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라는 사상 - 근대 일본의 언어 인식
이연숙 지음, 고영진.임경화 옮김 / 소명출판 / 2006년 10월
품절


설상가상으로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1847~1889. 일본의 언어로 영어를 도입할 것을 주장 - 인용자주)는 근대 일본의 언어의식에 있어서 가장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는 부분을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드러내 버렸다. 모리 아리노리는 일본어가 "결코 우리들의 열도 밖에서는 사용되는 일이 없는 우리들의 빈곤한 언어"라고 무모하게도 단정해 버렸던 것이다. 일본의 지식인이 아무리 허세를 부린다고 해도, 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그들에게 끊임없이 마음에 걸렸다. 그것을 타나카 카쓰히코(田中克彦, 1934~)는 일본의 지식인에게는 "모어 페시미즘의 전통" 있다고 표현했고, 스즈키 타카오(鈴木孝夫, 1926~)는 "일본인은 심층의식 속에서 일본어를 저주하고 있다"고 서술했다. 단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언할 수 없는 비밀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식인들은 모리 아리노리의 논의에 대해서 거의 신경질적인 대응을 보여 왔다.-36쪽

바바 타쓰이(馬場辰猪, 1850~1888)의 모리 아리노리 비판은 실로 첲저한 것이었다. 그 후의 비판자들이 오로지 모리 아리노리에게 감정적인 저항을 나타내는 데 머물렀던 것에 반해, 바바는 한 권의 일본어 문법을 써냄으로써 모리의 논의의 근간을 이루는 인식, 즉 일본어는 불완전한 언어라는 인식을 뒤집으려고 했다. 그것은 대단한 지적인 치밀함과 역경을 동반하는 작업이었다. 왜냐하면 당시까지는 기술적인 체계성을 가지고 쓰인 문법서는 단 한 권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완성된 것이 <일본어문전(日本語文典)>이라고 통칭되는 영문 저작 이다. (중략)
바바는 '문법'을 쓰는 것이 그 언어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아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언어공동체의 자립성을 표시하는 최대의 증거가 된다는 사회언어학적 선견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바바는 모리 아리노리의 논의에 숨은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바바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중략) "설령 어느 민족이 정복자의 강대한 힘에 굴하여 언어의 채용을 강요당하는 경우에도 (아래에 계속)-37-41쪽

그 민족이 몇 백 년 동안이나 써 왔으며 그 때문에 가장 편리한 자민족의 언어를 버리는 일은 없었다."라고. 따라서 한 민족의 언어를 바꾸려는 모리 아리노리의 시도는 근본적으로 실행 불가능하며 무모한 기도이다.
그러나 바바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강압에 의할 수밖에 없는 외국어의 도입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두 언어 병용(다이글로시아)의 체제는 반드시 국민에게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할 것이다. 거기에는 언어의 벽에 의하여 격리되는 사회 계급의 분열이 생길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국민 중의 부유한 계급은 빈곤한 계급이 끊임없이 묶여있는 일상의 일로부터 해방되어 있으므로, 그 결과 전자는 후자보다 많은 시간을 언어의 학습에 쓸 수 있다. 만약 국정이, 나아가 사회의 교류 전부가 영어로 행해지게 되면 하층 계급은 국민 전체와 관련되는 중요 문제로부터 소외당하게 된다."-37-41쪽

메이지 초기의 '국어' 개념은 아직 성숙과는 거리가 먼 상태였다. 세키네 마사나오(關根正直, 1850~1932)의 <국어의 본체 및 그 가치(1888, 메이지21년)>는 국어의식의 변천을 살피는 데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논설로 나중에 다루겠지만, 그 서두에서 세키네는 이렇게 말한다. "근래 소학교 및 중학교에 국어라는 학과가 있음은 내가 아는 바이지만, 이 국어란 어떠한 것인가. 그 본체에 이르러서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고. 요컨대 '국어'는 세상에서 인지되는 버젓한 개녀이 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키네는 "국어란 랭퀴지라는 영어의 번역어로 들린다"고 하며, 그런 것이라면 오히려 국문이라고 하는 편이 알기 쉽지 않겠는냐고 말한다. 왜냐하면 "어(語)라고만 하면 단어로 들리기 때문이다."
(중략) 메이지 20년대 초두가 되어도 여전히 language의 번역어로서의 '국어'와, 단어 차원에서 '한자어(漢語)', '서양어(洋語)'에 대립하는 '국어'라는 두 가지의 층이 '국어'라는 표현 속에 섞이지 않은 채 병존하고 있었던 것이다.-114-115쪽

ㅔ이지 27~28년)을 정점으로 하는 메이지 20년대의 정신 상황을 토대로 하여 태어났다. 개괄적으로 보아, 메이지 10년대가 자유민권운동과 서구화주의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메이지 20년대는 관민(官民)일체에 의한 통일적 '국민'의 창출과 '국가' 의식 고양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는 모든 사회적 세력이 근대 국가에 걸맞는 '국민'상의 탐구라는 한 점을 향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흡수되어 버렸다.
1885년에 태정관제가 폐지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초대 총리대신으로 하는 내각제가 성립되었을 때, 문부대신(文部大臣)에는 모리 아리노리가 임명되었다. (중략) 그리고 모리는 이듬해인 1886년에 <학교령>을 발포하여,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대학교를 체계적으로 국가의 통제하에 두는 근대적 교육제도를 확립하고자 했다. (중략) '국어'와 관련하여 여기에서 놓칠 수 없는 것은 중학교에서 그때까지 '화한문과(和漢文科)'로 불리던 과목의 명칭이 '국어 및 한문과'로 변경된 것과, 사범학교에 '국어과'가 신설된 것이다. 더욱이 그 여파로 1889년에는 제국대학에서 '화문학과'가 '국문학과'로 개칭되었다. (아래에 계속)-119-120쪽

