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폐허에서 - 저항과 재건의 아시아 근대사
판카지 미슈라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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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
현대 세계는 1905년 5월의 이틀 동안 쓰시마 해협의 좁은 물길에서 결정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오늘날 가장 붐비는 축에 드는 대양 항로에서, 도고 헤이하치로 장군이 지휘하는 소규모 일본 함대가 세계를 반 바퀴 돌아 극동에 도착한 러시아 해군의 주력 함대를 격파했다. 독일 황제가 트라팔가 해전 이래 가장 중요한 해전이라 말하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제껏 세계가 목격한 가장 엄청난 현상"이라고 말한 이 쓰시마 해전의 결과, 한국과 만주를 누가 통치할 것인지를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1904년 2월부터 해 온 전쟁이 사실상 끝났다. 중세 이래 처음으로 비유럽 국가가 주요 전쟁에서 유럽의 열강을 격파한 것이다. (중략) 다마스쿠스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젊은 병사이자 훗날 케말 아타튀르크로 알려지는 무스타파 케말이 승전 소식을 듣고 전율했다. 서구의 위협에 맞서 오스만 제국을 개혁하고 강화하는 일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던 케말은 다른 많은 튀르크인과 마찬가지로 일본을 본보기로 삼아온 터였고, 이제 자기가 옳았음이 입증되었다고 생각했다. 훗날 인도의 초대 총리가 되는 자와할랄 네루는 열여섯 살에 고향 마을에서 신문을 읽으면서 들뜬 마음으로 러일전쟁의 초기양상을 주시했고, "유럽의 속박에서 벗어날 인도의 자유와 아시아의 자유"를 위해 자신이 맡을 역할을 꿈꾸었다. 네루는 도버에서 그가 다닐 영국 사립학교인 해로 학교로 향하는 기차에서 쓰시마 해전 소식을 들었다. 그때 네루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네루처럼 런던에서 그 소식을 들은 중국의 민족주의자 쑨원도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1905년 말 쑨원은 배를 타고 중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수에즈 운하에서 그를 일본인이라 생각한 아랍인 항만 노동자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일본의 성공이 뭣을 함의하는지에 대한 들뜬 추론이 오스만 제국, 이집트, 베트남, 페르시아, 중국의 신문을 가득 채웠다. 인도의 마을들에서는 일본 장국의 이름을 따서 신생아의 이름을 지었다. 미국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도자 듀보이스가 세계 각지에서 분출하는 ‘유색인 자긍심’에 관해 말했다. 이와 엇비슷한 감흥이 평화주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를 사로잡았던 것이 분명하다. 타고르는 쓰시마 해전 소식을 접하자마자 즉흥적으로 학생들을 데리고서 벵골 지역의 작은 학교 주위를 빙빙 돌면서 승전 행진을 벌였다.

20-21
대부분의 유럽인과 미국인은 여전히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소비에트 공산주의와의 오랜 핵 교착 상태가 대체로 20세기의 역사를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계 인구 과반수에게 지난 세기의 중심 사건은, 아시아가 지적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아시아와 유럽 제국들의 폐허에서 부상한 일이라는 것이 이제는 한층 분명해 보인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세계를 오늘날 존재하는 대로 이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서구의 이미지보다는 한때 종속되었던 사람들의 염원과 열망에 맞추어 세계가 어떻게 계속 재형성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180
떠돌면서 무슬림의 병약함을 목격한 또 한 사람인 빈 라덴과 달리, 알 아프가니는 결코 테러 공격의 전도자가 아니었다. 이집트의 유럽 채권자들과 이란의 담배 상인들이 은밀히 악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격한 알 아프가니는, 서구의 힘이 군사력에만 의존하지 않으며 군사적 수단만으로는 그 힘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는 무슬림 지배계급이 서구의 지정학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협조하거나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온갖 행태를 시대에 앞서 경고했다. 그는 당대의 무슬림 군주들에게 경고했으나 그들의 주의를 끄는 데 실패했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묵살당한 예언자의 통한을 느꼈다. 이스탄불로 찾아온 독일 저널리스트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동방 세계 전체가 너무나 철저하게 썩은 데다가 진실을 듣고 따를 능력도 전혀 없으므로, 나는 홍수나 지진이 이 세계를 집어삼키고 묻어버리기를 바랍니다."

191-193
서구를 스승으로 삼은 도제 기간에 메이지 정치가들은 운 좋게도 마찬가지로 근대화를 추진한 오스만 제국이나 이집트의 정치가들보다 장애물에 덜 부딪혔다. (중국은 근대화의 난관을 경험하기 전이었다.) 작은 나라인 일본의 인구가 단일 인종이라는 사실이 그들의 조직화 역량을 강화했다. 무사계급과 부유한 상인측 같은 집단들은 무슬림 세계의 전통적 엘리트층과 달리 근대화에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밀려난 엘리트층인 무사계급의 역량이 국민 통합이라는 과제에 쓰일 수 있었다. 일본 경제는 줄곧 튼튼했다. (중략) 더욱이 메이지 국가는 자국의 주된 목표를 결코 시야에서 놓치지 않았다. 그 목표란 일본이 서구와 맺는 관계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개정하는 것이었다. (중략) 마침내 일본은 1894년에 영국이 5년 안에 치외법권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해에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중략) 일본은 순식간에 중국의 해군과 육군에 대승을 거두어 자국의 군사력과 산업과 기반시설의 토대가 견고하다는 것을 널리 입증했을 뿐 아니라, 도쿠토미의 표현대로 "문명이란 백인의 전유물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혹사당한 일본 농민들은 서구의 노선을 따르는 자국의 근대화 -본래 어디에서나 가장 약자들에게 무자비한 과정-를 위해 이미 막대한 희생을 치른 터였다. 이제 중국인의 차례였다. 당시 일본에서 살고 있던 작가 라프카디오 헌은 "새로운 일본의 진짜 생일은 중국 정복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라고 썼다.

223-224
캉유웨이나 량치차오와 달리, 쑨원은 광저우의 빈농 집안 출신이었다. 쑨원의 형은 가난 때문에 하와이로 이민을 가야 했고, 쑨원도 10대 초반에 그곳으로 갔다. 하와이에서 미션스쿨을 다닌 쑨원은 영어를 유창하게 말했지만 한문 쓰기에는 서툴렀다. 서구식 옷을 입고 화교들에게 신세를 지던 쑨원은 캉유웨이와 량치차오가 속한 전통적인 유학자 세계와는 되도록 거리를 두었다. 서구를 두루 돌아다닌 쑨원은 중국의 약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1894년에 조정에 올린 대담한 상서가 거부되었을 때, 쑨원은 만주족의 군주제를 전복하고 중국을 공화국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확신했다. 이 신념은 훗날 왕정주의자인 캉유웨이와 반목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임기응변에 능한 쑨원은 캉유웨이와 량치차오 편에 가담하기를 열망했다. 나중에 드러났듯이, 캉유웨이는 쑨원을 쓸모없고 상스러운 모험가로 여기며 못 견뎌했ㄷ. 퇴짜를 맞은 기독교 개종자 쑨원은 근대의 분위기를 고려해 유교를 재해석하려는 캉유웨이의 시도를 무의미한 학문적 탁상공론으로 여기게 되었다.

