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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파 - 내부 폭력의 사회심리학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지음, 임정은 옮김 / 교양인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남편책이고, 오래 꽂혀 있었다. 궁금하네,라고 생각했지만 시작하고 얼마 안 지나서, 이런 얘기 흔하잖아,라고 생각했다.
미국인 사회학자가 텔아비브 공항의 폭탄테러에 가담한 일본인을 인터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일본 내 공산주의? 조직 내부에서 벌어진 숙청사건에 대해 쓴 책이다.
젊은이의 결벽성, 이념의 경직성, 고립된 조직.
일본에 공산주의를 이념적 지향으로 삼는 조직 두 개가 연합해서 탄압을 피해 산중에 비밀리에 모였다. 모여서 함께 하는 와중에 내부자를 숙청한다. 사소할 수도 있을 말이나 행동이 이념적 지향과 다르다고 폭력으로 깨우친다면서 직접 때리고, 결국 죽은 '동지'를 이념적으로 스스로를 넘어서지 못한 '패배사'로 규정한다. 그렇게 처음, '이탈자'를 죽이고, '동지'들을 숙청하고, 경찰 탄압에 맞서는 영웅적 서사 다음에 선 법정에서 동지의 살인자로 재판받는다.
다 읽고 나서 남은 감상은 관찰자의 문화적 차이다. 내가 짧게 궁금하다고 생각하고도 오래도록 펴 보지도 않은 것에는 그렇게까지 궁금하지 않았던 게 있는데, 미국인인 저자는 더 오래 궁금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연구하고 책도 썼을 것이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읽을 때 가졌던 서구인의 무정부적 이상향에 대한 태도가 드러나는 것도 같다. 젊은이의 순수함이 어떻게 왜곡되었나,나 이데올로기는 잘못이 없는데, 사람들이 저지른 일탈처럼 묘사하는 것도 같다. 그런데 나는 이데올로기나 종교나 잘못이 없을까,라고 생각하고 있다. 같을 수도 있다고 믿는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고양시키는 어떤 태도가 다른 존재를 용납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치닫는 것은 얼마나 순식간인가 싶기도 하다. 종교보다는 정치가 고양되는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숙청 사건을, 정치보다 종교가 고양되는 서구인의 관찰기록으로 보는 것은 덜컹거린다. 종교적 숙청을 수도 없이 자행한 서구인의 눈에는 정치적 숙청이 생경하겠지만, 동아시아인인 나는 왜 저 관찰자는 자기는 아닌 척 말하는 걸까, 싶기까지 했다. 관찰자가 가지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옹호하는 심리도 느껴져서 뭐지, 싶기도 했다. 이데올로기가 그렇게 중요한가, 싶다.
이러한 이론을 밀고 나가다 보면 결국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 같은 행위는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범인이 정신장애인이니 책임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정신장애에 다른 사람이 책임을 질 수도 없다. 나아가 이렇게 생각하면 사건의 원인을 정치, 사회적 상황에서 찾을 책임에서 모든 사람이 해방되고 문제는 개인의 심리 상태라는 차원에 묻히고 만다. 따라서 미국인은 일본의 다른 집단까지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에 공적 책임을 지고 나서는 데 크게 놀랐다. 책임 의식에 관한 일본인의 사고방식은 미국인에게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 p67
이것과 꼭 닮은 사례로 1930년대 에스파냐 내전의 국제 여단을 들 수 있다. 그들이 에스파냐에서 벌어진 지역 분쟁에 다 같이 참여한 배경에는 더 큰 목적을 이루겠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들이 지원하는 투사들에게 개인적으로 공감하는 동시에, 더 큰 이념젹 관련성 때문에 에스파냐로 향한 것이다. - p73
당을 떠난 사람들에게 공산당의 지도가 사라졌다는 것은 이론과 방침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최후의 심판에서 해방되었음을 뜻했다. 학생들은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고 창조하도록 자유롭게 풀려나 이데올로기를 두고 마음껏 논쟁할 수 있었다. 다음 10년간 당파 분열이 계속 이어졌고 새로운 조직은 학생 운동 안에서 서로 경쟁하는 파벌, 즉 섹트로 급격하게 불어났다. 분열의 원인이 된 논쟁이 무엇이든 간에 새로운 섹트는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고자 독자적 이데올로기를 구축했다. 그러나 그 알맹이는 그들의 선배와 동료들이 지닌 이데올로기와 거의 다름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섹트마다 특징적인 스타일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대부분 일본공산당의 틀을 계승하여 수입을 얻고 조직을 유지하는 확고한 원천인 지방 학생 조직을 지배하고자 경쟁했다. -p 95
