정체 불명의 갱스터 물을 들고 나왔을 때 느꼈던 신선함과 가까워 보인다.

 

모든 장르적 취향이 결합하여, 거침없는 박력을 끝까지 밀어 붙이는 이 작품은, 말 그대로 순도 100%의 엔터테인먼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라더
나혁진 지음 / 북퀘스트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한국형 갱스터 엔터테인먼트의 걸음.

-나혁진의 브라더-

 

 

  작가 나혁진씨는 재미있는 사람이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실제로 그가 만나면 무척이나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추리소설, 무협소설, 갱스터 물, 홍콩 영화, 야구, 격투기, 걸그룹 등 다방면에 대한 지식을 그처럼 구수하게 풀어내는 입담꾼을 난 아직 만나지 못했다(그리고 아마 만나지 못할 것 같다). 또 하나는 그가 살아온 인생사가 소설 못지않게 드라마틱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태어나서 인천 외에는 한 번도 다른 곳에 적을 둔 적이 없는 인천 토박이인 그는 대학 졸업 후 대학교 때 다시금 빠져들었던 추리소설을 직접 만들고파 돈 몇 푼 주지 않던 출판사에 입사해 장르 전문 편집자로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설을 쓰겠다는 결심 후 퇴사. 이후 몇 작품을 여러 공모전에 출품 후 낙선을 거듭하다 천신만고 끝에 이 작품 “브라더”를 펴내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브라더”를 처음 쓴 게 2009년도였다고 하니, 실로 4년 만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름을 올리기에도 민망한 작품들이 심심찮게 쏟아지는 요즘, 어째 이 정도의 필력을 지닌 작품이 이렇게 빛을 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는 의문이다.) 작가로서 등단한다는 꿈 하나만으로 불안정한 생계를 몇 년이나 감수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한 반쯤의 믿음과 그 나머지 반을 채울 수 있는 부단한 노력으로 결국 작가라는 위치를 얻어냈다. 그리고 한국 추리 문학 문단계에 미스터리 독자에서 미스터리 전문 편집자로, 미스터리 전문 편집자에서 미스터리 소설가로의 변신이라는 꽤 의의 있는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사실 아는 지인의 책을 읽고 감상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이좋고 매부좋고’라는 정 문화가 팽배한 이 사회에서 괜히 지인의 책에 호들갑을 떨었다가는 주례사 비평으로 오해받기 쉽고(내가 쓴 글이 무슨 비평정도로까지 취급받겠는냐만), 객관적인 입장에서 따뜻한 위로보다는 혹독한 채찍질을 가했을 경우 어떻게 아는 사람이 그럴 수 있냐고 원망스런 눈총을 받기가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만약에 책을 다 읽고 장점보다는 단점이 눈에 들어오면 글을 쓰지 않겠다고.

그런 까닭에 지금 이렇게 “브라더”에 대한 글을 올릴 수 있는 상황이 매우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8998760150_1.jpg
 

 

  국내 유일의 대기업형 조직 범죄 집단인 대흥그룹(이는 영화 “신세계”를 연상케 하지만, 이 작품은 신세계보다 훨씬 먼저 쓰였고, 작가의 말로는 마리오 푸조의 "대부"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을 배경으로 자기 자신의 꼬리를 무는 뱀을 연상시키는 네 남녀의 인생이 펼쳐진다. 조직 내 라이벌의 함정에 빠져 동생을 잃고 조직에서 버림받은 성민, 성민과 성민의 라이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성민을 배신하고 끔찍한 댓가를 치르게 된 여진, 여진이 성민에 대한 복수를 위해 끌어들인 부산출신 고아 미옥, 그리고 미옥에게 빠져 조직까지 배신할 각오를 하게 된 성민의 옛 동료 완기의 이야기가 연작 중편의 형태로 전개되다 다시 이야기를 마무리 하는 것은 성민이다.

