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이야기가 지금은 더 이상 특별한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디서나 일어나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던가, 또는 현실이던가 아니면 개똥 밭이던가. 그런 흔하디 흔하고 지겹도록 굴려먹고 있는 연인의 이야기를 켄 로치가 한다면 이런 것이다.
켄 로치를 익히 알아 온 팬들이라면 의외라고 단박에 말하겠지. 사실 <<빵과 장미>>에서 노조원 샘과 멕시코 이민자 마야의 사랑 이야기가 나왔었지만, 왠지 불편했었다. 연대에서 자연스럽게 뻗어진 친밀감인지, 동정에서 시작된 이타애인지 의문이 갈 정도였니까.하지만 계속 바닥으로 떨어지는 인권에 떠밀려 에피소드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런 켄 로치가 연인을 소재로 사랑의 떨림을 웃기지만 로맨틱한 연출로 살려내고 있지만 연인의 이야기로 단정싶고 싶지 않은 많은 것들이 욕심나게 담겨 있는 영화 <<다정한 입맞춤>>
사랑은 익숙한 단어만큼도 간단하지 않다. 나와 같아서 사랑하고, 나와 달라서 사랑한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오래 사랑하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오래라는 것은 각각의 타인에게 얼마쯤의 시간을 말하는걸까? 얼마쯤 이라는 약속을 사랑이라는 감정에 묶어두기 위해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묶여 온 제도에 서로를 갖다 맞춘다. 그리고 그 제도는 형식마저 제각각 틀리다. 인종, 나라와 역사, 문화와 관습, 가치관, 그리고 기호에 이르기까지.
사랑하는 연인이 결혼을 한다. 내가 아닌 타인을 끌어 안을 수 있다면 얼마까지 가능할까? 혹시나 내가 버랴야 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얼마만큼 일까? '당신을 사랑해, 목숨까지 다 바쳐서' 그러나 우리에겐 목숨을 다 바쳐도 사랑과 흥정할 수 없는 일들이 많기에 일어나는 많은 갈등을 알고 있다.
그 대표적인 몇몇을 들추는 두 연인의 다정한 입맞춤에서 발견한다.
카심의 여동생은 수업시간의 발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파키스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신의 종교에 대해 아주 당당하다. 그것은 그 지역의 유수한 대학에서 정치학을 수료한 카심의 누나도 마찬가지다. 아들 카심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후 최근 DJ로 일하다 친구와 동업해서 클럽을 차릴 꿈에 부풀어 있다. 자식들의 안정된 결혼만이 최대의 관심사인 아버지는 아들의 집을 증축하는 즐거움으로 살며, 어머니는 딸의 혼사를 두고 자식들 자랑에 여념이 없는 우리와 별 다를바 없는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이 있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영국의 글래스고라는 것.
여동생은 사람들의 문화적 편견으로 따돌림과 놀림을 당하고, 부모님이 경영하시는 슈퍼만 해도 백인의 애완견이 볼일 보는 변소와 다를 바 없다.
그러한 환경의 카심은 어느 날 동생이 다니는 미션스쿨의 음악 선생 로신과 사랑에 빠진다. 누군가를 만나고, 설레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붙잡을 구실을 만들고, 키스하고, 섹스하고 이 둘의 사랑은 여느 연인들 못지않게 달콤하다. 사랑할 때는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카심의 결혼 계획은 카심이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진도가 더 빨라지고 급기야 두 사람의 만남은 문화의 충돌이자 인종과 종교의 범위까지 이어져 모든 것이 문제화 된다.
카심이 사랑한 그녀 로신이 미션스쿨의 선생이고, 별거중인 카톨릭 교도에, 카심보다 몇살 많은 영국 본토박이 백인이라는 것과 부모는 없는데다 순종적인 성격은 없지만 자립심 강하다는 것, 카심 또한 가부장적인 가족 분위기에서 애지중지 길러진 아들이라는 것과, 무슬림 교도로서의 지역적인 평판을 중시하는 문화, 그의 모태신앙인 종교, 우유부단하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이 서양사회보다 더 두터운 것 뿐이라는 것 등등이 그들을 괴롭힌다. 가족을 사랑한 나머지 여성을 사회로 진출시키지 않는 <<슈팅라이크 베컴>>의 일화들이 여기서도 발견된다. 그래도 <<슈팅..>>과 차별되는 켄 로치의 시선은 이들의 관습을 비하하고 수준 낮은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데 있다. 그가 주력하는 것은 낯선 관습이 서로 부딪히는데서 오는 것이지, 한 쪽의 관습이나 문화가 다른 문화에 종속되어야 할 이유를 역설하는데 있지 않았다.
카심의 어머니는 병으로 쓰러진다고 위협을 하고, 정혼자인 사촌 재스민은 영국으로 날아오고,
아버지는 아들의 신혼집 증축을 끝내고, 누나는 카심이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 때문에 파혼 당하게 되었다고 울고, 급기야는 로신을 불러내 로신 없이도 카심이 가족과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려 한다. 로신은 상처받은 자존심을 수습하기도 전에 이교도와 동거를 하고 있다는 문제로 학교 위원회로부터 해고를 당한다.
이러한 문화적 문제들을 산적해 두고도 우리에게 이 영화가 다정하게 끌어당기는 것은 두 연인의 다툼과 사랑, 헤어짐과 재화, 일상적인 순간들을 스크린에 열심히 쏟아 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카심에게 일방적으로 가족을 버리고 자신을 선택하라고 종용하는 로신을 보고 백인의 우위의식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사랑하는 이에게 충분히 요구할 수 있는 그런 권한처럼 보이게 만드니까. 사업의 사활이 걸린 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버리고 가족에게 달려갔을 거라고 믿으며 화를 내는 그녀의 모습은 보통의 연애가 아닌가.
과거의 켄 로치처럼 영화에 나타낸 좌파적 행동으로 무장한 영화화는 아니지만, 은유적으로 배어 나오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다. 종교와 인종에 대해서, 가족과 문화에 대해서, 사람과 사람에 대해서 그가 말하는 것들은 여실히 묻어나고 있다. 세상이 금방 바뀔 턱은 없지만, 무엇 때문에 바뀌어야 하는지, 왜 혁명을 꿈꿀 수 밖에 없는지 우리의 생활을 들춰내며 그가 조용히 묻고 있다.
마지막 수업에서 로신은 Billie Holiday의 "Strange Fruit"이 흐르는 가운데 1930년대의 흑인린치 참상이 담긴 스틸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다정한 입맞춤을 영화 마지막에 보았건만, 잔상으로 남는 것은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했다'가 아니라 그들이, 아니 우리가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를 반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