(위에서 계속) 학과명의 변경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화'에서 '국'으로의 변화는 언어의식에 어떤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났음을 의미하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119-120쪽

'전독일언어협회'의 결성 계기는 브라운슈바이크의 미술관장이었던 리겔(Hermann Riegel, 1834-1900)이 1883년에 발표한 <우리들의 모어의 근간>이라는 논문이었다. 거기에서 리겔은 외래어가 범람하는 독일어의 실상에 격분하여, 그러한 비독일적인 요소를 독일어에서 배제하기 위하여, 정부가 언어 아카데미를 설립해서 강력히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문이 세상에 호평을 얻고 받아들여지자, 리겔은 외래어를 배제하는 '언어순화운동'을 스스로 일으킬 결심을 했다. (중략)
언어순화운동은 스스로의 언어에서 외래어의 요소를 토착의 요소로 변환하려는 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그 운동은 한편으로는 커뮤니케이션의 원활화와 민중화, 다른 한편으로는 배외적 내셔널리즘과 국수주의라는 두 개의 극 사이에서 그 성격을 다양하게 바꾸어 버린다. 확실히 리겔은 "독일어로 바꿀 수 있는 외래어"의 배제만을 목표로 했으며, '맹목적인 결벽성'이나 '완고한 국수주의'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운동은 점차 '마녀 사냥'과도 닮은 '외국어 사냥'의 경향을 띠기에 이르렀다.
(아래에 계속)-150-153쪽

(위에서 계속)
전독일언어협회의 폭발적인 성공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승리하고 독일 통일을 이룩한 프로이센-독일에서 애국적 내셔널리즘의 파도가 일반 시민 사이에도 깊이 침투하고 있었던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점에서 협회가 먼저 배척해야 할 것으로 간주한 것이 수 세기에 걸쳐 독일어에 대해 우위를 자랑해 온 프랑스어로부터 들어온 외래어였던 것은 상징적이다. 그것은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언어적으로도 독일어의 자립을 추구하는 기운이 높아졌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독일어를 쓸 때는 네가 독일인이라는 것을 상기하라"와 같은 협회의 모토가 나타내고 있듯이, 거기에는 언어와 국민을 곧바로 동일시하는 위험한 동화주의의 맹아도 있었다. 애냐하면 이 협회의 정신은, 후에 제시하듯이 폴란드어를 쓰는 폴란드인의 존재를 말살하고 '독일인화'하려고 한 '게르만화운동'의 이데올로기와 간단히 타협하고 말기 때문이며, 나아가서는 국외의 독일어권까지도 독일의 판도에 넣으려는 영토확장주의까지도 거기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래에 계속)-150-153쪽

(위에서 계속)
우에다(우에다 카즈토시, 上田万年, 1867~1937, 1894년 베를린 대학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의 3년반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제국대학 교수가 되어 국어 이념의 형성을 주도. 도쿄대학 국어학과 초대 주임교수-인용자주)가 독일에 있었을 때 만난 것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소장문법학파이며 흥륭하고 있던 전독일언어협회였던 것은, 우에다의 그 후의 행보에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이 두 가지 운동체는, 전자가 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적인 것임에 비해 후자가 일반 대중도 포괄하는 결사운동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성격을 달리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운동체 사이에는 대립도 있었다. (중략) 그러나 이 두 가지 운동체의 근간에는 프로이센-독일의 내셔널리즘이 견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실 우에다가 유럽으로부터 가지고 돌아온 것은 바로 언어와 내셔널리즘의 불가분한 관련이라는 인식이었다. 학문으로서의 언어학도 실천적인 어너 정책도 '국가'라는 공통의 무대 위에서 어느 쪽도 뺄 수 없는 두 주역이어야 했다.-150-153쪽

우에다의 문하에서는 신무라 이즈루(新村出, 1876-1967, 역사언어학, 비교언어학, 사전학),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1882-1944, 조선어학), 킨다이치 쿄스케(金田一京助, 1882-1971, 아이누어학), 하시모토 신키치(橋本進吉, 1882-1945, 일본어학), 후지오카 카쓰지(동양어학), 오카쿠라 요시자부로(岡倉由三郞, 1868-1936, 영어학, 영어 교육)등의 많은 어어학자, 국어학자가 배출되었다. 그러나 언어 정책과 언어 교육 면에서 우에다의 작업을 전면적으로, 게다가 충실히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 호시나 코이치(保科孝一, 1872-1955)는 지금은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중략)
호시나는 1898년 문부성 촉탁이 되고 난 다음부터, 일관해서 표음식 가나 표기, 한자 폐지를 최종 목표로 하는 한자 제한, 공적 기관에서의 구어문의 채용을 계속해서 주장해 왔다. (중략) 호시나에게는 이른바 국어 개혁의 원형이 전형적으로 제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작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패전 후의 국어 개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입장에 따라 명확히 두 가지로 나뉜다. (아래에 계속)-201-203쪽