 

 

  출판사는 이 작품을 한 남자의 집요한 복수극과 거친 쌈마이들의 세계를 그린 형님 소설로 포장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마 출판사의 입김에서 새어나왔을 듯한 “브라더”라는 제목만큼 독자들의 오독을 이끄는 함정도 없을 것이다(이건 작가에게 물어보지 못했는데, 내가 아는 혁진씨는 절대 이런 제목을 붙일 만큼 감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이는 분명히 성민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여진의 이야기이도 하고, 완기의 이야기이도 하고, 미옥의 이야기이도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이 네 인물의 인생사와 이들의 욕망과 그 욕망을 성취하려는 이들 각각의 계략을 모두 다 포함하지 않고서야 온전히 말할 수가 없다.

 

 

  인생의 파고에 휩쓸리고 각자의 욕망을 쫓아 나아가기보다는 흘러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상당히 매끈한 리듬과 모난 곳 없는 전개와 맞물려 매우 탁월한 가독성을 창출하고 있다. 실제로 이 작품이 북퀘스트에서 나오기 전에도 몇몇의 출판사에서 이 작품의 가독성만큼은 인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 작품이 ‘조폭 소설’이란 이유로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약간 허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조폭 영화나 이원호 소설로 대변되는 조폭 물에는 한 가지 뚜렷한 패턴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공부도 못하고 집안도 가난하지만 의리와 주먹하나만큼은 제대로 있는 남자가 조직을 접수해 나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혁진의 ‘브라더’는 이와는 전혀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데, 조폭 물의 배경을 빌려오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위험에 처하고 이를 주먹보다는 머리로 해결하려는 인물의 지략싸움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범죄 소설에 당당히 이름을 차지하는 한 장르로써, “대부” 이전에 도널드 웨스트레이크가 데뷔작 “고용인들(Mercenaries)”에서 본격적으로 태동을 알렸고, 엘모어 레너드가 이 장르의 절대자이며, 일본에서는 "불야성" 같은 작품이 이름을 떨쳤다. 개인적으로는 갱스터 엔터테인먼트라고 이름붙인 이 장르가, “브라더”로 우리나라에서는 이제야 잰 걸음을 하기 시작한 것이고, 아마 제대로 인정받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한국형 갱스터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작품의 재미를 제쳐두고 이 작품을 좋아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작가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과 그에 따른 체취가 작품 속에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1부에서 성민이 여진의 배신을 눈치채는 것은 다분히 명탐정 추리물의 공식을 따르고 있고, 2부에서 여진이 미옥을 길러내어 자신의 뒤를 따르는 텐프로 아가씨로 잠입시키는 과정은 다분히 무협소설에서 보는 사제 관계 유형을 타 장르에 이식시킨 것처럼 보인다. 완기의 장에서 읽은 이들이 가장 감탄했다고 한 인간 투견(순전히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한다)은 바닥을 넘어서 끝을 보고 만 UFC 격투기가 아닐까 한다. 이렇듯 작가가 흥에 젖어 개인적으로 반영한 취향이 자칫 일방적인 패턴으로 흘러갈 수 있는 작품의 구도에 큰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이 작품에 나타난 현실 묘사 때문이다. 우리나라 소설에 나타난 끈적끈적하고 눅눅한 현실 묘사 대신에, 삶의 일상적이고 애잔한 단면을 밀착해서 그린 부박한 인생살이의 모습들이 담담하고 정갈하게 그려진다. 호들갑스럽지만 속은 텅 빈 육순 잔치를 그린 부분이나, 돈 몇 푼 벌려고 대리 번역을 사주했다가 이것이 드러나 치욕을 면치 못하는 장면 등 이를 잘 드러내는 장면은 많지만, 특히 이는 미옥의 장에서 특출나다. 나는 미옥이 고생하며 첫 월급을 타 구한 월세방과 부산 남포동 거리를 잊지 못한다. 또 성민이 미옥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콘돔을 씹는 장면은 터무니없으면서도 그 순간에 가장 그럴듯하지 않던가.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마지막 장에서 이들 네 인물에 대한 공간을 충분히 마련해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시 성민의 장'으로라고 이름 붙여진 이 마지막 장은 지나치게 급하게 마무리된 느낌이 없지 않다. 마지막 장 이전에 여진, 완기, 미옥에게 할당된 역할을 생각해서라도 이들의 운명에 이 정도의 지면만을 할애한 것은 부당하다. 혹시라도 이 책이 나중에 개정 증보판이라도 나올 가능성이 있다면 작가는 이 마지막 장을 다시 한 번 고려했으면 한다.

