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재업고튀어, 재밌습니다!

변우석은 멋지고, 김혜윤은 정말, 정말 정말 예쁩니다!

저는 이걸 초5 딸이랑 같이 봅니다. 


인생1회차 솔이는 사고로 다리를 잃고 병실에서 갓 데뷔한 보이밴드 멤버 선재의 전화를 받습니다. 퉁명스럽고 쌀쌀맞게 받았지만, 그래도 건네는 선재의 따뜻한 말에 다시 살 마음을 먹고 선재의 팬이 됩니다. 솔이에게 선재는 하늘에 뜬 별과 같은 존재라서, 콘서트가 끝난 한강 다리 위 고장난 휠체어를 탄 채 만난 선재에게 바들바들 떨면서 살아있어줘서 고맙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날 밤 선재의 죽음을 뉴스로 듣고는 첫번째 타임슬립을 합니다. 

솔이의 타임슬립으로 운명은 조금씩 달라지고, 각각의 선재와 솔이는 조금씩 다른 경로로 다시 만납니다. 

저는 내내, 인생 1회차 선재의 죽음이나 2회차 선재의 죽음이 자살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랫동안 좋아한 솔이가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깊은 절망일 거라고도 생각했구요. 그런데, 딸래미는 저 사람이 범인이잖아, 그럴 리 없어,라고 말해줍니다. 1회차 선재의 죽음이나 2회차 선재의 죽음의 경위는 이미 지나가버렸고, 드라마는 그걸 알려줄 리 없지만, 3회차 선재의 죽음?이 드러난 것처럼 범인의 보복살해방식이 달랐던 걸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절망한 사람을 죽이기는 좀 더 쉬워서, 1회차 선재나 2회차 선재는 상처없이 스스로 죽인 거라 오해받을 상황에 죽음을 맞은 걸 수도 있으니까요. 알려줄 리 없는 사실이지만, 그 죽음들을 솔이가 알면 알 수록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재는 어떠한가요. 사랑에 대한 판타지의 응축이라는 면에서, 선재의 지고지순함은 너 대신 죽은 거라면, 나는 괜찮다고 어제는 세번째 타임슬립한 솔이한테 이야기합니다. 

1회차 선재는 고백도 못하고 짝사랑한 이웃집 여자애가 위험에 처해서 교통사고를 당하는 걸 눈 앞에서 보고, 그 아이를 구하고도 '죽게 내버려두지, 왜 살렸냐'는 원망을 듣습니다. 그러고도 '살아달라'고 '꼭 살아있어달라'고 모르는 사람인 채로 당부하는 아이돌이 됩니다. 이제 그 이웃집 여자애는 휠체어를 타고, 꼭 살아있어달라던 그 아이돌의 팬이 되어, 아무 것도 아니던 선재의 마음은 끝끝내 모르는 채로, 팬으로의 사랑을 말할 뿐입니다. 

2회차 선재는 타임슬립한 솔이의 어마어마한 사랑을 짧은 순간 받고, 어리둥절한 채로 내쳐져서는 역시나 아마도 솔이의 사고를 목격하고 역시 또 죄책감을 품고 살아가다가, 자신을 모르는 오랜 사랑 앞에서 절망감을 품은 채로 영문 모르게 죽습니다. 

3회차 선재는 살았고, 솔이에게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솔이는 선재의 팬이 아니고, 선재는 경쾌하게 살아가다가 솔이를 다시 만나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범인의 칼을 맞고는 위중한 상태에 빠집니다. 

다시 솔이는 세번째 타임슬립을 합니다. 이제 조금은 다른 시기, 대학생 시절로 갔습니다. 이게 10회차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지고지순한 첫사랑을 품은 남자애의 환상은 얼마나 강력한지, 사랑하지만 사랑받을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는 여자애의 사랑은 얼마나 달콤한지, 시간이 어긋난 사랑 속에서 그 둘이 마주보는 순간은 또 얼마나 짜릿한지 이걸 보는 내가 너무 단 사탕을 먹은 것 같은 느낌이 됩니다. 

열아홉 남자애의 마음과 서른 넷 여자애의 마음이 만나는 게 지금 시대가 그런 것 같았습니다. 뭐 그렇지만 정말 그런가, 는 잘 모르겠습니다.  

