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구혜영 옮김 / 창해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가 직접 “마지막 장은 절대로 먼저 읽지 마십시오.”라고 책이 나오자 인터뷰에서 밝혔던 작품이다. 그는 그 마지막에 가장 공을 들였다고 한다. 처음을 읽고 마지막 장을 읽어볼까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뒷 표지에 이 말이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참고 끝까지 읽었다. 다 읽고 작가의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제목이 왜 “숙명(宿命)”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지막은 절대 성급하게 보면 안 된다. 이 책의 묘미를 떨어트리는 후회하는 일이 될 것이다. 부디 작가의 말을 유념하고 읽으시길.

 

어린 시절 병원에서만 있던 그 여인에 대한 추억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는 유사쿠는 경찰이 되고 큰 기업의 아들인 아키히코는 아버지의 뒤를 잇지 않고 의사가 되어 뇌신경을 연구하는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 같은 기연은 유사쿠가 사랑한 여인 미사코가 아키히코의 아내가 되어 그들이 만나게 만든다. 자칫 진부해질 수 있는 이런 삼각의 구도를 멜로가 아닌 미스터리라는 틀 안에서 멋지게 녹여 내며 작가는 그들의 과거와 현재로 독자를 초대한다.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부잣집 도련님을 이번에야 말로 사건으로 이겨보겠다고 열의를 보이며 독화살 살인 사건에 뛰어든 유사쿠는 그 이면에 감추어진 아키히코의 숨겨 놓은 비밀을 밝혀내려 애를 쓰고 아키히코는 그 비밀을 숨기며 철벽의 알리바이를 만들어 낸다. 그 알리바이를 무너트리고 독화살의 범인을 찾는 것이 하나의 드러난 사건이라면 유사쿠가 아버지의 유언처럼 간직한 미해결 사건을 조사하려는 과거의 사건은 드러나지 않은 이 작품의 진짜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의 조사 과정과 정교한 미스터리적 장치들, 사회성 짙은 과거의 밝혀지는 모습들 속에서 작가의 이야기를 우리는 들을 수 있다.

 

인간의 인생이 이렇게도 얽힐 수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되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밝혀지는 진실은 실로 무시무시하고 마지막은 이것이 진짜 미스터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를 외치게 만든다. 인간이라는 미스터리 말이다. 그리고 숙명에 대한 미스터리이기도 하고. 인간의 숙명이란 어떤 것일까? 비록 원하지 않았더라도 해야만 하는 길로 들어서게 만들고 사람들이 할 일을 준비하는 것이 바로 숙명이다. 다 읽고 난 뒤 유사쿠가 경찰이 된 것도 아키히코가 의사가 된 것도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조종당하는 느낌이라는 미사코의 기이한 인연까지 모두 숙명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게 된다. 과거를 살아가는 유사쿠의 모습과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아키히코의 모습의 대비는 그대로 이 작품의 사건들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 주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정교하게 짜여 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미스터리를 읽다가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슬프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는 인간 드라마를 본 느낌이 들게 만드는 것이 인상적이다. 그 한 장면은 책장을 덮은 뒤에도 계속 여운이 남아 마치 자막이 내려가는 동안 정지된 필름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감동까지는 아니더라도 그것으로 작가가 미스터리라는 소재를 통해 얼마나 다양한 것을 담아내려고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마 이 작품을 보지 않는다면 히가시노 게이고를 안다고 그의 작품을 이해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작품을 보며 비로소 작가에게는 인간과 그 인간이 간직한 비밀이라는 것이 미스터리의 바탕임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미스터리가 약간 허술하기도 하고 미스터리가 아닌 것 같은 작품들도 미스터리로 등장하고 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이 미스터리였다는 것을 알고 나니 이제 그의 작품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알 것 같다. 그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은 이 작품이 너무 늦게 번역된 탓도 있고 내 아둔함 탓도 있지만 그만큼 작가가 다방면에 여러 소재를 뛰어나게 사용했다는 반증이라는 생각이 들어 작가가 새삼 다시 보인다.

 

세상에는 절대적인 비밀이란 없다. 그 비밀을 풀기 위해 미스터리를 끊임없이 파헤치는 것 또한 인간의 숙명이다. 그러므로 비밀이란 미스터리의 숙명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가 지향하는 작품의 “숙명”이리라.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홍수맘 2007-06-02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찜해 놓은 책 중에 하나랍니다. ^ ^.

물만두 2007-06-02 1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홍수맘님 아주 재미있습니다^^

sayonara 2007-07-26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출간일이 90년도라... 이걸 읽어 말어...
"서재가 음산해졌어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