 

 

  아는 작가가 생겼다는 기쁨에 혁진씨에게 이 후속 작품은 어떻게 나올 것인지 물었다. "브라더"의 프리퀄인지 시퀄인지.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의 대답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다음 작품은 ‘브라더’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미리 한 편 써둔 작가 나혁진의 또 다른 작품은 대학생들을 주인공으로 한 캠퍼스 미스터리라고 한다.

 

 아, 그는 정말로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 궁금하게 만든다. 작가로서도, 인간으로서도.

 

 

 

기타등등 

 

 

1) 작가에게 속편으로 대부 2편처럼 프리퀄 +시퀄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박준우 사장과 성민과 완기가 합심하여 서울을 공략하다가 실패한 이야기를 프리퀄로 하고, 성민이 미국에 있는 박준우 사장을 다시 한국에 불러와 대흥그룹과 맞선다는 이야기를 시퀄로 담아 한 편에 그리는 것이었다. 작가의 말은 ‘그런데 우선 이 작품이 팔려야 말이죠...’

 

 

2) 읽은 이들 모두 "브라더"란 제목과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 표지에 불만을 품은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둠의 불 블랙 캣(Black Cat) 22
C. J. 샌섬 지음, 이기원 옮김 / 영림카디널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역사 미스터리의 기적

 

-C.J. 샌섬(C(hristopher) J(ohn) Sansom)의 <어둠의 불>

 

  <수도원의 죽음>은 데뷔작이라고 믿기에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수작이었지만, 미스터리 독자들에게는 ‘걸작’이라 부르기엔 뭔가 찜찜한 데가 하나 있었다. 아무리 영국 고유의 역사를 테마로 철저한 역사적 고증에 바탕을 둔 작품이라 해도, 감상을 마친 미스터리 독자들의 혀끝에서 맴도는 말은 ‘장미의 이름....’ 이었다. 타 텍스트의 양식에 전적으로 의존한(그러나 내용적인 면에서는 <장미의 이름>과는 정 반대의 길을 가는 작품이다) 측면은 작품의 독자성을 훼손하였고, 아무리 옹호를 한다 해도 <수도원의 죽음>을 완벽한 작품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수도원의 죽음>을 자신의 베스트 미스터리 5에 올려놓은 P.D 제임스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은 것 같지만). 그래서 독자들이 이 곱사등이 변호사 매튜 샤들레이크의 모험담이 한 편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샌섬은 <장미의 이름>없이 어떤 작품을 쓸 것인가? 아니, 제대로 된 미스터리를 쓸 수 있기는 한 건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편이라 할 수 있는 매튜 샤들레이크의 두 번째 이야기 <어둠의 불>은 우리에게 그러한 의심이 기우였다는 안도의 한 숨을, 아니 기쁨의 탄성을 부르짖게 한다. 샌섬은 <장미의 이름>없이도 좋은 작품을 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샌섬이란 작가는 <장미의 이름>의 그림자가 없을 때는 위대한 작품을 쓰는 재능마저 갖춘 것 같다.