(위에서 계속)개혁 찬성파에게는 "戰前부터 계속 문부성 국어과에 있으면서 국어심의회의 간사장으로 남 모르는 고생을 하셨던 호시나 코이치 씨"는 존경의 念을 담아 상기되지만, "국어 국자의 간이화, 합리화를 민족의 전통을 손상시키는 파괴적 활동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호시나라는 사람은 오랫동안 문부성에 들어앉아서, 국어 개혁이라는 국가적 사업을 일당 일파의 편협한 견해에 의하여 수행하려고 하는 성가신 남자"로 간주되고 만다.-201-203쪽

우에다 카즈퇴와 그 주변의 언어학자들은 현재의 입말이야말로 '국어'의 본체라고 하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어학 잡지>를 활동의 중심으로 하여 언문일치체를 솔선해서 채용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성실하게 언문일치를 실행한 것이 횟나 코이치였다. 그 성실함이 화근이 되어, 호시나의 문체는 언문일치체의 단점이라고 해야 할 장황함과 단조로움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말았다. 호시나의 책을 읽으면 아무리 애써도 졸음이 몰려오는 것은, 내용보다도 그의 문체 탓인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문체로는 아무리 선구적인 사고라도, 박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포섭하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호시나는 그의 저작에서 실로 전투적이라고 할 만한 가나표기법도 실천했다. 호시나가 이상으로 삼은 가나표기법은 입말의 음성을 가능한 한 충실히 표상하는 표음적 가나표기법이었다. 호시나가 저작에 사용한 가나표기법은 결코 일관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호시나는 단순히 자신이 최량이라고 믿는 가나표기법을 멋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그가 참여했던 위원회가 정한 새로운 가나표기법을 재빨리 자신의 저작에서 사용했던 것이다.-235쪽

일본어의 '표준어'라는 말에는 특수한 感情 가치가 부착되어 있는 것 같다. 戰前에는 '표준어 제정'이라는 이름 아래 방언이 천시해야 할 말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방언의 화자는 자신의 말에 대한 깊은 열등감을 강요당했다. (중략) '표준어'라는 개념은 메이지 이래의 이러한 방언 박멸 정책의 심벌로서의 표현이었다. 그러자 전후에도 '표준어'라는 말에는 전전의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다니게 되었다. 그 때문에 지금도 학문적으로 '표준어'를 논할 때조차도 세상에 침투한 '표준어 알레르기'에 대한 배려가 필요할 정도이다. 그래서 이러한 과거의 기억을 흐리게 하기 위하여, '표준어'에서 '공통어'로의 다소 뻔한 '치환'이 이루어졌다.-261-262쪽

먼저 호시나는 포젠주의 교과 교재의 특수성에 주목한다. 대개 독일의 교과서에는 대 놓고 교훈적이거나 도덕적인 내용을 다룬 부분이 드문데, 포젠주에서는 그렇지 않다. 포젠주에서 사용되는 교과서에는 교훈적인 것, 특히 독일 황제와 황실에 관한 교재가 대단히 많다. (중략) 또한 독일에서는 일반적으로 향토 교육이 성행하였으며 교과서에도 향토 교재가 다수 들어 있는데, 포젠주의 향토 교재는 다른 주와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학생들에게 향토에 대한 애착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폴란드인의 향토가 독일의 영토라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교재이며, 호시나에 의하면, 포젠주에서는 향토 교재가 "폴란드의 아동으로 하여금 독일화시키려고 하는 일대 목적"에 의해 편찬되어 있는 것이다. (중략)
호시나는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교재도 이러한 프로이센의 전례를 따라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제언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조선의 보통학교에서의 국어 독본에도 조선과 일본과의 고대에 있어서의 관계, 교통 상태, 조선이 지나 때문에 학대받은 것, 통치의 제도가 불완전했으므로 항상 苛政에 시달렸던 것, (아래에 계속)-274-276쪽

(위에서 계속) 징세의 제도가 난잡하여 인민이 관리 때문에 고통 받았던 것 등을 서술하고, 이제 일본에 합병되고 나서 국내에 선정을 펼쳐, 인민이 비로소 자유로워지고 그들의 인권은 善美한 재판제도로 인하여 완전히 보호받으며 능히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성케 하고 교통 기관이 크게 발달하였으며 인문이 점차 진보하여 조선의 면목이 한층 일신한 것 등을 향토편에서 서루하고, 혹은 그것에 의하여 왕성하게 直觀敎授를 추진하도록 한다면, 그들의 사상을 일본화시켜 점차 悅服하여 반일의 감정을 품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예들로 보면 호시나는 '합방' 직후부터 이후의 '황민화교육'의 모습을 이미 내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다만, 호시나가 국내의 표준어 교육에서도 동일한 직관 교육, 향토 교재, 직접 교수법이 유효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인 주목할 만하다. 호시나가 여기에서 찾아 낸 언어 정책과 언어 교육의 원리는 일본 국내에서 이미 그 효과가 확인되어 있었던 것이며, 그 방식이 식민지로 확대되었던 것이다.-274-276쪽

