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 민주주의는 어떻게 끝장나는가
강양구 외 지음 / 천년의상상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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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가 아직 흡연의 해악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내가 갓 서른을 넘겼을 무렵, 도서관에 있는 진중권의 책을 하나씩 하나씩 전부 빌려 읽었던 적이 있다. 경쾌하게 움직이는 두뇌와 폭넓은 독서 경험에, 자유에 대한 열망과 어리석고 거짓된 것들에 대한 증오가 더해진 그의 글은, 읽는 것만으로 해방감이 느껴졌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라는 책에 대한 언론 보도를 보고, 이제는 10년도 더 전이 된 그 때의 일이 기억났다. 다른 네 명의 저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진중권이라면 믿고 읽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 책을 손에 들었다.

 

다 읽고 난 감상은, 다섯 명의 공동저자 중에 진중권의 역할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의 진중권의 역할은 요즘 세상에 이렇게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공동저자들의 말을 분위기를 맞춰가며 잘 들어주는 것이다. 머리가 좋고 아는 것이 많은 아재라 찰떡같이 알아듣고 필요할 때 정리도 잘 해 주고 궁금한 대목에서 질문도 잘 해 주고 보충 설명도 적절하게 잘 해 주어서 아주 도움이 된다. (서민 역시 비슷하게 청중 역할을 하고 있다. 이쪽은 진중권보다 더 아는 것이 없는 만큼 아는 것 없는 독자와의 거리가 더 가까운데, 그래도 서울의대를 나온 머리는 어디 가는 게 아니어서 같이 얘기하고 있으면 든든한 느낌이 든다.)

 

이 책을 통해 얻은 새로운 정보는 주로 김경율 회계사, 권경애 변호사로부터 들은 것들이었다. 조국 사건에 대한 뉴스 보도가 그렇게 오래 지속되었음에도 내가 이 사건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 자체를 그들의 설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모르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솔직히 충격이었고,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 거 알았느냐고 물어보며 그들도 대부분 나와 같은 상태라는 것을 알고, 방송과 인터넷을 통한 대중 조작이 이 정도까지 왔다는 사실이 무서워졌다. 정신 바짝 차리고 살지 않으면, 자기가 속는 줄도 모르고 속아 넘어가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런 답답한 세상에, 그래도 이렇게 친절하게 내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똑똑한 선배님들이 열을 올려 하는 이야기 자리에 끼어 앉아, 말은 못 해도 가슴을 두근거리며 행여나 놓칠 세라 한 대목 한 대목을 열심히 듣고 있는 어리버리한 후배가 된 것 같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결국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내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니까, 지금은 이런 정보를 얻어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다. 

(진중권) 뉴스의 비판적 수용자는 사라졌고 오늘날 대중은 자신을 콘텐츠 소비자로 이해합니다. 진위보다는 핵잼, 노잼으로 평가의 기준이 바뀌죠. 이제 사람들은 옳은 말을 하는 기사를 원하는 게 아니라 듣고 싶은 말, 재미있는 말을 해주는 기사를 요구해요. 굉장히 감성적이고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죠. 설사 그들이 거짓말을 했다 하더라도 처벌을 받지 않아요. 왜냐면 그것은 문화 콘텐츠잖아요. 예컨대 사극을 보면서 "기거 다 거짓말이야"라고 비판하지 않잖아요. 극의 내용이 역사책과 다르다면서 화내지 않습니다. 이런 것처럼 거짓말해도 용서가 되는 거죠. (중략) 이른바 포스트 트루스, 탈진실 현상들이죠. 요즘 대중은 ‘독자’로서 신문기사에 진실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소비자’로서 자기의 니즈를 충족시켜 주기를 원합니다. 거짓말이라도 듣기 좋으면 되는 거죠. 이른바 ‘소비자 민주주의’ 현상인데, 이는 사실 민주주의라고 하기 힘든 거죠.
- P26

