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모더니즘 소설론
강상희 / 문예출판사 / 1999년 5월
품절


객관적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주관적 표상이라는 '세계의 이중화'는 근대적 사유의 핵심으로서, 어느 영역에 사유의 중점을 두는가에 따라 상이한 세계 이해의 방식을 산출하게 된다. 모더니즘 소설은 이 가운데 주관적 표상을 궁극적인 영역으로 상정하는 비동일성의 사유 방식을 따른다. 그 반면에 리얼리즘 소설은 대체로 객관적 세계, 나아가 주관과 객관의 동일성을 지향하는 사유 방식을 따른다. 그에 따라 모더니즘 소설은 객체, 외적 경험, 집단 의식보다 주체, 내적 경험, 개인 의식을 상위의 리얼리티로 구현한다.
이처럼 경험과 사유의 개인적인 기원에 근거를 두고 있는 주관성의 특성으로 인해 모더니즘 소설은 내면성과 외적 현실의 원형적인 대립 구성을, 내면성에로 경도된 일원화된 소설 구조로 병형시키는 경향이 강하다. 내면성의 우세, 더 나아가 내면의 독립화와 자율성은 모더니즘 소설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의 흐름, 내적 독백, 회상과 자유 연상 그리고 미학적 자의식 등은 바로 모더니즘 소설이 구현하고자 하는 내면성에 상응하는 서술 범주들이다.-16-17쪽

자율성 범주는 칸트와 실러의 미학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서, 근대의 분화 과정 즉 진 선 미의 범주에 해당하는 과학 도덕과 법률 예술의 정립의 산물이다. 예술 분화의 기본 원리는 심미주의를 통해 확립된 바 있는, 예술의 사회적 무효과성에 대한 인식이다. 그것은 우선 목적 합리성과 유용성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의 일상적 가치 체계로부터의 독립을 뜻한다. (중략)
그러나 근대 예술 가운데 소설은 그와 같은 자율성 상태에 오랫동안 저항해 왔다. 근대 소설은 미적 자율성을 필수적인 요건으로 하지 않는 동시에 작가의 윤리성이 작품의 미학적 문제가 되는 유일한 장르이다. 내용 미학과 형식 미학의 충돌이 가장 극심한 장르가 소설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내용과 형식의 긴장 속에서 총체성을 모색한 1920-30년대의 경향 소설과, 내용화된 형식 형식화된 내용을 지향한 모더니즘 소설은 작가의 윤리성과 소설의 자율성의 갈등을 선명하게 보여준 두 영역이라 할 수 있다.-32-33쪽

모더니스트들은 이상의 소설엣허처럼 외적 현실로 환원되지 않는 내면 의식의 요소를 담고 있으며, 새로운 언어와 기법, 인물의 발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 공간적 형식과 동시성을 소설 구성의 핵심적 요소로 차용함으로써 전대 시간과의 선조적 연속성을 부정하고, 통합적 주체 대신에 파편화된 주체를 형상화함으로써 전통적인 소설과 명백하게 구분되는 특징을 갖게 된다. 모더니즘 소설의 이러한 특징은 "문명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산출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바 있다. (중략)
모더니즘의 전통 부정이란 본래 '가까운'과거 (immediate past)를 향하는 것이고, 먼 과거(distant past)는 오히려 숭배의 대사이 된다. 모더니즘의 한 특징인 신화 형식의 차용은 전통을 대하는 이러한 태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중략)
모더니즘 소설의 두번째 타자로 경향 소설을 들 수 있다.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의 진정한 타자는 경향 문학이다. 특히 마르크시스트 모더니즘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 모더니즘 문학이 내용에 있어 정치적 급진성을 결여하고 있음은 경향 문학과의 대립이 배제론에 경도되었기 때문이다. (아래에 계속)-35-38쪽

(위에서 계속) 경향 문학에 대한 비평적 태도는 박태원, 김기림 등에게서 특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박태원은 형식 미학의 요소들인 문장론과 기교론으로써 경향 문학에 맞서고 있으며, 김기림은 관념주의와 문학 언어 경시를 사례로 들어 경향 문학의 편내용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이들의 경향 문학 비판의 핵심은 이데올로기 편향 비판이거니와, 이 비판을 통해 모더니즘 문학은 형식 미학을 자기동일성의 근간으로 자각하기 시작한다.-35-38쪽

박태원의 중편 <천변풍경>을 리얼리즘의 확대로, 이상의 단편 <날개>를 리얼리즘의 심화로 규정한 최재서의 평론 <리얼리즘의 확대와 심화>를 기점으로 하여 전개된 논쟁은 모더니즘 소설의 리얼리티관의 실제를 검증하는 기회가 되고 있다. 리얼리티의 소설적 구현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양자의 공동 목표이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처럼 양자 사이에는 한 걸음에 건너뛸 수 없는 문학적, 인식론적 단절이 가로놓여 있다. (중략)
리얼리티의 내용 확정이나 현실 상황에 대한 인식에 있어 문제의 핵심에 도달하고 있는 것은 최재서와 백철, 임화이다. 최재서는 <날개>에 구현된 리얼리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 작품은 한 개의 아브 노르말(이상한)한 성격을 그린 것인 만큼 나는 거기에만은 리얼리티가 있다고 봅니다. 가령 그러한 아브 노르말한 성격이 현실과 유리된 것이라면 리얼리티가 희박하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그러한 아브 노르말한 성격이란 것도 역시 현대 문명이 낳아 놓은 것인 만큼 그러한 개성의 분화를 묘사한 것이니까 거기에는 리얼리티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현대의 리얼리즘이란 맑시즘과 프로이디즘의 양면이 있겠는데 (계속)-54-58쪽

그렇다면 이상 씨의 작품은 물론 프로이드적이겠지요." <문예좌담회> 조선일보(1937. 1. 1) (중략)
최재서가 리얼리티와 현실에 대한 모더니즘의 입장을 명백히 했다면 백철은 리얼리즘론의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그는 이얼리즘론의 혼미에 대해 "현대에 있어 리얼리즘이 그의 뚜렷한 본격성 그 일얼리티를 잃고 극히 완미해지고 분화되어 있는 적실한 반증"이라고 지적한 뒤,
"현재 우리들이 대하고 있는 일상적 현실은 그것이 현실이면서도 현실이 아니라는 곳에 不眞實한 금일의 사회 현상이 있다. 그 일상적 현실은 현실적 진실을 의미하는 현실이 아니고 일종의 가상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백철 "리얼리즘의 재고", <사해공론> (1937.1)
라고 말하고 있다. "현실적 진실"로서의 현실과 "가상적 표현"으로서의 일상적 현실의 대별이야말로 리얼리즘의 인식론적 거점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중략)
한편 임화는 <날개>를 "순수한 심리주의"로, <천변풍경>을 "파노라마적 트리비얼리즘"으로 규정하면서, "터무니없는 주관, 엉뚱한 관념주의"가 리얼리즘 형식 가운데 포장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아래에 계속)-54-58쪽