우에다 카즈토시는 다른 누구보다도 더 '국어와 국가'의 연결을 열렬히 주장했다. 그러나 그 '국어'는 야마다 요시오가 말하는 '전통'으로부터 단절된 곳, 바로 거기에서 성립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우에다는 일본에서는 '국어'에 대한 의식이 전혀 자라지 않음을 자주 한탄했다. 우에다에게 '국어'란 본래의 일본어의 모습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실현되는 언어의 이상형인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근대언어학이었다.
호시나 코이치는 이러한 우에다 카즈토시의 '국어' 이념을 그대로 계승한다. 그리하여 호시나는 거의 반 세기에 걸쳐 일관해서 일본의 언어 정책, 언어 교육의 확립에 우직하리만큼 헌신해 왔다. (중략) 반복해서 언급한 것처럼, 호시나의 사상은 국내에서의 '표준어' 제정, 식민지와 '대동아공영권'에서의 '동화정책'의 추진 등 국가주의적 제국주의적 측면을 가짐과 동시에, 한자 제한, 표음 가나표기법 채용, 구어문의 보급 등 '국어 민주화'라고 할 만한 측면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360-361쪽

아마도 보수파와 개혁파의 '국어'를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그 싸움 자체가 일본의 '언어적 근대'의 표현을 형성해 왔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보수파와 개혁파의 양자가 싸움을 통하여 서로 보완하며, '국어'의 사상은 공고한 것이 되어 갔던 것이다.
왜냐하면 보수파도 개혁파도 하나의 암묵의 전제를 나눠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제란 일본어의 변함없는 동일성이다. 야마다 요시오와 우에다, 호시나 사이에는 이 동일성이 성립하는 차원이 상당히 달랐고, 오히려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일본어가 하나의 동일한 실체라는 신념은 양자 모두 다르지 않았다.
즉 일본어의 동일성을 암묵의 전제로 삼는 한, '국어'의 무대 밖으로는 나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국어라는 사상'은 근대 일본의 언어 인식의 세계를 한정짓는 지평선을 이룬다. 그러나 그 지평선의 저편에는 -아이작 도이처(Isaac Deutscher, 1907-1967)의 "비유대적인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빌자면- 다양하고 무정형의 '비일본적 일본어'의 속삭임이 들려 올 것이다. (아래에 계속) -363쪽

(위에서 계속) '국어'의 사상이 '국가어'와 '공영권어' 사상으로 변모할지 어떨지는, 이러한 '비일본적 일본어'의 소리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끝>-363쪽

<역자해설>
또한 한국어의 근대화와 관련한 문제도 지금까지 연구된 것보다는 앞으로 연구해야 할 것들이 훨씬 더 많다. 그 한 예로 1933년에 나온 <한글 마춤법 통일안>의 "표준말은 대체로 현재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는 표준어 규정은 아직까지도 막연히 일본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추측만 있었을 뿐, 그것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식민지 조선에 유입되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이 책은 이와 관련해서도 상당한 암시를 주고 있다. 예컨대, 통일안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최현배가 쿄토제국대학에서 신무라 이즈루의 언어학 강의를 들었으며, 그 신무라야말로 독일 유학후 일본의 표준에 제정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우에다 카즈토시의 제자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384-385쪽

1895년(메이지 28년)에 우에다는 <표준어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였는데, 거기에서 처음으로 '표준어'라는 개념을 일본에 소개한다. 거기에서 우에다는, 표준어란 영어의 standard language, 독일어의 Gemeinsprache에 해당하며, "이른바 방언이라는 것과는 달리 전국 도처 모든 장소에 통하여 대개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 만한 효력을 가지는 것", "일국 내에 모범으로 사용되는 언어"라는 의미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일본에 '표준어'라 부를 만한 것이 있는가 하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에다는 생각했다. 그러나 표준어가 될 수 있는 언어는 있다. 그것은 "일대 제국 首府의 언어"인 "토쿄말"이다. 우에다는 일본에서는 "현금의 토쿄말이 후일 그 명예를 향유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금의 토쿄말"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제1부에서 본 바와 같이, 메이지 20년대 초의 후타바테이 시메이나 야마다 비묘의 언문일치 소설에서 이미 '토쿄말'은 어떤 특권적 지위를 얻고 있었다. 다만, 그것은 '에도말'과의 연속성 아래 형성된 '토쿄말'이었다. (아래에 계속)-173-174쪽

(위에서 계속) 그런데 우에다는 의식적으로 '에도말'과의 연속성을 끊으려 하는 것이다. 우에다는 '표준어'의 기본이 될 만한 '토쿄말'은 '베란메에'투(에도의 직인들 사이에 사용되는 거친 말투-역자주)와 같은 것이 아니라 "교육 있는 토쿄 사람이 쓰는 말"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한다. 표준어가 "토쿄 중류사회의 언어"라는 규정은 1904년(메이지 37년)의 <심상소학독본편찬취의서(尋常小學讀本編纂趣意書)>에서 처음으로 명확해진 것인데, 그 맹아는 이미 이때의 우에다의 강연 안에 있었던 것이다.-173-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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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8-13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며 대학교 때 국어학 선생님이 당신과 우리를 비롯해서 국어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은 전부 주시경 선생의 몇 대째 제자라고 하셨던 것을 떠올렸다. 경성제대 조선어과의 교수로 현대적 한국어 연구의 토대를 놓은 오구라 신페이 교수가 우에다 카즈토시 교수의 제자였음을 생각하면,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 역시 우리들의 (억지로 지워진) 몇 대째 스승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서 당연하게 가르치고 있는 '국어라는 사상'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행이 흥미진진했다.
 
