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군도 3 열린책들 세계문학 260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김학수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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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장은 죄수들을 곤봉과 배급 식량으로 밀어붙이면서, 당국, 교도관, 호송병이 없어도 작업반원들을 꽉 잡아야 한다. 샬라모프가 실례로 보여 주듯이, 꼴리마 지방의 금 채굴 현장에서는 한 기간 내에 작업반의 구성원들이 죽어서 몇 번이나 새 사람들로 바뀌었으나, 반장만은 죽지 않고 최후까지 바뀌지 않았다.
- P198

하지만 인간이 적응할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에 있을까? 때로는 그 작업반이 군도의 주민 사회의 자연스러운 세포, 즉 사회에서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무시한다면, 우리의 관찰이 너무나 소홀했다 할 것이다. (중략) 다만 그것은 일반 작업, 즉 한 사람이 죽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일반 작업반은 아니었다. 그것은 특수 작업반이었다. 전기 기술자들이나, 선반공들, 목수들, 페인트공들의 작업반이었다. 이런 작업반은 인원이 적으면(10명에서 20명) 적을수록 서로 돕고 의지하는 기미가 현저했다.
- P199

이러한 작업반이 그와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어울리는 반장이 필요했다. 그것은 적당히 엄격하고, 수용소 군도의 모든 도덕(부도덕) 규칙을 잘 알고, 통찰력이 있고, 작업자에게 공정하며, 당국에 대해 의연하고 확고한 태도를 가지고 발언하는 인물 - 어떤 자는 목쉰 소리로 지껄이며, 어떤 자는 냉정하게 조리를 세우는 인물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 작업반을 위하여 여분의 1백 그램의 빵, 솜바지, 구두 한 켤레를 놓치지 않는 인물이다. 게다가 유력한 사람들과 친분을 가지고, 그에게서 수용소 내의 소식이나 예정된 변동 상황을 미리 알고, 그것에 대응하여 바르게 지도할 수 있는 인물이다. 더욱 작업 내용에 정통하고, 각 작업 현장의 유리하고 불리한 점을 알고 있는 인물이다. (만일 이웃에 작업반이 있다면, 그쪽에 불리한 현장이 돌아가게 하는 인물)
-아래에 계속 - P199

-위에서 계속
속임수에 대해 예리한 눈을 가지고, 그 5일 노동 속에서 노르마의 속임수가 가장 쉬운 곳이 어딘가를 간파하는 능력이 있는 인물이다. 현장 감독이 작업 수행 보고서를 <삭제>하려고 잉크가 묻은 펜을 들었을 때, 굽히지 않고 속임수를 지켜 나가는 인물이다. 또 노르마 산정자에게 <뇌물>을 줄 수 있는 인물이다. 자기 작업반 안에서 누가 밀고자인지 (만일 그가 그다지 머리가 좋지 않아서 해를 끼치지 않을 자라면, 그대로 둔다. 그러지 않으면 더욱 까다로운 녀석이 오게 된다) 알고 있는 인물이다. 자기 작업반의 일이라면 한눈에 누구를 격려하고 누구를 나무라야 하는지, 오늘은 누구에게 가벼운 작업을 시켜야 하는지, 언제나 알고 있는 인물이다. 이러한 반장을 가진 작업반은 단단히 결속되어 꿋꿋하게 살아남는다. 쉽지는 않지만, 죽는 사람도 없다. (중략)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렇게 효율적이고 또 머리가 좋은 반장들은 대부분이 <꿀라끄>의 자식들이었다.
- P199

어떤 여자는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사랑하지도 않는 특권수들의 첩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여자는 <일반 작업장>에 끌려 나가 사랑 때문에 죽어갔던 것이다. 게다가 전혀 젊지도 않은 여자까지 이런 일에 말려들어 교도관들을 당황하게 했다. 바깥세상에서는 도저히 이런 여자를 상상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이 여성들은 정욕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돌보아 주고, 누군가를 따스하레 위로해 주고, 자기 몫을 떼어서라도 그에게 먹여 주고, 그의 옷가지를 빨아 주고, 누더기가 된 것을 기워 주고 싶다는 여성 본래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 P314

