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의 유골'을 읽고 나서, 한 때 케드펠 시리즈의 애독자를 자처했던 친구들에게 생각보다 재미없더라고 투덜거리자 이건 확실히 재미있다고 추천해 준 책이 '99번째 주검'이었다. 둘이서 입을 모아 칭찬하길래 기대를 가지고 읽었는데, 확실히 재미있었다. 단숨에 읽어 버리고 흐뭇한 기분으로 책장을 덮었다.전작에 비해 풍성하게 잘 짜여진 느낌을 주는 것은 인물들의 성격이 보다 복합적이기 때문인 것 같다.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남장소녀의 이야기는 너무나 식상하지만, 나머지 인물들은 꽤 기쁘게 지켜보았다. 경건하고 우아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앞뒤 가리지 않는 열정이라든지 교활하고 믿을 수 없는 인상 뒤의 사내다운 호방함이라든지...... 역사적으로는 중요 인물이지만 여기에서는 조연으로 물러앉은 스티븐 왕의 캐릭터에도 퍽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작가가 많이 공부하고 작은 곳까지 성의를 보인 증거인 것 같아 흐뭇했다.메인인 살인사건의 진행은 이만하면 나쁘지 않다고 본다. 앉은뱅이 거지와 어부 소년이 등장하며 사건 진행이 마구 앞으로 내달리는 왕의 연회 밤의 이야기는 확실하게 시선을 사로잡았고, 망토의 복선 같은 것도 상당히 훌륭했다. 캐드펠과 휴의 두뇌 싸움 쪽은 작가가 들인 노력에 비해서는 큰 효과가 없었지만, 이것은 궁금해서 미리 뒷장을 넘겨 본 내 책임인 것 같으므로 넘어가자. 사건의 결말이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것도 이 소설의 장점이다.너무 진지해지지 않으면서도 할 말은 하고 있고, 독자 쪽도 너무 심각해질 걱정 없이 적당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연애담 쪽은 매우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경쾌하고 발랄하며 늙은 수도사의 눈으로 객관화되어 부담스럽지 않다. 부드럽게 술술 장면이 넘어가는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같은 소설이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이 책을 선택한 것에 만족한다.
중세 수도원 배경의 장편 추리소설이라는 특성상 아무래도 먼저 번역되어 나온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 역자 역시 해설에서 저 작품을 언급하고 있다. 에코와 같은 현학이 없는 것이 캐드펠 시리즈의 미덕이라는 논지인데.... 글쎄, 과연 어떨까?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이 작품에서 '장미의 이름'에서와 같은 긴박감이나 벅찬 감동이나 저자의 해박함에 기대어 중세 문화의 폭풍 속에 잠기는 즐거움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그러나, 분명 이 소설은 자기만의 강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여류 작가의 부드러운 필치와 영국 시골의 정취가 묻어나는 소박한 유머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그것이다. 극적인 긴장감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피하기 힘들겠지만 이 글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은 밝고 건전하고 반박의 여지 없이 귀염성이 있다. 더 좋은 것은 노인네들 역시 젊은이들 못지 않게 귀염성이 있다는 것이고.종교와 미신의 경계를 넘나드는 무지한 시대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는 새삼스레 관심을 보여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지만,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자존심 싸움만은 썩 재미있었다. 생각해 보면 한국도 인구에서나 국토에서나 그다지 남에게 꿀릴 만한 규모는 아닌데, 중앙집권 국가가 너무 일찍 성립해 그 위세를 유지한 때문인지 이렇다 할 지방색을 찾기 어려운 것 같아 유감이다. 잉글랜드 수도사 나리들을 감쪽같이 속여 넘기는 웨일즈 정신이란 이런 환경에 사는 우리에겐 확실히 'exotic'하다. ^^1분중 0분께서 이 리뷰를 추천하셨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이 사람이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절대 이런 글은 못 썼을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의 남성 작가들이 섬세한 글을 쓰는 것은 군대에 가지 않았기 때문일 거라고 농담처럼 얘기하는 일도 있다. 