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쿠치바 전설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아카쿠치바 가문 3대에 걸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기묘하면서 재미있게 일본의 전후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를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이고 있다. 가문의 가업인 제철소의 변화와 몰락의 길을 걷는 3대의 모습은 새로울 것은 없는데도 아름답고 독특하게 전개된다. 한마디로 이렇게 재미있고 좋은 작품이라니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읽으면서 계속 이 작은 한권의 책속에 옹골차게 철의 여인 3대의 이야기를 가지치기를 잘해서 넣을 것만을 잘 담아 넣었다고 감탄했다.

염상섭의 <삼대>를 읽고 감탄했던 예전의 밤이 생각났다. 우리네 격동의 일제시대를 살아가는 서로 다른 모습의 3대의 남자들의 동시대 모습을 담고 있는 그 책은 조덕기 집안의 삼대에 관한 이야기다. 과거의 관습에 집착하는 고집 센 노인인 할아버지 조의관과 과거와 단절하고 신문물을 받아들여 기독교인이며 학교사업을 하는 인텔리이나 난봉꾼에 도덕관념이 전혀 없는 노름꾼인 아버지 조상훈. 그리고 그들과 상관없이 현실에 안주하는 소심한 주인공 조덕기. 그들 삼대와 그 주변 인물과 상황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염상섭의 <삼대>가 한 시대를 사는 수평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이 작품은 수직적 구조를 가지고 흐르는 세월 속에 여인들의 이야기를 세 부분으로 나눠서 쓰고 있다. 그들은 동시대 사람이 아니고 각기 다른 세월, 다른 시대, 변하는 각자의 시대를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내고 있다. 그런 부분을 비교해서 읽는다면 이 작품을 추리소설로 따져 읽지 않고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사실 이 작품에서의 미스터리적 요소는 그다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고 있다. 2007년 제60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만요는 산의 아이로 그 지방에 남겨진 아이였지만 양부모를 잘 만나 잘 컸고 아카쿠치바라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그 집안 마님인 다쓰에 의해 그 집안 며느리가 된다. 그녀는 천리안 사모님이라는 별명을 가졌는데 그것은 어려서부터 미래를 내다보는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 될 사람을 처음 만나고 그 남자가 어떻게 죽을지가 보였으니 그 인생이 순탄치만은 않았으리라 생각되지만 자신의 시대인들이 갖고 있는 순종과 노력이라는 이름아래 잘 참고 인내하며 살았다. 그 천리안 덕분에 아카쿠치바의 사업인 제철업은 남편에게 잘 물려지게 된다.

오빠가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해서 아카쿠치바 가문에 데릴사위를 들이게 되는 장녀 게마리는 한마디로 방황과 불타는 젊음이라는 주체할 수 없는 시대를 산다. 불량 서클 아이언 엔젤의 두목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일대를 평정하는 것을 꿈으로 삼고 나날을 보냈지만 친구의 허망한 죽음으로 서클에서 은퇴하고 만화가가 되어 자신의 일대기라고 할 수 있는 <아이언 엔젤>을 그린다.

이런 특징 있는 할머니와 엄마와는 달리 특이할 것 하나 없는 화자인 도코는 버블 경제 붕괴 뒤 허무하고 그 어떤 희망도 가질 이유를 찾지 못한 지금 세대 젊은이들과 같이 평범한 삶을 살면서 그런 자신에게서 아카쿠치바라는 가문이 문을 닫는 것은 아닌가 걱정을 한다.

신화와도 같았던 일본의 경제 부흥기, 그 뒤에 찾아온 추락,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날을 관통하며 한 집안의 이야기이면서 한 나라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구가 둥글어 한 바퀴 돌면 제자리 듯이 모두가 공감할만한 이야기를 한 지방의 전래 민속 설화와 접목해서 재미있게 작가는 끝까지 쓰고 있다.

끝에서 미스터리에 대한 살인자와 살해당한 사람을 찾는 도코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서 내가 기대한 미스터리가 없었지만 읽는 내내 사람이 자신의 시대를 열심히 산다는 것은, 그 시대와 함께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내게도 한 시대가 있었고 지금도 한 시대를 살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전설은 아니더라도 어떤 것에서든 최고는 아니더라도 내 시대가 끝날 때 나 혼자만이라도 만족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또한 각 시대마다 그들에게는 중요한 사람이 한 명씩 등장한다. 그리고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지탱해주고 그들의 삶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한 사람의 삶은 온전히 자신만의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와 그 ‘나’를 둘러싼 주변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전설은 생겨나고 사라지고 다시 생겨나기를 반복하면서 변형되는 것이라고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카쿠치바 전설>이라는 작품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대나 역사도 그렇게 형성되는 것이다. 한 가문이 한 여인의 삶으로 이어지듯이 말이다.

단 한 권의 책에 어쩌면 삼대의 시대별 특징을 나타낸다고 하지만 한 인물의 계속되는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시대를 상징하는 주인공의 두드러짐이 삼대로 구별될 뿐, 그 안에 만요나 그 밖의 사람들은 죽거나 사라지지 않는 한 그대로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만요의 일대기로도 볼 수 있다. 만요에서 시작해서 만요에서 끝이 난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렇게 그리지 않았다. 전설은 현실 속에 있건 주변부에 머무르건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므로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듯 보여 진다.

읽어보면 우리도 공감할만한 이야기다. 열심히 산 사람과 몰락한 사람과 광기에 내몰린 사람과 평범한 사람들이 모두 모여 우리의 부모나 조부모가 살았던 시대를 이야기하고 우리의 시대를 이야기하고 앞으로 우리 또는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갈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전설이다. 사람의 삶도 전설이다. 지나간 과거는 모두 전설이 된다. 그 하나의 전설이 여기에 있다.

<아카쿠치바 전설>은 2007년 올 해 읽은 작품 가운데 감히 최고로 꼽고 싶은 작품이다. 책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는다. 존재와 소멸, 사랑과 이별 같은 사람냄새가 가득하다. 그래서 이 작품은 감동적이고 아름답다. 재미있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추리소설이 부담스럽다고 생각되는 독자들에게 추리소설 같지 않은 추리소설, 추리소설이 이런 작품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 한 권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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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7-12-26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님 완전 평론수준이어요. 저도 올해는 무리고 내년엔 꼭 읽어볼래요

물만두 2007-12-26 10:25   좋아요 0 | URL
아, 좀 길죠^^;;;

stella.K 2007-12-26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엔 이제야 올렸군요. 왜 이제야...? 읽고 싶어지잖아요. 흐흑!

물만두 2007-12-26 14:09   좋아요 0 | URL
그게 또 올려도 되는지를 몰라서 망설였답니다^^:;;

BRINY 2007-12-26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입은 했는데, 도입부가 그다지 안끌려서 밀어두고 있던 책이네요. 만두님 리뷰에 힘입어 다시 손에 들어볼까봐요.

물만두 2007-12-26 18:44   좋아요 0 | URL
도입부만 지나면 순식간에 읽게 되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