앰 아이 블루?
마리온 데인 바우어 외 12인 지음, 조응주 옮김 / 낭기열라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간만에 아주 특별하고 아름다운 책을 읽었다.
오늘 오후 도착한 푸른빛의 예쁘고 작은 책을 점심시간과 집으로 오는 귀가시간을 투자해서 순식간에 다 읽어 버렸다. 덕분에 지하철에서 눈물 가득 머금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이걸 흘려야 하나, 마를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냥 닦아야 하나 고민해야 하긴 했지만서도.

표제작이기도한 '앰 아이 블루'는 내가 이 책 받기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우울한' blue 가 아니였다. 그러기는 커녕 경쾌하기 짝이 없다. 호모로 불리며 반친구들에게 얻어맞고 진흙탕에 엎어져 있는 빈센트 앞에 '요정(fairy : 속어로 남성 동성애자를 뜻하기도 함) 대부' 멜빈이 나타난다. 맞다. 신데렐라에 나오는 요정대모 아니고 요.정.( fairy) 대부. 즉. 게이수호천사가 나타난다. 빈센트는 본인이 호모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정체성에 혼란을 겪지만, 이야기조차 꺼내기 힘든 현실이다. 그런 그에게 요정대부는 하루동안 '게이더(gaydar : 게이 레이더 : 동성애자가 다른 동성애자를 식별하는 능력) ' 를 쓰게해주고 3가지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다. 이 단편은 무지하게 경쾌하고 절로 웃음 삐져나오게 하면서 동시에 유익하다.

'어쩌면 우리는'  은 커밍아웃하는 앨리슨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앨리슨 할머니가 옛 경험담을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크리스마스때 스위스에 있는 학교를 다닐때 독일의 친구 집에 놀러갔다. 마을 어귀에 '유대인 사절' 이란 간판이 붙어 있었지만, 친구는 다 정치적인거라며 새총리 히틀러 때문에 그러는거니 신경쓰지 말라고 한다. 잘 차려진 저녁을 먹고 있는데 비쩍 마른 하녀하나가 " 저 시중 못 들겠어요. 남자든 여자든 어린애든...' 그러더니 날 쳐다보더니 이러는 거야. ' 유대인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것들한테는 두 번 다시 시중 못 들어요.'  .... 그러니까 아웃사이더가 된 기분이 어떤 건지 말하지 않아도 안단다. 편견이 어떤 건지도 말이야. 앨리슨, 네 자신에 대해서 이 할미한테 말해줘서 고맙다. 나한테 맨 먼저 얘기해줘서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구나'  이 단편의 제목인 '어쩌면 우리는' 이란 제목은 어쩌면 이 뒤에 나오는 이야기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해와 몰이해.  '모든 커밍아웃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이다. 남남이 서로를 이해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특히 그 남남이 가족이라면. '

다른 장르의 다른 색깔의 다른 시대의 이야기들이 '동성애' 란 주제 아래 묶여있다.
몇가지 공통되는 것들이 있다면, 첫째 청소년 소설들이니만큼, 성정체성에 고민하고 죄의식을 느끼는 청소년들에게 '그것은 죄가 아니고, 선택도 아니며,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다' 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로는 '소외받는 자' 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동성애자일수도 있고, 동양인이나 흑인 혹은 혼혈일 수도 있다. 유대인이기도 하고, 가족 중에 동성애자가 있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가족' 이다. 가장 가까운 남남인 가족. 가족의 이해와 사랑은 어느 경우에도 가장 중요하고 힘이 된다. 마지막 이유로 나의 눈물을 쏙 빼놓은 작품이 ' 학부모의 밤' 이다.

이 단편집의 소재는 동성애일지라도 위의 것들이 주제일 것이다.
성정체성에 고민하거나 혹은 주위의 그런 이들을 색안경 쓰고 보지 않기 위해 뿐만 아니라, 더 넓은 '사랑' 과 '이해' 그리고 '평등' 의 의미에서 이 책은 참으로 아름답고 또 유익하다.

