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은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 일이지만, 지난 몇십 년 동안 우리는 기아, 역병, 전쟁을 통제하는 데 그럭저럭 성공했다는 것이다. - P15
1692년과 1964년에 인구의 15퍼센트에 해당하는 약 280만 명의 프랑스인이 굶어죽었지만, 그동안 태양왕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情婦들과 놀아났다. 이듬해인 1695년에는 에스토니아에 기근이 닥쳐 인구의 5분의 1이 죽었다. 1696년은 핀란드 차례가 되어 인구의 4분의 1 내지 3분의 1이 죽었다. 스코틀랜드는 1695년과 1698년 사이에 심각한 기근을 겪었고, 몇몇 행정구역은 거주자의 20퍼센트를 잃었다. - P17
전례 없는 수준의 번영, 건강, 평화를 얻은 인류의 다음 목표는,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가치들을 고려할 때,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것이다. 굶주림, 질병, 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을 줄인 다음에 할 일은 노화와 죽음 그 자체를 극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극도의 비참함에서 구한 다음에 할 일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짐승 수준의 생존투쟁에서 인류를 건져올린 다음에 할 일은 인류를 신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로 바꾸는 것이다. - P39
어떤 희귀한 돌연변이에 의해, 땅콩 한 알을 먹으면 행복한 감각이 영원히 지속되는 다람쥐가 탄생한다면 어떻게 될까? 기술적으로 다람쥐의 뇌 회로가 바뀌면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누가 아는가? 수백만 년 전 어떤 운 좋은 다람쥐에게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을지. 하지만 그랬더라도 그 다람쥐는 지극히 행복할 뿐 아니라 지극히 짧은 생을 살았을 것이고, 그 희귀한 돌연변이는 그냥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행복에 도취해 배우자는 고사하고 땅콩도 더 이상 찾아나서지 않았을 테니까. 땅콩 한 알을 먹고 돌아서면 다시 배가 고픈 다른 다람쥐들이 오래 살아남아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정확히 같은 이유로, 우리 인간들이 그러모으는 땅콩(돈 많이 버는 직업, 큰 집, 잘생긴 배우자)도 우리를 오래 만족시키지 못한다. - P61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수렵채집인으로 살았다. 그리고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장면은 농헙혁명과 놀랍도록 닮았다. - P113
알고리즘은 오늘날 세계에서 단연코 가장 중요한 개념일 것이다. 우리의 삶과 미래를 이해하려면 알고리즘이 무엇이고 그것이 감정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알고리즘은 계산을 하고 문제를 풀고 결정을 내리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일군의 방법론적 단계들이다. (중략) 사람은 자판기보다 훨씬 더 복잡한 알고리즘이지만, 그렇다 해도 알고리즘인 것은 확실하다. 인간은 차를 우릴 뿐 아니라 자신을 복제하는 알고리즘이다. (자판기처럼 올바른 조합의 버튼들을 누르면 또 다른 자판기가 탄생한다.) 자판기를 제어하는 알고리즘은 기계장치와 전기회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인간을 제어하는 알고리즘은 감각, 감정, 생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 P122
오늘날 우리는 예루살렘의 고대 사원이 커다란 유대교 회당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곳에서 눈처럼 흰 예복을 입은 성직자들이 독실한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미성의 합창단이 찬송가를 부르고, 향기로운 향냄새가 퍼졌을 거라고. 하지만 사실 그곳은 도축장과 바비큐 식당을 섞어놓은 듯한 장소였다. 순례자들은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그들이 데려온 양, 염소, 그밖에 동물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 동물들은 신의 제단에 희생제물로 바쳐졌고, 의식이 끝나면 그것을 요리해 나눠먹었다. (중략) 성경시대의 정신에 더 가까운 모습은 예배당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축일을 보내는 정통 유대교 가족보다는, 자기집 잔디밭에서 바비큐를 먹으며 축일을 기념하는 현대 유대교 가정이다. - P131
하지만 사냥꾼과 농부들이 그들의 신화를 가졌듯이, 연구개발부서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가장 유명한 신화는 링컨셔 울즈소프 마을에 있는 한 저택의 정원으로 무대만 옮겨왔을 뿐, 선악과와 에덴동산의 전설을 뻔뻔하게 표절한다. 그 신화에 따르면, 뉴턴이 사과나무 아래에 앉아있을 때 익은 사과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중략) 울즈소프 정원은 눈먼 자연법칙들에 의해 운영되는 곳이며, 그 법칙들을 해독하는 일은 인간의 몫이다. - P140
에덴동산 신화에서 인간은 호기심을 참지 못한 탓에, 그리고 지혜를 얻고 싶다는 소망을 품은 탓에 벌을 받는다. 신은 그들을 낙원에서 추방한다. 하지만 울즈소프 정원의 신화에서는 아무도 뉴턴을 벌하지 않는다. 그의 호기심 덕분에 인류는 우주를 더 잘 알게 되고, 더 막강한 힘을 가지고, 기술 낙원을 향해 또 한 걸음을 내디딘다. 전 세계 수많은 선생님들이 호기심을 가지라며 학생들에게 뉴턴 신화를 들려주는 것은, 우리가 충분한 지식을 갖추기만 하면 이곳 지상에 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사실 뉴턴 신화에도 신은 존재한다. 뉴턴 자신이 신이다. - P141