고참 수용소 죄수 D.S.L.이 감사하며, 동시에 죄의식을 가지고 말하고 있듯이 - 만일 내가 오늘 살아 있다는 것은 그 날 밤 나 대신에 다른 누군가가 명단에 의해 총살된 덕분이라 하겠다. 내가 오늘 살아 있다는 것은 배의 선창에서 나 대신에 누군가가 질식사한 덕분이다. 내가 오늘 살아 있다는 것은, 그것은 내가 죽은 사람들보다 빵을 2백 그램 더 받은 덕분이다.
- P350

지식인은 그 직업이나 일의 내용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훌륭한 교육과 훌륭한 가정이 반드시 지식인을 기른다고 할 수도 없다. 지식인이란 그 생활의 정신적인 면의 관심과 의지가 튼튼하고 변함이 없고, 외적 사정에 좌우되지 않고 오히려 그와 대항하는 인간을 말한다. 지식인이란 모방할 수 없는 사상의 주인인 것이다.
-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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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군도 2 열린책들 세계문학 259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김학수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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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어떻게 해서라도 용변을 줄이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을 적게 주어야 한다! 그리고 식사도 적게 주면, 설사 때문에 불평을 말하는 자도 없을 것이고, 공기도 더럽히지 않을 수 있다. (중략) 누구도, 아무도 우리를 괴롭히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호송대의 행동은 아주 합리적이었다! (중략) <제58조> 위반자를 잡범이나 경범죄자와 같은 한 찻간에 넣는 것도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때로는 그랬다.) 그것은 단지 죄수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아서 차량이 부족하고 시간도 없어서 정리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략) 예수가 두 사람의 도둑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 것 역시, 빌라도가 그를 능욕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지 않았는가? 다만 그날이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골고다의 언덕은 하나밖에 없고, 시간도 짧았다. 그래서 <그는 악당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 P288

가지지 말라!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중략) 빵과 설탕은 한 번에 이틀분을 주어도 이내 전부 먹어 버리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이제 아무도 훔칠 수가 없다. 당신은 하늘의 새처럼 자유롭게 된다! 항상 마음에 간직할 수 있는 것만 가지는 것이 좋다. 여러 언어를 알며 여러 나라를 알고 여러 사람을 알라. 당신의 기억이야말로 당신의 여행 가방이 될 것이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 P312

"일반 작업이란 각 수용소의 주요한 기본적인 작업을 말하는 걸세. 전 죄수의 80퍼센트가량이 일반 작업에 참가하고 있는데 결국은 모두 죽어 버리고 말지. 하나도 살아남을 수 없어! 다시 새로운 죄수를 끌어다가 인원을 보충하는 거야. 거기 끼어들면 항상 굶주려야 하고 항상 젖은 옷을 입어야 하고, 터진 신발을 신어야 하고, 식량 배급량에 속아야 하고, 가장 나쁜 막사에서 자야 하지. 병이 들어도 치료 한 번 받아 볼 수 없어.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것은 일반 작업에 나가지 않는 죄수들뿐이야.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일반 작업에만은 끼지 말도록 하게! 첫날부터 말이야!"
- P379

나는 반 년 전에 우리들의 수용소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수용소 관리 본부의 인사 카드에 여러 가지 사항을 기록했던 일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인사 카드의 중요한 칸은 <특기란>이었다. 그리하여 죄수들은 자기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수용소에서 가장 인기 있는 특기를 카드에 써넣었다. <이발사>, <재단사>, <창고계>, <제빵사> 등등. 그러나 나는 눈을 찌푸리고 핵물리학자라고 써넣었다. 나는 핵물리학자는 아니었으나 그저 전쟁 전에 대학에서 그 방면의 강의를 다소 들은 적이 있어서 원소의 기호며 매개 변수 따위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핵물리학자라고 써넣었던 것이다. 1946년이 되자 원자 폭탄이 아주 필요하게 되었다.
- P415