 

두 개의 역사

 

  이야기의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해, 샌섬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기저부터 파고들어간다. 정치 특사로 <수도원의 죽음>에 등장하지만, 원래 샤들레이크의 직업은 변호사가 아닌가. 샌섬은 역사 법정 미스터리라는 유례없는 영역에 도전한다. 엘리자베스 웬트워스는 12살 난 사촌 동생 랠프를 우물 속에 빠트려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다. 부모를 여의고 숙부 에드윈 웬트워스의 손에 맡겨진 엘리자베스는 에드윈 집안의 가족과 어울리지 못해 고초를 겪고 있었다. 극악한 범죄로 지탄받은 엘리자베스는 압살형을 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범죄에 대해 일체의 변호도 거부하며 침묵을 지킨다. 에드윈의 형이자 엘리자베스의 또 다른 숙부인 조지프 웬트워스는 이 가능성 없는 재판을 샤들레이크에게 부탁한다. 자수성가한 원단 업자인 에드윈과 달리 순박한 농사꾼인 조지프의 따뜻한 인심에 이끌려 엘리자베스의 변호를 허락한 샤들레이크이지만, 피고도 침묵하고 사건 자체도 엘리자베스의 유죄가 명백해 보이기에 전망이 막막하기만 하다. 이와 함께 또 다른 축을 이루는 이야기는 비잔틴 제국이 사용하던 전설상의 고대 화염 방사액인 <그리스의 불(Greek Fire)>을 뒤쫓는 추적담이다. 앤 클레브스와 헨리 8세의 결혼이 실패로 돌아가 토머스 크롬웰의 정치적 입지가 악화되기 시작한 무렵, 크롬웰은 반전을 꾀하기 위해 국왕 앞에서 <그리스의 불>을 시험해 보이기로 약속한다. 최근에 해산된 바르톨르뮤 수도원에서 한 비잔틴 제국 병사의 유품 중에 기록상으로만 내려오던 비잔틴 제국의 강력한 무기 <그리스의 불>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의 불>을 발견한 그리스트우드 형제는 <그리스의 불> 공식도 함께 발견해 자체적으로 <그리스의 불>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며 크롬웰과 거래를 원한다. 엘리자베스 웬트워스 사건을 12일 연기해 주는 대신 크롬웰은 샤들레이크에게 그리스트우드 형제로부터 <그리스의 불> 공식을 찾아오라고 명령한다. 크롬웰의 충직한 부하인 바라크와 함께 샤들레이크는 그리스트우드 형제를 만나러 가지만 그들은 이미 만신창이 시체가 되어있고, 이후 <그리스의 불>에 관련된 사람들은 무참히 살해되기 시작한다.

 




                    (<어둠의 불> 국내, 영국판, 미국판 표지. 여러분이 선택한 최고의 표지는?)

 엘리자베스 웬트워스의 사건과 <그리스 불> 추적담은 각각 역사의 두 측면을 반영한다. 한 자수성가한 상인의 집안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과 권력자들의 암투에서 벌어나는 피비린내 나는 연쇄 범죄는 한 시대 역사의 정적인 면과 동적인 면을 대표한다. 우리는 전자를 “생활상 혹은 사회상”이라 부르고 후자를 “정치”라고 부르지 않던가. 생활상이란 게 본질은 그대로이고 겉모습만 바뀌는, 어느 시대나 존재하는 역사의 구성 요소인데 반해 “정치”라는 것은 한 시대를 다른 시대로 바꾸어가게 하는 요체이다. 생활상의 주체가 조지프나 에드윈 같은 그 시대를 구성하는 민초들이라면 정치의 주체는 권력을 쥔 자(크롬웰, 노포크, 헨리 8세)이다. 생활상에서 사람들은 선택이 필요한 상황을 계속해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반면에, 정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에 처하게 한다. 노련한 역사가답게 샌섬은 이 두 가지 역사의 대립이 아니라 상호 연관성에 주목한다. “생활상”란 게 전 시대 정치가 축적된 결과라면 정치의 동력은 정체된 생활상이다. 역사는 변화와 안정이라는 두 가지 자양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샌섬은 여기서 더 나아가 한 시대 역사의 이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시대를 관통하는 공통적인 시대정신을 끄집어낸다. 엘리자베스 살인 사건의 진실이 드러내는 그 핵심은 튜더 왕조 시대 보통 사람들에게 까지 널리 퍼진 인간의 잔혹성이고, <그리스의 불>의 추적담을 통해 샤들레이크가 깨달은 것은 정치적인 불관용이 불러일으키는 참혹함이다. 이는 어떻게 표현하든 르네상스의 허울 뒤에 숨은 야만적인 폭력성으로 귀결된다. <그리스의 불>과 관련된 사람들이라면 가차 없이 죽이는 사주 받은 암살자 토키와 라이트의 냉혹함, 스포츠로 통용되는 황소와 곰의 남살(濫殺), 20살도 안 된 소녀를 압살시키기, 그리고 정치 반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화형 등, 이 모두가 이러한 야만적 폭력성을 구체화하기 위해 등장하고 있다. 
 