열아홉의 잔인한 마음은 나 좋다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자기 마음 가는 대로 흐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1회차 솔이가 선재의 마음을 모르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기는 합니다. 선재는 솔이의 오해를 내버려뒀고, 한 번도 마음을 알려준 적 없으니까요. 그런 솔이가 잔인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걸을 수 없다는 절망감을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게 쏟아냈다는 것도, 그 사람이 그 앞에 서 있었다는 것도 솔이의 잘못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저 그런 때가 있는 거니까요. 타인의 마음을 찬찬히 돌아보는 심정 같은 건 살아가면서 익히는 어떤 게 아닌가. 사랑이라는 감정의 잔인함은 자신의 마음에 생기기 전에는 타인의 감정 따위 보이지 않는 게 아닌가, 말입니다. 

타임슬립처럼 불가능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고 보는 이유는, 어긋나는 시간에 대한 한탄일 겁니다. 어긋나는 시간들 속에서 용케도 살면서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마음의 시간과 네 마음의 시간이 어긋나도 어긋난 채로 감당하는 마음들도 대단하구요. 

다시 또 월요일의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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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설명을 이상하게 하니까 아들이 한참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에 질문을 했는데, 이게 너무 어려워서 또 이상하게 설명했다. 

주말에 과학토론 심사를 받고 자기보다 잘 한 친구때문에 풀 죽어서는 이마트에 가자고 나선 길이다. 아들은 전기가 이상하다면서 질문을 했다. 

"있잖아. 전기에서 움직이는 건 전자잖아? 전자는 음극에서 양극으로 가는데, 전류는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른다고 하잖아? 우리는 이제 움직이는 건 전자라는 걸 아는데, 왜 흐르는 건 양극에서 음극이라고 하는 거야?"

"..."

"..."

"... 음. 과학의 설명은 어차피 다 헛소리야. 우리가 차를 타고 달릴 때 창밖을 보면 막 나무가 뒤로 가는 걸로 보이잖아. 그러니까 티비에서 차타고 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차는 가만히 있고 옆에 배경을 움직여서는 우리가 그렇게 보게 하잖아. 사람들은 마이너스가 움직이는 걸 못 본 거야. 움직이는 건 마이너스지만, 플러스만 보고 있으니까 아 전류는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르네,라고 보고 다음을 다음을 설명하는 이야기들을 만든 거야. 그러고 나니까, 나중에 아 진짜 움직이는 건 마이너스를 가진 전자네,라는 걸 알아도 뒤에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어쩌지 못하는 거야. 설명이 이대로 남아 있어도 잘 설명이 되니까."

"뭔가 이상한데." 

"그렇지."

"전자도 2,8,16? 뭐 이런 식으로 첫 궤도에는 두 개, 두번째 궤도에는 8개, 그 숫자가 들어차야 안정되잖아. 그러니까, 두번째 궤도에 여섯개밖에 없으면 다른 데서 두 개 가져오거나, 여섯개를 버리나?"

"다른 거랑 손을 잡지. 그러면 좀 궤도도 바뀌고 안정감도 바뀌고. 그러니까, 화학적 성질이 비슷해지는 거 같은 게 생기지."

그런 게 그저 다 이야기라는 걸, 언제 알게 되려나. 그게 다 이야기이고, 실상은 구름처럼 흐릿하고 불투명하다는 걸 받아들이게 될까. 

아직은 선명해서 과학이 재밌을 텐데, 내가 너무 일찍 이야기를 혼돈에 밀어넣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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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4-04-23 1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에게 과학설명을 하실수 있다니 별족님 참 대단하셔요^^
 
적군파 - 내부 폭력의 사회심리학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지음, 임정은 옮김 / 교양인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남편책이고, 오래 꽂혀 있었다. 궁금하네,라고 생각했지만 시작하고 얼마 안 지나서, 이런 얘기 흔하잖아,라고 생각했다. 

미국인 사회학자가 텔아비브 공항의 폭탄테러에 가담한 일본인을 인터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일본 내 공산주의? 조직 내부에서 벌어진 숙청사건에 대해 쓴 책이다. 

젊은이의 결벽성, 이념의 경직성, 고립된 조직. 

일본에 공산주의를 이념적 지향으로 삼는 조직 두 개가 연합해서 탄압을 피해 산중에 비밀리에 모였다. 모여서 함께 하는 와중에 내부자를 숙청한다. 사소할 수도 있을 말이나 행동이 이념적 지향과 다르다고 폭력으로 깨우친다면서 직접 때리고, 결국 죽은 '동지'를 이념적으로 스스로를 넘어서지 못한 '패배사'로 규정한다. 그렇게 처음, '이탈자'를 죽이고, '동지'들을 숙청하고, 경찰 탄압에 맞서는 영웅적 서사 다음에 선 법정에서 동지의 살인자로 재판받는다. 