로마의 축제일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4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한길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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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261-273행, 3월 1일)

숲과 호숫가에서 디아나에게 시중드는 요정(Egeria-인용자주)이여, 말해주시오.
누마의 아내인 요정이여, 왛서 그대 자신의 행적의 증인이 되어주시오.
저기 아리키아 계곡에는 우거진 숲에 둘러싸이고
오래된 의식으로 말미암아 신성시되는 호수가 하나 있습니다.
그곳에 제 말들의 고삐에 갈기갈기 찢겨 죽은 힙폴뤼투스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은 그곳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긴 산울타리들에는 늘어진 실들이 드리워져 있고
그곳에 있는 많은 서판들이 여신에 대한 감사의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가끔 기도가 이루어지면 여인은 이마에 화관을 두르고
시내에서 불타는 횃불들을 가져옵니다.
그곳에서는 손과 발이 강한 도망자들이 왕노릇을 하지만
그들이 전임자들을 죽였듯이 그들도 나중에 죽음을 당합니다.
-136-137쪽

(3뤈 675행-696행. 3월 15일. 안나 페렌나의 축제)

이제 나에게는 소녀들이 외설스런 노래를 부르는 까닭을 말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잡스러운 노래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안나가 최근에 여신이 되었을 때 그라디부스(마르스의 별명. 행진하는 이-인용자주)가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옆으로 데려가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는 내 달에 경배받으니 우리는 계절을 함께하는 셈이오.
내 큰 소망이 이루어지느냐의 여부는 그대의 도움에 달려 있소.
무장한 신인 나는 무장한 여신인 미네르바에게 사랑에 빠져 불타고 있고
내가 이 상처를 키운 지도 벌써 오래되었소.
기능이 비슷한 신들인 우리를 그대가 결합시키시오.
이 역할은 그대에게 어울리오. 그대 붙임성 좋은 노파여."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빈 약속으로 신을 우롱하고
모호하게 지연시킴으로써 어리석은 희망에 매달리게 합니다.
그가 자꾸 졸라대자 그녀가 말합니다. "분부대로 실행했다니까요.
그녀가 졌어요. 그녀는 그대의 간청에 가까스로 손을 들었으니까요."
(아래에 계속)-159-160쪽

(위에서 계속)
사랑에 빠진 그는 그 말을 믿고 新房을 준비하고
신부처럼 베일로 얼굴을 가린 안나가 그곳으로 인도됩니다.
마르스는 막 입 맞추려다가 안나를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수치심이, 다음에는 노여움이 우롱당한 신을 엄습합니다.
세 여신은 사랑스런 미네르바의 구혼자를 보고 웃고 있고,
베누스에게는 이보다 더 재미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옛날의 익살과 외설스런 시구들을 노래하게 되었으니,
사람들은 안나가 위대한 신을 속인 것을 기억하고는 좋아하는 것입니다.-159-160쪽

(3권 809-848행, 3월 19일, 미네르바의 축제, 3/19-3/23)

그 사이 하루가 지나고 나면 미네르바의 축제가 열리는데
그것은 연속되는 다섯 날에서 그 이름을 따왔습니다.(Quinquartus-인용자주)
첫날은 피를 보아서는 안 되는지라 劍鬪는 불법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날에 미네르바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벤티눔 언덕에서 미네르바에게 신전이 봉헌되었기 때문에-인용자주)
이어지는 나흘 동안에는 뿌려진 모래 위에서 축제가 열립니다.
호전적인 여신은 칼집에서 칼을 빼어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소년들과 부드러운 소녀들이여, 이제 팔라스에게 기도하시오.
팔라스의 호감을 사는 이는 유식해질 것입니다.
일단 팔라스의 호감을 산 뒤에 소녀들로 하여금 양모를 빗고
가득 감겨 있는 물레 가락을 푸는 법을 배우게 하십시오.
그녀는 또 수직의 날실 사이를 북으로 통과하는 법과
느슨하게 짜여진 천을 바디로 단단하게 하는 법도 가르쳐줍니다.
그녀를 경배하시오. 더럽혀진 옷에서 얼룩을 지우는 그대는.
그녀를 경배하시오. 청동 가마에서 양모를 염색할 준비를 하는 그대도.
(아래에 계속)-167-169쪽

(위에서 계속)
어느 누구도 팔라스의 뜻을 거슬러서는 발에 맞는 샌들을 만들지 못합니다.
설사 그가 튀키우스(일리아스 7권에 나오는 아이아스의 방배 제작자-인용자주)보다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설사 그가 에페우스(트로이야의 목마 제작자-인용자주)보다 더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팔라스가 그에게 화를 내면 그는 서투른 사람이 될 것입니다.
포이부스의 기술로 질병을 몰아내는 그대들도
수입의 일부를 여신에게 바치십시오.
그리고 사람들에게 종종 수업료를 떼이는 그대들 교사들이여.
그녀를 모욕하지 마시오. 그녀는 새 학생들을 끌어다줍니다.
그리고 그대 글을 쓰는 이도, 그대 蠟畵 화가도. 그대 솜씨 좋은 石手도.
수천가지 일이 여신의 소관입니다.
그녀는 詩歌의 여신이 틀림없습니다.
그녀가 내가 하는 일에 호의를 베풀어주시기를. 내가 만약 그럴 자격이 있다면.
(아래에 계속)-167-169쪽