신념의 회복
 

  그러나 샤들레이크가 이 두 가지 역사에 모두 관여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어느 쪽의 주인공도 아니기 때문이다. 변호사라는 높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곱사등이라는 신체적 약점은 그를 약자로 만들며, 약자 쪽에서 샤들레이크는 변호사 로브 때문에 그들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로 여겨진다. 그는 정말로 아무도 아니다. 그렇기에 이 두 사건을 해결한다는 것은 샤들레이크에게 있어선 내면적으로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이 두 사건의 해결은 그가 자신의 소멸해버린 정신적 신념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전작 <수도원의 죽음>의 원제 “dissolution”이 가리키는 해체, 붕괴, 파멸은 영국 수도원의 몰락에만 관련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 소설에서 무너져 내린 것은 샤들레이크가 가지고 있던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이상적인 현실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다. 전작이 연속적인 배신이라는 과정을 통해 샤들레이크의 고통스런 각성을 그리고 있었다면, 이번 편은 고통스럽고 위험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그의 정신적 회복을 그린다. 그런데 샤들레이크가 이 험난한 모험 뒤에 회복한 신념이란 무엇인가? 그가 크롬웰에게 걸었던 열렬한 개혁주의자의 이상? 그런 게 아니라 그는 종교라는 명분 하에 아귀다툼을 벌이는 보수파와 개혁파의 갈등에서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혜안을 얻는다. 이는 허무주의적 체념이라기보다는 뚜렷한 현실 인식이라 불러 마땅하다. 그리고 강한 휴머니즘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샤들레이크가, 그런 현실인식을 통해 도달하는 결론이 ‘긍정적 방향으로 세상을 바꾸는 데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겠다.’는 다소 교훈적이고 소박한 행동주의적 실천론인 것은 필연적이자 필수적인 것이다. 

 

 <단편적 시리즈>와 <연대기적 시리즈>의 중간

  
(BBC에서는 샤들레이크 시리즈를 드라마로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샤들레이크 역에는 우리도 익숙한 셰익스피어
전문배우 케네스 브래너가 내정돼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얼마전 헤닝 만켈의 발란더 시리즈의 영국판 리메이크에서
발란더 역할을 맡아 성공하지 않았던가. 독자들에게는 브래너 =샤들레이크
조합이 심히 걱정 스러운가 보다. 그래서 샤들레이크 시리즈 독자는
샤들레이크 역에 시리즈의 모든 작품을 오디오 북에서 낭독한
또 다른 셰익스피어 전문 배우 안톤 레서가 맡아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름도 레서(Lesser)니 왠지 곱사등이 변호사 역에 잘 어울리는 듯. )

   