그리고 나도 그런 천국과 같은 수용소(죄수들은 속어로 <샤라시까>라고 한다)에 형기를 반쯤 보내고 나서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살아남은 것도 그 덕택이며 일반 수용소에서라면 도저히 형기를 다 치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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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군도 1 열린책들 세계문학 258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김학수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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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짓을 하기에 앞서 인간은 먼저 그것을 선이라고 믿어야 하고 자기 행위의 합법성을 찾아야 한다.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중략) 셰익스피어의 악당들의 상상력과 정신력으로는 불과 열 사람 정도의 사람도 제대로 죽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데올로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 - 그것은 사악한 일에 그럴듯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악인에게 필요한 장기간에 걸친 강인함을 제공해 준다. 그리고 그 사회적인 이론은 자기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악행을 은폐하게끔 도와주고, 비난과 저주를 듣는 대신 칭찬과 존경을 듣도록 도와준다.
- P266

우리는 일부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억압할 권리를 가진다는 그 <관념 자체>를 공개적으로 탄핵할 의무가 있다.
- P272

파스첸꼬는 우리 감방에서 자유의 몸이 될 가망성이 전혀 없는 유일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활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의 어깨를 끌어안고 이렇게 말했다.
진리를 위해 <일어나서> 싸우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진리를 위해서는 형무소에 들어가 <앉아> 있어야지!
그러고는 나한테 자기가 좋아하는 옛 유형 시대의 노래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어두운 감방 속, 축축한 갱도에서 말없이 죽어 간다 해도 우리의 외침은 살아남은 세대 속에 메아리쳐 살아나리라!
나는 이 말을 믿는다! 그리고 이 글이 그의 믿음을 실현시키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 P305

물론 우리는 고개를 번쩍 쳐든다. 그러면 우리는 반사된 햇살이 아닌 진짜 태양을 본다. 아, 저 태양! 영원히 살아 있는 태양! 봄 구름 사이로 나타나는 황금빛 햇무리!
봄은 누구에게나 행복을 약속하지만 우리 수감자에겐 열 배나 더 큰 행복을 안겨 준다. 오, 4월의 하늘이여! 감옥살이 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총살형만은 면하게 될 모양이니까. 그 대신 나는 여기서 더욱더 슬기로운 인간이 되련다. 여기서 더 많은 것을 깨달으련다. 하늘이여, 나는 또 나 자신의 과오를 시정하련다. -물론 <그들>에 대한 과오가 아니다! 하늘이여! 너에 대한 과오를 말이다. 나는 여기서 나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었다 - 나는 반드시 그것을 시정해 보이겠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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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 무도에의 권유 - 발레에 새겨진 인간과 예술의 흔적들
이단비 지음 / 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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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이다. 인터넷에서 조금씩 주워들어 왔던 발레 지식들이 이 책을 통해 체계를 가지고 정리되었다. 발레의 특징, 발레의 역사를 알기 쉽게 정리해 주는 사이사이에 필자 자신의 경험을 적절하게 끼워 넣어서 생생하고 재미있다. 살짝 과도하게 감상적인 부분들도 있지만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예쁜 일러스트들이 적절하게 사용되어 내용의 이해를 돕는 것도 좋았다. 

풀업이 잘 됐을 때 안정적인 를르베가 가능하고, 를르베가 제대로 된 후에야 비로소 회전을 비롯한 다양한 테크닉을 구사할 수 있다. 발레는 똑바로, 제대로 서 있는 것에서 시작하는 춤이다.
- P70

정확한 풀업을 요구하는 춤은 발레 외에 어떤 것도 없다. 즉 풀업이 없다면 발레가 아니다. 풀업은 발레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 P72

