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군도 4 열린책들 세계문학 261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김학수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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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박된 죄수들은 5명에서 7명씩 마차에 실려서 <고르까>라는 수용소의 묘지로 운반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이미 준비되어 있는 커다란 구덩이 속에 떠밀려 그대로 <생매장>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잔인성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사람을 운반하고 들어 올리는 작업에서 죽은 사람을 다루기보다는 산 사람을 다루는 쪽이 훨씬 더 편하다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작업이 아다끄에서 밤마다 여러 날 계속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방식에 의해서 우리 당의 도덕적 정치적 통일은 달성되었던 것이다.
- P66

슬라바는 전쟁 전에 아홉 살 때부터 도둑질을 하게 되었고 우리 군대가 왔을 때도 도둑질을 했으며 종전 후에도 계속했다. 그는 열다섯 살이라는 나이치고는 어른스러운 침울한 웃음을 띠며 앞으로도 계속 도둑질을 하며 살아갈 작정이라고 했다. "그런데 말이에요." 그는 제법 논리적으로 말했다. "노동자 ㅁ노릇이나 하면 빵과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구경할 수 없잖아요. 나는 아이 때 너무 고생을 했으니까 앞으론 좀 잘살아보고 싶어요." "독일군이 쳐들어왓을 때는 뭘 했니?" 나는 그가 언급하지 않은 2년간, 즉 독일군 점령 기간에 대해 물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독일군이 들어왔을 때는 일을 했지요. 독일군 치하에서 어떻게 도둑질을 해요? 그랬다가는 당장에 총살이에요."
- P162

연소자들은 어른들의 수용소에 와서도 그들의 행동의 주요한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즉, 모두 한패가 되어 일제히 적을 습격하기도 하고, 일제히 적을 물리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힘을 강화시켜 여러 가지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들의 의식 속에는 해도 되는 짓과 해서는 안 되는 짓을 분간하는 힘이 전혀 없으며 선과 악에 대한 관념조차 없다. 그들에게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모두 선이고 자기를 방해하는 것은 모두 악이다. 그들이 방약무인하게 행동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유리한 처세술이기 때문이다. 힘이 통하지 않을 때는 거짓 연기를 하거나 속임수를 쓰기도 한다.
- P162

<남의 가랑이 들쑤시지 말라고!>, <(건드리지도 않는데) 오 납작 엎드려?> (이 말의 괄호 부분은 비슷한 낱말로 바꿨지만, 원래의 것을 그대로 쓰면 다음에 오는 <엎드리다>라는 동사가 아주 음탕한 뜻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듣는 사람을 흠칫하게 만드는 표현이 특히 군도의 여자 주민의 입에서 튀어나올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당황하게 된다. 그녀들은 비유에 에로틱한 소재를 즐겨 사용한다. 연구 논문이 지니는 도덕적 제한 때문에 그런 에로틱한 표현들을 열거하지 못함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 P239

제끄는 항상 <현재보다 더 나쁜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운명의 함정과 악마들의 습격을 기다리면서 살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설사 생활이 조금 완화되는 경우에도, 무언가 잘못되어 일어나는 일시적은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항상 재난에 대비하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운명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남의 운명에도 동정하지 않는 제끄의 냉엄한 정신이 형성되고 성숙되어 가는 것이다. 정신적인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 제끄는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일이 거의 없다. 밝은 쪽으로도 어두운 쪽으로도. 절망 쪽으로도 기쁨 쪽으로도.
- P257

대체로 제끄들은 <유머>를 높이 평가하고 좋아한다. 그것은 군도 첫해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주민들의 심리적 바탕이 건전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들은, 눈물은 자기변명이 될 수 없으며 웃음은 얼마든지 좋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 유머는 그들의 변함없는 동맹자로서 그것 없이는 아마도 군도에서의 생활을 이어 갈 수 없었을 것이다.
- P266