(위에서 계속)
카일리우스 산이 정상에서 들판으로 내려오고
길이 아직은 판판하지 않아도 거의 판판한 곳에서
그대는 미네르바 캅타의 작은 사당을 볼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여신이 생일날에 처음 받은 것입니다.
캅타라는 이름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명한 재능을 카피탈리스(capitalis)라고 부르는데 여신이야말로 재능이 있습니다.
아니면 전설에 따르면 그녀가 어머니 없이 아버지의 머리(caput)에서 방패를 들고 뛰어나왔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팔레리이가 정복되었을 때 그녀가 포로(captiva)로서 우리에게 왔기 때문일까요?
어떤 초기 銘文에 그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아니면 그 사당에서 물건을 훔치는 것에
死刑(captis poena)을 내리는 법이 있기 때문일까요?
그대의 이름이 어디에서 유래했든 간에, 팔라스여,
그대는 늘 우리 지도자들의 앞을 아이기스로 가려주소서!-167-169쪽

(5권 215-228행. 5월 2일. 플로라의 축제(4/28-5/3))

서리가 이슬이 되어 잎에서 떨어지고
다채로운 잎들이 햇살에 데워지자마자
호라이 여신들이 와서 알록달록한 옷을 걷어올리고는
가벼운 바구니들에 내(Flora-인용자주) 선물들을 모으지요.
이어사 카리스 여신들이 나타나
자신들의 天上의 모발을 장식할 화관과 화환들을 엮지요.
내가 처음으로 수없이 많은 민족들 사이에 씨를 뿌렸지요.
그전에 대지는 한 가지 색이었어요.
내가 처음으로 테라프네의 피에서 꽃을 만들었지요. (히아신스. 테라프네는 휘아킨토스가 죽은 곳-인용자주)
그 꽃잎에는 아직도 그것의 탄식이 새겨져 있지요.
나르킷수스여, 잘 손질된 내 정원에는 네 이름도 있지. (수선화-인용자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었던 불행한 자여.
그들의 상처에서 내 덕분에 명예가 솟아오르고 있는 크로쿠스와 (사프란. 크로쿠스는 메르쿠리우스의 연인-인용자주)
앗티스와(제비꽃,퀴벨레의 연인-인용자주) 키뉘라스의 아들(아네모네 또는 장미. 베누스의 연인 아도니스-인용자주)에 관해서는 말할 피요도 없겠지요.-244-245쪽

(5권. 379-414행. 5월 3일)

세번째 밤에는 키론이 자신의 별자리를 드러낼 것인데,
그의 몸은 반은 사람이고 반은 구렁말입니다.
펠리온은 하이모니아에 있는 산으로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정상은 소나무로 푸르고 나머지는 참나무들입니다.
그곳은 필뤼라의 아들이 차지했습니다.(Chiron/Cheiron은 사투르누스와 필뤼라의 아들-인용자주)
오래된 바위 동굴이 하나 있는데, 정직한 노인은 바로 그곳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가 언젠가 헥토르를 죽음으로 보내게 될 손들(手)에게
뤼라를 연주하는 법을 가르쳐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카이우스의 손자도 그곳에 왔는데,
그는 고역들의 일부를 마치고 얼마 안 되는 명령들만이 그에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대는 트로이야의 두 파멸의 운명이 우연히 함께 있는 것을 보게 되었을 것인즉,
이쪽 소년이 아이아쿠스의 손자고, 저쪽이 제우스의 아들입니다.
필뤼라의 아들인 영웅이 젊은이를 환영하며
찾아온 까닭을 묻자 젊은이가 가르쳐줍니다.
그 사이 그는 몽둥이와 사자 가죽을 보더니 말합니다.
"사람은 무기 못지않고 무기는 사람 못지않구려."
(아래에 계속)-254-256쪽

(위에서 계속)
아킬레스는 센털이 난 털복숭이 모피를
감히 만져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습니다.
한편 노인은 독화살들을 만지작거리다가
화살 하나가 떨어져 왼쪽 발을 찔립니다.
키론이 신음하며 몸에서 무쇠를 뽑았습니다.
알카이우스의 손자도, 하이모니아의 소년도 함께 신음합니다.
키론 자신은 파가사이 언덕들에서 따 모은 약초들을 섞어
여러 가지 치료법으로 자신의 상처를 진정시킵니다.
그러나 게걸스런 독이 치료법들을 이겨
파멸이 뼛속과 전신으로 퍼졌습니다.
레르나의 휘드라의 피가 켄타우루스의 피와
이미 섞인 뒤라 구제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아래에 계속)
-254-256쪽

(위에서 계속)
아킬레스는 눈물범벅이 되어 마치 아버지 앞인 양 그의 앞에 서 있었습니다.
펠레우스가 죽어가고 있다면 그는 그렇게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는 다정한 손들로 힘없는 손들을 가끔 어루만지곤 했으니,
스승은 자신이 형성해준 성품으로 보답받는 것입니다.
아킬레스는 가끔 그에게 입 맞추고 거기 누워 있는 그를 가끔 부르며 말했습니다.
"제발 죽지 마세요. 나를 버리지 마세요. 사랑하는 아버지."
아흐레째가 되자, 가장 정직한 키론이여,
그대는 이칠십사 열네 개의 별들을 그대의 몸에 둘렀소이다.-254-256쪽

(5권 671-692행. 5월 15일, 메르쿠리우스의 축제)

