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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불 ㅣ 블랙 캣(Black Cat) 22
C. J. 샌섬 지음, 이기원 옮김 / 영림카디널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역사 미스터리의 기적
-C.J. 샌섬(C(hristopher) J(ohn) Sansom)의 <어둠의 불>
<수도원의 죽음>은 데뷔작이라고 믿기에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수작이었지만, 미스터리 독자들에게는 ‘걸작’이라 부르기엔 뭔가 찜찜한 데가 하나 있었다. 아무리 영국 고유의 역사를 테마로 철저한 역사적 고증에 바탕을 둔 작품이라 해도, 감상을 마친 미스터리 독자들의 혀끝에서 맴도는 말은 ‘장미의 이름....’ 이었다. 타 텍스트의 양식에 전적으로 의존한(그러나 내용적인 면에서는 <장미의 이름>과는 정 반대의 길을 가는 작품이다) 측면은 작품의 독자성을 훼손하였고, 아무리 옹호를 한다 해도 <수도원의 죽음>을 완벽한 작품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수도원의 죽음>을 자신의 베스트 미스터리 5에 올려놓은 P.D 제임스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은 것 같지만). 그래서 독자들이 이 곱사등이 변호사 매튜 샤들레이크의 모험담이 한 편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샌섬은 <장미의 이름>없이 어떤 작품을 쓸 것인가? 아니, 제대로 된 미스터리를 쓸 수 있기는 한 건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편이라 할 수 있는 매튜 샤들레이크의 두 번째 이야기 <어둠의 불>은 우리에게 그러한 의심이 기우였다는 안도의 한 숨을, 아니 기쁨의 탄성을 부르짖게 한다. 샌섬은 <장미의 이름>없이도 좋은 작품을 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샌섬이란 작가는 <장미의 이름>의 그림자가 없을 때는 위대한 작품을 쓰는 재능마저 갖춘 것 같다.
두 개의 역사
이야기의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해, 샌섬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기저부터 파고들어간다. 정치 특사로 <수도원의 죽음>에 등장하지만, 원래 샤들레이크의 직업은 변호사가 아닌가. 샌섬은 역사 법정 미스터리라는 유례없는 영역에 도전한다. 엘리자베스 웬트워스는 12살 난 사촌 동생 랠프를 우물 속에 빠트려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다. 부모를 여의고 숙부 에드윈 웬트워스의 손에 맡겨진 엘리자베스는 에드윈 집안의 가족과 어울리지 못해 고초를 겪고 있었다. 극악한 범죄로 지탄받은 엘리자베스는 압살형을 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범죄에 대해 일체의 변호도 거부하며 침묵을 지킨다. 에드윈의 형이자 엘리자베스의 또 다른 숙부인 조지프 웬트워스는 이 가능성 없는 재판을 샤들레이크에게 부탁한다. 자수성가한 원단 업자인 에드윈과 달리 순박한 농사꾼인 조지프의 따뜻한 인심에 이끌려 엘리자베스의 변호를 허락한 샤들레이크이지만, 피고도 침묵하고 사건 자체도 엘리자베스의 유죄가 명백해 보이기에 전망이 막막하기만 하다. 이와 함께 또 다른 축을 이루는 이야기는 비잔틴 제국이 사용하던 전설상의 고대 화염 방사액인 <그리스의 불(Greek Fire)>을 뒤쫓는 추적담이다. 앤 클레브스와 헨리 8세의 결혼이 실패로 돌아가 토머스 크롬웰의 정치적 입지가 악화되기 시작한 무렵, 크롬웰은 반전을 꾀하기 위해 국왕 앞에서 <그리스의 불>을 시험해 보이기로 약속한다. 최근에 해산된 바르톨르뮤 수도원에서 한 비잔틴 제국 병사의 유품 중에 기록상으로만 내려오던 비잔틴 제국의 강력한 무기 <그리스의 불>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의 불>을 발견한 그리스트우드 형제는 <그리스의 불> 공식도 함께 발견해 자체적으로 <그리스의 불>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며 크롬웰과 거래를 원한다. 엘리자베스 웬트워스 사건을 12일 연기해 주는 대신 크롬웰은 샤들레이크에게 그리스트우드 형제로부터 <그리스의 불> 공식을 찾아오라고 명령한다. 크롬웰의 충직한 부하인 바라크와 함께 샤들레이크는 그리스트우드 형제를 만나러 가지만 그들은 이미 만신창이 시체가 되어있고, 이후 <그리스의 불>에 관련된 사람들은 무참히 살해되기 시작한다.