2012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오직 15퍼센트만이 호모 사피엔스가 신의 개입 없이 자연선택만을 통해 진화했다고 생각한다. 32퍼센트의 미국인은 인간이 초기 생명 형태부터 수배만 년에 걸쳐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신이 이 쇼 전체를 지휘했다고 주장한다. 46퍼센트의 미국인은 성경에 적힌 그대로 신이 지난 1만 년 동안의 어느 시점에 지금의 형태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는다. 3년간 대학을 다녀도 이러한 견해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같은 조사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대학 졸업생들 가운데 46퍼센트가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믿는 반면, 14퍼센트만이 인간이 신의 감독 없이 진화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중략) 학교가 진화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이 분명하지만, 열성적인 신자들은 그것도 모자라 진화를 아예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혹은 지적설계론도 함께 학생들에게 가르치라고 요구한다. - P147
그런데 왜 진화론에는 이렇듯 격렬한 반대를 일으키면서도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까? (중략) 상대성이론은 아무도 화나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중한 믿음 가운데 어떤 것고도 모순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반면 다윈은 우리에게서 영혼을 박탈했다. 당신이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이 영혼은 없다는 이야기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 P148
마음의 흐름을 구성하는 의식적 경험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모든 주관적 경험에는 기본적인 특징 두 가지가 있다. 바로 감각과 욕망이다. 로봇과 컴퓨터는 의식이 없다. 왜냐하면 수많은 능력을 갖추었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것도 갈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 P153
튜링 테스트에 따르면, 컴퓨터가 마음을 갖고 있는지 알려면 컴퓨터 그리고 사람과 동시에 소통해야 한다. 이때 당신은 어느 쪽이 컴퓨터이고 어느 쪽이 사람인지 모른다. 당신은 원하는 질문을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상대방과 게임하고 논쟁하고 심지어 장난도 칠 수 있다. 시간도 원하는 만큼 쓸 수 있다. 그런 다음 어느 쪽이 컴퓨터이고 어느 쪽이 사람인지 결정해야 한다. 당신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거나 실수하면 그 컴퓨터가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것이고, 그 컴퓨터를 실제로 마음을 지닌 존재처럼 취급해야 한다. (중략) 튜링 테스트는 1950년 영국에서 모든 동성애자 남성이 받아야 했던 일상적인 테스트 ‘당신은 이성애자 남성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중략) 컴퓨터가 실제로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일 것이다. - P172
우리가 세계를 정복한 주요 요인은 여럿이 소통하는 능력이었다. - P187
러시아 혁명은 1억 8000만 농부들이 차르에 항거해 일어났을 때가 아니라, 소수의 공산주의자들이 적시 적소에 있었을 때 터져나왔다. 1917년 러시아의 상류층과 중산층이 최소 300만 명이던 반면 공산당원은 겨우 2만 3000명이었다. 그럼에도 공산당원들이 광대한 러시아 제국을 손에 넣은 것은 조직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 P189
이온 일리에스쿠는 루마니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그의 동료들은 장관, 국회의원, 은행장, 백만장자가 되었다. 지금까지 그 나라를 장악하고 있는 새로운 루마니아 엘리트층은 주로 전 공산당원과 그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다. 티미쇼아라와 부쿠레슈티에서 목숨을 걸었던 대중은 찌꺼기에 만족해야 했다. 협력하는 방법과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효율적인 조직을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 P194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재가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이며 제3의 옵션은 없다고 생각한다. (중략) 하지만 실재에는 제3의 층위가 존재한다. 그것은 상호주관적 실재이다. 상호주관적 실재들은 개개인의 믿음과 느낌보다는 여러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에 의존한다. 역사의 중요한 동인들 가운데 많은 것이 상호주관적실재이다. 예를 들어 돈은 객관적 가치가 없다. 당신은 1달러짜리 지폐를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입을 수도 없다. 하지만 수십억 명이 그 가치를 믿는 한 당신은 그것을 사용해 음식, 음료수, 옷을 살 수 있다. - P204