우리 나라 곳곳에서 우리는 이런 것을 보게 된다. -개를 끌고 가는 경비병이 누구를 잡으려고 앞으로 뛰어나가는 석고상이 있다. 따시껜뜨시에는 이런 동상이 NKVD 부속의 사관학교 앞에 서 있는데, 랴잔시에서는 마치 시의 상징처럼 미하일로프 방면에서 시로 접근하면 눈에 들어오는 유일한 기념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고도 혐오의 몸서리도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마치 그것이 당연한듯이, 개를 부추겨 사람한테 덤벼들게 하는 모습의 동상에 아주 익숙해져 버렸다.
우리들에게 덤벼드는데.
- P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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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군도 3 열린책들 세계문학 260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김학수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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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장은 죄수들을 곤봉과 배급 식량으로 밀어붙이면서, 당국, 교도관, 호송병이 없어도 작업반원들을 꽉 잡아야 한다. 샬라모프가 실례로 보여 주듯이, 꼴리마 지방의 금 채굴 현장에서는 한 기간 내에 작업반의 구성원들이 죽어서 몇 번이나 새 사람들로 바뀌었으나, 반장만은 죽지 않고 최후까지 바뀌지 않았다.
- P198

하지만 인간이 적응할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에 있을까? 때로는 그 작업반이 군도의 주민 사회의 자연스러운 세포, 즉 사회에서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무시한다면, 우리의 관찰이 너무나 소홀했다 할 것이다. (중략) 다만 그것은 일반 작업, 즉 한 사람이 죽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일반 작업반은 아니었다. 그것은 특수 작업반이었다. 전기 기술자들이나, 선반공들, 목수들, 페인트공들의 작업반이었다. 이런 작업반은 인원이 적으면(10명에서 20명) 적을수록 서로 돕고 의지하는 기미가 현저했다.
- P199

이러한 작업반이 그와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어울리는 반장이 필요했다. 그것은 적당히 엄격하고, 수용소 군도의 모든 도덕(부도덕) 규칙을 잘 알고, 통찰력이 있고, 작업자에게 공정하며, 당국에 대해 의연하고 확고한 태도를 가지고 발언하는 인물 - 어떤 자는 목쉰 소리로 지껄이며, 어떤 자는 냉정하게 조리를 세우는 인물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 작업반을 위하여 여분의 1백 그램의 빵, 솜바지, 구두 한 켤레를 놓치지 않는 인물이다. 게다가 유력한 사람들과 친분을 가지고, 그에게서 수용소 내의 소식이나 예정된 변동 상황을 미리 알고, 그것에 대응하여 바르게 지도할 수 있는 인물이다. 더욱 작업 내용에 정통하고, 각 작업 현장의 유리하고 불리한 점을 알고 있는 인물이다. (만일 이웃에 작업반이 있다면, 그쪽에 불리한 현장이 돌아가게 하는 인물)
-아래에 계속 - P199

-위에서 계속
속임수에 대해 예리한 눈을 가지고, 그 5일 노동 속에서 노르마의 속임수가 가장 쉬운 곳이 어딘가를 간파하는 능력이 있는 인물이다. 현장 감독이 작업 수행 보고서를 <삭제>하려고 잉크가 묻은 펜을 들었을 때, 굽히지 않고 속임수를 지켜 나가는 인물이다. 또 노르마 산정자에게 <뇌물>을 줄 수 있는 인물이다. 자기 작업반 안에서 누가 밀고자인지 (만일 그가 그다지 머리가 좋지 않아서 해를 끼치지 않을 자라면, 그대로 둔다. 그러지 않으면 더욱 까다로운 녀석이 오게 된다) 알고 있는 인물이다. 자기 작업반의 일이라면 한눈에 누구를 격려하고 누구를 나무라야 하는지, 오늘은 누구에게 가벼운 작업을 시켜야 하는지, 언제나 알고 있는 인물이다. 이러한 반장을 가진 작업반은 단단히 결속되어 꿋꿋하게 살아남는다. 쉽지는 않지만, 죽는 사람도 없다. (중략)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렇게 효율적이고 또 머리가 좋은 반장들은 대부분이 <꿀라끄>의 자식들이었다.
- P199

어떤 여자는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사랑하지도 않는 특권수들의 첩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여자는 <일반 작업장>에 끌려 나가 사랑 때문에 죽어갔던 것이다. 게다가 전혀 젊지도 않은 여자까지 이런 일에 말려들어 교도관들을 당황하게 했다. 바깥세상에서는 도저히 이런 여자를 상상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이 여성들은 정욕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돌보아 주고, 누군가를 따스하레 위로해 주고, 자기 몫을 떼어서라도 그에게 먹여 주고, 그의 옷가지를 빨아 주고, 누더기가 된 것을 기워 주고 싶다는 여성 본래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 P314