  샤들레이크가 전편과 연관되어 이런 정신적, 정치적 모험을 치루는 과정에서 시너지 효과처럼 시리즈의 막강한 힘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수도원의 죽음>을 읽은 독자들 상당수가 '도대체 어떻게 시리즈로 이어갈지 알 수가 없다. 이 작품 하나만 놓고 본다면 스탠드 얼론으로 쓰인 작품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했는데 이는 샌섬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는 팬 맥밀란과의 인터뷰에서 시리즈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 없이 한 작품 자체에 충실하여 시리즈를 써 내려가고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원래 시리즈라는 것이 작가의 야심찬 장기 프로젝트로, 거대한 조감도와 같이 매 작품을 이어주는 섬세한 이야기의 실선으로 연결돼 있는 법이다. 이는 매우 치밀한 계획과 안목을 요구한다. 그런데 샌섬의 시리즈 구상법은 이와 다르게 즉흥적이다. 한 발을 내 딛고 다음에 갈 방향을 잡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자기가 창조한 허구적 세계와 그와는 다른 역사적 실제 사료를 최대한 활용하여 시리즈라는 특성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가이 수사라는 괜찮은 인물을 만들었으니 속편부터 그를 제대로 한 번 활용해 보고, 새로운 왓슨 역은 흑인인 가이에 맞대응 하는 유태인으로 설정해 인종 문제를 더욱 건드려 보자는 식이다. 수십 년간 동거 동락한 종마 이름이 샤들레이크의 직업을 나타내는 챈서리(대법관 법정)였는데, 챈서리가 죽고 들여온 말의 이름을 새로 왔다 해서 제네시스(발생, 탄생)이라고 붙이다니. 실제 역사는 다음과 같이 활용한다. 어차피 크롬웰의 몰락은 역사에 변하지 않는 진실이니 거기에 <그리스의 불>에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 쯤 더해도 문제가 없고, 샤들레이크와 바라크가 정적의 치명적 약점을 쥐고 있어도 실제 역사에서 헨리 8세가 중도 정책을 폈으니 샤들레이크도 아무런 위협에 처하지 않게 처리된다. 이런 식이라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을 목격했다고 FBI에 쫓기며 평생 도망자로 지내는 크리스 넬스콧이 쓴 흑인 하드보일드 소설의 주인공 스모키 달튼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일을 잔뜩 벌여 놓고 능구렁이 같이 피해가는 이 태도, 마음에 든다.

 이는 절충적인 시리즈 구상법이라 불러야 할 것 같다. 원래 추리소설에서 시리즈의 구상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셜록 홈즈 단편 같이 동일한 시리즈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시리즈 전체 흐름에 상관없이 어느 편을 읽어도 무리가 없는 시리즈물이다(우리는 이를 단편적 시리즈라 부르자). 둘째는 시리즈 전체를 순서에 따라 읽지 않으면 인물의 점진적 변화와 시리즈 전체를 총괄하는 거대한 이야기의 맥을 잃어버릴 수 있는 연대기적 시리즈이다. 현대의 미스터리 시리즈는 점점 후자에 집중되고 있다(제임스 리 버크, 마이클 코넬리, 아르날두르 인드리다손 등등). 그러나 매튜 샤들레이크 시리즈는 이 중 어느 구상법에도 치우치지 않고 ‘단편적 시리즈’와 ‘연대기적 시리즈’의 정확한 중간에 서 있다. 도대체 이처럼 독립적으로 완전하면서도 다음 편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의 행보가 어떻게 이어질지 애타게 기다리게 하는 작품을 만난 게 언제였던지.

 

성실함이라는 역사 추리소설가의 무기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는 샌섬을 이제부터 
유혹의 샌섬신 이라 불러야 겠다.
이런 멋진 작품을 쓰다니, 샌섬, 당신은 사기꾼이야!)

 