237-238
20세기 초에 도쿄는 아시아 전역의 민족주의자들이 몰려드는 메카, 확장된 아시아 공공 영역의 중심이 되었다. 1905년에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를 거두자 이 과정은 한층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도쿄 외에 시카고와 베를ㄹ린, 요하네스버그, 요코하마처럼 서루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거의 모든 식민 사회 출신 지식인들 -신할리족 불교도, 이슬람 근대주의자, 힌두교 부흥론자-이 지적 문화의 도가니를 이루었다. 이런 곳에서는 탐구와 성찰, 논쟁의 지평이 넓어졌으며, 많은 남녀가 귾임없이 방랑하고 자아와 세계를 부단히 탐험하고 분석하는 일에 몰두했다. 대개 해안가에 자리잡은 도심지(캘커타와 광둥성처럼)의 서구식 학교와 대학, 저널리즘, 인쇄매체는 세속적 공간을 만들어냈고, 최근에 교육받은 엘리트들은 그 공간에서 자기인식과 분석에 필요한 새로운 어휘를 배웠다. 그들 다수는, 선조들이 꿈도 꾸지 못했으며 당시까지 연한계약노동자, 인도인 선원과 유모-제국의 서비스 계급-만 할 수 있던 신체적 지적 여전ㅇ에 올라 서구로 가거나 아시아 안을 돌아다녔다. 직업훈련을 받기 위해 간디는 런던으로, 루쉰은 일본으로, 쑨원은 호놀룰루로 갔다. 이런 제국 중심지들에서 그들은 식민지 경찰의 악의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발행 부수가 적은 잡지에 인쇄되거나 여행자 개개인이 고국에 전달한 그들의 강렬한 언어는 들불처럼 번져나갈 수 있었다.

248-249
량치차오는 이 오욕을 예민하게 느꼈다. 그러나 미국의 화교 공동체가 인종 차별과 학대를 겪으면서도 고국에 있는 중국 국민의 역량을 키우자는 자신의 원대한 구상을 지지하지 않자 낙담했다. 언론의 자유가 있는 민주적인 나라의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중국계 미국인들은 배타적인 길을 선호했다. 그들은 전통에 매달렸고, 그들을 대표하는 당과 지도자가 아닌 갱단과 마피아의 두목들을 배출했다. 량치차오는 이렇게 썼다. "중국인은 국가 사고방식이 아닌 마을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지나치게 발달한 그 의식은 국가 건설에 중대한 장애물이다." 량치차오는 더 이상 중국인이 자각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개개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오직 전제정 때문이라고 결론지을 수 없었다. "누가 미국이 국민 개개인에 의해 자유롭게 형성된 국가라고 말하는가? 나에게는 국민들에게 국가를 강요한 몇몇 위인들이 보일 뿐이다. 자치에 아주 익숙한 미국인들조차 이럴지니, 다른 국민들은 그런 사태를 확실하게 경계해야 한다." 중국에서 혁명이 약속한 민주주의와 자유는 서구 열강에 대적할 수 있는 국민국가를 건설하기는커녕 혼란만을 초래했다. "이런 동포들을 데리고서 선거제도를 시행할 수 있을까? .....자유, 입헌주의, 공화주의는 모두 다수의 통치를 뜻하는 어휘다. 그러나 중국 국민의 절대다수는 샌프란시스코의 주민과 비슷하다." (중략) 량치차오가 갑작스레 변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머문 메이지 시대 일본의 성공은, 권위주의 국가가 근대 국가를 건설하는 일에서 자유민주주의제보다 효과적일 수 있음을 입증했다. 유럽 국가들이 보호주의적 경제정책을 포용하고 더 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쪽으로 움직이자,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255
제국주의 신참도 이미 중국에서 활동 중이었다. 근래에 중국에서 상업적 이해관계가 대폭 깊어지고 영국, 프랑스와 고아범위한 협정을 체결한 일본이었다. (일본은 장차 연합국 편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터였다.) 이제 막 제국주의로 발돋움하는 국가의 역할에 걸맞게, 일본 당국은 외국인 범아시아주의자들의 삶을 고달프게 했다. 일본은 반프랑스 활동가를 자국 영토에 들이지 않겠다는 조약을 프랑스와 체결한 이후 판보이쩌우를 추방했다. 영국이 일본에 압력을 가한 결과 이브라힘의 신문 ‘이슬람 형제애’도 폐간되었다.

256-257
량치차오도 위안스카이의 실패로 인해 때를 묻혀야 했다. 일본에서 망명하던 시절에 그는 스승으로서 큰 존경을 받았다. 그의 제자 몇 명은 중화민국에서 힘 있는 자리에 올랐고, 나라를 황폐화한 분파 투쟁에 가담했다. 이미 학생들보다는 유력한 관료들을 상대로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한 량치차오는 옛 제자들 편에 가세했고, 베이징의 새로운 정부에서 각료직에 올랐다. 량치차오는, 자신을 환대했던 일본인들과 그들의 불합리한 요구에 대해 강경한 자세로 협상했다. 또한 1917년에 중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야 한다고 주장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중국이 승리하는 편에 서는 것이 국제체제에 진입하고, 여전히 중국을 옭아매는 불평등조약을 무효화하고 일본에게서 산둥 반도를 되찾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그가 연합국과 체결한 협정의 일환으로,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같은 제1세대 공산주의 지돚들을 포함한 중국 노동자와 학생들이 프랑스로 갔다. 그럼에도 량치차오의 정치 이력은 비참한 실패로 판명났다. 15년이 지나 중국의 돌아온 그는 청조 이후의ㅡ 격란에 몸을 던졌지만, 현실과 철저히 타협한 채 임시변통으로 부패하고 난폭한 군벌들과 정치적으로 연대한 것이 고작이었다. 위안스카이 사후 중국을 뒤흔든 정치적 격동 속에서 결국 량치차오는 밀려났고, 정계에 적극 개입하는 삶에서 은퇴해야 했다. 이제 더 젊은 세대가 전면으로 부상해 그의 사상이 닦아 놓은 토대 위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것이었다.

276-277
중국과 인도의 사태를 면밀히 주시하던 레닌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손에서 벗어난 아시아가 러시아에 중요하다는 것을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다. 레닌이 썼듯이 "투쟁의 결과는 결국 러시아와 인도, 중국 등이 인류의 절대다수를 이룬다는 사실에 달려 있다." 스탈린은 "사회주의의 승리를 원한다면 절대 동양을 잊지 말아야 한다."라고 단언했다. 1917년 혁명 직후 레닌과 스탈린은 동양인이 제국주의적인 "강도와 노예주"를 타도할 것을 요청했다. 1920년, 볼셰비키는 바쿠에서 동양인미회의를 조직했다. 그 직후에 코민테른은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공산당 창당을 도왔으며, 소비에트 고문들은 중국인 공산주의자는 물론이고 민족주의자의 훈련도 도왔다. 조선, 페르시아, 인도, 이집트, 중국의 많은 활동가들은 소련의 단호한 반제국주의 입장에 이끌렸다.

290-291
중국 대표단은 산둥 반도가 온전히 중국 땅이며 독일이 무력으로 빼앗았다고 웅변했다. 산둥 반도는 공자의 출생지이자 중국 문명의 ‘요람’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일본이 점령한 산둥 반도에 대한 중국의 주장에 동조했지만, 전시에 일본 측에 그 식민지를 계속 보유해도 좋다고 약속한 로이드 조지와 클레망소에게 그 약속을 철회하라고 설득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영국과 프랑스 모두 중국에서 무력을 행사해 획득한, 지켜야 할 이해관계가 있었다. 일본은 전시에 연합군에 군수품을 팔고 아시아에서 시장을 넓힘으로써, 대서양에서 미국이 강대국인 것만큼이나 태평야에서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일본을 국제연맹에 끌어들이려던 윌슨으로서는 이미 일본의 인종 평등 요구가 묵살당한 마당에 이 나라의 화를 더 돋우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295-296
네루는 윌슨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아시아에서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불러냈다고 섰다. 호찌민과 마찬가지로, 마오쩌둥은 공산주의만이 중국에 진정한 주권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략) 소비에트가 창설한 코민테른의 요원들의 중국, 인도, 이란, 터키의 공산주의자들뿐 아니라 중국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까지 지원하기 시작했다. 코민테른 지부가 있던 베를린은 세계 곳곳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반식민 활동가들을 끌어들였으며, 그중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탄 말라카와 인도의 마나벤드라 나트 로이를 비롯해 아시아 공산주의의 첫 지도자들도 있었다. (중략) 1925년 이후 상하이와 광둥성은 아시아에서 이러한 초국적 네트워크의 허브가 되었다. 호찌민은 라시드 리다의 글을 잡지 ‘파리아Le Paria’에 게제했고, 모스크바로 가서 러시아와 중국, 인도의 혁명가들을 만났다.