(<어둠의 불> 국내, 영국판, 미국판 표지. 여러분이 선택한 최고의 표지는?)
엘리자베스 웬트워스의 사건과 <그리스 불> 추적담은 각각 역사의 두 측면을 반영한다. 한 자수성가한 상인의 집안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과 권력자들의 암투에서 벌어나는 피비린내 나는 연쇄 범죄는 한 시대 역사의 정적인 면과 동적인 면을 대표한다. 우리는 전자를 “생활상 혹은 사회상”이라 부르고 후자를 “정치”라고 부르지 않던가. 생활상이란 게 본질은 그대로이고 겉모습만 바뀌는, 어느 시대나 존재하는 역사의 구성 요소인데 반해 “정치”라는 것은 한 시대를 다른 시대로 바꾸어가게 하는 요체이다. 생활상의 주체가 조지프나 에드윈 같은 그 시대를 구성하는 민초들이라면 정치의 주체는 권력을 쥔 자(크롬웰, 노포크, 헨리 8세)이다. 생활상에서 사람들은 선택이 필요한 상황을 계속해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반면에, 정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에 처하게 한다. 노련한 역사가답게 샌섬은 이 두 가지 역사의 대립이 아니라 상호 연관성에 주목한다. “생활상”란 게 전 시대 정치가 축적된 결과라면 정치의 동력은 정체된 생활상이다. 역사는 변화와 안정이라는 두 가지 자양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샌섬은 여기서 더 나아가 한 시대 역사의 이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시대를 관통하는 공통적인 시대정신을 끄집어낸다. 엘리자베스 살인 사건의 진실이 드러내는 그 핵심은 튜더 왕조 시대 보통 사람들에게 까지 널리 퍼진 인간의 잔혹성이고, <그리스의 불>의 추적담을 통해 샤들레이크가 깨달은 것은 정치적인 불관용이 불러일으키는 참혹함이다. 이는 어떻게 표현하든 르네상스의 허울 뒤에 숨은 야만적인 폭력성으로 귀결된다. <그리스의 불>과 관련된 사람들이라면 가차 없이 죽이는 사주 받은 암살자 토키와 라이트의 냉혹함, 스포츠로 통용되는 황소와 곰의 남살(濫殺), 20살도 안 된 소녀를 압살시키기, 그리고 정치 반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화형 등, 이 모두가 이러한 야만적 폭력성을 구체화하기 위해 등장하고 있다.
신념의 회복
그러나 샤들레이크가 이 두 가지 역사에 모두 관여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어느 쪽의 주인공도 아니기 때문이다. 변호사라는 높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곱사등이라는 신체적 약점은 그를 약자로 만들며, 약자 쪽에서 샤들레이크는 변호사 로브 때문에 그들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로 여겨진다. 그는 정말로 아무도 아니다. 그렇기에 이 두 사건을 해결한다는 것은 샤들레이크에게 있어선 내면적으로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이 두 사건의 해결은 그가 자신의 소멸해버린 정신적 신념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전작 <수도원의 죽음>의 원제 “dissolution”이 가리키는 해체, 붕괴, 파멸은 영국 수도원의 몰락에만 관련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 소설에서 무너져 내린 것은 샤들레이크가 가지고 있던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이상적인 현실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다. 전작이 연속적인 배신이라는 과정을 통해 샤들레이크의 고통스런 각성을 그리고 있었다면, 이번 편은 고통스럽고 위험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그의 정신적 회복을 그린다. 그런데 샤들레이크가 이 험난한 모험 뒤에 회복한 신념이란 무엇인가? 그가 크롬웰에게 걸었던 열렬한 개혁주의자의 이상? 그런 게 아니라 그는 종교라는 명분 하에 아귀다툼을 벌이는 보수파와 개혁파의 갈등에서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혜안을 얻는다. 이는 허무주의적 체념이라기보다는 뚜렷한 현실 인식이라 불러 마땅하다. 그리고 강한 휴머니즘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샤들레이크가, 그런 현실인식을 통해 도달하는 결론이 ‘긍정적 방향으로 세상을 바꾸는 데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겠다.’는 다소 교훈적이고 소박한 행동주의적 실천론인 것은 필연적이자 필수적인 것이다.