(위에서 계속)이어서 그는 이상의 소설이 노정하고 있는 주관주의적 경향을 리얼리즘의 원칙에 입각하여 비판한다. 비판의 방식으로 제기된 것이기는 하지만 임화의 다음과 같은 견해는 모더니즘 소설의 특징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파행적 리얼리즘이 사물의 현상과 본질을 혼동하고 디테일의 진실성과 전형적 사정 중의 전형적 성격이란 본질의 진실성을 차별하지 않고 현상을 가지고 본질을 대신하였다면, 주관주의는 사물의 본질을 현상으로서 표현되는 객관적 사물 속에 현상을 통하여 찾는 대신 작가의 주관 속에서 만들어 내려는 것이다." 임화, "사실주의의 재인식", <문학의 논리>, (학예사, 1940), 73
최재서와 백철, 임화의 대립적 견해가 절충적으로 수용되는 것은 이원조에 이르러서이다. 그는 "이상의 작품에도 현실 속에서 사는 사람의 생활이 진실하게 그려져 있다면 그것은 리얼리즘이라고 해도 결코 망발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보는 눈과 보이는 대상, 주체와 객체가 통일되는 모멘트가 가장 중요"하다고 덧붙임으로써 양자의 종합을 시도한다. (아래에 계속)-54-58쪽

(위에서 계속) 그러나 이 절충적 입장은 최재서의 침묵으로 인해 논의의 심화에로 ㅇ연결되지는 못하였다.
이 논쟁을 정리해 본다면 임화, 백철 등은 현상/본질의 변증법에 깇토하여 일의적 리얼리티, 목적론적 개념에 종속된 범주로서의 리얼리티, 목적론적 개념에 종속된 범주로서의 리얼리티 및 이데올로기 형상화 수단으로서의 언어관을 제시한 반면에 최재서는 이상의 <날개>가 다루고 있는 세계를 존재론적인 문제로 제기함으로써 반영의 틀에서 벗어난 또 하나의 리얼리티 세계로서 근대적 인간의 내면을 제시하고 있다. 최재서에 의해 내적 리얼리티는 그 존재론적 위상을 보다 명료하게 비평적 관점 속에 부각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54-58쪽

'새로움'에의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 개항기 이후의 근대사가 보여주는 바처럼 근대의 추동력은 새로움과 독창성의 추구이다. 개항기는 중세로부터 근대에로의 이행이라는 서구의 역사 모델과 유비 관계를 이루면서 '새로운 시대'라는 공통의 시간 의식을 생성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라는 규정을 자기 인식의 원천으로 하는 서구의 근대는 역사를 상대함으로써 이 새로움의 역사철학적 토대를 마련했다. 창조와 파괴의 연속으로 점철되는 근대의 유동성은 그 추동력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58-59쪽

한편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은 박태원, 이태준, 정지용 등의 문장론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현저하게 문장론(문체론) 지향서을 띠고 있다. 문장과 문체의 강조는 소설을 언어학적 구조물로 인식하는 가장 뚜렷한 징표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문장과 문체가 새로움을 보증하는 방법론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문체는 근대 개인주의와 함께 출현한 것으로서 문학적 개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독창성의 근원에 해당하는 것이며, 개인 의식을 타자의 의식으로부터 구별짓는 양식이다. 이러한 문장, 문체의 정립을 통해서 새로운 리얼리티로서의 내면은 그 독자성을 확증받을 수 있다. 1930년대 모더니스트들의 소설이 대체로 서사 충동(질량화 충동;molar impulse)보다는 문체 충동(분자화 충동;molecular impulse)이 우세하고, 그에 따라 플롯을 무시한 비유기체적 소설에로 경도된 한 원인을 문장론 지향성에서 찾을 수 있다.-67쪽

근대적 삶의 불확실성, 모호함, 가변성으로 인해 모더니즘 작가들의 소설은 그 구성에 있어 유기체성의 파괴라는 특징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잏상, 박태원 등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단편(斷片)의 병치와 몽타주 수법 등은 모더니스트들의 근대 인식에 상응하는 기법들이다. 이러한 기법들을 통한 세계와 자아의 탐구는 당연히 통일된 감정이 아닌 아이러니로 귀결된다. 최명익의 <봄과 신작로>의 주인공 금녀첳럼, 자아는 이제 외적 현실에 대해 내면적 가치로서 자기 존재를 체감하기 시작한다. 자아는 근대적 삶의 유동성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내면으로 눈을 돌리고 자기 자신을 보존하거나 혹은 해체하려는 욕망을 갖게 된다. 모더니즘 소설에 나타나는 개별자로서의 주인공은 이처럼 보편자로서의 근대성이 유동성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인물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는 내면과 외적 현실 사이의 균열을 이어주고 내면성의 열망을 상대화한다. 예컨대 시적 주술이 사라져 버린 "산문적 현실"에서 최명익 소설의 주인공들이 내면의 추상성으로 고립되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의 기능 때문이다. 또 삶을 "수평적 타락"으로 만들어 버리는 (아래에 계속)-82-83쪽

(위에서 계속) 환멸의 현실에서 유항림 소설의 인물이 생존하는 힘은 내면의 충돌 감정 혹은 욕망이다. 이 양가적 감정 혹은 욕망의 균형이 상실되었을 때 아이러니가 사라지고 <마권>의 주인공은 완전한 유폐로서 동경행을 결정하게 된다. 李箱 소설의 자아는 "형해와 흔적'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지만, 자아를 그러한 상태로 만드는 세계의 위계 질서를 유희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소설 전체를 아이러니의 공간으로 만든다. 이렇듯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에서 내면성의 유아론적 고립을 어느 정도 상쇄하는 것은 아이러니를 매개로 한, 외적 현실과의 최소한의 접촉 때문이다.
외적 현실의 표상(사실)은 모더니즘 소설에서 그것과 대칭 관계에 있는, 의미와 가치의 내면적 탐색으로 형상화된다. 사회적 근대성의 세계는 의미와 가치를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탐색은 자아의 내면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더니즘 소설에서 자아의 내면에서 탐색된 의미, 가치와 외적 현실을 이어주는 수사학적 가교가 바로 아이러니인 셈이다.-82-83쪽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인 경험의 양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일상성의 경험이다. 동시대의 경향 소설이 대체로 일상성을 넘어서는 목적론적 시공간 구조를 소설의 기반으로 삼은 데 반해, 그러한 목적론이 결여된 모더니즘 소설은 일상성 그 자체를 소설적 시공간으로 채용하고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 소설은 대체로 일상성을 소설의 토대로 삼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반정립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상적 현실은 모더니즘 소설 주인공의 주관적 경험이 펼쳐지는 시공간이지만, 그 주관성으로 인해 일상성이 변형, 전도된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특히 교환 가치와 실제적 합목적성이 지배하는 근대적 일상성은 모더니스트들이 넘어서야 하는 하나의 인식론적 장애물로 형상화되고 있다. 근대적 일상성을 내면화하여 자기 동일성의 근간으로 삼을 때 얻을 수 있는 삶의 만족감은 오히려 이들에게는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 되고 있다. (중략)
근대인들에게는 일상의 순환적 시간이 근대적 삶의 유동성을 견디는 동력을 제공한다. 일상의 세 영역인 노동, 욕구, 쾌락의 결합 속에서 그들은 일상을 자기 실존의 절대적인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계속)-91-93쪽