타조, 독수리, 황새, 두루미도 두 발로 걷지만 이들은 척추의 방향이 수평, 가로로 되어 있다. 펭귄이 유일하게 인간처럼 척추가 수직이지만, 대신 허벅지 뼈가 수평이다. 동물들도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출 수 있지만 풀업은 가능하지 않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척추와 다리가 수직으로 되어 있어서 풀업을 할 수 있고 그 덕분에 발레의 테크닉이 발전할 수 있었다. 결국 발레는 신이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허락한 선물인 셈이다.
- P73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것 중의 하나로 나는 발레를 배운 일을 꼽는다. 그건 풀업의 방법과 중요성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전문 무용수의 길을 걷는 경우는 좀 다른 이야기가 되지만,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발레를 배워보라고 권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 몸이 풀업이 되었구나’라는 걸 아는 그 순간의 느낌은 짜릿하다. 풀업을 아는 것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포 하나하나, 근육 하나하나를 느끼며 나의 신체를 내 뜻대로 컨트롤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과 다름없다.
- P77

휴가 기간인데도 다음 날 아침에 주섬주섬 연습복을 챙겨 발레단에 클래스를 하러 나왔다는 이야기를 무용수들에게 종종 듣는다. 아예 여행을 3박 4일 이상 가지 않는 무용수들도 있다. 가급적 빨리 발레 클래스에 복귀하기 위해서이다. 부득이 오래, 먼 지역으로 여행 갈 경우 현지 발래 클래스를 미리 체크해서 여행 중간중간 꾸준히 참여하고 온다. 그렇게 휴가 이후에 발레단에 복귀했을 때도 바로 어제 출근했던 사람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몸이 이미 만들어진 근육이나 몸의 선을 그렇게 오랫동안 가지고 있을 수 없다. 유효기간은 단 이틀. 이틀만 지나도 몸은 기억력을 상실한다. 발레를 꾸준히 하는 사람들은 며칠만 쉬어도 풀업으로 다져진 몸이 흐물흐물해진다고 느낀다.
- P92

그런데 실제로 바지 없이 타이츠만 입고 무대에 등장했다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발레단에서 쫓겨난 사람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된, 1911년의 일이다. 그 사람은 ‘무용의 신’이라 불리는 바츨라프 니진스키(Vaslav Nijinsky)였다. 러시아로 귀화한 폴란드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는 러시아 마린스키극장의 주역이었다. 그 당시 남성 무용수들은 타이츠만 입고 무대에 오른 적이 없었다. 19세기 초반 파리오페라발레학교의 경우 남학생들이 무릎 길이의 헐렁한 바지를 입는 게 규정이었다. 그래서 엉덩이와 무릎의 움직임이나 근육의 변화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던 발레 마스터들은 바지를 입지 않도록 끊임없이 정부요 요청했다. 당시에는 발레학교의 규정을 정할 때도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요청은 받아들여져서 연습 때 반바지를 입지 않게 됐지만 공연 때는 공처럼 부풀린 형태의 반바지를 입어야 하는 엄격한 규율이 있었다.
- P110

한 남성 무용수가 은퇴를 준비하면서 "이제 댄스벨트와도 안녕이구나"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해방감일까, 섭섭함일까, 무용수의 옷을 벗고 이제 다른 옷을 입어야 하는 시점이 언젠가는 온다. 몸은 시간이 지나면서 끊임없이 변하고, 늙어가고, 훈련으로 그 변화를 막을 수 없는 지점에 언젠가는 도달한다. 올해 했던 테크닉을 그다음 해에는 구사할 수 없다는 걸 직면하게 되고, 올해 내가 뛰어올랐던 점프의 높이가 그다음 해에는 더 낮아져서 점점 더 땅에 가까워지는 걸 겪는다. 발레는 훈련한 기간과 강도에 비해 찰나에 가까울 정도로 짧은 기간 무대 위에서 불꽃을 피우다가 사라지는 춤이다. (중략) 신이 부여한 신체조건과 예술적 감성이 인간의 노력과 만나 짧은 순간 불꽃을 일으킨 후,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는 운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게 발레 무용수의 길이다.
- P117

