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나크 사냥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단 하룻밤, 아니 정확하게는 이틀에 걸쳐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배신을 당했다. 복수를 위해 평소 가지고 있던 총을 가지고 남자의 결혼식장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는데 돌아오는 길에 그만 그 긴 밤을 시작하게 될 여러 사람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고 만다.

가끔 그런 생각, 아니 요즘은 자주 생각을 한다. 도대체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에 대해서 생각해주는 이가 없다. 세상은 마치 가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고 피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 약한 자들만이 싸우고 지치고 힘들고 그래서 결국 떨어져 나가고 남는 이들은 가해자란 이름의 비양심적이고 힘 있고 백 있는 자들, 선한 자들, 평범한 자들을 이용해먹는 자들만 남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분하고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루이스 캐럴의 <스나크 사냥>에서의 스나크란 괴물을 잡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이들과 작품 속 인물들의 순간적 변화를 매치시키고 있다. 과연 그럴까? 우리 안의 괴물이 있어 그 괴물을 잡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것은 순수함이라고 생각한다면 괴물이 날뛰게 만들어야 한다는 얘길까? 그래서 그 괴물이 누구를 잡아먹든 상관하지 말고 당하면 당하는 대로 가만히 있자고?

하지만 그렇게 있었기 때문에 괴물은 더 많아지고 진화를 거듭해서 절대 사라지지 않는 존재가 되어 잡으려는 자조차도 괴물로 보이게끔 만든 것은 아닐까? 애초에 괴물이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들었다면 없었을 일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경찰이 초동 수사를 잘해서 범인을 초기에 검거했다면 두 번째, 세 번째 범죄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라는 뉴스의 상투적인 아나운서의 맨트처럼 말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미국의 어느 작가의 작품이 생각났다. 그 작품을 볼 때 그 심정을 백분 공감했지만 작품이 너무 상투적이고 너무 헐리우드 영화 같아서 공감할 수 없었는데 정서적으로 비슷해서 그런지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은 언제나 공감하며 읽게 된다. 아마도 이것이 동, 서양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괴물은 있다. 우린 모두 그림자처럼 괴물을 숨기고 사는 존재들이다. 그렇다고 누구나 그 괴물을 풀어 놓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풀어놓은 괴물이라면 다시 감금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비는 좀 더 철저히 마련했으면 좋겠다. 늘 억울한 사람만 계속 억울함을 호소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것도 어쩌면 괴물 탓은 아닐까...

그래도 미야베 미유키는 늘 희망을 준다. 어두웠다가 약간의 빛을 보여준다. 절망하는 가운데 희망이 꽃피우는 것을 함께 보여준다. 그것으로 위안을 삼으라는 듯이. 한 사람은 영원히 가족을 잃었고 대신 한 사람은 가족을 다시 얻었다. 한 사람은 아이에서 어른이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절망에 쌓여 산다.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없는 인생 게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더라도 누군가는 행복해지고 누군가는 불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반타작만이라도 이룬다는 것, 그리고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싶다.

내가 만약 이 경우라면 나는 어쩌면 이보다 더하지 않았을까 내 안의 괴물은 그렇게 외치고 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11-15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이런건 좋죠.
추리소설 혹은 그 비슷한 류의 소설에서, 재미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인생도 함께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으음~ 만두님 리뷰 맛있어요.

물만두 2007-11-15 11:52   좋아요 0 | URL
꼭꼭 씹어드시와요^^

미미달 2007-11-15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야베 미유키는 재미와 교훈을 동시에 안겨주는 작가이지요.
근데 그 교훈이 좀 다양했으면 하는 ..... ^^*

물만두 2007-11-15 20:09   좋아요 0 | URL
추리소설에서의 교훈은 뭐 좀 한정적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