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의 한계를 아름답게 메꿔주는 영화.
내가 있었던 공간, 들었던 음악, 보았던 공간, 맡았던 냄새, 보았던 사람, 느꼈던 기분을 시간이 흐른 뒤 그대로 추억한다는 것은 정말 가능할까?
보통의 방법이라면 사진을 찍거나 필름을 남기고 녹음을 하거나 기록을 하는 정도겠지.
그렇다면 그 기록물을 다시 들추어본다고 해서 인상이 남았던 그 지점을 얼마쯤이나 복구할 수 있을까?
입맛도 변하고, 청각도 변하고, 혹시나 연출 되었던 경우라면 자신의 기억력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기억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란 현재로선 정말 불가능해보인다. 또 잊지 않으려는 것은 욕심일 뿐이다.
그런 욕심을 버리고 호우 샤오시엔의 야스지로 속으로, 요코의 기록과 하지메의 녹음 속으로,
장 웬예를 추억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2003년의 도쿄와 야마노테 선의 기억 속으로 그들의 얘기와
내 일상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러 갔다.
상영시간을 턱 앞에 두고 당도했으나 안심은 커녕 볼멘 소리만 나왔다.
예정에도 없던 호우 샤오엔의 깜짝 무대인사가 있었다.
마스터 클래스와 강연은 포기하고 있던 차에 얻은 횡재였건만, 벌써 마무리 멘트다. 조금 더 일찍 도착할 걸.

'날 좋은 날 카페에 앉아서 몽롱한 기분으로 앉아 추억을 회상하는 기분으로 만든 영화라 스토리가 강하지 않고, 리듬도 느려서 보면서 조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고 덧붙여 잘 주무시고 좋은 꿈꾸라고 빌어주기 까지 했다.
그래서일까? PIFF 홍보 필름의 아기 웃음소리 까지 흉내내며 부산스레 움직이던 내 옆 관객은 영화가 시작되고 첫 씬의 요코가 빨랫줄에 옷을 두개째 널 때 부터 머리를 접고 졸기 시작했다.
처음 등장하는 요코의 방은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야스지로의 그런 방이다. 요코는 친구와 통화를 하며 빨래를 널고 있고 요코의 통화를 통해 대강의 짐작을 하느라 머릿속이 부산스레 움직였지만, 나중에 가선 끼어맞추기 놀이는 그만해버릴 걸 하는 후회를 하고 말았다. 스릴러도 아닌데 나름대로 조합을 맞추느라 열심이었다. 오즈 야스지로와 이 영화의 상관관계 말이다.

그냥 편하게 즐기면서 보면 되는데, 궁리하면서 보는 이상한 습관이 뭐냔 말이다. 전철이 지나가고, 딸의 사정이 있고, 식구들과 방에서 식사를 하고, 이웃이 찾아오는 일들에 굳이 무릎을 칠 필요도 없는데 말이야.
대만에 애인과 함께 있다 임신을 한 채로 집에 돌아온 요코(HITOTO Yo )는 자신의 친구 하지메(ASANO Tadanobu)가 일하고 있는 고서점을 찾아가 하지메가 구한 시디를 들으며 장 웬예라는 음악가의 얘기를 한다.
일본에 살았던 대만 가수로 독학으로 성악을 터득했으며, 그가 자주 가곤 했던 카페
와 주변부 이야기를 쓰고 싶어하고, 하지메는 도쿄의 모든 종류의 지하철과 전철, 발차 소리, 안내 방송, 사람들이 말 소리 까지 모두 녹음하는 틈틈이 요코가 말하는 카페 찾기를 돕는다.

한편 요코는 아버지(KOBAYASHI Nenji)의 마중으로 집에 돌아가 평소와 다름없이 잠을 자고 밥을 먹고나선 임신을 했으며 미혼모가 될거라고 말하지만, 아버지와 새어머니(YO Kimiko)는 요코에게 아무런 다그침이나 조언도 없다. 옛날 마음이 있었던 친구 세이지(HAGIWARA Masato)와의 추억을 꼽씹으며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요코는 다시 도쿄로 돌아온다.
요코는 간밤에 아기를 뺏기고 대신 얼음아이를 얻는 꿈을 꾸고, 하지메에게 전화를 하고, 자신이 그 동화를 본 적도 없는데 고블린의 동화와 유사한 꿈을 꾼것에 감탄한다.

카페에서 우유를 마시고 고즈넉히 시간을 돌아다보면서 세이지와도 다시 재회하지만, 그는 요코의 주위에 변함없이 편히 머물러 있는 친구일 뿐이고,
하지메와도 기차를 타고 장 웬예의 카페를 찾아 함께 다니지만 자신에게 마음 써 주는 좋은 친구일 뿐이다. 미래에 대한 설계도 없이 요코가 매달리는 것은 장 웬예의 카페 뿐이다.
그동안 자신이 좋아하는 감자조림을 가지고 도쿄로 찾아 온 부모님과의 한때도 일상처럼 흘러간다. 어떻게 보면 가족의 위기에 직면한 시점에도 유쾌한 해프닝들이 일어나는 자잘한 순간들이 있다. 요코의 어머니가 요코와 요코의 이웃에게서 술과 잔마저 빌리는 그런 장면들은 언제나 일상의 무거움에 숨통을 트이게 한다. 예
전의 도쿄 지도를 기억하는 카페 주인의 도움으로 장 웬예를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평소와 변함없이 타고 가는 지하철 안에서 녹음작업에 여념이 없는 하지메와 변함없이 마주친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 다음으로 ASANO Tadanobu가 직접 그래픽 작업한 기차들의 이미지처럼 도쿄의 지하철들이 제각기 스크린을 가로지르며 지나간다.
기차, 지하철. 참으로 이 영화엔 많이 등장하는 소재다. 야마노테 선은 물론 전철, 경전철, 소형 열차 등 많은 종류의 열차가 등장인물과 기억들을 실어 나른다.
하지메에겐 실어 나르는 기억보다는 생활의 편리와 일상의 기억이 함께 담기는 기록이 된다.
그리고 감독에게는 오즈 야스지로에게 이르는 촉매제가 되고, 뤼미에르 형제의 그 까페에 가 닿는 시오타역의 기차와도 같다. 영화 내내 무수히 많이 나오는 역의 모습과 소리들은 하나도 똑같은 것이 아니었다.

기차를 타면 목적지와 경유지가 틀리고, 오즈 야스지로와 호우 샤오시엔이 표현과 시대가 틀리듯, 영화를 보는 우리의 일상도 그 빛을 달리한다.
역시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모습도^^; (카페 뤼미에르를 보고 나올 때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주무시고 나왔던 것 같긴 하더라)
커피 향기 가득한 카페의 창가에 앉아, 따뜻한 볕을 등지고 나의 기억과 다른 사람의 기억을 훑어가며 만끽하는 오후의 심심한 여흥에 꽤 기분이 좋았다.
일상을 꼼꼼히 기록할 수 없겠지만, 흘러가 버려도 추억할 수 있는 그런 기억으로 채워 보려는 욕심은 괜찮을 듯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