책을 읽음으로써 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된다면, 이 책 추천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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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5-10-06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네요. 책을 읽음으로써 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 나도 아는데. 히히~. 근데 '낭기열라' 이거 생소하고 열라 웃기네요. 낭기열라가 뭘까?

하이드 2005-10-06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5년 8월 어느 날 시내의 모 대형 서점 구매과

그러니까 남... 이름이 뭐더라, (서류를 다시 들여다보며) 남비열라에서 말이죠...
아뇨, (어색한 웃음) 남비열라가 아니구 낭기열라요.
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며) 남기열라.
낭이요, 낭.
아, 네... 아무튼... 출판사 이름이란 게 쉬워야 되거든요. 독자들이 서점에 와서 책 제목을 기억 못하고 무슨 무슨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며 찾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제 조언을 듣고 이름을 바꾼 출판사도 있어요. 참고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네에...
낭, 기, 열, 라. 그런데 낭기열라가 뭐예요? 무슨 뜻이에요?
아, 네... 그러니까... 혹시... 말괄량이 삐삐 아세요? 그 삐삐를 쓰신 작가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인데요. 그분 작품 중에 <사자왕 형제의 모험>이란 작품이 있어요. 거기 나오는 판타지 세계 이름이에요. (머쓱) 그 작품을 워낙 좋아해서요. (긁적긁적)

하이드 2005-10-06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고 합니다. ^^ http://nangiyala.co.kr/tt/index.php?pl=8&ct1=2

돌바람 2005-10-06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lliott Smith의 Between the Bars도 듣고 왔어요. 특이하고 따뜻한 출판사라는 생각. 특히 성정체성을 묻는 청소년들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손을 내밀 수 있는 따뜻함이 좋네요. 비주류의 문화를 올 곧게 전달하고 보듬어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근데 하이드님, 혹 저 책 표지 조혁준 씨가 했는지 봐줄래요. 포토그라피를 보면 절대 아닌 것 같지만 그새 디자인이 많이 바뀐 건가 의심도 가고.

돌바람 2005-10-06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잇, 일해야 되는디. 벌써 한 시간이나, 내 이래서 하이드님 방에 댓글을 못 남긴다니께.^^*

하이드 2005-10-06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디자인 sailing blu그린이 sylbia kim 디자인 mimuse 로 되어 있네요.

하이드 2005-10-06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 - 난 자야되는데, 왜 잠 안자고 이렇게 서재에서 .. -_-a

panda78 2005-10-06 0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게이더! 윌 앤 그레이스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었군요.. ㅎㅎㅎ

panda78 2005-10-06 0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원래 관심있던 주제기도 하고, 관련있는 인간들이 주위에 좀 있기도 하고 이래저래 읽어봐야겠습니다. ^^
낭기열라에 얽힌 이야기도 재밌네요. ㅋㅋ

아영엄마 2005-10-06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저 없을 때 리뷰단 모집하구, 알라딘 미워잉~ 어제 리뷰단 모집했던 페이퍼에서 출판사 이름보면서 책(사자왕 형제의 모험-저도 읽었어요!! ^^*) 읽어본 사람만 아는 이름을 지어서 좀 어려워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그런 경향이 좀 있지요? ^^

2005-10-06 0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주미힌 2005-10-06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끌린다.

울보 2005-10-06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받고 바로 보관함에 넣었습니다,,,

chika 2005-10-06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니깐요!! 제가 사서 읽을 걸 알았는지 리뷰단에도 안뽑아주고 말이지요..ㅠ.ㅠ
추천이예요!(알라딘 서재팀에 땡투했었는데 바꿔야겠다. ㅎㅎㅎ)

moonnight 2005-10-06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리뷰를 읽으니 안 읽고는 못 배기겠네요. ^^

하이드 2005-10-06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다행입니다. 재밌고 의외로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어요.
치카니이이임~ 고롬요. 고롬요. 알라딘 서재팀에 뭐하러요. 저에게에에 땡투를~~
울보님. 재밌고 유익합니다. 모두가 꼭 읽었음 한다는 책 서문의 말에 120% 동의합니다.
라주미힌님/ 끌리죠? 사셔요~
아영엄마님! 오오 그렇군요. '사자왕 형제의 모험' 이라. 정말 읽어보고 싶어지는걸요.