(위에서 계속)
그러나 모더니스트들은 그와 같은 완결된 표현(피상성)을 가진 일상적 현실의 질서와 가치 체계에 권태를 느낀다. 권태는 특히 근대 소설 이후에 부각된 실존의 상태로서, 모더니즘 소설이 사회적 근대성과 맺는 부정성의 관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증이 된다.-91-93쪽

최명익은 독서 체험의 가치를 절대화하기 위해 일상적 현실의 종말을 그린다. <비오는 길>에서 사지관 주인의 느닷없는 죽음이나 <무성격자>에서 아버지의 죽음은 독서 체험의 가치 곧 내면성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소설적 책략이라 할 수 있다. 사진관 주인의 죽음이 다소 과장된 아이러니로 느껴지는 것은 그 책략의 필연성이 부각되지 못하고, 내면의 절대성을 강조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노출되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99-100쪽

"내가 내 작품 ㅎ속에 무기력한 룸펜, 인텔리를 취급하는 것은 이분들이 그들의 작품 속에 <투사>라는 <주의자>를 취급하는 것과 동등한 권한에서 나온 것으로 다만 이곳에서 우리가 명심하여 둘 것은 이 <오월의 훈풍>이 나의 이제까지 제작한 작품 속에서 결코 우수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철수>라는 인물이 그분들의 어느 <주의자>나 <투사>보다도 훨씬 실재감을 가지고 있다는 한 가지 사실이다."
-박태원 <내 예술에 대한 항변> 조선일보 (1937.10.22)

박태원이 말하고 있는 "실재감"은 그러한 인간형의 편재성에 대한 지적인 동시에 심미적 리얼리티를 핵으로 하는 인간형에 대한 옹호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실재감"이 바로 모더니즘 소설에 설정되는 인물의 가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인물은 근대인의 타자로 서 있는 심미적 근대인의 표상이다. 이들은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가치 체계를 거부함으로써 '고독한 예술가'라는 심미적 근대인의 원형이 된 보들레르의 특서을 공유한다.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에 설정된 인물은 우선 근대인의 자기 보존의 논리인 노동과 생산의 패러다임 그 맞은편에 서 있다. (아래에 계속)-106-107쪽

(위에서 계속) 노동자가 자본주의의 발명품인 것처럼 룸펜 인텔리도 자본주의의 부정적 발명품이다. 후자는 노동과 생산의 윤리를 저버림으로써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의 은유가 된다.-106-107쪽

이상, 유항림 등의 소설이 도달한 그러한 고립과 자기 충족성의 존재 상태에서 이들을 사로잡는 것은 유희 충동(spieltrieb)이다. 오성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완전성의 이념과 실천적 이성의 지향점인 선(善)이 절대적인 진지함을 요구한다면 유희 충동은 심미성을 통한 자율호운 유동을 경험한다. 모더니스트들의 유희는 감각 충동(Stofftrieb)과 형식 충동(Formtrieb) 간의 긴장과 갈등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이상의 유희는 형식 내지 절대를 향한 형식 충동이 우세한 반면에 유항림이나 박태원의 경우는 소재 내지 제재를 향한 감각 충동이 우세하다.-109쪽

이상의 소설이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에 나타나는 유희 충동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여전히 '근원에 대한 동경의 윤리, 순수함의 윤리, 자기 현존의 순수성에 대한 윤리'가 존재한다. "루소적 유희"라고 불릴 수 있는 이상의 이러한 유희 양상은 줄곧 "풍경의 근원, 중심, 초점"을 붇는 근대적 지성의 자기 이해로부터 유래하는 것일 터이다.
이상의 '루소적 유희'가 자책감, 슬픔, 향수 등의 정조를 담고 있는 것이라면 박태원 소설에 나타나는 유희는 유며를 수반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중략) 문어체에 적합한 단어 특히 한자어를 서술이나 대화에 빈번하게 사용하여 과장과 의뭉스러움을 만들어내고 있는 이런 경우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전후한 모더니즘 소설에 두드러진 경향이다. 이상의 소설에서 한자어가 관념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데 기여하는 반면, 박태원의 소설에서는 그것이 유머를 낳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중략)
생활인의 정조인 명랑성에 대한 욕망은 박태원의 소설 세계 전반에 관철되고 있는 욕망이다. (아래에 계속)-113-115쪽

(위에서 계속) 모더니즘 소설의 다소 부박한 유희로부터 일상적 현실의 전면 수용으로 이행하게 되는 동력은 처음부터 그의 소설과 문장에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이행은 내면성의 추구로부터 일상적 현실의 승인으로 나아간 과정과도 동일하다. 그렇다면 박태원 소설에 나타나는 유희 충동은 유항림 소설의 환멸의 유희와 대칭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 중간 지점에 전도된 진정성의 원천으로서 이상의 루소적 유희가 있는 것이다. -113-115쪽

관조의 한 요소인 침묵이 내면 의식 형성의 중요한 전제가 됨은 최명익의 소설 거의 전편에서 드러나고 있다. 침묵은 일상적 현실로부터 심미적인 거리를 두고 자아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이다.-124쪽