296-297
버킹엄 궁전에서 열린 가든파티에 참석한 량치차오에게 춥고 안개 자욱한 런던으로 태양은 "핏빛으로" 보였다. "가을의 납빛 하늘 아래" 유럽 대륙 전체가 웅크리고 있었다. 랭스에서는 독일군 포병대의 포격을 세 차례 받고 반쯤 부서진 고딕 대성당의 잔해를 보았다. 벨기에 도시 루뱅에서는 독일군이 민간인 수백 명을 살육하고 유명한 대학 도서관을 파괴했다는 말을 들었다. 량치차오는 중국과 아시아의 다른 지역들에서 서구가 별다른 이유 없이 문화유적을 파괴한 역사를 익히 알고 있었다. 보어 전쟁 기간에 영국 때문에 ‘강제수용소’라는 말이 두루 쓰이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과거에는 그런 참극이 장차 유럽 본토에서 자행될 만행의 전조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량치차오를 비롯한 아시아의 지식인들은 타고르의 말처럼 "문명화된 유럽이 중국처럼 거대한 나라의 목구멍으로 밀어넣은 독약 때문에 유럽 자체가 영원히 심각하게 상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유럽이 문명의 횃불로 빛을 비추지 않고 불을 지르려는 속셈은 아닌지" 의심했다.

316-319
활동 초기인 1881년에 타고르는 아편 교역의 핵심 중개상인 할아버지와 정치적 거리를 두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귀족 환경과 서구식 교육에서 출발한 그의 지적 영적 여정은 벵골 동포들과 매우 다른 종착지에 이르렀다. 1891년에서 1901년까지 벵골 지역의 시골에서 체류한 기간은 이 점에서 결정적이었다. 인도인 촌락들 근처에서 살았던 경험은 타고르가 캘커타의 중간계급과 뚜렷이 다른 세계관을 갖는 데 일조했다. 이 체류를 통해 그는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곤경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을 뿐 아니라, 자연풍경을 사랑하고 가정적이고 파편적인 일상을 존중하게 되었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산업화 이전 문명이 기계화된 근대 문명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확신을 줄곧 잃지 않았다. 또한 인도의 자기쇄신은 촌락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중략) 타고르는 아시아인이 "유럽의 방식을 따라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문명의 유일한 유형이자 인간의 유일한 목표"라고 믿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보았다. (중략) 1917년부터는 에세이와 연설로 민족주의를 체계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 해에 그는 미국에서 청주에게 국민국가란 "깔끔하게 뭉친 인간 더미들을 생산하는 정치의 기계"라고 말했다. "오늘날 어디에서나 받아들여지는 이 국가라는 관념이 이기심 숭배를 도덕적 의무로 가장하려 들 때.... 그것은 바로 인류의 생필품을 강탈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격까지 하는 것이다."

332
1923년 타고르의 방문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한때 타고르의 작품을 번역한 마오둔 같은 급진주의자들은 타고르가 중국 청년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다. "우리는 동양 문명을 찬미하는 노래를 목청껏 부르는 타고르를 환영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국내의 군국주의자들과 국외의 제국주의자들에게 억압당하는 우리에게는 꿈꿀 시간이 없다." 젊은 급진주의자들은 이미 타고르를 초대한 량치차오를 공격하고 있었고, 중국에서 타고르의 통역을 맡은 낭만파 시인 쉬즈모에게도 계속 모욕을 퍼부었다.

339-340
삶이 저물어가던 1938년 타고르는 절망했다. "팔자가 기박한 우리는 어디를 올려다보아야 하는가? 일본을 쳐다보던 시절은 끝났다." 3년 뒤 타고르는 죽었다. 타고르를 중국으로 초대했던 량치차오는 그에 앞서 1929년에 비교적 이른 나이인 56세로 숨을 거두었다. 이보다 4년 전에는 캉유웨이가 죽었고, 량치차오는 옛 스승을 개혁의 선구자로 칭송하는 추도사를 낭독했다. 베트남인 판보이쩌우는 프랑스에 체포되어 처형 직전까지 몰렸다가 정치적 거세를 당한 뒤 1940년에 옛 제국의 중심지 후에에서 죽었다. 이들 대부분은 젊어서는 국내의 자강을 주창했으나 말년에 이르러서는 냉철한 정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지 않았으며 자국 내에서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이집트, 터키, 이란 같은 나라들에서는 미몽에서 깨어난 이슬람 근대주의자들이 강경한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근본주의자들에게 밀려났다. 아시아 전역의 비밀결사와 비밀조직(그리고 파리, 베를린, 런던의 커피하우스)뿐 아니라 대학과 신학대학, 공식 노동조합에서도 개로운 전투적 민족주의자와 반제국주의자가 등장하고 있었다. 이들 다수는 타고르가 말년의 에세이에서 극성스러운 "동양의 남학생들"이라고 경고한 부류였다. "결국 이 위대한 문명들을 파괴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조숙한 남학생들 같은 부류, 즉 영리하고, 피상적으로 비판하고, 스스로를 숭배하고, 이익과 권력의 시장에서 기민하게 흥정하고, 덧없는 것을 효율적으로 다룬 사람들, 종국에는 자멸하는 정념의 힘에 이끌려 이웃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 자신도 불길에 휩싸인 사람들이다." (중략) 타고르는 일본의 아시아 본토 침략과 더불어 분출하기 시작해 여전히 아시아 전역에서 분출하고 있던 격렬한 증오를 이상하리만치 경고하고 두려워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352-353
훗날 바모는 1943년 대동아회의에서 1955년 반둥회의로 이어질 정신이 형성되었다고 말했다. 아시아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가 반둥회의에 참석했고, 1961년 비동맹운동을 결성했다. 1940년대에 이 정신의 활력을 한껏 북돋운 것은 다른 무엇보다 유럽이 약하다는 발견이었다. 알아프가니와 량치차오를 비롯한 아시아 전역의 제1세대 지식인과 활동가들의 더디고 절망적인 노력 -발행 부수가 아주 적은 다수의 정기 간행물과 늦은 밤에 우중충한 방에서 나눈 대화- 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일본은 반서구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아시아인이 유럽의 박해자로부터 얼마나 빨리 권력을 되찾을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중략) 일본은 오랫동안 치열하게 투쟁한 뒤, 결국 폭격과 핵폭탄으로 ‘응징’을 당하고서야 항복했다. 1916년 일본에서 타고르가 "도덕적 맹목과 애국주의 숭배를 용의주도하게 배양하는 국가들은 갑작스레 비명횡사할 것이다."라고 했던 불길한 예언이 현실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점령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토착민을 언제까지나 복종 상태에서 묶어두려던 유럽의 힘어 현저히 약해졌다. 유럽인은 충격을 받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전 식민지로 되돌아갔다. (중략) 그러나 그들은 어디에서나 오랜 전쟁 기간 동안 유럽인이 부재하거나 포로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을 하는 동안 벼려진 새로운 집단 정체성과 맞닥뜨렸다.

