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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 무도에의 권유 - 발레에 새겨진 인간과 예술의 흔적들
이단비 지음 / 클 / 2023년 6월
평점 :
좋은 책이다. 인터넷에서 조금씩 주워들어 왔던 발레 지식들이 이 책을 통해 체계를 가지고 정리되었다. 발레의 특징, 발레의 역사를 알기 쉽게 정리해 주는 사이사이에 필자 자신의 경험을 적절하게 끼워 넣어서 생생하고 재미있다. 살짝 과도하게 감상적인 부분들도 있지만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예쁜 일러스트들이 적절하게 사용되어 내용의 이해를 돕는 것도 좋았다.
풀업이 잘 됐을 때 안정적인 를르베가 가능하고, 를르베가 제대로 된 후에야 비로소 회전을 비롯한 다양한 테크닉을 구사할 수 있다. 발레는 똑바로, 제대로 서 있는 것에서 시작하는 춤이다. - P70
정확한 풀업을 요구하는 춤은 발레 외에 어떤 것도 없다. 즉 풀업이 없다면 발레가 아니다. 풀업은 발레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 P72
타조, 독수리, 황새, 두루미도 두 발로 걷지만 이들은 척추의 방향이 수평, 가로로 되어 있다. 펭귄이 유일하게 인간처럼 척추가 수직이지만, 대신 허벅지 뼈가 수평이다. 동물들도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출 수 있지만 풀업은 가능하지 않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척추와 다리가 수직으로 되어 있어서 풀업을 할 수 있고 그 덕분에 발레의 테크닉이 발전할 수 있었다. 결국 발레는 신이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허락한 선물인 셈이다. - P73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것 중의 하나로 나는 발레를 배운 일을 꼽는다. 그건 풀업의 방법과 중요성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전문 무용수의 길을 걷는 경우는 좀 다른 이야기가 되지만,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발레를 배워보라고 권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 몸이 풀업이 되었구나’라는 걸 아는 그 순간의 느낌은 짜릿하다. 풀업을 아는 것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포 하나하나, 근육 하나하나를 느끼며 나의 신체를 내 뜻대로 컨트롤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과 다름없다. - P77
휴가 기간인데도 다음 날 아침에 주섬주섬 연습복을 챙겨 발레단에 클래스를 하러 나왔다는 이야기를 무용수들에게 종종 듣는다. 아예 여행을 3박 4일 이상 가지 않는 무용수들도 있다. 가급적 빨리 발레 클래스에 복귀하기 위해서이다. 부득이 오래, 먼 지역으로 여행 갈 경우 현지 발래 클래스를 미리 체크해서 여행 중간중간 꾸준히 참여하고 온다. 그렇게 휴가 이후에 발레단에 복귀했을 때도 바로 어제 출근했던 사람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몸이 이미 만들어진 근육이나 몸의 선을 그렇게 오랫동안 가지고 있을 수 없다. 유효기간은 단 이틀. 이틀만 지나도 몸은 기억력을 상실한다. 발레를 꾸준히 하는 사람들은 며칠만 쉬어도 풀업으로 다져진 몸이 흐물흐물해진다고 느낀다. - P92
그런데 실제로 바지 없이 타이츠만 입고 무대에 등장했다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발레단에서 쫓겨난 사람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된, 1911년의 일이다. 그 사람은 ‘무용의 신’이라 불리는 바츨라프 니진스키(Vaslav Nijinsky)였다. 러시아로 귀화한 폴란드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는 러시아 마린스키극장의 주역이었다. 그 당시 남성 무용수들은 타이츠만 입고 무대에 오른 적이 없었다. 19세기 초반 파리오페라발레학교의 경우 남학생들이 무릎 길이의 헐렁한 바지를 입는 게 규정이었다. 그래서 엉덩이와 무릎의 움직임이나 근육의 변화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던 발레 마스터들은 바지를 입지 않도록 끊임없이 정부요 요청했다. 당시에는 발레학교의 규정을 정할 때도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요청은 받아들여져서 연습 때 반바지를 입지 않게 됐지만 공연 때는 공처럼 부풀린 형태의 반바지를 입어야 하는 엄격한 규율이 있었다. - P110
한 남성 무용수가 은퇴를 준비하면서 "이제 댄스벨트와도 안녕이구나"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해방감일까, 섭섭함일까, 무용수의 옷을 벗고 이제 다른 옷을 입어야 하는 시점이 언젠가는 온다. 몸은 시간이 지나면서 끊임없이 변하고, 늙어가고, 훈련으로 그 변화를 막을 수 없는 지점에 언젠가는 도달한다. 올해 했던 테크닉을 그다음 해에는 구사할 수 없다는 걸 직면하게 되고, 올해 내가 뛰어올랐던 점프의 높이가 그다음 해에는 더 낮아져서 점점 더 땅에 가까워지는 걸 겪는다. 발레는 훈련한 기간과 강도에 비해 찰나에 가까울 정도로 짧은 기간 무대 위에서 불꽃을 피우다가 사라지는 춤이다. (중략) 신이 부여한 신체조건과 예술적 감성이 인간의 노력과 만나 짧은 순간 불꽃을 일으킨 후,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는 운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게 발레 무용수의 길이다. - P117
발레단은 오전에 클래스를 마치고 나면 공연 리허설에 들어가는데 자신이 공연에서 맡은 부분을 리허설하고 나면 퇴근이다. 전막 공연에서 본인이 등장하는 장면이 1막에만 있다면 1막 리허설을 마치면 퇴근이 가능하다. 그래서 캐스팅을 받지 못한 무용수는 오전 클래스만 하고 리허설도 없이 퇴근하게 된다. 다들 공연 연습을 하는데 혼자 매일 클래스만 하고 퇴근한다고 생각해 보라. 이런 경우가 많아지면 퇴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평생 발레만 바라보고 살아온 무용수에게 이런 일은 치명적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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