한때 소련은 인류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권력이었지만, 펜 놀림 한 번으로 사라졌다. 1991년 12월 8일 오후 2시,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지도자들이 비스쿨리 근처의 한 시골 저택에서 벨라베자 조약에 서명했다. 그 조약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22년 연방조약에 서명한 소련의 창립국들인 우리 젤라루스 공화국, 러시아 연방,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소련이 국제법의 적용 대상이자 지리적 정치적 실재로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밝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소련은 그렇게 사라졌다. - P206
돈이 상호주관적 실재임은 비교적 받아들이기 쉽다. 또한 고대 그리스 신, 악한 제국, 외래문화의 가치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꺼이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 신, 우리 나라, 우리의 가치가 허구라는 것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이 어떤 객관적 의미를 지니고, 자신의 희생이 머릿속에서 지어낸 이야기보다 중요한 뭔가를 위한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실 사람의 인생은 그들이 서로에게 말하는 이야기의 그물망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 P206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의 그물망들이 생기고 풀리는 것을 지켜보고, 한 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 후손에 이르러 완전히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 P207
사피엔스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그들만이 상호주관적 의미망을 엮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동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법, 힘, 실체, 장소로 이루어진 그물이다. 이런 그물은 인간만이 십자군, 사회주의 혁명, 인권운동을 조직할 수 있게 한다. - P212
성경은 실제의 진정한 본성에 대해 사람들을 오도할 때조차 수청 년 동안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예컨대 성경의 역사인식은 기본적으로 오류임에도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믿는다. 성경은 일신론적 역사이론을 널리 그리고 집요하게 퍼뜨리며, 나와 내 행동을 다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전능한 유일신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주장했다.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내 선행에 대한 보상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재앙이 닥친다면 내 죄에 대한 처벌임이 틀림없다. (중략) 이런 자아도취는 모든 인간이 유년기에 보이는 특징이다. 모든 종교와 문화권에서 아이들은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타인의 조건이나 감정에 진정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중략) 부모가 자기 때문에 싸운다고 생각하는 아이처럼, 일신론자는 페르시아인들이 자기 때문에 바빌로니아인들과 싸운다고 확신한다. - P240
오늘날 사학자들은 성경보다 헤로도토스와 사마천에 동의한다. (중략) 하지만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가 성경 저자들보다 실제를 훨씬 잘 이해했다 해도, 두 세계관이 충돌할 경우에는 성경이 케이오 승을 거두었다. 유대인이 그리스인의 역사관을 채택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인이 유대인의 역사관을 채택했다. 투키디데스 시대로부터 천 년이 흐른 뒤, 그리스인들은 야만인 무리가 침입해오는 것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신의 처벌이 분명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성경의 세계관은 비록 오류이긴 했지만 대규모 협력을 위한 더 나은 토대를 제공했다. - P242
실제로 오늘날에도 미국 대통령들은 성경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한다. 마찬가지로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전 세계 많은 나라에서 법정에 서는 증인들 역시 성경에 손을 올리고 오직 진실만을 말할 것이며 진실이 아닌 것은 어떤 것도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허구, 신화, 그리고 오류가 넘쳐나는 책에 대고 진실을 말할 것을 맹세하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P242
허구는 나쁜 것이 아니다. 허구는 꼭 필요하다. 돈, 국가, 기업 같은 허구적 실체에 대한 널리 통용되는 이야기가 없다면 복잡한 인간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똑같은 허구적 규칙들을 모두가 믿지 않으면 축구 경기를 할 수 없고, 허구 없이는 시장과 법원의 이점을 누릴 수 없다. 하지만 이야기는 단지 도구일 뿐이다. 이야기가 목표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단지 허구임을 잊을 때 우리는 실제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되며, 그때 우리는 ‘기업을 위해 많은 돈을 벌려고’ 또는 ‘국익을 보호하려고’ 전쟁을 시작한다. 기업, 돈, 국가는 우리의 상상에만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를 도우라고 그것들을 발명했다. 그런데 왜 그것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희생하는가? - P247