  그런데 나는 이런 힘 있는 이야기들을 쓰는 C. J. 샌섬을 한 번도 천부적 재능을 가진 미스터리 문학의 귀재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의 문체는 문학적 수사력이 전무하다시피한 평이한 글쓰기이고, 가끔은 역사학자라는 전직을 속일 수 없는지 역사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설명문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이런 태생적 한계를 장점으로 이끌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는 데, 오히려 이런 평이함을 어려운 역사적 관념을 쉽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학자 특유의 학자적 과시를 없애면서 샌섬은 독자들을 친절한 방식으로 그 시대로 안내한다. 샌섬은 독자를 이끄는 카리스마적인 리더보다는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가이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의 소설보다 갑절은 방대한 이 소설의 분량은 작가가 어려운 이야기를 되도록이면 쉽고 위화감없이 풀어내려고 애쓴 데에서 발생했다. 두꺼운 역사 추리소설은 많지만, 두껍다는 데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역사 추리소설은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소설이 끝난 후, 작품의 맛을 음미한 다음에 읽어보는 샌섬의 짧은 역사적 도움말은 작품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이렇게 친절하고 성실한 역사 추리소설가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난 다음과 같은 사실도 확신한다. 예컨대 그는 역사 추리소설을 쓰기 전에 추리소설에는 그다지 관심이 많은 독자가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사실 <수도원의 죽음>이나 <어둠의 불>에 나오는 살인 사건과 트릭, 그리고 해결 방식은 이미 작품 좀 읽어봤다는 독자들에게는 익숙한 것이다. 그런데 많은 역사 추리소설가가 사실 개인적인 성공을 위해 역사를 추리 소설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품기 전까지 미스터리의 ‘미’자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인 게 대부분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 다음부터의 태도가 문제다. 팩션을 쓰기 위해 다빈치 코드만 줄기차게 읽는 작가, 미스터리 소설 몇 편 제대로 읽지 않고서 오직 미스터리 전문가들(자기 딴에는)에게 조언 받아 미스터리 플롯을 짠 오스만 투르크 역사 학자(난 그래도 몇 편은 좀 읽었겠지 했다). 이런 미스터리 형식에 대한 안이한 접근 태도가 역사와 미스터리 소설의 엇박자라는 끔찍한 불협화음을 낳는다. 그런데 내가 <수도원의 죽음>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기존의 미스터리 패턴을 소설에서 진부하다고 느껴지지 않게 최대한 잘 융화시키려고 애쓴 노력이었으며, 속편인 <어둠의 불>에서 느낀 미스터리 독자로서의 만족감은 더 다양한 트릭과 서술적 장치를 연구하고 자신만의 것으로 완벽히 흡수하려고 한 작가의 부단함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쉰 살 이후 데뷔한 작가가 보여줄 수 있는 젊은 천재의 패기와는 다른 연장자의 성숙한 성실함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샌섬이라는 작가가 가진 최대의 장점이자 무기이다. 

  <어둠의 불>은 이와 비슷한 작가적 배경과 상황 아래서 탄생할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자, 명백히 보이는 단점마저 완전히 상쇄해 버린 극소수의 역사 미스터리이다. 이는 마땅히 역사 미스터리의 기적이라 불러야 한다. 그래서 <어둠의 불>을 읽고 난 다음에 든 의문은 제 1작인 <수도원의 죽음>을 읽고 난 뒤에 생긴 의혹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와 같은 기적은 또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비평가와 작가 자신은 샤들레이크 시리즈의 가장 훌륭한 작품을 두렵게도 <어둠의 불> 다음편인 <군주(Sovereign)>로 꼽고 있다.

 (<어둠의 불>을 다 읽은 독자들은 확신하건데
애타도록 제 3작 <군주>가 보고 싶을 것이다.
여러분이 지갑을 꺼내들고 서점으로 달려가
한 부 사서 보지 않고, 또 이 재미있는 책을
지인들에게 소개시켜 주지 않는다면 제 3작은
국내에서 영영 못 볼 것이다. 어흑, 그렇게 슬픈 일이 ㅠ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추리소설따위라고? 하며 비웃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위대한 미스테리 소설들.


