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히 소설이 읽고 싶어서 집 앞 도서관에 들렀다가 무코다 구니코 씨의 단편집 <수달>을 빌렸다.
















방송 작가 출신이 쓴 나오키 상 수상작이라는 이미지와는 좀 거리가 있는 순문학풍의 잘 된 단편집이었는데,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작품의 내용이 아닌 작가 쪽이었다.
1929년생. 평생 원고마감에 시달리며 살았던 여성 방송작가...
이거 어디서 본 듯한 얘기인데 혹시.... 하고 찾아본 것이 10년 전에 산 <펜끝으로 훔쳐본 세상>.














 혹시가 역시였다.  드라마 극본이 늦어져서 제작진이 모두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원고를 받으러 간 스탭에게 질그릇 냄비를 건냈던 그 아줌마가 바로 이 무코다 씨였다.
  "어머나, 무코다 씨, 예전에 세노 갓파 씨랑 같이 뵈었었지요. 드디어 무코다 씨의 글을 읽게 되다니 정말이지 감개무량!! 이야~ 그 동안 세월 많이 흘렀네요. 그 때만 해도 쌩쌩한 20대 초반이었는데, 이젠 저도 중년이에요. 호호호"  ^^;;

실은 10년 전 <펜끝으로 훔쳐본 세상>을 읽을 때도 나는 '10년 지인'을 한 사람 만났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읽었던 <창가의 소녀 토토짱>의 작가 구로야나기 데츠코 씨 이야기가 여기에 나왔던 것이다. 그 때도
"어머나 이게 누구야? 토토짱 아냐?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초등학교 때 봤는데 그새 어른이 됐구나. 이야~ 하지메 짱도 그렇지만 당신도 정말 훌륭해졌네."
하면서 꽤나 감격했었다.
하지메 짱이라는 것은 세노 갓파 씨의 본명으로, 이 양반의 어린 시절 이야기인 <소년 H>를 나는 그  2년 전에 읽었었다. 즉 무대미술가 세노 갓파 씨와 아나운서 구로야나기 데츠코 씨를 나는 그들이 꼬마였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 나이로는 나보다 쉰 살이나 많은 분들이지만 그런 게 전혀 상관 없어진다는 것이 책읽기의 재미있는 점이다.








 








얘기가 이리저리 섞여버렸지만,  이 글의 마지막에는 역시 10년만에 떠올린 질그릇 냄비의 추억을 옮겨놓아야겠다.

<원고 대신 받은 질그릇 냄비>

나는 지금은 세상을 떠난 무코다 씨에게서 받은 질그릇 냄비를 소중히 사용하고 있다.
그녀의 각본으로 텔레비전 드라마를 만들 때 나는 미술 담당이었다. 이 질그릇 냄비는 그때의 인연으로 그녀에게서 받은 것이다.
하루는 연출자가 내게 무코다 씨를 찾아가 직접 각본을 받아오라고 부탁했다. 미술 디자이너는 작가에게서 각본을 받아오는 담당은 아니다.
그러나 연출자는 "내가 가는 것보다 갓파 씨가 가는 게 덜 재촉하는 것 같지 않겠어요?"
하며 듣기 좋은 말로 나를 설득했다.
"한숨도 안 자고 쓰는데도, 아직 열일곱 장밖에 못 썼어요. 기다리게 하는 건 미안하지만 그래도 와주세요."
그녀는 자기 원고를 읽어 주는 것이, 뒷부분을 쓰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뛰어갔는데, 가는 도중에 두부를 샀다. 전화 목소리로 보아 아직 식사도 하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초췌한 모습의 그녀는 들고 간 두부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조금 깊긴 해도 두부를 데칠 땐 이 질냄비가 맘에 들어요. 다시마가 있던가? 가다랭이포밖에 없지만 괜찮지요?"
하며 그녀는 재빠르게 두부 데칠 준비를 했다.
나는 완성되어 있다는 열 몇 장의 각본을 아직 받지 못했기에 초조해서 은근슬쩍 책상 위를 보았지만 쓴 것은 서너 장뿐이었다.
"배우들은 앞부분 연습을 하고 있나요?"
"네, 뒷부분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기 때문에 연출가도 망설이고 있습니다만....."
결국 그 날은 한 장도 못 받았다. 그녀는 "내일 아침에는 반드시...."하면서 마치 원고 대신이라는 듯이 질냄비를 신문지에 싸서 나에게 주었다. 물로 씼었을 냄비가 아직 따뜻했다.
                      - 세노 갓파, 박국영 옮김(1998): <펜 끝으로 훔쳐본 세상>, 서해문집, 112쪽

(옆 페이지에 세노 씨의 훌륭한 세밀화로 그려진 문제의 질그릇냄비가 그려져 있다. 그림의 위와 아래에 "높이 13센티, 직경 23.5센티, 무게 13650그램. 크기에 비하여 얇고 가벼워서 깨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사용하고 있다." ""무코다 구니코씨가 준 질그릇 냄비에 속아서 그냥 왔습니까? 갓파씨는 물건을 받으면 마음이 약해져서 문제예요." 라고 디렉터에게 비난을 당했다."라는 메모가 더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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