356
서구가 마지막까지 고집스럽게 품고 있던 아시아에 대한 착각 -폭력을 행사하면 토착민이 고분고분히 복종하리라는 확신- 은, 1975년에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 옥상에서 미국인과 베트남인을 태운 미군 헬기들의 가까스로 철수했을 때 산산히 깨졌다. 4년 뒤 이란인은 친미 독재를 무너뜨렸으며, 이란에 대한 서루의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파괴하는 활동의 일환으로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을 습격해 이곳 직원들을 인질로 잡았다. 그 무렵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서 경제적으로 되살아나고 있던 일본은 범아시아적 야망에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냉전이라는 새로운 대치 국면 때문에 일본이 아시아의 많은 부분을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이 가려졌다. 말레이 반도의 주요 민족주의자 무스타파 후사인은 대다수 아시아인을 대표해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점령은 가혹한 고난과 만행이라고 묘사되었음에도 긍정적인 어떤 것, 항복한 이후에야 따서 먹을 수 있는 달콤한 열매를 남겼다." 말하자면 범아시아주의는 일본에 이로웠다는 점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이 행동에 나서는 것을 허용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1905년 러일전쟁부터 시작된 일본의 활동에 따라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361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가장 유명했던 유학자는 량수밍이다. 그는 간디식의 자급자족하는 도덕적 마을 공동체를 중국 전역에 건설할 것을 구상했다. 실제로 량수밍은 자신의 이론을 실천에 롬겨, 산둥성에서 중국의 시골을 유교화하려는 향촌 건설 운동을 시작했다. 1938년, 또 다른 시골 활동가 마오쩌둥은 량수밍을 찾아가 그의 운동에 관해 오랜 시간 의견을 나누었다. 마오쩌둥 자신은 유교를 공개적으로 매섭게 비판하면서도 일찍이 받아들인 유교의 도덕주의를 결코 떨쳐버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오쩌둥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에는 캉유웨이의 조화로운 세계라는 공상이 눈에 띄게 가미되어 있었다. 1949년 연서레서 마오쩌둥은 "서구의 부르주아 문명, 부르주아 민주주의, 부르주아 공화국 계획은 중국 인민이 보기에 모두 파탄이 났습니다."라고 확언한 뒤, 이제 "인민의 공화국은 계급을 철폐하고 大同世界로 들어설"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 대동세계는 캉유웨이가 "실현할 방도를 찾지도 않았고 찾을 수도 없었던" 세계였다. 1958년 공산당 간부들은 중국 전역에 인민공사를 설립할 때 캉유웨이의 책에서 배우라는 지시를 받았다.

372-374
195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도시 지역에 사는 무슬림의 비율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새로운 통신매체와 엘리트층의 과시적인 소비, 만연한 불평등을 목격한 무슬림들은 이슬람을 다시근 열렬히 받아들였다. (중략) 서구 열강들이 강요한 근대화와 경제 성장 과정은 새로운 계급들을 창출하고 그들 사이에 권력을 재분배함으로써 이슬람 사회의 오랜 결속을 근본적으로 깨뜨렸다. 신흥 도시 엘리트층의 근대적 교육기관과 관료제에서 등장했으며, 전통적인 권위의 원천에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 다수는 시골의 빈민층을 쥐어짜는 방법으로 부유해졌다. 그 결과 희생자들, 특히 종교 지도자, 소도시 상인, 지방 관료, 반쯤 시골 출신인 사람 -알아프가니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던 부류- 처럼 이 과정에서 가장 멀리까지 밀려난 사람들 사이에 불만의 저수지가 만들어졌다. (중략) 탈식민 시대에 이집트, 튀니지, 인도네시아, 알제리 같은 무슬림 국가들은 식민국가의 정책, 특히 대중적 이슬람을 미심쩍게 여기는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며, 공적 생활에서 이슬람에 역할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제한하려 했다. 그러나 무슬림 나라들에서 인구의 절대다수는 이슬람 신앙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중략) 서구화된 세속적인 탈식민 엘리트들은, 이슬람에 세속적 발전과 경제적 통합이라는 국가의 과업에 걸림돌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대개 이슬람 단체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많은 나라들에서처럼 그런 근대화 노력이 실패했을 때, 또는 대중의 고통을 초래했을 때, 이슬람의 위세는 더 강해졌다.

377
1948년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사이드 쿠틉의 비통은 한층 더 깊어졌다. 서구의 많은 국가들은 600만 명이 조직적으로 살해된 유대인을 위해 그들의 나라를 마련해주는 것을 도덕적 당위로 여겼다. 뒤이은 전쟁에서 시온주의자들은 아랍의 연합군대를 격파한 뒤,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고 있던 아랍인 수십만 명을 추방하고 이스라엘이 독립국임을 선언했다. 이 전쟁은 아랍 국가들 가운데 가장 근대적이던 이집트에게는 특히 쓰라린 패배였다. 이스라엘은 서구 열강 앞에서 아랍이 무력하다는 것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그런 존재로 남아있다.

393-394
많은 나라들에서, 특히 근대화에 실패하거나 제대로 시도조차 못한 중동과 남아시아에서 수억 명의 무슬림들은 오랫동안 종교적 정치적 복수를 꿈꾸며 암흑 속에서 살았다. 서구가 규정한 근대 세계에 진입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결국 그들은 스스로 뿌리를 자르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 인생에서 수많은 격변과 트라우마의 근원인 서구를 증오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9월 11일에 대규모 살인을 저지른 악랄한 범인들을 수백만 명이 남몰래 지지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중략) 재앙적인 오판이었던 ‘테러와의 전쟁’은 불난 집에 부채질한 꼴이었고, 오르한 파묵이 두려워한 대로 "이슬람 나라와 빈곤에 찌든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 즉 굴욕감과 열등감을 낳는 조건에서 사는 사람들이 느끼는 서구에 대한 적의"를 강화했다. (중략) 2006년 이래로 서구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퍼뜨리기보다 체면을 지키는 데 주력하면서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늦춤에 따라, 무슬림들의 분노도 점차 누그러졌다. 그럼에도 오늘날 대다수의 무슬림들은 서구가 여러 차례 이슬람을 침략했으나 실패했고, 그 과정에서 파산했다는 확신을 두루 공유하고 있다. 이런 확신은 전 세계의 이슬람 설교사들을 새롭게 고무했으며,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텔레비전 전도사, 유튜브 비디오, 웹사이트, 오디오 녹음 등을 통해 그들 고국의 인구만큼이나 많은 유럽의 무슬림 이민자들에게 전파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슬람의 천년왕국설은 서구에 거주하는 무슬림들 사이에서 특히 관심을 받고 있다. 서구 국가들이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실패했다고 확신하는 그들은, 오늘날 세속적인 환경에서 이슬람이 도덕적 종교적 권위의 새로운 원천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406-410
헌신적인 혁명가들로 이루어진 전위대라는 레닌의 생각은 천두슈나 마오쩌둥 같은 공산당원뿐 아니라 쑨원에게도 호소력을 발휘했다. 쑨원은 레닌주의 노선을 따라 국민당을 재조직했고, 소비에트의 원조를 받아 중국의 많은 지도자들을 길러낸 유명한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했다. (중략) 쑨원은 중국의 과제가 중국 대중을 혁명운동에 동원하는 것임을 인식했다. 그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하기까지 했다. 또한 1924년 경에는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중국의 경제적 곤경, 특히 농업의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쑨원은 너무 일찍 죽었고, 그의 후계자인 장제스는 군사 전술가임을 자처했찌만 토지개혁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지주층과 도시의 금융업자, 사업가들과 연합한 장제스는 쑨원의 급진적인 개혁을 이어나가는 데 실패했고, 마오쩌둥과 공산당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중략) 일본의 침공은 국민당의 부패와 잔혹성을 부추긴 것만큼이나 마오쩌둥의 대의에 도움이 되었다. 중국 대중의 반제국주의를 적극 활용한 공산당은 일본을 패퇴시키는 데에 실제로 기여한 바가 별로 없을 때조차도, 저항하는 중국의 지도 세력처럼 보였다. 공산당이 중국 사회를 재조직하기 위해 선호한 또 다른 촉매는 계급투쟁이었다. 1945년 이후 국민당과 내전을 치르면서도, 공산당은 대개 무자비하게 토지개혁을 비롯해 계급에 토대를 둔 사회화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중략) 중국이 서구를 가능한 한 빠르게 따라잡기를 바랐던 마오쩌둥은 터무니없는 목표를 정했다. 예를 들어 그는 1950년대 중반에 동포들에게 15년 내에 영국의 산업 생산량을 따라잡을 것을 요구했다. 이 실착은 중국을 마비시킨 일련의 대참사로 귀결되었다. 1959년에서 1961년 사이에 기근에 이은 식량 부족으로 중국인이 3000만명 넘게 죽었다.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은 적어도 초기에는 1960년대에 중국 혁명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나, 곧 내전으로 변질되었다. 1976년에 마오쩌둥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중국은 정통 공산주의보다 자유무역과 결합한 맹자의 공적 소유라는 경제적 이상에 더 기댄 듯한 원칙 -순전히 실용적인 원칙이라고 제시되긴 했으나- 에 입각해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되돌아보면, 공산주의는 중국에서 대중을 동원하고 통합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점점 더 효과를 발휘해온 듯하다. 20세기 초의 중국 활동가들은 근대 세계에서 부와 권력을 추구할 수 있는 통합된 국민국가를 만들어내려 했으나 실패했다. 도시의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농민들까지 두루 참여하는, 기반이 넓은 민족주의를 창출하는 데 성공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사기가 꺾인 농민들에게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고 기운을 불어넣음으로써 새로운 군대를 창설했고, 공산당과 행정관료층을 결합해 도시와 농촌 구석구석까지 손을 뻗는 강력한 국가관료제를 수립했다. (중략) 중국공산당은 더는 교조적 정통성을 고집하지 않음에도 중국의 안정과 안보, 번영을 보장하는 공산당의 독점적 지위는 도전받지 않고 있다.