1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Y의 비극- 시그마 북스 012
엘러리 퀸 지음 / 시공사 / 1994년 12월
6,000원 → 5,400원(10%할인) / 마일리지 300원(5% 적립)
2002년 11월 28일에 저장
절판

사회를 위해서 개인은 희생될수 있는 가에 대한 질문. 그리고 완벽한 퍼즐게임의 조합.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 / 해문출판사 / 2002년 8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02년 11월 28일에 저장

우리 내면에 잠재한 사악함에 대한 폭로.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존 르 카레 지음, 강호걸 옮김 / 해문출판사 / 2001년 10월
5,000원 → 4,500원(10%할인) / 마일리지 250원(5% 적립)
2002년 11월 28일에 저장
품절

어쩌면 현대에서도 국가권력에 의한 꼭두각시로 살아가고 있을 개인들.
원죄 -상
모리무라 세이찌 / 현재 / 1998년 5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2002년 11월 28일에 저장
품절
딱딱한 머리로 이해하기 이전에 우리도 사람이라는 사실


1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채털리 부인의 사랑 청목정선세계문학 8
D. H. 로렌스 지음, 강만식 옮김 / 청목(청목사) / 1989년 4월
평점 :
절판


건전한 섹스에 건강한 정신!!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만큼 '후끈'한 작품이 아니다. 물론 소설 중간 중간에 사람들을 달아오르게 할 정도로 뜨거운 장면도 몇몇 있지만, 지금 세상에 나도는 다른 포르노그라피들에 비하면 세발에 피다. 그만큼 약발이 달았다는 이야기다. 그당시 영국 비평가들이 단순한 성애소설이라며 치부했던 것과 달리 채털리부인의 사랑은 놀랍도록 지적이고 관념적인 작품이다. 표면적으로 두드러진 몇 가지 점만 살피고, 그저 싸구려 소설로 치부해 버렸던 영국의 점잖은체 하는 비평가들을 생각하면 그저 한숨밖에 안나온다.

채털리부인의 사랑의 주제는 성이다. 가장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사람들이 드러내기 꺼려하는 성. 로렌스는 섹스-성이야 말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섹스없는 삶은 죽은것과 다름없다. 로렌스가 생각하는 성은 아주 신성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가장 순수한 본능이고, 이것을 통해 사람들은 가족을 형성하고 사회를 형성한다. 인간사회의 근본을 형성하는 것은 섹스라고 로렌스는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감추어 두고, 피하려고 하는 것을 반대한다. 낭만적인 연예담에 그려지는 적극적이지 못한, 그저 손만 잡고 키스하는 이성간의 사랑을 그는 솔직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순수한 정신적인 사랑은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순수한 욕망을 감추어 오히려 인간을 더 황폐하게 만든다.

반면에 로렌스가 가장 증오하고 혐오하는 대상은 바로 산업사회, 문명사회이다. 그는 이러한 것들이 정신만을 강조하고 육체적인 생활-섹스를 무시한 사회의 결과라고 말한다. 이러한 산업사회, 문명사회, 정신만을 고집하는 사회를 대변하는 인물이 바로 클리포드다. 육체적으로 불구가 된 클리포드는 오직 정신에만 집착하게 되는데, 처음에 그는 훌륭한 문학가에서 나중에는 비상한 탄광산업의 고용주로 변신하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모습은 그의 육체적 나약함과 죽은 본성을 덮어두기 위한 방편일뿐이다. 이러한 인물의 종말은 오직, 정신병자 적이고 히스테리적인 광기어린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로렌스는 서문에서 60이 다 된 젊잖은 목사로 알려진 인물이 어린 소녀를 강간하고, 수십년동안 착실한 결혼생활을 하던 남자가 갑자기 커밍아웃한 일등을 통해 이러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정말로 인상깊었던 것은 결코 흔한 멜로로 전락하지 않은 마지막 결먈 부분이었다. 로렌스는 좀더 차분히 자신의 입장들을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채털리부인의 사랑은 사실 너무나 보수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가족을 찬양하고 일부일처제를 강력히 주장하며, 건전한 성이 있는 기독교적 생활을 강조한다. 이러한 작품이 같은 동료들에게 오히려 공격받았다는 사실은 씁쓸한 웃음을 남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이즈리크 2005-12-16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언제 이런글을 썼지? 제 자신이 봐도 좀 신기하군요.

2008-06-13 1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6-20 1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