1930년대 리얼리즘 소설이 이와 같이 환유 지향성을 수사학적 원리로 삼고 있는 데 반해 모더니즘 소설은 은유 지향성을 그 원리로 삼고 있다.
첫째, 모더니즘 소설은 대체로 보편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별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는다.이 인물은 주관적 경험과 개별적인 내면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중략)
둘째, 모더니즘 소설은 유기적 소설 구성보다는 몽타주나 병치 등의 단편화(斷片化) 기법으로써 스토리의 통일성을 해체한다. 모더니즘 소설에서 전반적으로 서사성이 약화되는 것은, 인접성에 근거한 환유가 아니라 유사성에 근거한 몽타주, 병치 등에의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서사는 발단이 결말을 포함하고, 결말이 발단을 포함하는 완결된 구조를 요구하는데, 모더니즘 소설은 그러한 완결된 서사에 대한 욕구를 폐기하는 경우가 많다. (중략)
셋째, 모더니즘 소설은 언어의 재현적 성격보다는 은유를 통한 의미의 확장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복합적이고 다의적인 내면 의식의 표출에 있어서 모더니스트는 재현 불가능성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은유의 수사학은 그러한 난경을 극복하려는 수사학적 전략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128-129쪽

(위에서 계속)
넷째, 문장의 운용에 있어 모더니스트는 결합보다는 선택의 원리를 취함으로써 은유를 통한 새로운 리얼리티의 창조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레이코프와 존슨의 지적처럼 "새로운 은유는 새로운 이해를, 따라서 새로운 실재를 창조할 수 있다." 특히 1930년대 모더니스트들이 운용하는 은유의 수사학은 내적 리얼리티의 창조에서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128-129쪽

모더니즘 소설의 시간 구조는 일반적으로 자연적 시간(time in nature), 객관적 시간, 사회적 시간의 속성이자 전통적인 소설의 시간 형식인 선조성의 거부로 특징지을 수 있다. 전통적인 소설에서 시간은 서사 전개의 동력으로서 스토리에 종속되어 있다. 그 반면에 모더니즘 소설의 작가와 주인공은 선조적 시간의 무의미함에 권태를 느끼고 그 시간을 미적 유희를 위한 단편(斷片)으로 해체하려는 경햐이 강하다. (중략)
모더니즘 소설에서 서사섯ㅇ이 약화되는 한 가지 이유는 거기에 있다. 모더니즘 소설은 자기 경험의 바탕을 이루는 경험적 시간(time in experience), 주관적 시간, 개인적 시간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모더니즘 소설에서 내면성과 외적 현실의 급격한 분열이 서사성을 파괴하듯이, 내면 의식에 상응하는 주관적 시간과 외적 현실에 상응하는 객관적 시간의 분열은, 스토리의 직선적 운동성에 근거한 서사적 시간의 성립을 방해한다.-136-137쪽

모더니즘 ㅎ소설의 시간 체험인 동시성의 본질적 요소는 시간의 공간화이다. 주관화된 현재적 시간의 발현 형식인 동시성이란 바로 시간적 인자의 공간화를 본질로 하는 것이다. 공간화된 시간을 설정하고 있는 이상이나 박태원의 몇몇 소설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거의 느껴지지 않으며, 나아가 그것이 의미 있는 질적 변화를 초래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공간의 유동과 흐름이 -특히 최명익의 소설에서처럼- 인물의 내면 의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인공물로 가득 찬 도시의 유동적이고 혼란스러운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에서 이 공간화의 효과가 극대화된다.-141쪽

모더니즘 소설의 작중 인물은 많은 경우 사회적 존재로 환원되지 않는 심리적 아포리아를 지니고 있다. 이 인물은 존재피구속성에서 벗어난 형상으로 나타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상태, 곧 내면성만으로 서술되기도 한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명제는 모더니즘 소설에서 이처럼 전도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모더니즘 소설의 작중 인물에게 부여되어 있는 내면의 형상을 중층적이라 할 수 있음은 그 때문이다. 이들은 단층적, 단선적 심리 구조보다는 중층적, 복합적인 심리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인물의 내면에는 그 기원이 불명확한 심상과 지각, 관념들이 혼재되어 있다. 모더니스트들이 전통적인 리얼리즘 기법을 거부하는 한 가지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는 삶의 다양성과 복잡성 그리고 심오함을 포착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178쪽

박태원의 소설은 개인과 가족의 문제를 다루면서, 고립된 개인으로부터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으로 이행한다. 초기 소설의 탈중심화된 인물조차 그 근저에는 어머니로 푯항되는 가족에로의 욕망이 개입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소설과 구보씨의 일일>은 그 의미 이동의 분수령으로서, 내면성과 외적 현실의 불화가 후자에로 경사되는 계기를 이룬다. 이제 <천변풍경>을 중심으로 하여 안정된 세테 소설의 세계가 정칙된다. 예를 들자면 <골목안>은 그러한 세태 소설의 안정성을 얻고 있는 소설이다.-212쪽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의 내면성은 유폐적 실존으로서의 근대적 개인의 위상을 드러내고, 소설의 형식 미학을 개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경향 문학의 타자로서 모더니티 지향성의 한 갈래를 형성한 모더니즘 소설은 부정성으로써 사회적 근대성을 비판하였거니와, 그 비판의 토대 역시 합목적성의 대항 형식인 자율적 내면성이었던 것이다. 근대주의의 가능성과 한계에 관한 최근의 비판적 논의에도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이 구축한 내면성의 세계는 의미 있는 통찰을 제공하리라 생각한다.-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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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4월. 레포트를 쓰느라 읽는 책은 아무래도 필요한 부분만 읽게 되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는 책이 드물다. 김만중, 박지원, 이광수, 최서해와 관련해서 이것저것 발췌해 읽었지만 제대로 다 읽은 책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는 책을 생각해 보니 공부보다는 취미를 위해 읽는 책이 많은 것 같다. 

 우한용의 <채만식 소설 담론의 시학>을 대출 기한이 임박해서 허겁지겁 다 읽었다. 덕분에 <탁류>도 읽고, <과도기>, <냉동어>, <소년은 자란다>도 읽었다. 내가 보기에 채만식은 균형 감각이 뛰어난 작가이다. 인간에 대해 덮어놓고 신뢰하지 않는, 냉소와 의혹의 눈초리가 좋다. 그의 냉소와 의혹은 자본가와 지식인과 기층민중 모두를 향하며, 군국주의 일본뿐만 아니라 신생 대한민국도 놓치지 않는다. 전쟁 전에 험한 꼴 안 보고 죽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좀 더 오래 살아서 냉소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글들을 조금 더 써주지 않은 것이 아쉽다.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는 민족주의의 고전이다. 서양사학과의 민족주의 수업을 청강하기로 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막연했던 민족주의가 머릿속에서 어렴풋하게 윤곽을 잡아가기 시작한다. 레포트를 하나 써 보면 또 한 발 나갈 수 있겠지.

 

 

 

 

 

 

 

 

어느 우울한 오후에 공부를 걷어치우고 도서관에서 미사키 아키의 <이웃 마을 전쟁>을 빌려 잠적했다. 이 작가의 단편 <버스 탈취 사건>을 퍽 재미있게 봤는데, 장편은 아직 멀었다는 느낌. 아이디어는 상쾌하나 이야기를 구성해가는 역량이 조금 부족하다. 