(강양구)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하려면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지 않습니까. 비판하고 따질 준비를 해야 하고, 과정 과정마다 토론이 필요하니까요. 게다가 ‘옳다 그르다’에는 항상 불확실성이 존재합니다. 맥락에 따라 옳은 것이 그를 수도 있고, 그른 것이 옳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섬세한 독해가 요구됩니다. 그런데 ‘옳다 그러다’를 ‘좋다 싫다’로 바꿔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게 편하고 선명해집니다.
- P28

(진중권) 옹이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라는 책에서 구술문화 단계에 있는 사람들의 의식상태를 조사한 것이 있는데, 거기에 따르면 구술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어조는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고 호전적이고 격정적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개인주의’도 실은 문자문화의 산물입니다. 구술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을 독립적인 개인이라기보다는 촌락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깁니다. 마셜 매클루언이 ‘지구촌’이라고 했지요. 이 촌락문화가 전자매체의 영향으로 지구적 차원으로 확산됐다고 할까?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페이스북 친구가 뚝뚝 떨어져나가면 굉장한 상실감을 느끼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될 것 같고, 마치 공동체로부터 처벌을 받은 느낌 혹은 사회로부터 왕따를 당한 느낌을 받게 되죠.
- P47

(진중권) "언어가 말을 한다" 하이데거의 말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어떤 프레임을 받아들이면 계속 그 프레임이 허용하는 말만 하게 된다는 거죠. 사람이 말하는 게 아니라, 뇌에 입력된 프레임이 그의 입을 움직이는 거죠. 또 하이데거는 "민중은 항상 창작을 한다"는 말도 했어요. 민중은 늘 이야기를 창작하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 과학의 시대에도 민중은 모든 것을 스토리텔링으로 번안해, 그것을 현실로 여기고 싶어 합니다. 과학적 설명은 너무 복잡하고 짜증나잖아요. 게다가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잖아요. 그런데 이야기는 아주 단순하거든요.
- P83

(강양구) 사실 아주 무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민주화 운동가 출신의,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여권의 정치 원로의 고백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만났다는 사람이 없어." 그가 이렇게 말한 맥락이 있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때만 해도 앞에서 여러분이 언급한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내가 건의했다", "나랑 토론했다" 이런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렸거든요.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의 경우에는 독대해서, 토론하고, 건의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 했다는 거예요.
- P259

(강양구) 어딘가 하소연하고 싶을 때, 딱 자기 마음을 알고 대신 말해주는 정당. 그런 정당이 있으면 거기가 내 편이 되는 거잖습니까?
(진중권) 그런 것에 신경을 써야 하는데, 진보주의자들은 항상 너희들은 무식해서 그러는 거야. 뭘 몰라서 그러는 거야. 비꼬고, 비웃고, 조롱하고 이런 코드였잖아요.
(강양구) 그런 말을 진중권 선생님이 하는 것은 좀 거시기하네요. 그랬던 당사자 아닙니까.
(진중권) 그러다가 이 꼴이 됐잖아. 내가 산 증인이에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근데 난 이 버릇 못 고칠 것 같으니까 여러분이라도 그러지 마세요.
- P279

(진중권) 정치는 사회를 바꾸는 것이 목적이고, 권력을 잡는다는 것은 사회를 바꾸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에요. 저들은 권력을 잡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었잖아요. 자신이 가진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사실은 권력을 잡지 못한다 해도 다른 수단으로, 즉 정치를 견인하는 것으로도 사회를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유권자들은 저 작은 의석수를 가지고 뭘 할 수 있을까, 지지해 봐야 사표 되는 거 아닌지 걱정합니다. 그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어야 해요. 우리가 국회 10석 가지고 이런 일들을 했는데, 20석이면 오죽하겠냐고 설득을 해야 하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배패감에서 벗어나야 해요. 패배의 기억은 저번처럼 자연스레 민주당과의 연대에 골몰하게 만듭니다.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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