433-434
에너지 자원이 한정된 세계에서 인도와 중국이 소비지상주의적인 중간계급과 더불어 부상하는 오늘날, 지난 세기를 격렬한 폭력으로 물들였던 경제적 경쟁과 무력 분쟁이 이번 세기마저 황폐화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중략) 경제 성장을 끝없이 추구하도록 부채질하는 희망 -인도와 중국의 소비자 수십억 명이 언젠가 유럽인과 미국인의 생활양식을 누릴 것이라는 희망- 은 알카에다가 꿈꾸는 공상 못지 않게 터무니없고 위험한 공상이다. 이 공상은 전 세계의 환경을 더 빨리 파괴하고 있고, 수억 명의 가진 것 없는 사람들 사이에 허탈한 분노와 절망의 저수지를 만들고 있다. 서구 근대성의 보편적인 승리라는 이런 씁쓸한 결과로 말미암아, 동양의 복수는 어딘지 음울하고 모호하게 변해가고 있으며, 서구가 거둔 모든 승리는 패배나 다름없는 승리로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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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8-11-22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어가는 동안, 내가 알고 있던 자잘한 지식들이 세계사의 큰 흐름 안에서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아가는 신기하고 기쁜 경험을 했다. 동시에 학교에서 배운 한국사가 쓰레기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국민국가의 편협한 눈으로 재단된 하찮은 세부들이나 외우게 하면서,아이들의 말랑말랑한 머리를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세뇌시키는 한국사 교육 극혐.
 
고양이 눈으로 산책 - 고양이 스토커의 사뿐사뿐 도쿄 산책
아사오 하루밍 지음, 이수미 옮김 / 북노마드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

69
매화를 볼 땐 벚꽃을 볼 때처럼 마음이 확 열리면서 즐기워지지는 않는다. 매화는 서서히 즐거워진다. 정원 북쪽으로는 아무도 오지 않는데, 그래도 매화는 차분하게 하얀 꽃을 포동포동 피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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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 임진왜란부터 태평양전쟁까지 동아시아 오백년사 메디치 WEA 총서 4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김시덕은 왜 '역사학자'가 아니라 '문헌학자'일까? 역사 문헌을 연구하는 것이야말로 역사학자가 하는 일이 아닌가? 일어일문과 출신으로 일본에 가서 역사 공부를 하고 온 김시덕이 '역사학자'를 자처하지 못하는 것이 교조적 반일민족주의에 갇힌 한국사 학계의 배타성를 보여주는 사례는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82-84
한반도 문제를 해결한 청나라는 조선으로 하여금 홍타이지를 칭송하는 비석을 세우게 했다. 현재 서울 잠실의 석촌호숫가에 자리한 ‘大淸皇帝功德碑’, 일명 ‘三田渡碑’가 그것이다. 청나라의 공식 언어인 만주어, 몽골어, 중국어 세 개 언어로 새긴 이 비석은 청의 요구로 세워지고 비문의 세세한 부분까지 청에서 지정했다. 그러나 비석의 내용을 읽어보면, 조선의 신하들이 국왕 인조의 어리석음을 사죄하고, 홍타이지가 패전한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음에 감동하여 자발적으로 세운 것처럼 돼 있다. 비문의 첫머리에는 "인자하고 관대하고 온화하고 신성한 한han께서 ‘화친을 깨뜨린 것이 우리 조선으로부터 시작됐다’며 병자호란을 일으키셨다"라고 선언한다. 이어서 "작은 나라가 윗나라에 죄를 얻음이 오뢔됐다"라고 하여 1619년 사르후 전투, 정묘호란 등의 사례를 든다. 그러나 조선이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듯하자 "신성한 홍타이지는 여전히 관대하게 즉시 군대를 보내오지 않고, 분명한 칙령을 내려 거듭 거듭 조선 조정을 깨닫게 하는 것이 마치 귀를 잡고 가르치는 것보다 또한 더했다." 그럼에도 조선은 여전히 깨닫지 못했으니 병자호란의 원인은 하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조선에 있다는 것이다. 비문에는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가 다음과 같이 말하며 항복을 결심했다고 적는다. "내가 정묘호란 이래 큰 나라와 화친한 지 10년이다. 내가 무능하고 우매하여 하늘이 정복함을 서둘렀고 만민 백성이 재난을 만났으니 이 죄는 오로지 내게 있다. 그러나 신성한 한은 차마 조선의 관민을 죽이지 못하여 이처럼 깨닫게 하시니, 내가 어찌 감히 나의 조상들의 道를 온전케 하고 백성을 보호하지 않기 위해 칙령을 받지 않겠는가?"

85
적반하장 격으로 청은 도리어 청이 조선을 다시 일으켰다고 하여 조선에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베풀었다고까지 주장했다. 원래 재조지은이란 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보낸 명나라가 조선에 대해 주장한 개념이었다. 이 개념을 홍타이지의 청나라가 차용한 것이다. 1716년에 도쿠가와 막부의 실권자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도 "조선빙사후의(朝鮮聘使後議)"라는 책에서 재조지은을 주장한다.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멸망시켜서 조선의 원수를 갚아주고 재침 위협에서 구해준 것이니, 재조지은이 있는데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괘씸하다는 것이다. 조선의 주변 국가가 모두 재조지은을 주장하니, 참으로 동네북과 같은 처지의 한반도였다.

279-281
이번에는 한반도를 청나라에 병합하자는 논의가 청나라 정부에서 이루어졌다. 이홍장은 조선의 주권을 부정하는 이러한 방침을 택하지 않았지만 청나라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고 대원군을 납치하는 등 강경책을 구사하는 데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수당이 고구려 및 신라와 충돌했던 경험을 통해 중원 세력은 한반도를 완전히 병합한다는 야망을 포기하고 한반도 세력은 중원의 국가를 上國으로서 존중한다는 암묵적 합의를 도출하여 이를 천 년 이상 유지해왔다. (중략) 그러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중원 세력이 이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자, 한반도 세력은 이에 반발하여 일본 세력을 끌어들임으로써 중원 세력을 축출하고자 했다. 이것이 1884년 12월 4일에 김옥균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3일간 정권을 차지한 갑신정변이다. 이들은 베트남의 지배권을 두고 프랑스와 청나라가 충돌하면서 청나라가 조선에서 군대를 일부 빼간 틈을 타서, 일본 세력을 끌어들여 청나라를 축출하고 대원군을 귀국시키는 등 조선의 자주권을 확보하려 했다. (중략) 이처럼 갑신정변 세력은 통설과 달리 단순히 ‘친일파’로 치부할 수 없다. 최근 한국 학계는 이러한 관점에서 갑신정변 연구를 심화하는데, 재평가가 이뤄지기 전의 분위기도 한번 눈여겨볼 만하다. 김용구 교수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1967년이라고 기억된다. 필자는 ‘갑신일록’의 판본과 갑신정변에 관한 의견을 듣기 위해 국사편찬위원회를 찾은 적이 있다. (중략) 두 분의 연구원이 필자를 만나자 친일파의 문제를 왜 연구하느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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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스!
햐쿠타 나오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밑줄긋기 부분에 스포일러 있음.