 

 

 

 

 

 

  


좋아하는 선생님과 같이 주경철의 <문명과 바다>를 대상으로 한 독서토론회 포스터 옆을 지나다가 "저 책 읽어."라는 말씀을 들었다. 도서관에 있는 두 권은 모두 대출중이어서 서점에서 네 시간 만에 독파했는데, 서점에서 독파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흥미진진한 책이다. 지도와 그림이 아름답고 글이 쉽다. 선원들의 비참한 생활상에 대한 것과 노예 무역에 대한 것이 특히 좋더라.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려 드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예 무역의 바탕에 서양인의 탐욕 뿐 아니라 아프리카 인들 자신의 생활양식도 존재한다는 것은 조금 충격적인 발견. 저자가 대중적인 글쓰기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재미있어서, 토론회에서는 이 쪽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다

 

 

 

 

 

 

   



문학사를 따라 현대 소설을 설렁설렁 살펴보는 중이다.  경향을 지나 모더니즘에 도달했는데, 말만 많이 들었지 그게 뭔지 전혀 모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강상희의 <한국 모더니즘 소설론>은 비교적 쉽고 명쾌하게 중요한 점들을 짚어 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작품을 다 읽으면 훨씬 더 이해가 잘 되겠지만 도서관에서 찾기가 쉽지 않은 것들도 많군. 

 

 

 

 

 

 

 

 


그래서 레포트 주제는 박태원으로 결정했다. 크게 도움은 안 되겠지만 사진도 많고 지도도 있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 보여서 조이담의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를 읽었다. 박태원은 부잣집 아들이었구만. 아버지는 약사, 삼촌은 의사, 고모는 고등학교 교사인 초인텔리 집안. 구보 하나 정도 소설 쓰고 있어도 아무 문제 없는 경제 환경이었다. 쬐끔 재수 없어졌다. 그치만, 그런 도련님이 월북했다니, 만년은 엄청 고달펐겠구나 싶어서 동정하는 마음도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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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나남신서 377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윤형숙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구판절판


그러므로 나는 인류학적 정신에서 다음과 같은 민족의 정의를 제안한다. 즉 민족은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공동체이다.
민족은 가장 작은 민족의 성원들도 대부분의 자기 동료들을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며 심지어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하지만, 구성원 각자의 마음에 서로 친교(communion)의 이미지가 살아있기 때문에 상상된 것이다. 르낭(Renan)이 "민족의 핵심은 전 소속원들이 많은 것을 공유한다는 사실이며, 동시에 전 소속원들이 많은 것을 망각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라고 썼을 때 그는 그의 유쾌한 화법으로 이 상상함(imagining)을 언급한 것이다. 겔너(Gellner)가 "민족주의는 민족들이 자의식에 눈뜬 것이 아니다. 민족주의는 민족이 없는 곳에 민족을 발명해낸다"라고 얼마간 잔인하게 규정했을 때 위와 유사한 논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화의 결점은 민족주의가 잘못된 구실 아래 가장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너무 애쓴 나머지 '발명'을 '상상'이나 '창조'보다는 '허위날조'와 '거짓'에 동화시킨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민족과 병치될 수 있는 '진정한'공동체들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계속)-25-27쪽

(위에서 계속)
사실 면대면의 원초적 마을보다 큰 공동체는(그리고 아마 이 마을조차도) 상상의 산물이다. 공동체들은 그들의 거짓됨이나 참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상상되는 방식에 의해서 구분되어야 한다. (중략)
민족은 제한된 것으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10억의 인구를 가진 가장 큰 민족도 비록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한정된 경계를 가지고 있어 그 너머에는 다른 민족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민족도 그 자신을 인류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어떤 구세주적 민족주의자들도 기독교도들이 어느 시대에 기독교도만 모인 행성(planet)이 도래할 것이라고 꿈꾸는 것과 같이, 모든 인류의 성원이 그들의 민족에 동참하는 날이 올 것을 꿈꾸지는 않는다.
민족은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계몽사상과 혁명이 신이 정한 계층적 왕국의 합법성을 무너뜨리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래에 계속)-25-27쪽

(위에서 계속)오늘날은 어떤 보편적인 종교의 가장 신앙심 깊은 추종자라도 보편적인 종교들이 여럿 존재한다는 사실과, 각 신앙의 존재론적 주장과 영토적 한계 사이에 이질동형(allomorphism)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런 인간의 역사 단계에서 민족들은 자유롭기를 꿈꾸며 만일 신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면, 직접 받기를 꿈꾼다. 이 자유의 표식과 상징은 주권국가이다.
마지막으로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각 민족에 보편화되어 있을지 모르는 실질적인 불평등과 수탈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언제나 심오한 수평적 동료의식으로 상상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지난 2세기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제한된 상상체들을 위해 남을 죽이기보다 스스로 기꺼이 죽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 형제애이다.-25-27쪽

이 단순한 관찰들을 이야기하는 주된 이유는 서유럽에서 18세기는 민족주의의 여명기일 뿐 아니라 종교적 사고양태의 황혼기이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와 합리적 세속주의의 세기는 그 자신의 근대적 어둠도 동반하였다. 종교적 믿음이 쇠퇴했다고 해서 믿음이 일부 진정시켰던 고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낙원의 붕괴로 숙명만큼 종잡을 수 없는 것도 없게 되었다. 영혼의 구원이 어리석은 생각이라면 다른 형태의 연속성만큼 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없었다. 따라서 숙명을 연속성으로, 우연을 의미 있는 일로 전환시키는 세속적인 작업이 필오하였다.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이러한 목적에 민족이라는 개념보다 더 적합한 것은 별로 없었으며, 현재도 별로 없다. 민족국가가 '새로운' 것이고 '역사적인' 것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면 민족국가가 정치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민족들은 언제나 기억할 수 없는 과거에서부터 나타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민족은 끝없이 미래로 미끄러져 들어간다는 것이다. 우연을 운명으로 바꾸는 것이 민족주의의 마술이다.-31-32쪽

많은 왕조들은 정통성의 원칙이 조용히 시들어 갈 때 '민족'이라는 표어에 손을 뻗고 있었다. 프레드릭 대제(1740-1786통치) 군대에 지휘관이 대부분 '외국인들'로 구성되었던 반면에, 그의 장조카인 프레드릭 빌헬름 4세(1797-1840통치) 군대의 지휘관은 샨호르스트, 그나이세나우와 클라우제비츠의 눈부신 개혁의 결과로 전적으로 '프러시아 민족(national-Prussian)으로 구성되어 있었다.-45쪽