고참 수용소 죄수 D.S.L.이 감사하며, 동시에 죄의식을 가지고 말하고 있듯이 - 만일 내가 오늘 살아 있다는 것은 그 날 밤 나 대신에 다른 누군가가 명단에 의해 총살된 덕분이라 하겠다. 내가 오늘 살아 있다는 것은 배의 선창에서 나 대신에 누군가가 질식사한 덕분이다. 내가 오늘 살아 있다는 것은, 그것은 내가 죽은 사람들보다 빵을 2백 그램 더 받은 덕분이다.
- P350

지식인은 그 직업이나 일의 내용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훌륭한 교육과 훌륭한 가정이 반드시 지식인을 기른다고 할 수도 없다. 지식인이란 그 생활의 정신적인 면의 관심과 의지가 튼튼하고 변함이 없고, 외적 사정에 좌우되지 않고 오히려 그와 대항하는 인간을 말한다. 지식인이란 모방할 수 없는 사상의 주인인 것이다.
-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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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군도 2 열린책들 세계문학 259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김학수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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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어떻게 해서라도 용변을 줄이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을 적게 주어야 한다! 그리고 식사도 적게 주면, 설사 때문에 불평을 말하는 자도 없을 것이고, 공기도 더럽히지 않을 수 있다. (중략) 누구도, 아무도 우리를 괴롭히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호송대의 행동은 아주 합리적이었다! (중략) <제58조> 위반자를 잡범이나 경범죄자와 같은 한 찻간에 넣는 것도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때로는 그랬다.) 그것은 단지 죄수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아서 차량이 부족하고 시간도 없어서 정리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략) 예수가 두 사람의 도둑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 것 역시, 빌라도가 그를 능욕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지 않았는가? 다만 그날이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골고다의 언덕은 하나밖에 없고, 시간도 짧았다. 그래서 <그는 악당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 P288

가지지 말라!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중략) 빵과 설탕은 한 번에 이틀분을 주어도 이내 전부 먹어 버리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이제 아무도 훔칠 수가 없다. 당신은 하늘의 새처럼 자유롭게 된다! 항상 마음에 간직할 수 있는 것만 가지는 것이 좋다. 여러 언어를 알며 여러 나라를 알고 여러 사람을 알라. 당신의 기억이야말로 당신의 여행 가방이 될 것이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 P312

"일반 작업이란 각 수용소의 주요한 기본적인 작업을 말하는 걸세. 전 죄수의 80퍼센트가량이 일반 작업에 참가하고 있는데 결국은 모두 죽어 버리고 말지. 하나도 살아남을 수 없어! 다시 새로운 죄수를 끌어다가 인원을 보충하는 거야. 거기 끼어들면 항상 굶주려야 하고 항상 젖은 옷을 입어야 하고, 터진 신발을 신어야 하고, 식량 배급량에 속아야 하고, 가장 나쁜 막사에서 자야 하지. 병이 들어도 치료 한 번 받아 볼 수 없어.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것은 일반 작업에 나가지 않는 죄수들뿐이야.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일반 작업에만은 끼지 말도록 하게! 첫날부터 말이야!"
- P379

나는 반 년 전에 우리들의 수용소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수용소 관리 본부의 인사 카드에 여러 가지 사항을 기록했던 일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인사 카드의 중요한 칸은 <특기란>이었다. 그리하여 죄수들은 자기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수용소에서 가장 인기 있는 특기를 카드에 써넣었다. <이발사>, <재단사>, <창고계>, <제빵사> 등등. 그러나 나는 눈을 찌푸리고 핵물리학자라고 써넣었다. 나는 핵물리학자는 아니었으나 그저 전쟁 전에 대학에서 그 방면의 강의를 다소 들은 적이 있어서 원소의 기호며 매개 변수 따위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핵물리학자라고 써넣었던 것이다. 1946년이 되자 원자 폭탄이 아주 필요하게 되었다.
- P415