다 읽고 나서 남은 감상은 관찰자의 문화적 차이다. 내가 짧게 궁금하다고 생각하고도 오래도록 펴 보지도 않은 것에는 그렇게까지 궁금하지 않았던 게 있는데, 미국인인 저자는 더 오래 궁금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연구하고 책도 썼을 것이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읽을 때 가졌던 서구인의 무정부적 이상향에 대한 태도가 드러나는 것도 같다. 젊은이의 순수함이 어떻게 왜곡되었나,나 이데올로기는 잘못이 없는데, 사람들이 저지른 일탈처럼 묘사하는 것도 같다. 그런데 나는 이데올로기나 종교나 잘못이 없을까,라고 생각하고 있다. 같을 수도 있다고 믿는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고양시키는 어떤 태도가 다른 존재를 용납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치닫는 것은 얼마나 순식간인가 싶기도 하다. 종교보다는 정치가 고양되는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숙청 사건을, 정치보다 종교가 고양되는 서구인의 관찰기록으로 보는 것은 덜컹거린다. 종교적 숙청을 수도 없이 자행한 서구인의 눈에는 정치적 숙청이 생경하겠지만, 동아시아인인 나는 왜 저 관찰자는 자기는 아닌 척 말하는 걸까, 싶기까지 했다. 관찰자가 가지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옹호하는 심리도 느껴져서 뭐지, 싶기도 했다. 이데올로기가 그렇게 중요한가, 싶다. 



이러한 이론을 밀고 나가다 보면 결국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 같은 행위는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범인이 정신장애인이니 책임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정신장애에 다른 사람이 책임을 질 수도 없다. 나아가 이렇게 생각하면 사건의 원인을 정치, 사회적 상황에서 찾을 책임에서 모든 사람이 해방되고 문제는 개인의 심리 상태라는 차원에 묻히고 만다. 따라서 미국인은 일본의 다른 집단까지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에 공적 책임을 지고 나서는 데 크게 놀랐다. 책임 의식에 관한 일본인의 사고방식은 미국인에게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 p67


이것과 꼭 닮은 사례로 1930년대 에스파냐 내전의 국제 여단을 들 수 있다. 그들이 에스파냐에서 벌어진 지역 분쟁에 다 같이 참여한 배경에는 더 큰 목적을 이루겠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들이 지원하는 투사들에게 개인적으로 공감하는 동시에, 더 큰 이념젹 관련성 때문에 에스파냐로 향한 것이다. - p73


당을 떠난 사람들에게 공산당의 지도가 사라졌다는 것은 이론과 방침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최후의 심판에서 해방되었음을 뜻했다. 학생들은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고 창조하도록 자유롭게 풀려나 이데올로기를 두고 마음껏 논쟁할 수 있었다. 다음 10년간 당파 분열이 계속 이어졌고 새로운 조직은 학생 운동 안에서 서로 경쟁하는 파벌, 즉 섹트로 급격하게 불어났다. 분열의 원인이 된 논쟁이 무엇이든 간에 새로운 섹트는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고자 독자적 이데올로기를 구축했다. 그러나 그 알맹이는 그들의 선배와 동료들이 지닌 이데올로기와 거의 다름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섹트마다 특징적인 스타일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대부분 일본공산당의 틀을 계승하여 수입을 얻고 조직을 유지하는 확고한 원천인 지방 학생 조직을 지배하고자 경쟁했다. -p 95


게다가 적군파 이론은 적군파에 속한 일본 청년 병사들을 그야말로 활동의 중심에 세워놓았다. 선택받은 일본 청년으로서 세계 혁명 전쟁에서 자신들이 전위라고 자각하기란 쉬운 일이었다. 요컨대 적군파 멤버들은 일본에만 머무를 필요가 없었고 훈련된 일본의 기동대와 독선적인 일본 대중을 상대로 하여 허무한 충돌을 거듭하며 좌절감에 빠질 필요도 없었다. - p100


적군파 초기 지도부는 적군파를 만들어 분트에서 떨어져 나오기 전에 이미 분트 내부에서 어느 정도 지위에 올라 있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대부분이 대학 4학년이거나 유급한 학생이었다. 한편 모리의 군대는 어린 학생이나 노동자가 섞여 있었던 다이보사쓰 고개 그룹과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다이보사쓰 고개 그룹만큼 소박하지는 않았지만 이론 투쟁에 아주 능숙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단 그들이 지하 군대에 들어간 동기는 대부분 모험을 꿈꿨다기보다는 순수하게 혁명에 의한 변혁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 p133


