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로부터의 수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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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가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출발점을 잘 보여주는, 짤막하지만 의미심장한 소설. 유머러스한 점이 특히 좋다. 자기 자신이 젊은 시절부터 저질러 온 어리석은 짓에 대한 40대 작가의 이불킥이 들어있는 듯해서 호감이 간다. 

인간은 언제나 어디서나 그가 누구든 간에 절대 이성과 이익의 명령이 아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길 좋아했던 것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의 이익에 반해서라도 그렇게 하고 싶어할 수 있고 이따금씩은 꼭 그래야만 한다.
- P43

나는 녹초가 될 정도로 흥분에 시달렸다. 내 손으로 구두도 한 번 더 닦았다. 아폴론은 세상에 어떤 일이 있어도 구두를 하루에 두 번씩 닦지는 않을 위인, 그런 건 원칙에 위배된다고 생각할 위인이었다. 해서, 내가 직접 구두를 닦은 것이었는데, 어쩌다 저놈한테 들켜서 나중에 멸시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구두솔은 현관에서 몰래 가져왔다.
- P109

"안 돼!" 나는 다시 썰매에 올라타며 소리쳤다. "이렇게 예정된 일이다, 이건 숙명이다! 달려, 더 빨리 달려라, 거기로!" 이렇게 조바심을 내며 나는 주먹으로 마부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아니, 나리, 왜 사람을 치고 그러쇼?" 이렇게 소리를 치면서도 무지렁이 마부는 여윈 말을 채찍질했고, 때문에 말은 뒷발을 힘껏 구르기 시작했다.
- P134

가령 이놈의 월급만 하더라도 이삼 일도 미룰 수 없었다. 그랬다간 엄청난 소동을 일으켰을 것이고 나는 쥐구멍이라도 찾으려고 절절 맸을 것이다. (중략) 그러니까 이놈은 일단 굉장히 엄한 눈초리를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몇 분 동안 계속 나한테서 눈을 떼지 않는데, 나를 맞이하거나 외출하는 나를 배웅할 때는 특히 더 그랬다. 내가 가령 이 시선을 알아채지 못하는 척하며 견뎌 내면 이놈은 예전처럼 말없이 다음 단계의 고문에 착수했다. 즉, 내가 방을 거닐거나 책을 읽고 있을 때 갑자기 밑도 끝도 엇ㅂ이 어슬렁거리며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와 문 옆에 멈춰 서선 한쪽 손은 등 뒤로 돌리고 한쪽 발은 뒤로 뺀 채 이미 엄격하다기보다는 완전히 경멸에 찬 시선으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래에 계속)- P175

(위에서 계속)
내가 갑자기 이놈한테 무슨 용건이냐고 물으면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몇 초간 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 다음에, 왠지 유별나게 입술을 앙다물고 사뭇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 자리에서 느릿느릿 몸을 돌려 또 그렇게 느릿느릿 자기 방으로 물러난다. 그러다 두 시간쯤 지나면 갑자기 또 자기 방을 나와 또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중략) 이러고도 내가 정신을 못 차려 계속 반항하면 이놈은 갑자기 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이런 한숨만으로 나의 정신적 타락의 심연을 몽땅 재려는 듯 길고 깊은 한숨이었다. 물론 결국에는 이놈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나는 미친 듯 날뛰며 고함을 질러 대지만 어쨌든 문제가 됐던 그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됐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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