그러면 군대에 갔다 오는 한국 남자들은 어떤 글을 쓰는가? 성석제는 재미있는 예이다. 처음의 표현을 그대로 빌어 오자면 '이 사람이 한국에서 안 태어났으면 절대 이런 글은 못썼을 거야.'이다. 성석제에게 다행인가? 아니다. 한국에게 다행이다.성석제의 소설은 급속한 경제 성장 뒤에서 이리저리 뒤틀리고 병든 한국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꼬집고 있다. 그러나 그는 흥분하지 않는다. 감상에 젖지도 않는다. 현란한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며 삐딱하게 이죽거리는 그의 소설 속에서 독자는 조선 후기 고전 소설의 풍자와 해학을 떠올리게 된다. 개화기 이후 전통사회의 붕괴와 서양 문화의 급속한 이식과 더불어 우리가 잊어버린 줄 알았던 '한국적'인 웃음을 이 작가는 여봐란 듯 흔들어 보인다. 모순이 있는 한 풍자도 살아 있다. 조선조 말이거나 21세기거나, 중국을 섬기거나 미국을 섬기거나, 이 조선 땅 밑바닥 백성들의 피 속에는 풍자의 정신이, 위대한 거짓말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가 이것을 일깨우고 있는 한 우리에게 성석제는 소중하다.'궁전의 새'는 평화로운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메르헨이 아니다. 비록 이 글이 기타 리 스캔들의 해피엔딩이나 진용이의 전설적인 성공을 통해 '나는 동화요!'하고 능청스럽게 외치고 있지만, 독자 역시 배를 잡고 데굴데굴 웃으며 즐겁게만 읽을 수도 있지만, 웃음을 멈추고 이면을 헤집어 보면 어렵지 않게 심각한 메시지들을 만날 수 있다.할아버지와 유봉 어른이 사라진 은척은 우리의 잘려진 뿌리이다. 그 자리에는 글만 알았지 아무렇지 않게 어린 아이를 공장에 내다 파는 당숙과 칼만 안 든 강도 같은 깡다구와 거짓말 '은척신문'을 발행하고 1등이 내정된 노래자랑대회를 여는 유지들이 남았다. 작가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문제들만 늘어놓고 무책임하기 짝이 없게도 해피 엔딩의 메르헨 세계로 돌아가 버린다. 그를 비난하는 것도 부질 없는 일이다. 이런 도피까지 그는 해피엔딩의 고전소설을 빼닮았을 뿐인 것을.앞으로 무엇을 어찌 할지는 독자에게 남겨진 문제이다. 나? 나는 그냥 웃고 말까 한다. 위대한 거짓말의 백성은 게으른 법이다.
러시아 형식주의부터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까지 20세기 소설 비평사를 주요 논저들의 간략한 리뷰를 통해 소개하는 책이다. 현대 소설 이론들을 개관하기에 좋다. 이 책으로 대충 지도를 만든 후에 본격적으로 각각의 저작들에 도전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쉬운 말로 씌어져있고 짧은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편안하게 읽히고, 재미있는 표현같은 것도 인용해 주기 때문에 심심하지 않다.문과 계열 대학교 2학년 정도이고, 문학개론, 문학사, 현대소설론, 고전산문론 등의 강의를 들을 때마다 자신의 무식함에 위기의식을 느끼며, 교수님이 자주 언급하시는 위대한 이름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감을 잡고자 하는 사람에게 추천하고싶다. (오늘 문학감상론 시간에 선생님이 쥬네트 얘기를 하시기에 혼자 흐뭇해했다. ^^)장점이자 단점은 저자가 각각의 이론들을 설명하기 위해 한국소설들에 이들 이론을 적용해보인다는 것이다. '사랑손님과 어머니'같이 교과서 수록작은 상관 없는데, '당신들의 천국'의 경우에는 읽기도 전에 내용을 다 알아버리고 나니 퍽 허무해졌다. 아직 안 읽은 책 이야기가 나온다면 요령껏 건너뛸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소설 '소년H'를 보고 감동받은 사람은 꼭 보기를 권한다. 종전의 폐허 속에서 중학교를 겨우 마치고 간판집 점원으로 취직했던 우리의 하지메 짱은 훌륭한 어른이 되어서 이렇게 멋진 책까지 쓴 것이다. 정말로 대견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창가의 소녀 토토짱'의 팬들은 딱 한 군데 잠깐 언급되는 구로야나기 데쯔코 씨의 이름도 찾아보시라. 이 역시 대견한 소녀이다.)손으로 그린 예쁜 그림이 곁들여진 짤막짤막한 이야기들은 부담 없고 유쾌하며 따뜻하면서도 통속적이지 않다. 어디를 펼치더라도 기쁘게 읽을 수 있다. 단, 빨리 덮기에는 아쉽고, 책장이 자꾸만 넘어가는 것이 아깝게 여겨지기도 한다. 부록으로 실린 '두 번의 이상한 여행'과 '괴짜 친구의 작업장 <고양이 빌딩> 전말기'가 가장 긴 이야기인데,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두번째 이야기가 정말로 마음에 들 것 같다. 우연히 서점에서 손에 넣었는데, 사자 마자 친구에게 선물하는 바람에 다시 구하느라 애를 먹었던 책이기도 하다. 이럭저럭 세 권이나 사버렸다. 선물용으로는 더할나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