종교는 다른 무엇보다 질서에 관심이 있다. 종교의 목표는 사회 구조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다. 한편 과학은 다른 무엇보다 힘에 관심이 있다. 과학의 목표는 연구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고 전쟁을 하고 식량을 생산하는 힘을 획득하는 것이다. 과학자와 성직자 개인이 다른 무엇보다 진리를 우선시할 수는 있겠지만, 집단적인 제도로서 과학과 종교는 진리보다 질서와 힘을 우선시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의외로 잘 어울리는 짝이다. 타협 없는 진리 추구는 영적 여행이라서, 종교나 과학의 제도권 내에 머물기 어렵다. - P275
근대는 놀랍도록 간단한 계약이다. 계약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이다. 즉 인간은 힘을 가지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다. - P277
수천 년 동안 과학의 성장로가 막혀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세상에 관한 모든 중요한 지식이 성경과 고대 전통에 담겨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중략) 과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지를 발견한 것이었다.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얼마나 없는지 깨달았을 때 비로소 인간에게 새 지식을 찾아나설 타당한 이유가 생겼고, 이것은 진보를 향해 가는 과학의 길을 열었다. - P294
인류는 이중의 경주에 내몰려 있다. 한편으로는 과학 진보와 경제성장의 속도를 높여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10억 명의 중국인과 10억 명의 인도인들은 미국 중산층처럼 살고 싶어한다. 그들은 미국인들은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과 쇼핑몰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데 왜 자신들만 꿈을 보류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생태적 아마겟돈보다 적어도 한 걸음은 앞서 있어야 한다. 해가 갈수록 이런 이중의 경주를 해내기가 어려워진다. 델리의 빈민들이 아메리칸 드림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지구는 파국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이다. - P297
자유주의 정치는 유권자가 가장 잘 안다고 믿는다. 자유주의 예술은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 경제는 고객이 항상 옳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 윤리학은 좋게 느껴지면 하라고 조언한다. 자유주의 교육은 모든 답이 자기 안에 있으니 스스로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 P343
현 사회경제제도를 이해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경험을 고려할 때 비로소 내가 느끼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고, 공동 행동을 통해서만 제도를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과연 누가 모든 인간의 경험을 고려해 공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이런 문제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아탐구를 권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세계를 판독해주는 강력한 공동기구(예컨대 사회주의 정당과 노조)를 설치하자고 주장한다. 자유주의 정치에서는 유권자가 가장 잘 알고 자유주의 경제에서는 고객이 항상 옳다면, 사회주의 정치에서는 정당이 가장 잘 알고 사회주의 경제에서는 노조가 항상 옳다. 권위와 의미는 여전히 경험에서 나오지만(정당도 노조도 사람들로 구성되고 인간의 비극을 줄이기 위해 일한다.), 그럼에도 개인들은 자신의 감정보다는 당과 노조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 P349
히틀러도 자유주의 반전 예술가들처럼 일반 병사들의 경험을 신성시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실제로 히틀러의 정치경력은 20세기 정치에서 보통 사람들의 개인적 경험에 주어진 막대한 권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히틀러는 장교가 아니었다. 전쟁 4년째 되던 해에 겨우 하사 계급으로 승진했다. (중략) 그는 무일푼의 이민자였다. 히틀러가 독일 유권자들에게 표를 호소하며 신뢰를 구할 때 내세울 것은 딱 하나뿐이었다. 참호에서의 경험이 대학, 총사령부, 정부 부처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것을 자신에게 가르쳐주었다는 점이다. 국민들이 그를 따르고 그에게 투표한 것은 히틀러와 자신을 동일시했기 때문이었고, 그 사람들 역시 세상은 정글이며 자신을 죽이지 않은 시련은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 P354
나치즘의 공포 때문에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통찰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나치즘은 진화론적 인본주의에 특정 인종차별주의 이론들과 초강력 민족주의 감정이 결합해서 생겨난 산물이었다. 모든 진화론적 인본주의자가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며 인류가 더 진화할 잠재력이 있다고 믿는 세력이 반드시 경찰국가와 강제노동수용소의 설치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 P355