기본적으로 나는 민족을 상상하는 가능성 자체가 역사적으로 볼 때 아주 오래된 세 가지 근본적인 문화개념이 인간의 사고에 대해 갖고 있던 공리적 통제력(aximatic grip)을 잃어버린 때와 장소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이 세 가지 문화개념 중 첫째는 특정한 정본 언어(script-language)가 바로 진리와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존재론적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제공한다는 개념이었다. 기독교세계와 이슬람세계 그리고 기타 세계의 초대륙적 대 연대감을 낳게 한 것은 바로 이 개념이었다. 둘째는 다른 인간들과 구별되며 어떤 우주적(신성한) 형태의 섭리에 의해 통치하는 군주라는 상위 중심부의 주변과 그 밑에서 사회가 자연스럽게 조직된다는 믿음이었다. 지배자는 경전처럼 존재에 접근하는 접목점이었으며 존재 안에 본래부터 내재하였기에 인간의 충성심은 반드시 서열적이고 구심점을 향하여 있었다. 셋째는 우주관과 역사가 구별되지 않고 세계의 기원과 인간의 기원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보는 시간의 개념이었다. (아래에 계속)-62-63쪽

(위에서 계속) 이러한 개념들은 서로 어우러져서 존재의 일상적인 숙명성(무엇보다 죽음, 상실, 예속)에 어떤 의미를 주며 여러 방식으로 그것들로부터 구원을 제공하며 인간의 삶을 사물의 본질 자체에 굳게 뿌리내리게 했다.
이러한 상호 연결된 확실성들이 서서히 불균등하게 퇴조하면서 우주관과 역사 사이에 엄한 쐐기를 박았다. 세 문화개념들의 퇴조는 경제변동, '발견'(사회적인 발견과 과학적인 발견), 그리고 가일층 빨라진 커뮤니케이션의 발달 등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서유럽에서 일어나고 그 후에는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다. 그렇다면 형제애와 권력과 시간을 의미 있게 서로 연결하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인쇄자본주의보다 이러한 모색을 촉진시키고 성공적으로 만든 것도 없을 것이다. 인쇄자본주의는 빠르게 늘어나는 사람들이 심오하게 새로운 방식으로 그들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연결할 수 있게 해주었다.-62-63쪽

우리는 인간언어의 숙명적 다양성 위에 자본주의와 인쇄술이 수렴됨으로써 그 기본 형태에 있어 근대 민족(nation)을 준비하는 새로운 형태의 상상의 공동체가 형성될 가능성을 창조했다고 말함으로써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할 수 있다. 이 공동체들의 잠재적 영역은 본래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동시에 현존하는 정치적 경계들과 아주 우연적인 관계만을 가졌다.-75쪽

새 인쇄소를 시작하는 인쇄업자들은 신문을 그들의 생산에 포함시켰다. 흔히 인쇄업자들 자신이 신문의 주요 기고자요 때로는 유일한 기고자이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인쇄업자 겸 신문인들은 처음에는 본질적으로 북아메리카적인 현상이었다. 인쇄업자 겸 신문인들이 당면한 주요 문제는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편부와 매우 밀접한 연대를 발달시켜 흔히 한쪽이 다른 한쪽을 겸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인쇄업소는 북아메리카 통신의 중심이자 지역의 지적 생활의 핵심으로 등장했다.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는 비록 느리고 간헐적이었지만 유사한 과정이 일어나 18세기 후반에 최초의 지방신문이 출현하였다.
남아메리카에서든 북아메리카에서든 무엇이 아메리카 대륙의 최초의 신문의 특성이었을까? 신문은 본질적으로 시장의 부속물로 시작했다. 초기 신문들은 본국에 대한 소식 외에 식민지의 정치적인 발령, 부호들의 결혼 등에 관한 소식과 함께 상업소식(언제 배가 도착하고 떠나며, 어느 항구에서 어떤 물건의 시세가 어떤지 등)을 실었다. (아래에 계속)-94-95쪽

(위에서 계속)달리 말하면, 같은 면에 이 결혼과 저 배, 이 가격과 저 대주교에 관해 같이 실을 수 있게 한 것은 식민행정부와 시장체계 자체의 구조였다. 이런 식으로 까라까스(Caracas)의 신문은 아주 자연스럽게, 심지어는 비정치적이라 할 수 있게, 독자라는 특정 무리에게 상상의 공동체를 창조해 주었다. 이 배, 신부(brides), 대주교, 가격들은 독자들에게 속하는 것이었다. 물론 적절한 시기에 정치적 요소가 들어오는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일이었다. -94-95쪽

한 자본가가 대개 다른 자본가의 딸과 결혼하지도 않았고 서로의 재산을 상속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과 비슷한 수천 명의 존재들을 활자어를 통하여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문맹한 자본가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세계사적 조건에서 자본가는 본질적으로 상상의 기반 위에 결속력을 성취한 최초의 계급이었다.-111쪽

결론적으로 말해 필자는 19세기 중엽부터 시튼왓슨이 '관주도 민족주의'라고 부른 민족주의가 유럽에서 발전했다고 논하였다. 관주도 민족주의는 대중적 언어민족주의가 출현할 때까지 역사적으로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사실 관주도 민족주의는 대중의 상상된 공동체에서 배제되거나 주변화될 위협을 느낀 세력집단들-주로 왕조와 귀족의 세력집단들-에 의한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1918년 이후와 1945년 이후 일종의 지각상의 대변동이 일어나 이 세력집단들을 에소토릴(Estoril)과 몬테 까를로(Monte Carlo)에 있는 하수구 쪽으로 쏟아버렸다. 그런 관주도 민족주의는 앞서 일어난 대규모의 자발적인 대중 민족주의의 모형에서 각색한 반동적이면서 보수적인 정책들이었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유럽과 레반트(Levant) 지역에 국한되지 않았다. 제국주의의 이름으로 비슷한 정책들이 19세기에 복속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방대한 지역에 있는 비슷한 종류의 집단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마지막으로 비유럽 문화와 역사 속으로 굴절되어 관주도 민족주의는 직접적인 예속을 피한 소수 지역(그 중에는 일본과 샴이 있다)에 있는 토착지배 집단에 의해 포착되고 모방되었다.-147-148쪽