<단편적 시리즈>와 <연대기적 시리즈>의 중간
(BBC에서는 샤들레이크 시리즈를 드라마로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샤들레이크 역에는 우리도 익숙한 셰익스피어
전문배우 케네스 브래너가 내정돼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얼마전 헤닝 만켈의 발란더 시리즈의 영국판 리메이크에서
발란더 역할을 맡아 성공하지 않았던가. 독자들에게는 브래너 =샤들레이크
조합이 심히 걱정 스러운가 보다. 그래서 샤들레이크 시리즈 독자는
샤들레이크 역에 시리즈의 모든 작품을 오디오 북에서 낭독한
또 다른 셰익스피어 전문 배우 안톤 레서가 맡아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름도 레서(Lesser)니 왠지 곱사등이 변호사 역에 잘 어울리는 듯. )
샤들레이크가 전편과 연관되어 이런 정신적, 정치적 모험을 치루는 과정에서 시너지 효과처럼 시리즈의 막강한 힘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수도원의 죽음>을 읽은 독자들 상당수가 '도대체 어떻게 시리즈로 이어갈지 알 수가 없다. 이 작품 하나만 놓고 본다면 스탠드 얼론으로 쓰인 작품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했는데 이는 샌섬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는 팬 맥밀란과의 인터뷰에서 시리즈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 없이 한 작품 자체에 충실하여 시리즈를 써 내려가고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원래 시리즈라는 것이 작가의 야심찬 장기 프로젝트로, 거대한 조감도와 같이 매 작품을 이어주는 섬세한 이야기의 실선으로 연결돼 있는 법이다. 이는 매우 치밀한 계획과 안목을 요구한다. 그런데 샌섬의 시리즈 구상법은 이와 다르게 즉흥적이다. 한 발을 내 딛고 다음에 갈 방향을 잡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자기가 창조한 허구적 세계와 그와는 다른 역사적 실제 사료를 최대한 활용하여 시리즈라는 특성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가이 수사라는 괜찮은 인물을 만들었으니 속편부터 그를 제대로 한 번 활용해 보고, 새로운 왓슨 역은 흑인인 가이에 맞대응 하는 유태인으로 설정해 인종 문제를 더욱 건드려 보자는 식이다. 수십 년간 동거 동락한 종마 이름이 샤들레이크의 직업을 나타내는 챈서리(대법관 법정)였는데, 챈서리가 죽고 들여온 말의 이름을 새로 왔다 해서 제네시스(발생, 탄생)이라고 붙이다니. 실제 역사는 다음과 같이 활용한다. 어차피 크롬웰의 몰락은 역사에 변하지 않는 진실이니 거기에 <그리스의 불>에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 쯤 더해도 문제가 없고, 샤들레이크와 바라크가 정적의 치명적 약점을 쥐고 있어도 실제 역사에서 헨리 8세가 중도 정책을 폈으니 샤들레이크도 아무런 위협에 처하지 않게 처리된다. 이런 식이라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을 목격했다고 FBI에 쫓기며 평생 도망자로 지내는 크리스 넬스콧이 쓴 흑인 하드보일드 소설의 주인공 스모키 달튼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일을 잔뜩 벌여 놓고 능구렁이 같이 피해가는 이 태도, 마음에 든다.
이는 절충적인 시리즈 구상법이라 불러야 할 것 같다. 원래 추리소설에서 시리즈의 구상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셜록 홈즈 단편 같이 동일한 시리즈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시리즈 전체 흐름에 상관없이 어느 편을 읽어도 무리가 없는 시리즈물이다(우리는 이를 단편적 시리즈라 부르자). 둘째는 시리즈 전체를 순서에 따라 읽지 않으면 인물의 점진적 변화와 시리즈 전체를 총괄하는 거대한 이야기의 맥을 잃어버릴 수 있는 연대기적 시리즈이다. 현대의 미스터리 시리즈는 점점 후자에 집중되고 있다(제임스 리 버크, 마이클 코넬리, 아르날두르 인드리다손 등등). 그러나 매튜 샤들레이크 시리즈는 이 중 어느 구상법에도 치우치지 않고 ‘단편적 시리즈’와 ‘연대기적 시리즈’의 정확한 중간에 서 있다. 도대체 이처럼 독립적으로 완전하면서도 다음 편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의 행보가 어떻게 이어질지 애타게 기다리게 하는 작품을 만난 게 언제였던지.