로드무비 2005-10-23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올리고 나서 님의 리뷰를 읽어봅니다.
빨리도 읽고 쓰셨군요.
감흥에 겨워 쓰신 게 표가 납니다. 추천!^^

하이드 2005-10-23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심때 받아서, 집에가면서 읽고, 바로 썼지요.
 

나란 인간은 참 잘도 반한다.
오늘 첫 수업  최영미 선생님의 서양미술사 ' 문학과 미술의 특별한 만남' 이란 부제를 담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  서양미술사 강의에 들어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박지성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팀버스에 올라탈때 감독이 ' 웰컴투 프리미어리그' 그랬단다. 3년만의 강의라 많이 떨린다며, 첫수업에서 써먹어야지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가 몇마디 하기 전부터 그녀의 스타일은 확연히 드러났다.
말이 빠르고, 어수선하며, 문장의 끝도 잘 안 맺는다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그러니 이해하시라고 말한다. 자신은 이번 수업에 가능한 많은 도판을 보여줄텐데, 자칭,타칭 '최고의 슬라이드 편집자' 라고 하며 자신감을 보인다. Lucky. 원하는 바다. 처음부터 끝까지 쉴새없이 돌아가는 두개의 슬라이드. 슬라이드 넘어가는 0.5초의 시간도 아까워서 넘어갈때마다 '빨리빨리' 재촉하던 그녀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난다. 슬라이드 수업은 기대했던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고 유익했다.



그녀는 정말 미인이다.

 화장기 없는 피부는 아기피부같이 잡티하나 주름하나 없이 뽀얗다! ( 그렇게 피부 고운 사람 첨봤다!)
 앞가르마를 탄 검은 머리는 그녀를 지적으로 보이게 한다.

 짙은 카키색의 정장 수트가 쫙 떨어지는 슬림한 몸매에 
 큰 키. 검정 단화에 고상하고 화려한 스카프를 매고 있었다.

 나중에 스카프를 벗으니, 
 정말 아름다운 길쭉한 목선이 드러났다.

 목소리는 굉장히 지적이고
 말은 굉장히 빠르다.  그녀의 말대로 어수선하기 그지없다.

축구를 무지 좋아한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조합된 그녀는 정말 멋졌다.

미술사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알아야 하지만, ' 인생 경험이 풍부해야 한다' 고 한 말이 특히 와 닿았다. 고대부터 중세 직전까지를 훑었는데, 에게해 미술, 그리스 미술 슬라이드가 나올때는 겁나게 뿌듯했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서 라루스 미술사까지, 그 외 이것저것 미술책까지 그닥 정독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이리저리  뒤적여 보긴 했기에, 이야기들은 알고 있는 것들이 많았지만, 시대별로 지역별로 정리되면서 새롭게 알게되는 이야기들의 재미가 쏠쏠했다.

그녀의 강의의 가장 큰 힘은 그녀가 지금 '그녀가 가르치고 있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투에 절절이 드러났다. 알렉산더 대왕의 마라톤 전투를 그린 벽화를 보며 '이때부터 원근감이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  하다가, '이 말 뒷모습좀 보세요. ' .. ' 야, 정말 대단하다. ' ' 이것봐요. 이거. 이게 이렇게 뒷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림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데, 이집트 미술에선 생각하기 힘든거죠. ' ' 정말 멋지다'
혼자서 감탄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어수선화법에 듣는 사람을 말려들게 한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 에드워드 번즈 등의 ' 서양문명의 역사 1-4' 그리고 성경을 꼭 읽어야할 책으로 꼽았는데, 겁나게 설득력 있어서 그 책들이 세상에서 재미있고 유익한 책들처럼 느껴지며, 에드워드 번즈의 '서양문명의 역사 1-4' 없는게 죄스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미술과 문학의 만남이다. 
직접 작품을 보며 얘기하기도 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고 페리클레스가 읽었던 장례식 연설문을 낭독하면서 또 막 감탄하고 멋지다. 그런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사치로 흐르지 않고
지혜를 사랑하면서도 유약함에 빠지지 않고
부자는 부를 자랑하지 않고 그것을 활동의 바탕으로 삼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단지 가난을 이겨내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 페리클레스의 '장례식 연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그녀가 정말 좋아한다는 사포의 시