1949년 무렵 동유럽은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고, 중국 공산당은 중국 내전에서 승리했으며, 미국은 반공 히스테리에 사로잡혀 있었다. 세계 전역의 혁명가들과 식민반대 운동가들이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던 반면, 자유주의는 인종차별적인 유럽 제국들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붕괴된 유럽제국들은 자유민주주의 구가가 되지 않고, 대개 군사독재 국가 또는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중략)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서구의 많은 대학에서 ‘자유주의자’라는 말은 욕으로 통했다.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에서는 자유주의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급진적인 좌익 세력의 시도가 잇따르면서 사회 불안이 증가했다. 파리, 런던, 로마의 학생들과 ‘버클리 인민공화국’ 학생들은 마오쩌둥 주석의 작고 빨간 책 (마오 주석 어록"을 탐독하고 영웅 체 게바라의 초상을 침대 머리맡에 걸었다. - P364
자유민주주의는 점점 노쇠한 백인 제국주의자들의 배타적인 클럽처럼 보였다. 그들은 다른 세계는 고사하고, 자기들의 젊은 후손에게조차도 줄 것이 별로 없었다. 워싱턴은 자유세계의 지도자임을 자처했으나, 같은 편의 대부분은 권위주의 국가의 왕들(사우디아라비아의 칼레드 왕, 모로코의 하산 왕, 페르시아의 샤)이나 군부독재자들(그리스의 대령들, 칠레의 피노체트 장군, 스페인의 프랑코 장군, 한국의 박정희 장군, 브라질의 가이젤 장군 그리고 대만의 대원수 장개석)이었다. 이 모든 왕과 장군들의 지지에도 불가하고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북대평양 조약기구NATO보다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 서구 국가들이 재래식 무기로 그들과 같은 수준에 다다르려 했다면, 아마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을 철회하고 영구적 전시 상태에 놓인 전체주의 국가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자유주의를 구원한 것은 핵무기였다. - P367
그런 다음 모든 것이 달라졌다. 자유민주주의가 역사의 쓰레기통에서 기어나와 전열을 가다듬고 세계를 정복했다. 슈퍼마켓이 강제노동수용소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 전격전은 남부 유럽에서 시작했다.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권위주의 정권들이 붕괴하고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섰다. 1977년 인디라 간디는 비상사태를 끝내고 인도에 민주주의를 재건했다. 1980년대에는 라틴아메리카와 동사이아의 나라들(브라질, 아르헨티나, 대만, 한국)에서 군부독재가 민주주의 정부로 대체되었다. 자유주의의 물결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쓰나미로 변해 막강한 소련제국을 쓸어버리고 ‘역사의 종언’이 도래할 거라는 기대를 높였다. 패배와 좌절의 몇십 년을 겪은 뒤 자유주의는 냉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상처를 입긴 했어도 인본주의 종교전쟁에서 당당히 살아 돌아왔다. - P368
자유주의는 경쟁자였던 사회주의자와 파시스트들의 다양한 사상과 제도를 채택했는데, 대중에게 교육, 건강,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이 그중 하나이다. 하지만 자유주의 패키지의 알맹이는 놀라울 만큼 바뀐 것이 없었다. 자유주의는 여전히 개인의 자유를 다른 무엇보다 신성시하고, 유권자와 고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어쨌거나 21세기 초에 우리가 선택할 만한 것은 자유주의뿐이다. - P369
물론 그럼에도 수억 명의 사람들이 이슬람교, 그리스도교, 힌두교를 계속 믿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숫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뒤를 돌아보는 대중이 아니라, 앞을 내다보는 소수의 혁신가들이다. 1만 년 전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렵채집인이었고, 중동에 사는 소수의 개척자들만 농부였다. 그런데도 미래는 농부들의 것이었다. - P373
승리한 자유주의 이상들은 이제 인류에게 불멸, 행복, 신성을 추구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과학자와 공학자들은 이른바 절대 틀리지 않는 고객과 유권자의 소망을 등에 업고 이런 자유주의 과제들에 점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발견하고 있는 것과 공학자들이 개발하고 있는 것들은 자유주의 세계관에 내재된 결함 그리고 고객과 유권자의 무분별함을 은연중에 폭로할 것이다. 유전공학과 인공지능이 잠재력을 온전히 드러내면, 자유주의, 민주주의, 시장경제는 돌칼, 카세트, 이슬람교와 공산주의만큼이나 낡은 것이 될 것이다. - P382
사실을 말하면, 경험하는 자아와 이야기하는 자아는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 긴밀하게 얽혀 있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경험을 이야기를 구성하는 중요한 (하지만 유일하지는 않은) 원재료로 이용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은 다시 경험하는 자아가 실제로 느끼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 - P410
환상을 갖고 사는 것이 훨씬 더 쉬운 것은 그것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은 수천 년 전에 이 원리를 발견했다. 수많은 종교의식과 계명의 근저에 이런 원리가 깔려 있다. 신이나 국가 같은 상상의 실체를 믿게 하려면, 사람들이 가치 있는 뭔가를 희생하게 해야 한다. 희생이 고통스러울수록 그 희생을 바치는 대상의 존재를 더 확실하게 믿게 된다. - P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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