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장 속의 치요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신유희 옮김, 박상희 그림 / 예담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벽장 속에서 유령이 나온다는 얘기에 처음에는 약간 무서운 작품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령이 나와도 무섭기보다는 슬프고, 쓸쓸하고, 살인이 등장해도 우스꽝스럽게 묘사되어 재미있고 아련한 감동까지 느끼며 볼 수 있었다.

<벽장 속의 치요>는 백수가 된 남자가 너무 싼 월세 방을 얻게 되는데 그 집 벽장 속에서 밤마다 어린 여자 아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느 집 아인가보다 했는데 이 아이가 하는 말이 이상하다. 메이지 시대에 태어났다니. 거기다 사람 관상을 볼 때는 꼭 할머니 같은 말투를 쓰고 육포를 “이것은 무슨 괴기인고?” “말괴긴가?” 이러는데 남자는 놀라 소개소에 전화를 하지만 그동안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너무 슬퍼서 성불시켜 주겠다고 한다. 우리가 무심코 부르는 일본에서 전해진 동요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이 노래가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치요가 계속 등장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 조금 아쉬웠다.

<Call>은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사랑 내기를 한 이야기다. 하지만 내기에서 이긴 친구가 고백을 미루자 진 친구가 먼저 고백을 하고 그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왜냐하면 그 여자가 자기가 아닌 그 친구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하지만 결국 그는 내기를 되돌린다. 눈물을 흘리면서... 눈물은 무슨, 이제라도 그랬으니 다행인거지. 미련이 많기도 하다.

<어머니의 러시아 수프>는 작가의 생각을 묻고 싶은 작품이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다시는 이런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냐?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고 말하는 것이냐? 왜 하필 러시아 사람이지? 반성이냐? 아니면 뭐냐? 그것을 알고 싶다. 알기 전에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작품이다. 심히 기분 언짢았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한 방문자>는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한 남자가 내연녀의 시체를 숨기기 위해 악전고투하는데 갑자기 무료 청소를 해준다는 청소업자가 등장해서 벌어지는 헤프닝을 그리고 있다. 참, 운도 없는 남자다. 마지막까지.

<살인 레시피>는 더 이상 결혼을 유지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부부가 각자 상대방을 살인하기 위해 음식을 가지고 벌이는 한 밤의 살인 게임을 다루고 있다. 부부는 닮는다고 하는데 너무 닮아 살인도 하기 힘든 이 부부는 그냥 이대로 사는 게 각자에게도 좋을 것 같다. 나중에는 귀엽게까지 보였다.

<냉혹한 간병인>은 사실 이 작품들 중에 튀는 작품이다. 정말 잔인하고 냉혹하게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괴롭히며 간병하다 돌아가시자 시아버지까지 그렇게 되자 또 다시 시어머니에게 하던 대로 시아버지가 빨리 죽기만을 바라며 먹을 것도 주지 않고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 죽을 때까지 가지고 놀려고 하다가 벌어지는 가정의 잔인한 내부를 그대로 보여주는 너무도 섬뜩하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라서 더욱 무섭게 느껴졌던 작품이다. 역시 진짜 무서운 건 죽은 유령이 아니라 산 사람이다.

<늙은 고양이>는 고양이를 싫어하는 내가 또 한 번 고양이를 무서워하게 만든 작품이다. 삼촌의 집을 물려받고 덤으로 삼촌이 키우던 고양이까지 물려받게 된 가족에게 서서히 일어나는 변화를 그리고 있다. 점점 조여 오는 스멀스멀한 무서움을 마지막까지 고조시키는 작품이다.

<어두운 나무 그늘>은 어린 시절 술래잡기를 하다 사라진 여동생을 어른이 되어 찾아보겠다고 다시 사촌 집을 방문한 ‘나’가 발견하게 되는 그 시절의 진실 같은 여동생의 실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어린 시절의 숲은 무섭고 큰 나무는 두려움의 존재지만 나이가 들면 그 숲은 단지 숲일 뿐이고 나무는 늙고 큰 나무일 뿐 도망가기보다는 다가가서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어른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 중 여전히 숲과 나무를 무서워하는 이가 있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어둠은 나무 그늘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신이치의 자전거>는 어린 시절 함께 놀다 물에 빠져 죽은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잔잔하게 다가오며 이 단편집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이 작품은 이 단편집 전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움, 서글픔, 후회, 반성, 무서움, 두려움, 새로운 시작 등을 담고 있는 단편집은 공포 장르라기보다는 미스터리 쪽이 어울리는 공포 약간, 미스터리 잔뜩 들어 있는 특제 수프를 먹는 맛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 양념들의 각각의 맛들도 잘 배어나와 펑키호러라는 새로운 장르를 잘 맛나게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유령이라고 무조건 무서운 건 아니라는 얘기다. 유령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들이 더 무섭고 잔인하니 어쩌면 유령들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것들이 더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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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10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킨이 멋지게 바뀌었네요.
가을 아침 멋진 시간 보내세요.

제목도 그렇고 표지도 그렇고 눈에 들어오네요.

물만두 2007-09-10 11:17   좋아요 0 | URL
님도요^^
읽어보세요~

레몬향기 2007-09-10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편집이었군요; 몰랐네요~ 내용이 궁금했는데 잘 읽었습니다 ㅎ

물만두 2007-09-10 11:17   좋아요 0 | URL
단편집입니다. 괜찮더군요. 읽어보세요^^

비로그인 2007-09-10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의 러시아 수프라니, 이런 제목은 어떻게 생각해낸 걸까? 라고 생각했건만 물만두님의 리뷰를 보니 제목만 제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벽장 속의 치요가 가장 기대됩니다.

물만두 2007-09-10 12:17   좋아요 0 | URL
엄마는 러시아인, 아빠는 일본인, 사는 곳은 중국, 시대는 2차대전끝무렵입니다. 좀 상상이 되시나요?
제목만 보면 근사해보이는데 실상은 안그렇더군요. 제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살인의 레시피>였어요. 치요는 한 작품에만 쓰기에는 좀 아깝더군요.

비로그인 2007-10-15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물만두님께 땡스 투 누르고 주문했습니다. 잠시 잊었다가 어제 서점에서 보고 다시 읽고싶어졌거든요. 몹시 기대됩니다. 후훗.

물만두 2007-10-15 14:14   좋아요 0 | URL
쥬드님이 기대하시는 이상의 작품이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