그리고 나도 그런 천국과 같은 수용소(죄수들은 속어로 <샤라시까>라고 한다)에 형기를 반쯤 보내고 나서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살아남은 것도 그 덕택이며 일반 수용소에서라면 도저히 형기를 다 치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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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군도 1 열린책들 세계문학 258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김학수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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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짓을 하기에 앞서 인간은 먼저 그것을 선이라고 믿어야 하고 자기 행위의 합법성을 찾아야 한다.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중략) 셰익스피어의 악당들의 상상력과 정신력으로는 불과 열 사람 정도의 사람도 제대로 죽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데올로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 - 그것은 사악한 일에 그럴듯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악인에게 필요한 장기간에 걸친 강인함을 제공해 준다. 그리고 그 사회적인 이론은 자기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악행을 은폐하게끔 도와주고, 비난과 저주를 듣는 대신 칭찬과 존경을 듣도록 도와준다.
- P266

우리는 일부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억압할 권리를 가진다는 그 <관념 자체>를 공개적으로 탄핵할 의무가 있다.
- P272

파스첸꼬는 우리 감방에서 자유의 몸이 될 가망성이 전혀 없는 유일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활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의 어깨를 끌어안고 이렇게 말했다.
진리를 위해 <일어나서> 싸우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진리를 위해서는 형무소에 들어가 <앉아> 있어야지!
그러고는 나한테 자기가 좋아하는 옛 유형 시대의 노래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어두운 감방 속, 축축한 갱도에서 말없이 죽어 간다 해도 우리의 외침은 살아남은 세대 속에 메아리쳐 살아나리라!
나는 이 말을 믿는다! 그리고 이 글이 그의 믿음을 실현시키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 P305

물론 우리는 고개를 번쩍 쳐든다. 그러면 우리는 반사된 햇살이 아닌 진짜 태양을 본다. 아, 저 태양! 영원히 살아 있는 태양! 봄 구름 사이로 나타나는 황금빛 햇무리!
봄은 누구에게나 행복을 약속하지만 우리 수감자에겐 열 배나 더 큰 행복을 안겨 준다. 오, 4월의 하늘이여! 감옥살이 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총살형만은 면하게 될 모양이니까. 그 대신 나는 여기서 더욱더 슬기로운 인간이 되련다. 여기서 더 많은 것을 깨달으련다. 하늘이여, 나는 또 나 자신의 과오를 시정하련다. -물론 <그들>에 대한 과오가 아니다! 하늘이여! 너에 대한 과오를 말이다. 나는 여기서 나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었다 - 나는 반드시 그것을 시정해 보이겠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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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 무도에의 권유 - 발레에 새겨진 인간과 예술의 흔적들
이단비 지음 / 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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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이다. 인터넷에서 조금씩 주워들어 왔던 발레 지식들이 이 책을 통해 체계를 가지고 정리되었다. 발레의 특징, 발레의 역사를 알기 쉽게 정리해 주는 사이사이에 필자 자신의 경험을 적절하게 끼워 넣어서 생생하고 재미있다. 살짝 과도하게 감상적인 부분들도 있지만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예쁜 일러스트들이 적절하게 사용되어 내용의 이해를 돕는 것도 좋았다. 

풀업이 잘 됐을 때 안정적인 를르베가 가능하고, 를르베가 제대로 된 후에야 비로소 회전을 비롯한 다양한 테크닉을 구사할 수 있다. 발레는 똑바로, 제대로 서 있는 것에서 시작하는 춤이다.
- P70

정확한 풀업을 요구하는 춤은 발레 외에 어떤 것도 없다. 즉 풀업이 없다면 발레가 아니다. 풀업은 발레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 P72

타조, 독수리, 황새, 두루미도 두 발로 걷지만 이들은 척추의 방향이 수평, 가로로 되어 있다. 펭귄이 유일하게 인간처럼 척추가 수직이지만, 대신 허벅지 뼈가 수평이다. 동물들도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출 수 있지만 풀업은 가능하지 않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척추와 다리가 수직으로 되어 있어서 풀업을 할 수 있고 그 덕분에 발레의 테크닉이 발전할 수 있었다. 결국 발레는 신이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허락한 선물인 셈이다.
- P73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것 중의 하나로 나는 발레를 배운 일을 꼽는다. 그건 풀업의 방법과 중요성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전문 무용수의 길을 걷는 경우는 좀 다른 이야기가 되지만,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발레를 배워보라고 권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 몸이 풀업이 되었구나’라는 걸 아는 그 순간의 느낌은 짜릿하다. 풀업을 아는 것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포 하나하나, 근육 하나하나를 느끼며 나의 신체를 내 뜻대로 컨트롤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과 다름없다.
- P77