증언에 따르면 모리는 악당이라기보다 자기 기만에 능숙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오자키의 죽음을 합리화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지도에 실패했음을 인정해야 했으리라고 모리는 자백과 비슷한 자기 비판 과정에서 이야기한다. 따라서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그럴듯한 해석을 쥐어짜내야 했고 실제로 그런 해석을 찾아냈다. 모리의 이론이 강력한 설득력을 지녔던 것은 바로 그 이론이 다른 멤버들도 공유하던 문제를 해결해주는 자기 기만이었기 때문이다. 감정적인 면에서 모리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상태였다. 단 그에게는 사태를 즉시 정당화할 수 있는 창조적인 힘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 분석을 밀고 나아가다 보면 결국 모든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만든 사람의 자기 기만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의도는 그런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이데올로기가 진실되게 가리켜 보여주는 사회 상황을 간과하게 될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지성과 창조성을 경시하게 된다. -p200


야마다의 의견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모리도 이 도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모리는 정신과 육체의 고차원적인 결합에 의해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선(禪) 사상에 기반을 둔 무사도 정신을 공산주의화 개념에 적용하여 야마다의 비판을 물리쳤다. 이런 생각은 전쟁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와 꼭 닮았다. 열정에 불탄 수많은 군인들은 이런 관념을 믿었기 때문에 적국이 군비 면에서 얼마나 우월하든 간에 일본군의 정신력으로 적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p206


나가타는 가와시마의 의견을 이론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가타는 1969년에 가와시마에게 성폭행당했다. 당시 가와시마는 혁명좌파의 최고 지도자였고 나가타는 같은 조직 내 여성 운동 분야에서 지위가 중간 정도 되던 조직 운영자였다. 열성적인 활동가였던 그녀는 성폭력 때문에 운동에서 발을 빼기는 싫었다. 그러나 동시에 혁명좌파 내부에서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다룰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혁명좌파의 방침은 여성은 여자이기 전에 먼저 혁명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성폭력 문제, 남자의 성적 우위 문제는 혁명좌파의 관심 밖이었다. 게다가 가와시미는 최고 지도자였고 나가타는 하부 여성 멤버엤다. 나가타는 성폭력 문제를 제기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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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집에 온 큰 아이가 일찍 깨서 같이 집을 나선 날, 차 안에서의 말들이다. 

아이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는 중인데, 갑자기 

"아비지옥이 뭐야?"

"모르겠다. 지옥이 여러개인데"

"나태지옥밖에 모르겠네. 에이, 검색할께."

폰으로 검색해서 나온 아비지옥,은 범어 아비치의 음차로 가장 큰 죄를 지은 죄인이 가는 지옥으로 고통의 간극이 없이 계속되는 무간지옥과 같다, 고 나왔다. 

"무간지옥이랑 같은 거네."

"그런데 고통에 간극이 없어? 그러면 그게 고통인가?"

"고통이 고통이려면 고통아닌 순간이 있어야 하는데, 쭉 고통이면 익숙해지는데. 고통에 간극이 없으면 고통이 고통인 줄 모르게 되는 거라서 거기는 그냥 무척 권태로운 지옥인가?

"에? 최악의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가는 지옥인데 고통이 없다고? 이상한데."

"이상한가?"

그러면서 책의 그 대목을 잠깐 읽어주는데, 역시 사람 생각은 거기서 거기네, 싶었다. 

고통이 간극이 없이 계속된다,는 말은 고통이 최대치를 늘 갱신하면서 상승하는 것인가, 그래야만 고통을 고통으로 인식할 수 있는 거다,라고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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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민'이라는 말이 좀 웃기다. 

'시민의식을 보여달라'는 어떤 종용을 들으면 콧방귀를 흥, 뀌고는 '나는 면민인데, 메롱'한다. 

촌년,이라는 말도 들었고, 내 자신이 그걸 감추려고 한 적도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시민이 아니라서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이를 도시 아닌 곳에서 키우는 것에 걱정을 많이들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아이는 도시 아닌 곳에서 자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시는 분업으로 굴러가는 곳이라,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는 온전하게 스스로를 책임지는 어른이 되지 못한다. 

도시 밖에서 먹을 걸 가지고 들어와서 도시 안의 쓰레기를 도시 밖으로 밀어내는 존재들이 거대한 허영과 우쭐함으로 스스로를 부풀리는 도시에서 사는 마음은 어리석음이 고양된다. 