성실함이라는 역사 추리소설가의 무기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는 샌섬을 이제부터
유혹의 샌섬신 이라 불러야 겠다.
이런 멋진 작품을 쓰다니, 샌섬, 당신은 사기꾼이야!)
그런데 나는 이런 힘 있는 이야기들을 쓰는 C. J. 샌섬을 한 번도 천부적 재능을 가진 미스터리 문학의 귀재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의 문체는 문학적 수사력이 전무하다시피한 평이한 글쓰기이고, 가끔은 역사학자라는 전직을 속일 수 없는지 역사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설명문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이런 태생적 한계를 장점으로 이끌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는 데, 오히려 이런 평이함을 어려운 역사적 관념을 쉽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학자 특유의 학자적 과시를 없애면서 샌섬은 독자들을 친절한 방식으로 그 시대로 안내한다. 샌섬은 독자를 이끄는 카리스마적인 리더보다는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가이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의 소설보다 갑절은 방대한 이 소설의 분량은 작가가 어려운 이야기를 되도록이면 쉽고 위화감없이 풀어내려고 애쓴 데에서 발생했다. 두꺼운 역사 추리소설은 많지만, 두껍다는 데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역사 추리소설은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소설이 끝난 후, 작품의 맛을 음미한 다음에 읽어보는 샌섬의 짧은 역사적 도움말은 작품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이렇게 친절하고 성실한 역사 추리소설가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난 다음과 같은 사실도 확신한다. 예컨대 그는 역사 추리소설을 쓰기 전에 추리소설에는 그다지 관심이 많은 독자가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사실 <수도원의 죽음>이나 <어둠의 불>에 나오는 살인 사건과 트릭, 그리고 해결 방식은 이미 작품 좀 읽어봤다는 독자들에게는 익숙한 것이다. 그런데 많은 역사 추리소설가가 사실 개인적인 성공을 위해 역사를 추리 소설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품기 전까지 미스터리의 ‘미’자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인 게 대부분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 다음부터의 태도가 문제다. 팩션을 쓰기 위해 다빈치 코드만 줄기차게 읽는 작가, 미스터리 소설 몇 편 제대로 읽지 않고서 오직 미스터리 전문가들(자기 딴에는)에게 조언 받아 미스터리 플롯을 짠 오스만 투르크 역사 학자(난 그래도 몇 편은 좀 읽었겠지 했다). 이런 미스터리 형식에 대한 안이한 접근 태도가 역사와 미스터리 소설의 엇박자라는 끔찍한 불협화음을 낳는다. 그런데 내가 <수도원의 죽음>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기존의 미스터리 패턴을 소설에서 진부하다고 느껴지지 않게 최대한 잘 융화시키려고 애쓴 노력이었으며, 속편인 <어둠의 불>에서 느낀 미스터리 독자로서의 만족감은 더 다양한 트릭과 서술적 장치를 연구하고 자신만의 것으로 완벽히 흡수하려고 한 작가의 부단함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쉰 살 이후 데뷔한 작가가 보여줄 수 있는 젊은 천재의 패기와는 다른 연장자의 성숙한 성실함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샌섬이라는 작가가 가진 최대의 장점이자 무기이다.
<어둠의 불>은 이와 비슷한 작가적 배경과 상황 아래서 탄생할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자, 명백히 보이는 단점마저 완전히 상쇄해 버린 극소수의 역사 미스터리이다. 이는 마땅히 역사 미스터리의 기적이라 불러야 한다. 그래서 <어둠의 불>을 읽고 난 다음에 든 의문은 제 1작인 <수도원의 죽음>을 읽고 난 뒤에 생긴 의혹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와 같은 기적은 또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비평가와 작가 자신은 샤들레이크 시리즈의 가장 훌륭한 작품을 두렵게도 <어둠의 불> 다음편인 <군주(Sovereign)>로 꼽고 있다.
(<어둠의 불>을 다 읽은 독자들은 확신하건데
애타도록 제 3작 <군주>가 보고 싶을 것이다.
여러분이 지갑을 꺼내들고 서점으로 달려가
한 부 사서 보지 않고, 또 이 재미있는 책을
지인들에게 소개시켜 주지 않는다면 제 3작은
국내에서 영영 못 볼 것이다. 어흑, 그렇게 슬픈 일이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