카페나 문 근처에 메르쿠리우스의 샘이 있는데
그 물을 마셔본 사람들의 말을 믿는다면 그것은 효험이 있습니다.
상인은 이곳으로 와서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燻蒸한 항아리에 정성스레 물을 퍼 담아 집으로 가져갑니다.
그는 그 속에 월계수 가지를 담갔다가
곧 새 임자를 만나게 될 모든 것에 이 젖은 월계수 가지로 물을 뿌립니다.
그는 또 물방울이 뚝뚝 듣는 월계수로 자신의 머리에도 물을 뿌리며
속이는 버릇이 있는 입으로 기도합니다.
"지난날의 거짓 맹세들을 씻어주소서" 라고 그는 말합니다.
"어제의 거짓말들도 씻어주소서!
내가 그대를 증인으로 삼았거나,
듣지 않으시리라 믿고 윱피테르의 신성에 걸고 거짓으로 맹세했거나,
또는 내가 알고도 다른 신이나 여신을 속인 적이 있다면
내 염치없는 말들을 재빠른 남풍이 쓸어가게 해주소서.
(아래에 계속)-269-270쪽

(위에서 계속)
하지만 내일 또 거짓 맹세하는 것을 허락해주시고,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신들께서 이를 무시하게 해주소서.
내게는 오직 이익만 주시고, 얻은 이익을 즐기게 해주시고,
손님을 속인 것이 내게 도움이 되게 해주소서!"
메르쿠리우스는 자신이 전에 오르튀기아의 소떼를 훔쳤던 일을 기억하고는
그러한 요구에 높은 곳에서 미소짓습니다.-269-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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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8-0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인 Fasti는 원래 법정의 개정일(dies fasti)과 휴정일(dies nefasti), 그리고 민회가 열리는 날(dies comitiales) 등을 기록해 놓는 달력을 뜻하는 말이라고.
오비디우스의 삐딱한 유머는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해준다.
 

일단은 놀고 보자는 느낌으로 신나게 노는 중. 공부는 8월에 하면 안되는 걸까.... -_-;;;
에 일단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전집. 이 중 몇 편은 한국에서는 첫 번역인 만큼 빨리 읽은 순서로는 한국의 10위권  안에 들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다. ㅋㅋ. 이걸로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에 이어 현전하는 희랍비극을 모두 읽었다.















라블레의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덕수궁 앞에서 친구랑 나란히 앉아서 간식 먹으면서 읽었다. 바로 앞에는 경찰 부대가 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바흐친의 <장편소설과 민중언어>. 3월부터 질질 끌며 읽다말다 하던 것을 드디어 끝냈다. 사실 앞의 라블레는 이걸 읽기 위해서 가져온 거기도 함








오비디우스의 <로마의 축제일>. 내 분야는 원래 여기지. ㅋㅋ. <황금가지>에 나오는 레미의 숲 이야기의 출처가 여기인 듯.













그리고 예전에 읽었던 소설 퍼레이드. 다카노 카즈아키 <13계단>,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공원>과 <잃어버린 세계>.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읽고 또 읽는 건 노년기 증상이 아닐까 조금 걱정.












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빼서 읽는 일본소설들 조금. 하다 케이스케의 <흑냉수>는 형제간의 증오라는 소재를 아주 리얼하게 묘사했다. 살짝 치기같은 게 느껴졌는데 작가가 17세의 고등학생이라는 얘기를 읽으니 납득이 갔다.  무코다 구니코의 <수달>은 근사한 단편집. 짧지만 삶에 대한 날카로운 이해를 담고 있다. 아시하라 스나오의 <청춘 덴데케데케데케>는 1960년대 카가와 시골의 고등학생들의 밝고 따스하고 유쾌한 일상을 엄청 기분좋게 그려낸 멋진 책이다. 일본어를 잘하게 된다면 꼭 사누키 사투리를 살린 원문으로 보고 싶은 책.















하라 료의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를 읽고 중년 탐정의 피곤한 삶이 마음에 쏙 들어서 내친 김에 레이먼드 챈들러를 읽었다. <빅슬립>하고 <안녕 내 사랑>. 흠... 시적이라는 평가는 납득이 가는데, 내 취향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게, 필립 말로가 장신의 미남이라는 게 아주 맘에 안 든다. 연달아 나타나는 육감적인 미인들하고의 에로에로한 관계도 느끼하고. 마음에 드는 건 삐딱한 독백 정도려나.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사람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다는 게 납득이 간다. 하라 료는 물론 챈들러 장면에 대한 오마쥬를 가득 써 두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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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말 레포트 내고 본격적으로 놀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들을 조금. <반도에서 나가라>는 예전에 읽은 것. <공항에서>는 처음이지만 소설이라기엔 그냥 꽁트집이었고, <이비사>는 이 작가 작품 중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는 뭔소린지 잘 모르겠는 유형.











한국 현대 소설 중 환상 단편을 모아둔 <환상소설첩> 읽었다. 장정일의 <펠리칸>이랑 신경숙, 윤대녕의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 이런 유형의 책들은 당연히 재미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흔들리는 바위>. 미야베 미유키야 작가 이름만으로도 확실히 믿고 읽을 수 있는 작가지. 특히 이 작가의 에도시대 물은 다 좋았다. <흔들리는 바위>는 아코로시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 이 소재도 이제는 무지 익숙해. 편안하고 즐겁게 읽었다.












존 보인의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이건 영화 소개를 보고 낚여서 읽었는데 대실망. 동화책이란 걸 감안하더라도 리얼리티가 너무 없었다.











중학생 대상의 '위로와 격려의 글 쓰기' 교수법에 대해 고민하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읽은 키토 아야의 <1리터의 눈물>. 보는 김에 드라마까지 넘겨가며 봤는데, 드라마 쪽은 아코 캐릭터가 괜찮았고 료짱이 나왔다는 거 외엔 별로 이렇다할 느낌이 없었지만, 책은 참 괜찮더라. 보면서 조금 울기도 했고. 그렇지만 어짜피 죽을 거 이렇게까지 고생해서 오래 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죽는 것보다 아픈 게 더 싫어.