방대한 교육산업은 미국 젊은이들이 1861-65년의 전쟁을 잠시 존재하였던 두 주권 민족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형제'간의 '시민' 정쟁으로 기억/망각하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만일 남부연방군이 독립을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다면, 이 '시민' 전쟁은 기억에서 매우 비형제적인 어떤 것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영국 역사책은 모든 학생들이 '정복자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이라고 부르도록 가르침을 받은 위대한 시조의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학생들은 정복자 윌리엄이 영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그 시대에는 영어가 없었기 때문에 사용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지 못한다. 또한 학생들은 '무엇의 정복자인가?'에 대해서도 배우지 못한다. 왜냐하면 알기 쉬운, 유일한 근대적 대답은 '영국의 정복자'이기 때문이다. 이 모범답안은 옛 노르만인 약탈자를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성공적인 선구자로 만든다. 그래서 '정복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망각할 의무가 있는 어떤 것을 상기시키는 '생 바르뗄레미'와 같은 종류의 생략부호로 작동한다.-255-256쪽

의식에서의 모든 심오한 변화는 성격상의 변화와 함께 특징적인 건망증을 가져온다.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그러한 망각으로부터 서술이 나온다. 사춘기가 낳은 체질적, 감정적 변화를 경험한 후 어린 시절의 의식을 '기억하기'는 불가능하다. 유아시절과 초기 성년시절 사이에 있는 얼마나 많은 수천의 날들이 직접적으로 회상하기 어려운 곳으로 사라지는가! 바랜 사진 속의 양탄자나 침대 위를 행복하게 기어다니는 벌거벗은 아이가 당신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중략) 이런 소외로부터 '기억될 수 없기 때문에' 서술되어야 할 인성(personhood), 정체성(identity:그렇다. 당신과 벌거벗은 아이가 동일하다)의 개념이 나온다. (중략)
민족도 근대적 인간과 마찬가지이다. 세속적, 연속적 시간에 매몰되어 있다는 인식은 연속성에 관한 모든 암시로 인하여, 또한 18세기 단절의 산물인 연속성의 경험을 '망각'하는 것에 관한 모든 암시로 인하여 '정체성' 서술의 필요성을 낳는다.-258-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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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4-18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족주의 이야기를 하려면 읽지 않을 수 없는 고전이라는 의무감으로 읽었다. 앤더슨은 민족 형성에 있어서 대중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학자이다. 그의 이야기에 조금 미심쩍은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내가 워낙 대중을 불신하기 때문이겠지.
 
중급한문 기초교육교재 시리즈 2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엮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원문과 최소한의 주석이 있는 수업 교재. 교내서점보다 쌈. 배송도 의외로 빨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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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와 담론 - 영화와 소설의 서사구조
시모어 채트먼 지음, 한용환 옮김 / 푸른사상 / 2003년 9월
절판


구조주의 이론은 각각의 서사물은 두 개의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야기, 사건들(행위, 돌발사 등)의 내용과 그 연쇄 및 사물적 요소(등장인물이나 배경을 구성하는 것)라고 부를 만한 것이 합쳐진 이야기가 그 하나라면, 표현, 혹은 내용이 전달되는 방식인 담론이 그 다른 하나이다. 단순화시킨다면 이야기란 묘사된 서사물 속의 '무엇'이며, 담론이란 '어떻게'에 해당하는 것이다.-19쪽

서사적 담론, 즉 '어떻게'는 다시 두 개의 하부 구성인자로 나누어진다. 서사적 형태 그 자체 -서사적 전달 구조- 와 그것의 발현 -언어나 영상, 발레, 음악, 팬터마임 등등의 특정한 물리적인 매체를 통해 나타남- 이 그것이다. 서사적인 전달은 이야기의 시간과 이야기를 진술하는 시간의 관계, 혹은 이야기의 출처나 저작적 특성(화자의 목소리나 '시점', 기타 그와 유사한 점 등)과 연관된다. 당연히 매체는 전달에 영향을 미친다. -22쪽

이러한 문제는 현상학적인 미학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가 박물관이나 도서관, 극장 등에서 부딪히게 되는 '실제적 대상'과 '미적 대상'간의 근본적인 차이점에 대해서 밝혀낸 바 있는 로만 잉가르덴에 의해 해결되었다. 실제적 대상이란 바깥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대리석 조각, 그림물감이 굳어 있는 캔버스, 규칙적으로 울리는 공기의 진동파, 한 덩어리로 제본된 인쇄된 종이뭉치-이다. 반면 미적 대상이란 관찰자가 그러한 사물들을 미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관찰자의 마음속에 구축(또는 재구축)되는 것이다. 미적 대상은 실제적 대상의 부재 속에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순수한 상상 속의 대상들에서도 어떤 미적 경험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나의 시를 기억 속에 살려낼 때 우리는 '글자들'이나 그에 해당하는 발음들을 단지 상상하게 될 뿐'인 것이다. (중략) '단순한' 독서는 조각을 단순하게 관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적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미적 경험의 예비적인 절차일 뿐이다. 대상을 지각하는 사람은 어느 지점에서 미적 대상의 '영역', 혹은 '세계'를 정신적으로 구축해야 한다.-28-29쪽

사건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서의 서사행위 자체와 그것의 직접적인 표출 방식으로서의 실연 사이의 구분은 diegesis와 mimesis 사이의 고전적 구분, 또는 현대적인 용어로는 '말하기'와 '보여주기' 사이의 구분과 일치한다.-35쪽

몇몇 비평가들은 배경이 플롯과 인물에 관련될 수 있는 방법의 범주화를 제안했다. 자연적 배경에 관심을 기울였던 로버트 리들(R. Liddell)은 이를 다섯 유형으로 구분했다.
첫째, 공리적, 혹은 실용적 배경은 단순하고 중요성이 적고 행동에 최소한의 영향을 미치고, 일반적으로 감정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배경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좋은 예가 된다.
둘째는 상징적 배경인데, 행위와 밀접한 결합을 강조한다. 여기서 배경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행위와 '유사'하다. 소란스러운 돌발사들은 "위대한 유산"에서의 습지 같은 소란스러운 장소에서 일어난다. "황폐한 집"에서의 비 오는 날씨는 데드로크 양의 가슴속에 있는 눈물과 일치한다.
셋째는 무관계한 배경이다. 즉 풍경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인물들은 특별히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시골에 묻혀 있는 샤를르 보바리를 따르는 마담 보바리의 경우가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이와 인접하거나 그 하위로 분류될 수 있는 유형은 아이러닉한 것으로 거기에서의 배경은 인물의 감정 상태나 지배적인 분위기와 일치하지 않는다. "대사들"에서 몇 년 전에 보스톤 회랑에서 (아래에 계속)-156-157쪽