51-54
"이나무라라는 선수는 몇 학년인데?"
"2학년이요. 하지만 작년 1학년 때 인터하이와 국체 그리고 선발대회까지 3관왕을 했대요. 아직 무패인 거죠."
요코는 링 위에 있는 이나무라를 보았다. 헤드기어를 쓴 얼굴은 도저히 열여섯, 열일곱으로 보이지 않았다. 몬스터라는 별명이 이해가 갔다. 눈매가 보통이 아니었다. (중략)
"정말 지루한 시합이야." 가부라야가 말했다. (중략) 얘는 방금 녹아웃 장면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네. 둔감해서 공포심도 덜한 모양이지. 상상력이란 게 없는지도. 요코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왠지 가부라야가 믿음직스러웠다. 그때 링에서 내려온 이나무라가 가부라야와 요코 바로 앞을 지나갔다.
헤드기어를 벗은 이나무라는 단정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빈틈이 전혀 없고, 꽤 잘생겼음에도 상당히 무섭게 느껴졌다. 키는 가부라야보다 머리 반쯤 더 컸다. 이나무라는 가부라야를 보더니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말없이 가부라야를 쏘아보았다. 눈빛에서 소리가 나는 듯했다. 가부라야도 이나무라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중략) 이나무라가 먼저 시선을 거두고 가부라야에게 등을 보이며 멀어졌다. 가부라야가 가볍게 숨을 토해냈다.

223-224
"그애는 지금까지 진 적이 없나요?"
"없습니다." 사와키가 바로 대답했다. "무패죠." (중략)
"그 애가 싸우는 걸 보니 패배의 무서움을 잘 아는 것 같아서요."
사와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사와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 아버지가 프로 복서였다고 합닏. 하지만 후유증으로 지금은 매우 심한 펀치 드렁커라고 하더군요."
펀치 드렁커라는 말은 요코도 알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전에 펀치가 뇌를 흔든다는 이야기 했죠? 오랫동안 펀치를 계속 맞다보면 뇌에 충격이 누적되어 펀치 드렁크 증세가 나타납니다. 상대의 주먹을 맞으면서도 파곧ㄹ어 공격하는 선수들에게 많이 나타나죠. 심한 경우에는 건망증이 생기거나 간단한 계산도 못하게 됩니다. 운동기능이 손상되어 손발이 떨리기도 하고, 똑바로 걷지 못하게 되기도 하고요. 더 심한 경우에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밤에 자다가 누운 채로 소변을 보기도 합니다."

239
"고교 권투가 수준 미달이라는 말씀이신가요?"
"뭐, 좋은 선수가 전혀 없으니까."
소가베는 그렇게 말한 뒤 바로 덧붙였다. "한 명만 빼고."
"그게 누구죠?"
"라이트급 선수. 그 녀석은 진짜 물건이더군."
"이나무라 말인가요?"
"이름은 기억 못하지만 그 선수는 대단하더이다."
요코는 역시 하고 생각했다. 이나무라를 한눈에 알아본 소가베도 대단하다 싶었지만 그런 소가베에게서 인정받은 이나무라는 역시 굉장한 선수가 틀림없었다.
"카를로스 오르티스 같은 녀석이었어."

336-338
그때 학생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보니 선수들끼리 멱살을 잡기 일보 직전이었다. 요코는 깜짝 놀랐다. 혹시 가부라야 때문인가. (중략)
"무슨 일인가요?"
요코가 김 감독에게 물었다.
"가부라야 녀석이 어떻게 조선인이 국민체육대회에 나올 수 있느냐고 한 모양이에요."
김 감독의 설명을 듣고 요코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가부라야에게 물었다. "너 그런 소릴 했어?"
"어떻게 나올 수 있느냐고 물었을 뿐인데요."
김 감독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오사카 대표인데 그런 기분 나쁜 소리를 뭐하러 해."
사와키가 말했다.
"저는 왜 나오냐는 소리가 아니었다니까요."
"나오지 말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잖아." 사와키가 말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나무라가 불쑥 끼어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이나무라를 향했다.
"가부라야에게 악의는 없었던 것 같아요. 표현이 좀 거칠었지만요. ‘조선인인데.’라고 필요 없는 말을 더 해서요." (중략)
"네가 미국에서 생활하는데 미국인이 너더러 일본 국적을 버리라고 하면 기분이 어떻겠냐?"
"그야 싫죠."
"마찬가지야."
"하지만 난 미국 국민체육대회에 나갈 생각은 안 할 건데요." 김 감독이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가부라야, 일본인과 재일조선인의 관계는 좀 복잡한 면이 있어. 다음에 쉽게 설명해 줄게." 요코가 말했다.
"됐어요." 가부라야가 말했다. "별로 신경 안 써요. 인터하이는 고등학생만 참가하는 대회인 것처럼 국체는 국민만 참가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물어본 것뿐인데."

489-490
그때 누가 "사와키 감독님."하고 불렀다. 이나무라였다. 조금 전에는 저지를 입고 세컨드에 붙어 있더니 어느새 교복 차림이었다.
"그 동안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국체 때 감사했습니다."
"뭘 그런 걸로. 전일본 출전 축하한다." 사와키가 말했다.
이나무라는 "감사합니다." 하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차분하면서도 품위가 있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180센티의 장신에서는 위압감이 풍겨나왔다. 이나무라가 기타루를 보았다.
"기타루, 우승 축하한다."
이나무라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기타루는 그 손을 맞즙으며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우리 도요타에게 완승을 거뒀네. 훌륭한 시합이었다."
"별말씀을요."
"뭐야?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도는."
가부라야가 시비를 걸듯 말했다. 하지만 이나무라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기타루에게 말했다.
"올봄 인터하이 때 어쩌면 만날 수도 있겠다. 기대되네."
그러더니 이나무라는 빙긋 웃었다. 기타루의 얼굴이 굳었다. 이나무라는 사와키 감독에게 "실례했습니다."라며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뭐야, 저 멍청이. 잘난 척은...."
가부라야가 내뱉듯이 말했다.

653
"기타루는 권투뿐만 아니라 공부도 잘했어."
부원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지금은 뭘 하시나요?"
"검사가 되었지."
부원들이 모호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요코는 이 아이들이 검사라는 직업이 어떤 건지 잘 모르는구나 싶었다. 요코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더니 다른 부원들도 하나둘 모여 들었다. 에다 감독도 왔다.
"고등학교 때 기타루 선배를 이긴 유일한 선수가 이나무라 카즈아키(稻村和明)라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이시모토가 물었다. "그래, 맞아." 몇몇 부원이 "대단하다."라고 소리쳤다.
이나무라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로 전향해 삼 년 뒤 라이트급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삼 년 반 동안 일곱 차례 방어전을 치른 뒤 타이틀을 반납하고 은퇴했다. 권투를 하는 소년치고 이나무라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패 전적으로 은퇴하다니 굉장해." 누군가가 말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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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8-11-04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혈 스포츠 만화 같은 캐릭터와 심하다 싶은 결말을 가진, 약점이 분명한 소설인데, 두 번을 반복해서 빠져 들듯이 읽었다. 재미있다. 구입해서 곁에 두고 싶은 정도의 책은 아니지만, 출연도 적은 稻村和明의 캐릭터가 마음에 남아서 밑줄긋기로 보관한다. 제일 흥미진진했던 건 권투에 대한 설명 부분이었는데, 그건 머릿속에만 남겨두는 걸로.
 
헤이케 이야기 2 대산세계문학총서 55
오찬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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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권위를 빌려 권력을 잡은 무인들의 혈투가 주된 내용이니 황실 사람들이 계속 등장하는데,

'천황', '상황', '황후', '태후', '태자'. '친왕'을 '임금', '상왕', '왕비', '대비', '세자',  '대군'으로 

일일이 격하시킨 번역이 너무나 거북했다. 

남의 나라 문학 작품에 그런 짓을 하면 번역자의 민족적 자존심이 높아지나.