게다가 적군파 이론은 적군파에 속한 일본 청년 병사들을 그야말로 활동의 중심에 세워놓았다. 선택받은 일본 청년으로서 세계 혁명 전쟁에서 자신들이 전위라고 자각하기란 쉬운 일이었다. 요컨대 적군파 멤버들은 일본에만 머무를 필요가 없었고 훈련된 일본의 기동대와 독선적인 일본 대중을 상대로 하여 허무한 충돌을 거듭하며 좌절감에 빠질 필요도 없었다. - p100
적군파 초기 지도부는 적군파를 만들어 분트에서 떨어져 나오기 전에 이미 분트 내부에서 어느 정도 지위에 올라 있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대부분이 대학 4학년이거나 유급한 학생이었다. 한편 모리의 군대는 어린 학생이나 노동자가 섞여 있었던 다이보사쓰 고개 그룹과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다이보사쓰 고개 그룹만큼 소박하지는 않았지만 이론 투쟁에 아주 능숙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단 그들이 지하 군대에 들어간 동기는 대부분 모험을 꿈꿨다기보다는 순수하게 혁명에 의한 변혁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 p133
증언에 따르면 모리는 악당이라기보다 자기 기만에 능숙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오자키의 죽음을 합리화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지도에 실패했음을 인정해야 했으리라고 모리는 자백과 비슷한 자기 비판 과정에서 이야기한다. 따라서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그럴듯한 해석을 쥐어짜내야 했고 실제로 그런 해석을 찾아냈다. 모리의 이론이 강력한 설득력을 지녔던 것은 바로 그 이론이 다른 멤버들도 공유하던 문제를 해결해주는 자기 기만이었기 때문이다. 감정적인 면에서 모리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상태였다. 단 그에게는 사태를 즉시 정당화할 수 있는 창조적인 힘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 분석을 밀고 나아가다 보면 결국 모든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만든 사람의 자기 기만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의도는 그런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이데올로기가 진실되게 가리켜 보여주는 사회 상황을 간과하게 될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지성과 창조성을 경시하게 된다. -p200
야마다의 의견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모리도 이 도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모리는 정신과 육체의 고차원적인 결합에 의해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선(禪) 사상에 기반을 둔 무사도 정신을 공산주의화 개념에 적용하여 야마다의 비판을 물리쳤다. 이런 생각은 전쟁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와 꼭 닮았다. 열정에 불탄 수많은 군인들은 이런 관념을 믿었기 때문에 적국이 군비 면에서 얼마나 우월하든 간에 일본군의 정신력으로 적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p206
나가타는 가와시마의 의견을 이론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가타는 1969년에 가와시마에게 성폭행당했다. 당시 가와시마는 혁명좌파의 최고 지도자였고 나가타는 같은 조직 내 여성 운동 분야에서 지위가 중간 정도 되던 조직 운영자였다. 열성적인 활동가였던 그녀는 성폭력 때문에 운동에서 발을 빼기는 싫었다. 그러나 동시에 혁명좌파 내부에서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다룰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혁명좌파의 방침은 여성은 여자이기 전에 먼저 혁명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성폭력 문제, 남자의 성적 우위 문제는 혁명좌파의 관심 밖이었다. 게다가 가와시미는 최고 지도자였고 나가타는 하부 여성 멤버엤다. 나가타는 성폭력 문제를 제기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 p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