(위에서 계속)보랑비네의 풍경화를 연상시키는 '푸르고 신선한 풍경을 그 프랑스풍의 시골'에서 발견하고 흥분해 있던 스트레더는 우연히 비오네 부인과 채드가 보우트에서 밀회를 즐기는 현장을 목격한다. 스트레더에게 있어 '그것은 마치 꿈속에서와 같이 별안간 나타난 갑작스럽고, 환상적인 위기였다.'
리들이 제시하는 네 번째 배경은 '마음속의 배경'이다. 즉, 이블린의 회상 속에 있는 내면 풍경이 그것이다.
다섯째는 만화경적인 배경인데, 물리적인 외부 세계에서 상상의 세계로 재빨리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에서 이러한 예를 찾을 수 있다.-156-157쪽

마지막으로 검토해야 할 부분은 화자의 개입이 있거나,혹은 없는 이야기의 전달이다. (중략) 그러한 구분에 대한 유용한 기초가 최근에 발전된 '화행 이론'이라 불리는 학문에 의해 제공되고 있다. (중략) 그 이론은 영국의 존 오스틴에 의해 발전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문장들이 의도하는 것 -오스틴이 그것을 '언표내적(illocutionary)' 국면이라 부르는 것-은 단순히 문법적인, 혹은 '언표적(locutionary)' 국면과, 그것들이 실제로 전달되는 것, 즉 청자에 미치는 영향 혹은 '완전언표적(perlocutionary)' 국면과 날카롭게 구분된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화자가 영어로(혹은 다른 자연언어로) 한 문장을 말할 때 그는 적어도 두 가지, 어쩌면 세 가지 일을 하고 있다. (1)그는 문장을 만드록 있다. 즉 영문법의 규칙에 의하여 문장을 형성하고 있다. ('언표화 하기'). (2)그는 그러한 언어 행위의 '내부에서', 비언어적 수단에 의해서도 똑같이 수행될 수 있는 완전히 분리된 하나의 행위를 수행하고 있다. ('언표내화 하기')
(아래에 계속)-168-169쪽

(위에서 계속)
예를 들어, 만일 그가 '물 속으로 뛰어들어'라고 말한다면, 그는 (1)명령법 구문에 관한 표준 영어 규칙에 의해서 '물 속으로 뛰어'라고 하는 어법을 수행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2)ㅂ물웅덩이의 가장자리에서 뚜이ㅓ드는 시늉을 함으로써 전달될 수도 있는 행동인 '명령하기'의 언표내화를 수행하고 있다. 만일 그가 자신의 대화 상대자로 하여금 물웅덩이에 뛰어들게 함으로써 언표내화의 의도를 달성한다면 (3)그는 설득이라는 완전언표화를 성취한 것이다. -168-169쪽

우리가 텍스트상의 의미론적 분석에 대하여 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된다면 대화 유형들에 유효한 분류법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인상적이긴 하지만 모리스 블랑쇼는 이미 세 가지의 유용한 구분법을 제안했다. 그가 내세운 보기들은 말로, 제임스, 카프카이다. 말로의 작품에서는, 전통적인 소크라테스적 의미로, 대화는 수수한 토론의 기능을 제공한다. 그의 인물들은 그들의 열정적인 강렬함에도 불구하고, '이성저깅ㄴ 순간에... 갑자기, 시대의 압력이 의견 합치에 이르는 것을 방해할지라도, 진리를 발견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토론한다. 반면에 제임스의 인물들은 (호오도온이 말한 것처럼) '늙은 부인들과 더불어 차나 마시는' 한가한 담소의 마음으로 대화를 수행한다. 그러나 그러한 대화 속에 갑자기 하나의 '예외적인 설명'이 끼어든다. (아래에 계속)-190-191쪽

(위에서 계속) 즉 어떤 전달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내용을 둘러싼 한동안의 대화 속에서, 그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은밀한 분위기와, 그들로 하여금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상호 이해 때문에 마땅히 서로가 모르고 있으리라고 생각한 그 숨겨진 비밀을 통해 주인공들이 놀랍게도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는 설명이 그것이다. 카프카의 인물들은 그들의 역할상 서로를 벗어나 반대의 목적으로 말하도록 영구히 운명지워진다. 이 인물들은 실제로 대화자들이 아니다. 실제로 발화들은 교환되지 않고, 표면적 의미는 닮았을지라도 그것들은 결코 동일한 비중이나 현실성을 갖지 못한다. 어떤 것은 말 이상의 말이며, 판단과 계울과 권위와 유혹의 말들인 반면, 또 다른 것은 그 대화들이 서로 오고 가지 못하게 만드는 책략과 도피와 기만의 말들이다.-190-191쪽

우리는 정신 행위의 두 가지 유형을 분리할 수 있다. 즉 '언어화'를 수반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거칠게 말해서 인식(cognition)과 지각(perception) 사이의 구분이 그것이다. (중략) 인식이란 이미 언어적 구성물이기 때문에, 또는 수비사리 언어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언어적 서사물로의 전환은 간단하고도 직접적인 것이다. 그러나 지각의 전달은 언어로의 변형을 필요로 한다. (중략) 비언어적 지각 내용들은 '지정되지 않은' 언어적 형태로 변형될 수 있는가? '내적 독백'에 의해 그것은 가능하다.
등장인물의 사고 내용을 다루는 가장 명백하고 직접적인 방식은 그것들을 '비언표적 언술'로 취급하는 것, 득 '그는 생각했다'와 같은 인용 표현과 더불어 그것들을 인용부호로 묶는 것이다. (중략) 최근에 올수록 인용 표현 또한 생략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는 '직접 자유 사고(direct free thought')이다. -195-196쪽

그러나 '감각 인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의식의 흐름'을 사용해야만 하는가? 왜 '감각 인상'은 그 자체로 완전히 적절한 용어가 되지 않는가? 우리는 보울리으이 가치 있는 구분법을 역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즉 두 개의 하위 분류를 지시하게 하는 것이다. '개념적인 내적 독백'은 등장 인물의 마음속을 스쳐 가는 실질적인 말에 대한 기록을 일컫는 것이고, '지각적인 내적 독백'은 관례적인 언어적 변형에 의해 등장인물의 발음되지 않은 감각 인상들을 전달하는 (화자의 분석 없이) 것을 일컫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의 흐름'은 따로이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즉 그것은 생각과 인상들을 임의로 배열하는 것이다. '흐름'이라는 말은 그것을 적절히 암시한다. 이 경우 정신은 어떤 목적을 가진 생각과는 정반대의 극을 이루는 연상의 일상적인 흐름에 몰두하는 것이다. -204쪽

만약 화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포작가와 내포독자 사이에 의사 전달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그 내포작가는 아이러닉하며 화자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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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3-29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쉬운 설명을 기대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읽는 동안에 더 헷갈려 버린 책. 그래도 앞부분 읽은 게 아까워서 반납하기 전에 억지로 끝까지 읽긴 했다. 문학이론을 번역서로 읽는 건 정말 고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