중국 황제만이 황제이니 다른 나라는 황제의 칭호를 써서는 안 된다는 속국적 발상이 우스꽝스럽고,

한국이 못 썼던 황제의 칭호를 일본이 썼던 게 배가 아파 그랬다면 그 옹졸함이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이런 사람을 교수님으로 부르며 그 밑에서 일본 문학을 배우는 학생들이 걱정될 정도로.

역자는 일본인 은사들 앞에서 자신이 헤이케 모노가타리에 무슨 짓을 했는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을 읽고 싶어 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 같지도 않으니, 

앞으로도 제대로 된 한국어 번역판이 나올 가능성이 낮을 것 같아 안타깝다.

내용이 재미있어서 더 안타깝다.

1권 349-350
대장군 코레모리(平維盛)는 관동의 물정에 밝은 나가이 출신의 사이토 사네모리(齊藤實盛)를 불러 "사네모리, 관동팔주에는 그대만 한 강궁이 얼마나 있나?" 하고 물었다. 그러자 사이토는 껄껄 웃더니 "대장군께서는 그럼 소인을 강궁을 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계셨단 말입니까. 소인은 고작 주먹 길이 열셋 되는 화살을 쏠 뿐입니다. 소인만큼 쏠 수 있는 사람은 팔주 안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강궁 소리 듣는 사람 치고 주먹 길이 열다섯이 안 되는 화살을 쏘는 사람은 없습니다. 활도 힘센 장사 대여섯이 겨우 부리는 강력한 활을 사용합니다. 이런 강궁들이 쏘면 두세 벌 포개놓은 갑옷도 그냥 꿰뚫습니다. 호족 한 사람의 병력이 적어도 오백 기를 밑도는 일이 없는데, 말을 타면 떨어질 줄 모르고 험한 산길을 달려도 말이 넘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전투 시에는 아비가 죽건 아들이 죽건 개의치 않고 죽으면 그 주검을 넘고 넘어 싸웁니다. 관서 무사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아비가 죽으면 공양을 한 후 상이 끝나야 다시 싸우고 아들이 죽으면 슬퍼하느라 싸울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군량미가 떨어지면 봄엔 논을 갈고 가을엔 추수한 후 싸움을 시작하고 여름은 덥다 싫어하고 겨울은 춥다고 마다하지만 관동에서는 일체 이러한 일이 없습니다. 카이와 시나노의 미나모토 군은 지리에 밝아 후지산 기슭에서 배후로 돌아올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장군을 겁주려고 그런다고 생각하실지 모르나 그렇지 않습니다. 전투란 사람 수가 아니라 계략 쓰기에 달려 잇다고 합니다. 소인은 이번 싸움에서 사아 다시 서울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보지 않습니다." 하고 답하니 이 말을 들은 타이라 군의 병사들은 모두 벌벌 떨었다.

67-69
사츠마 태수(薩摩国司) 타다노리(平忠度)는 어디쯤에서 말머리를 돌렸는지는 모르나 호위 무사 다섯에 시동 하나뿐인 단 7기만으로 다시 도성으로 돌아가 고조에 있는 휴지와라 슌제이(藤原俊成) 대감 집을 찾았으니 집 앞에 당도해 보니 문이 굳게 잠겨 밀어도 열리지 않았다. (중략) "주상께서 이미 도성을 뜨셨고 저희 집안도 이제 운이 다한 모양입니다. 이렇게 찾아뵌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얼마 전 대감에게 당대의 뛰어난 노래를 모아 편찬하라는 어명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 제 작품을 단 한 수만이라도 체택해 주시는 은혜를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면 일생의 영예가 될 것이라 기대했었는데 곧바로 난리가 일어나는 바람에 그 어명이 취소되고 말아 소장도 참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조용해지면 다시 어명이 내릴 터인데 이 두루마리 속에 쓸 만한 것이 있거든 한 수만이라도 넣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한 은혜를 입게 된다면 풀숲 그늘에 묻혀서도 기뻐할 것이고 저 멀리 저승에서나마 대감을 오래오래 지켜드릴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읊어온 수많은 노래 가운데 가작으로 생각되는 100여수를 모아 적은 두루마리를 갑옷 이음새 틈에서 꺼내 슌제이 대감에게 건넸다. (중략) 난리가 가라앉은 후 슌제이는 "천재집(千載集)"이라는 노래집의 편찬을 맡게 되었는데, 타다노리의 얼굴하며 남긴 말들이 새삼스레 생각나 감회를 억누를 수 없었다. 맡기고 간 두루마리 안에는 실을 만한 노래가 얼마든지 있었으나 이미 역적의 몸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밝힐 수 없어, ‘고도(古都)의 꽃’이라는 제목으로 읊은 노래 한 수를 ‘무명씨’의 작품으로 하여 채택하였다.
さざなみや 志賀の都は 荒れにしを 昔ながらの 山桜かな

151-153
요시나카(源義仲)는 시나노를 떠나올 때, 토모에(巴 御前)와 야마부키(山吹)라는 시녀 둘을 데리고 상경했다. 야마부키는 몸이 아파 서울에 남았으나 토모에는 내내 행동을 함께 했는데, 특히 이 토모에는 긴 머리에 얼굴이 백옥 같아 요ㅇ모가 빼어났을 뿐만 아니라 보기 드문 강궁에 마상이건 도보건 간에 한 번 칼을 뽑았다 하면 그 어느 누구와 대적해도 지지 않는 일기당천의 무예를 지니고 있었다. 사나운 말을 잘 다룰 뿐 아니라 아무리 험난한 길이라도 잘 다녀서 요시나카는 전투가 벌어지면 토모에에게 견고한 갑옷을 입히고 대도와 강궁을 들려 일군의 지휘관으로 명해 내보냈다. 수차례에 걸쳐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 이번에도 수많은 병사들이 낙오하고 전사했으나 마지막 일곱 기가 남을 때까지 토모에는 전사하지 않고 살아 남아 있었다. (중략) 요시나카는 토모에를 향해 "너는 여자이니 어서 어디로건 떠나거라. 나는 싸우다 죽겠다. 누군가에게 붙잡히게 될 것 같으면 자결할 생각인데 내가 마지막 전투에 여자를 대동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그렇구나." 하고 타일렀다. 그래도 떠나지 않아 몇 번이나 설득했더니 토모에는 "어디 쓸 만한 적이 없나. 마지막으로 싸우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하고 기다리는데 무사시 지방의 이름난 장사 온다노 모로시게(恩田師重)가 20여 기를 이끌고 나타났다. 토모에는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 온다 옆에 말을 대고 힘껏 잡아채더니 자기가 타고 있던 안장 앞가리개에 밀어붙여 옴짝달싹 못하게 한 후 목을 비틀어 벤 다음 집어던졌다. 그런 다음 갑옷을 벗어던지고 관동 방면을 향해 떠나갔다.