발레단은 오전에 클래스를 마치고 나면 공연 리허설에 들어가는데 자신이 공연에서 맡은 부분을 리허설하고 나면 퇴근이다. 전막 공연에서 본인이 등장하는 장면이 1막에만 있다면 1막 리허설을 마치면 퇴근이 가능하다. 그래서 캐스팅을 받지 못한 무용수는 오전 클래스만 하고 리허설도 없이 퇴근하게 된다. 다들 공연 연습을 하는데 혼자 매일 클래스만 하고 퇴근한다고 생각해 보라. 이런 경우가 많아지면 퇴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평생 발레만 바라보고 살아온 무용수에게 이런 일은 치명적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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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이론 - 강박적이고 우울한 사람을 끌어당기는 가장 고독한 경기, 테니스 알마 인코그니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노승영 옮김 / 알마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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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오스틴은 1989년 자동차 사고 이후에 "나는 여기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재빨리 받아들였다"라고 썼는데, 만일 이 문장이 사실일 뿐 아니라 그녀가 겪은 수용 과정 전부를 ‘오롯이 묘사’한 것이라면 어떨까? 어떤 불운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받아들이는 게 낫겠다고 말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더 이상의 내적 투쟁 없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는 멍청하거나 유치한 것일까? 어쩌면 천성적으로 지혜롭고 심오하고 마치 성자와 수도사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아닐까? (아래에 계속)
- P79

(위에서 계속)
내게 진짜 수수께끼는 이것이다. 그런 사람은 바보일까 도인일까, 둘 다일까, 둘 다 아닐까?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그런 사람이 매우 훌륭한 산문 회고록을 내놓지 못한다는 사실인 듯하다. 그 명백한 경험적 사실은 트레이시 오스틴의 실제 이력이 그토록 압도적이고 중요하면서도 그 이력에 대한 언어적 서술에서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최선의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소통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생각과 실천이 어떻게 다르고 실천과 존재가 어떻게 다른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면 이 사실은 최상급 운동선수의 자서전이 우리 독자에게 그토록 솔깃하면서도 그토록 실망스러운 이유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던질지도 모른다.
(아래에 계속)
- P79

(위에서 계속)
하지만 진실에 대한 표준운영지침(Standard Operating Procedure)이 으레 그렇듯 여기에는 잔인한 역설이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선수들 같은 천상의 재능을 갖지 못한 구경꾼인 우리야말로 자신이 허락받지 못한 재능의 경험을 진정으로 보고 서술하고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잇는 유일한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역설이요, 운동 천재의 재능을 부여받고 발휘하는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재능에 대해 눈멀고 귀먹을 수박에 없다는 역설이다. 그들이 눈멀고 귀먹는 것은 그것이 재능의 대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재능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트레이시 오스틴이 내 가슴을 후벼판 사연
- P80

필리푸시스가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육군과 같다면 샘프러스는 이동하며 포위하는 해군에 가깝다. 정치로 따지면 필리푸시스는 과두정이어서 의지가 있고 그것을 관철하고자 하는 반면에 샘프러스는 민주정이어서 더 혼란스럽지만 더 인간적이다. 그의 진짜 임무는 자신의 의지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인 듯하다. 그나저나 아테네가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했다는 사실을 기억 못하는 사람이 많다. 30년이 걸렸지만, 스파르타가 결국 아테네를 짓밟았다. 한편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애초에 시작된 것은 아테네가 해상 무역에 끼어든 스파르타 해상 동맹을 괴롭혔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아테네의 말쑥한 호인 이미지는 약간 과장된 것이다. 이 모든 고통의 발단은 처음부터 상업이었다.
-유에스 오픈의 민주주의와 상업주의
- P171

군중과 줄과 바가지와 기다림에 대한 뉴요커의 인내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척 인상적이다. 그들은 공기가 없는 곳에 오랫동안 다들 조용시 서 있을 수 있으며 그들의 눈에서는 禪명상과 (불행한 것이 분명하지만 결코 불평하지 않는) 임상적 우울이 뉴욕 특유의 방식으로 조합된 표정을 볼 수 있다.
-유에스 오픈의 민주주의와 상업주의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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