그런 면에서 서양은 도시국가 이상이 되지 못했다고도 생각한다. 자국민의 불만을 식민지로 해소하는 마음은, 작지.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은 신이 해 주십사 하는 마음도 어리기 짝이 없지.  



1. 춘추전국이야기 1 : 춘추의 설계자 관중


나는 관중이 '촌놈'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필자가 관중에 대한 고적을 찬찬히 검토하면서 얻은 결론은 두 가지다. 하나는 관중이 근본적으로 심성이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관중이 처음부터 끝까지 '야인野人' 곧 촌놈이라는 사실이다. 순자는 공자의 말을 빌려 관중이 천자를 보필할 교양인이 아니라 예를 모르는(교양이 없는) '야인'이라고 평했다. 관중은 소인이 아니라 야인이다. 고대에서 야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도성 밖의 사람, 곧 귀족이 아니라는 뜻도 있다. 그런데 도성에 기반을 두지 않은 인간이 오히려 패업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역시 큰 인물이 되려면 뛰어난 야성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순자의 의도와는 물론 다르지만, 점차 야성을 잃어가는 현대인이 듣기에 '야인'이라는 말은 꽤 매력적인 말이 아닌가? -p166


 공자가 보는 관중은 어떤 사람인가? 공자는 예를 목적으로 보고 극히 중시하지만, 관중은 예를 다만 도구로 보았다. 예를 근본으로 하지 않는 사람은 공자가 말하는 진정한 교양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관중은 예에서 엄격하지 않지만 근본적으로 '착하다'(仁). 공자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공자 스스로 관중이 인하다고 했는데, 공자가 보는 인은 예에 비해 어떤 것일까? 

 사람이 되어 인하지(착하지) 않으면 예는 알아 무엇 하며 음악은 알아 무엇하리요[人而不仁如禮何 人而不仁如樂何]? - 『논어』「팔일 八佾」-p171


도시인의 세련된 친절함이 도시라는 문명 밖에서도 유효할 수 있을까, 삐딱한 마음으로 본다. 자신의 주장에 따르는 불편이 자신에게는 올 리 없다는 음흉한 마음을 감춘 어린애같은 존재들이라고도 생각한다. 


2. 유교와 여성

https://blog.aladin.co.kr/hahayo/15272244


'시민사회'나 '공공 영역'의 개념은 서구 자유주의 전통의 발명품이다. 그리고 '시민사회'의 존재를 [이상적인] 규범으로 가정하는 것은 사실상 서구의 역사적 현실을 비서구사회의 이상화된 발전 경로로 투영하고 결과적으로 대안적인 발전 모델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 53%


이런 대목을 만난다. 계속 다르다고, 심정적으로 부인하려는 어떤 태도에 대한 해석이 가능한 대목은 아닌가 생각한다. 


왜 저렇게 싸운대? 싶은 서양의 날 선 태도들을 구경하면서, 억압이라면 억압일 나의 사고방식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 그걸 왜 드러내려고 하는 거야? 같이 살아가는 데 그게 그렇게 중요해? 같은 믿음들을 구경한다. 이슬람교도가 이슬람복식을 유지하지 못하는 한국은 억압적인 거라는데, 억압은 뭔가, 싶기도 하고 말이지. 


3. 논어 

和以不同(화이부동)을 크게 인상깊게 본 적은 없었다. 어디에라도 들어본 듯한 논어의 말들, '子曰, 君子矜而不爭, 羣而不黨'(자왈, 군자긍이부쟁, 군이부당, 군자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나 다투지 않고, 모이지만 무리를 짓지는 않는다)의 의미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지금의 대치상태를 보고 있으면, 어떤 말들은 그저 파벌을 만들어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것의 그럴 듯한 포장지인가 싶다.


같이 살아가기 위해, 무슨 태도가 필요한가. 

국가를 경영하는데 무엇이 필요한가. 

함께 이야기 하기 위해 필요한 대전제는 무엇인가. 

어떻게 같이 살아갈 것인가.  


동아시아에서, 무리를 가족수준으로 쪼갰기 때문에, 국가가 가능했다. 

춘추전국의 피뿌리는 혼란 속에서, 살아남은 정치철학이 유학이다. 그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이상국가가 조선이다. 

모든 인간은 군자라는 이상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자신의 선택에는 명분이 필요하고, 명분의 대결인 정치의 장이 세 대결이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파벌을 이루지 않은 군자인 개인들은, 명분의 대결 가운데 더 그럴 듯한 명분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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