방학하고 집에서 놀면서 예전에 읽었던 만화들을 다시 보다. <히카루노 고>도 <이니셜D>도 다시 봐도 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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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히 소설이 읽고 싶어서 집 앞 도서관에 들렀다가 무코다 구니코 씨의 단편집 <수달>을 빌렸다.
















방송 작가 출신이 쓴 나오키 상 수상작이라는 이미지와는 좀 거리가 있는 순문학풍의 잘 된 단편집이었는데,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작품의 내용이 아닌 작가 쪽이었다.
1929년생. 평생 원고마감에 시달리며 살았던 여성 방송작가...
이거 어디서 본 듯한 얘기인데 혹시.... 하고 찾아본 것이 10년 전에 산 <펜끝으로 훔쳐본 세상>.














 혹시가 역시였다.  드라마 극본이 늦어져서 제작진이 모두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원고를 받으러 간 스탭에게 질그릇 냄비를 건냈던 그 아줌마가 바로 이 무코다 씨였다.
  "어머나, 무코다 씨, 예전에 세노 갓파 씨랑 같이 뵈었었지요. 드디어 무코다 씨의 글을 읽게 되다니 정말이지 감개무량!! 이야~ 그 동안 세월 많이 흘렀네요. 그 때만 해도 쌩쌩한 20대 초반이었는데, 이젠 저도 중년이에요. 호호호"  ^^;;

실은 10년 전 <펜끝으로 훔쳐본 세상>을 읽을 때도 나는 '10년 지인'을 한 사람 만났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읽었던 <창가의 소녀 토토짱>의 작가 구로야나기 데츠코 씨 이야기가 여기에 나왔던 것이다. 그 때도
"어머나 이게 누구야? 토토짱 아냐?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초등학교 때 봤는데 그새 어른이 됐구나. 이야~ 하지메 짱도 그렇지만 당신도 정말 훌륭해졌네."
하면서 꽤나 감격했었다.
하지메 짱이라는 것은 세노 갓파 씨의 본명으로, 이 양반의 어린 시절 이야기인 <소년 H>를 나는 그  2년 전에 읽었었다. 즉 무대미술가 세노 갓파 씨와 아나운서 구로야나기 데츠코 씨를 나는 그들이 꼬마였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 나이로는 나보다 쉰 살이나 많은 분들이지만 그런 게 전혀 상관 없어진다는 것이 책읽기의 재미있는 점이다.








 








얘기가 이리저리 섞여버렸지만,  이 글의 마지막에는 역시 10년만에 떠올린 질그릇 냄비의 추억을 옮겨놓아야겠다.

<원고 대신 받은 질그릇 냄비>

나는 지금은 세상을 떠난 무코다 씨에게서 받은 질그릇 냄비를 소중히 사용하고 있다.
그녀의 각본으로 텔레비전 드라마를 만들 때 나는 미술 담당이었다. 이 질그릇 냄비는 그때의 인연으로 그녀에게서 받은 것이다.
하루는 연출자가 내게 무코다 씨를 찾아가 직접 각본을 받아오라고 부탁했다. 미술 디자이너는 작가에게서 각본을 받아오는 담당은 아니다.
그러나 연출자는 "내가 가는 것보다 갓파 씨가 가는 게 덜 재촉하는 것 같지 않겠어요?"
하며 듣기 좋은 말로 나를 설득했다.
"한숨도 안 자고 쓰는데도, 아직 열일곱 장밖에 못 썼어요. 기다리게 하는 건 미안하지만 그래도 와주세요."
그녀는 자기 원고를 읽어 주는 것이, 뒷부분을 쓰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뛰어갔는데, 가는 도중에 두부를 샀다. 전화 목소리로 보아 아직 식사도 하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초췌한 모습의 그녀는 들고 간 두부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조금 깊긴 해도 두부를 데칠 땐 이 질냄비가 맘에 들어요. 다시마가 있던가? 가다랭이포밖에 없지만 괜찮지요?"
하며 그녀는 재빠르게 두부 데칠 준비를 했다.
나는 완성되어 있다는 열 몇 장의 각본을 아직 받지 못했기에 초조해서 은근슬쩍 책상 위를 보았지만 쓴 것은 서너 장뿐이었다.
"배우들은 앞부분 연습을 하고 있나요?"
"네, 뒷부분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기 때문에 연출가도 망설이고 있습니다만....."
결국 그 날은 한 장도 못 받았다. 그녀는 "내일 아침에는 반드시...."하면서 마치 원고 대신이라는 듯이 질냄비를 신문지에 싸서 나에게 주었다. 물로 씼었을 냄비가 아직 따뜻했다.
                      - 세노 갓파, 박국영 옮김(1998): <펜 끝으로 훔쳐본 세상>, 서해문집, 112쪽

(옆 페이지에 세노 씨의 훌륭한 세밀화로 그려진 문제의 질그릇냄비가 그려져 있다. 그림의 위와 아래에 "높이 13센티, 직경 23.5센티, 무게 13650그램. 크기에 비하여 얇고 가벼워서 깨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사용하고 있다." ""무코다 구니코씨가 준 질그릇 냄비에 속아서 그냥 왔습니까? 갓파씨는 물건을 받으면 마음이 약해져서 문제예요." 라고 디렉터에게 비난을 당했다."라는 메모가 더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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