154-155
"소인 한 사람을 천 기쯤으로 여기십시오. 화살이 일고여덟 대 남아 있으니 잠시 활로 적을 막고 있겠습니다. 저기 보이는 숲은 아와즈 송림이라 하는데 저 송림에서 자결하십시오"라고 하고는 말을 채찍질하여 가는데 또 새로운 군사 50여 기가 나타났다. 이마이(今井兼平)가 "주군께서는 저 송림으로 가십시오. 저는 이 적병들을 막고 있겠습니다"라고 하니 요시나카(源義仲)는 "서울에서 죽었어야 하는 내가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은 너와 한 데서 죽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로따로 죽기보다는 한곳에서 싸우다 죽기로 하자"며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내달리려 하개에 이마이는 말에서 뛰어내려 말머리를 붙잡고 "무인이란 평소 아무리 군공을 세우더라도 죽을 때 자칫 잘못하면 두고두고 불명예가 되는 법입니다. 주군께서는 지금 지치셨고 후속의 아군도 없습니다. 적군에게 에워싸여 이름도 없는 잡병에게 밀려 말에서 떨어져 전사라도 하게 되시면 그렇게도 일본국에 이름을 떨친 요시나카 장군을 내 부하가 해치웠다고 떠들어댈 테니 이야말로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무 말 마시고 어서 저 송림으로 가십시오" 하고 설득하자 요시나카는 알았다며 아와즈 송림으로 향했다.
이마이는 혼자서 50기 속으로 뛰어 들어가 등자를 밟고 일어서서 "평소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겠지만 이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도록 하여라. 나는 요시나카 장군의 유모 아들 이마이노 카네히라로 금년에 서른셋이다.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은 요리토모 어른께서도 알고 계실 테니 내 목을 가지고 가서 보여드리도록 하여라" 하며 쏘고 남은 화살 여덟 대를 시위에 얹어 연거푸 쏘니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자리에서 적군 여덟 명이 말에서 고꾸라졌다. 다음에는 칼을 뽑아 들고 이리 치고 저리 베며 휘두르고 다니니 정면으로 맞서는 자가 없어 적을 수도 없이 베어 쓰러뜨렸다. (중략) 이시다가 칼 끝에 목을 꽂아 높이 쳐들고 "근래 일본 땅에 명성이 자자한 요시나카 장군을 이시다가 죽였노라"하고 큰소리로 외치자 싸우고 있던 이마이가 듣고서 "이제 누구를 막기 위해 싸울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여길 보아라, 관동 사람들아. 일본 제일의 용사가 자결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마" 하며 칼끝을 입에 물고 말에서 거꾸로 뛰어내리니 칼이 전신을 관통해 죽고 말았다. 이리하여 이와즈 전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7-199
뭍에 막 오르려 하는 것을 쿠마가이(熊谷直実)는 말을 옆에 갖다 대고 붙잡고 땅으로 굴렸다. 내리누른 채 목을 베려고 투구를 들추어 보니 겨우 16-7세의 소년이었는데 엷게 화장을 하고 이를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들 나이 또래에다 더할 나위 없이 고운 용모를 하고 잇어 어디에다 칼을 들이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뉘시오? 이름을 알려 주시오. 내 살려드리리다" 하자 소년은 "너는 누구냐?" 하고 물었다. "내놓을 사람은 못 되오만은 무사시 사람 쿠마가이노 나오자네라 하오."하고 이름을 밝혔다. 그러자 소년은 "그렇다면 너에게 내 이름을 밝힐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너에게는 좋은 상대일 테니 내가 이름을 밝히지 않더라도 목을 가지고 가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아라.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중략) 쿠마가이는 너무도 안쓰러워 어디다 칼을 대야 할지 몰라 눈앞이 캄캄해지고 제정신이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어 울면서 목을 벴다. "아, 무인만큼 죄 많은 직업이 또 있을까. 무사 집안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기막힌 일을 겪지 않아도 됏을 것을. 너무도 끔찍한 짓을 하고 말았구나"하고 한탄하며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었다. 한참 있다가 그러고만 있을 수도 없어 내갑의를 벗겨 목을 싸려 했더니 허리에 비단 주머니에 넣은 피리를 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무참한 일이 있나. 오늘 새벽 성안에서 피리를 분 게 바로 이 소년이었구나. 지금 아군에게는 수만 기가 있으나 싸움터에서 피리를 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역시 고귀한 사람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구나"하며 요시츠네에게 보였더니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후에 알아보니 그 소년은 수리대부 타이라노 츠네모리(平經盛)의 아들로서 대부 아츠모리(敦盛)라 했고 나이는 열일곱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부터 쿠마가이는 출가하여 구도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이 깊어졌다. 비단 주머니에 들어 있던 피리는 피리의 명수였던 조부 타다모리(忠盛)가 토바 천황에게 하사받은 것이라 했다. 여러 아들 중에 츠네모리가 물려받아 가리고 있던 것을 아츠모리가 재능이 뛰어나 가지고 있게 된 것이라 했는데 이름을 코에다(小枝)라 했다. 음악이란 불도에서 보자면 광언기어인 셈이어서 미망에서 오는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로 인해 한 무인을 불도의 세계로 이끌었으니 대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62-263
나치에서 수도하고 있던 승려 중에 코레모리(維盛)를 잘 알고 잇던 이가 있었는데 동료에게 말하기를,
"저기 저분이 누군가 했더니 시게모리(重盛) 대감의 장남인 삼위중장이시네 그려. 저 어른이 아직 사위소장으로 았던 안겐 원년(1178) 봄에 법황의 오십 세 수연이 있었지. 당시 시게모리 대감께선 좌대장이셨고 숙부 무네모리(宗盛) 경은 우대장이었는데 두 분은 어전 계단 아래 앉아 계셨고 그 밖에 토모모리(知盛) 중장과 시게히라(重衡) 경을 비롯한 일문들이 대례날처럼 차려 입고 원을 그려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저 어른이 머리에 벚꽃 가지를 꽂고서 청해파(靑海波)를 추셨는데 마치 이슬에 젖어 함초롬해진 꽃과 같은 자태로 소매를 바람에 펄럭이며 춤을 추시니 일대가 환히 빛나 보였다네. 황후께서 관백 대감을 통해 옷 한 벌을 상으로 내리셨는데 시게모리 대감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에 걸치고서 법황께 절을 올리셨어. 그러니 이보다 영예로운 일이 어디 있겠나. 그 옆에 있던 정신들이 얼마나 부러워했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을 일이지. 한때 대궐 궁녀들 사이에서 소설의 옛 주인공을 방불케 한다는 말을 들었고 이내 대신 자리에 오를 줄 알았는데 저리 초췌한 모습으로 변하시다니 예전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네그려. 변화무쌍한 게 세상일이라지만 참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군."
그러더니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우니 옆에 있던 수도승들도 따라 울어 소매가 흠뻑 젖고 말았다.

280
서울에서는 새 천황(後鳥羽天皇)이 첫 제사를 올리기 위해 목욕재계하는 행차가 있었는데 좌대신 사네사다(實定) 공이 행사를 주관하였다. 재작년 안토쿠 천황(安徳天皇)의 목욕 행차 때는 무네모리 내대신이 행사를 주관했었는데 용대기(龍大旗)를 앞에 세우고 장막 안에 정좌한 모습은 머리부터 발끝가지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고 보련을 호종한 삼위중장 토모모리, 도승지 시게히라 경을 비롯한 타이라 일문 및 근위부 무사들의 차림은 비할 바 없이 완벽했다. 그러나 이날은 판관대부 요시츠네가 행차의 선두에 섰는데, 시골 출신인 기소노 요시나카와는 달리 촌스러운 구석은 없었으나 그래도 타이라 사람들 중에서 제일 빠지는 사람을 골라 세운 것보다도 못해 보였다.

305
요시츠네(源義経) 역시 적진 깊숙이 들어가 싸우고 있었는데 타이라 군 병사들이 배 안에서 쇠갈퀴를 가지고 요시츠네의 투구 드림을 휙휙 하고 두세 차례 걸쳐 잡아당겼다. 부하들이 대도와 협도를 휘두르며 막아내어 위기는 모면했으나 그 와중에 활이 쇠갈퀴에 걸려 물에 빠지고 말았다. 요시츠네가 몸을 숙여 채찍으로 끌어당겨 건지려 하자 부하들이 그냥 버리라고 말렸으나 듣지 않고 몇 차례나 시도한 끝에 간신히 주워들더니 웃으며 물러섰다. 나이 많은 무사들이 혀를 차며 "왜 그리 무모한 짓을 하십니까? 설사 천 냥 만 냥 하는 활이라 할지라도 어찌 목숨과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하자 요시츠네가 "내가 활이 아까워서 그런 줄 아느냐. 내 활이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힘을 써야 시위를 걸 수 있는 활이거나 숙부님 활처럼 강궁이었다면 일부러라도 떨어뜨려서 적이 줍게 했을 것이다. 이렇게 힘없는 활을 적이 주워 가지고 ‘이게 미나모토 군의 대장군 요시츠네의 활이란다‘하며 비웃을까 봐 목숨을 걸고 건져온 것이다"하고 이유를 설명하니 맞는 말이라며 모두 감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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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 2026-03-10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난 우리가 익숙한 명칭으로 매핑해줘서 이해에 도움됐다 느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