휴가 기간인데도 다음 날 아침에 주섬주섬 연습복을 챙겨 발레단에 클래스를 하러 나왔다는 이야기를 무용수들에게 종종 듣는다. 아예 여행을 3박 4일 이상 가지 않는 무용수들도 있다. 가급적 빨리 발레 클래스에 복귀하기 위해서이다. 부득이 오래, 먼 지역으로 여행 갈 경우 현지 발래 클래스를 미리 체크해서 여행 중간중간 꾸준히 참여하고 온다. 그렇게 휴가 이후에 발레단에 복귀했을 때도 바로 어제 출근했던 사람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몸이 이미 만들어진 근육이나 몸의 선을 그렇게 오랫동안 가지고 있을 수 없다. 유효기간은 단 이틀. 이틀만 지나도 몸은 기억력을 상실한다. 발레를 꾸준히 하는 사람들은 며칠만 쉬어도 풀업으로 다져진 몸이 흐물흐물해진다고 느낀다.
- P92

그런데 실제로 바지 없이 타이츠만 입고 무대에 등장했다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발레단에서 쫓겨난 사람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된, 1911년의 일이다. 그 사람은 ‘무용의 신’이라 불리는 바츨라프 니진스키(Vaslav Nijinsky)였다. 러시아로 귀화한 폴란드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는 러시아 마린스키극장의 주역이었다. 그 당시 남성 무용수들은 타이츠만 입고 무대에 오른 적이 없었다. 19세기 초반 파리오페라발레학교의 경우 남학생들이 무릎 길이의 헐렁한 바지를 입는 게 규정이었다. 그래서 엉덩이와 무릎의 움직임이나 근육의 변화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던 발레 마스터들은 바지를 입지 않도록 끊임없이 정부요 요청했다. 당시에는 발레학교의 규정을 정할 때도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요청은 받아들여져서 연습 때 반바지를 입지 않게 됐지만 공연 때는 공처럼 부풀린 형태의 반바지를 입어야 하는 엄격한 규율이 있었다.
- P110

한 남성 무용수가 은퇴를 준비하면서 "이제 댄스벨트와도 안녕이구나"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해방감일까, 섭섭함일까, 무용수의 옷을 벗고 이제 다른 옷을 입어야 하는 시점이 언젠가는 온다. 몸은 시간이 지나면서 끊임없이 변하고, 늙어가고, 훈련으로 그 변화를 막을 수 없는 지점에 언젠가는 도달한다. 올해 했던 테크닉을 그다음 해에는 구사할 수 없다는 걸 직면하게 되고, 올해 내가 뛰어올랐던 점프의 높이가 그다음 해에는 더 낮아져서 점점 더 땅에 가까워지는 걸 겪는다. 발레는 훈련한 기간과 강도에 비해 찰나에 가까울 정도로 짧은 기간 무대 위에서 불꽃을 피우다가 사라지는 춤이다. (중략) 신이 부여한 신체조건과 예술적 감성이 인간의 노력과 만나 짧은 순간 불꽃을 일으킨 후,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는 운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게 발레 무용수의 길이다.
- P117

발레단은 오전에 클래스를 마치고 나면 공연 리허설에 들어가는데 자신이 공연에서 맡은 부분을 리허설하고 나면 퇴근이다. 전막 공연에서 본인이 등장하는 장면이 1막에만 있다면 1막 리허설을 마치면 퇴근이 가능하다. 그래서 캐스팅을 받지 못한 무용수는 오전 클래스만 하고 리허설도 없이 퇴근하게 된다. 다들 공연 연습을 하는데 혼자 매일 클래스만 하고 퇴근한다고 생각해 보라. 이런 경우가 많아지면 퇴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평생 발레만 바라보고 살아온 무용수에게 이런 일은 치명적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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