Ah, The Sweet apple that reddens at the tip
of the branch on the topmost limb,
and which the pickers forgot - or cold not reach

Or the hyacinth on the hills that shepherds
trample unknowingly under foot, yet on the ground
the flowers how its purple

본인이 번역한 본을 낭독해주었다.
그리스 최대의 여류시인인 그녀는 레스보스섬에서 젊은 소녀들을 모아 시를 가르치며 예술활동을 했다고 하는데, '레즈비언' 이란 말은 거기서 유례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묘한 질문 던져주신다. ' 내가 레즈비언일까요, 아닐까요? 말할 수 없습니다.' 뭐, 내가 지금 '앰 아이 블루' 를 읽고 있어서 그렇게 들렸을 수도 있다.

아무튼 정말 멋지다.
지난번 진중권 선생님의 수업에 이어 이번에도 개근상 탈 수 있을듯 -_-v

 마지막으로 선생님이 얘기해준 에피소드 하나와 관련 이야기를 옮기는 것으로 첫수업 후기 끝!

말 옮기는건 정말 조심스러운데, 특유의 어수선하고 빠른 말투에 내가 잘못 알아듣거나 오해했을 수도 있으니깐, 아무튼, 한다리 건너 전해지는 거니, 적어도 내가 페이퍼에서 이야기하는 걸로 인해 그분에 관해 결코 조금의 나쁜 얘기나 추측도 하시지 않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내가 '화가의  우연한 시선' 이라는 책. 제목 맞나? 내 책인데, 제목이 가물가물하네. 아무튼 그 책에 보면 첫 페이지에 이 조각이 나와 있는데, 이 책 탈고할 당시가 대선 직전이었어요. 나름대로 한 후보에게 도움 될 얘기 썼는데, 그 분은 그거 모를꺼야. 그리고 그 분 나 별로 안 좋아할꺼야. 왜냐면. 아, 또 잡소리가 길어진다. 너무 길으니깐 말자. 근데, 당시에 내가 인터뷰 하길 했었는데, 어떤 이유 때문에 안 나갔었거든요. 밝히긴 좀 뭐하고. 돈이 작아서 안 나간다고 했어요. 사실 내가 인터뷰 하고 에이. 밝히자. ㅎ 주간지였는데, 내가 돈도 세게 부르고, 또 내 글 절대 안 고친다고 각서 쓰라고 했더니, 돈은 많이 줄 수 있는데, 이때까지 편집장이 그런 각서 쓴 적 없다고 안 된다고. 아무튼, 그래서 그 분 비서들은 내가 나가는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이 결국 나가서 그분이  나 별로 안 좋아 할꺼야. '



 

 

 

 

이집트 미술에 나타난 기하학적 엄격함은 주기적으로 범람하는 나일강에 의존한 대규모 관개 농업과 관계가 있습니다. 대홍수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주민들의 공동작업을 강제할 강력한 절대 권력이 필요했지요. 대자연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기원전 민심의 동요를 막고 왕국을 보존하기 위해 지배자는 완벽한 평정심을 보여 주어야 했지요. <멘카우레와 그의 왕비>를 보세요. 굳은 자세로 정면을 응시하는 그는 웃지 않습니다. 울지도 않지요. 성공적인 통치자라면 대중 앞에서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데, 그 불문율을 어긴 어느 철없는 왕이 있었지요.

<산우스레트 3세의 초상> 은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 이집트 왕의 초상입니다. 처음 이 작품의 도판을 접했을 때 저는 그냥 지나쳤지요. 뭉개진 코와 윤기 없는 표면은 제 시선을 끌지 못했지요. 두꺼운 미술사 속에 들어간 무명(無名)의 유물이거니, 어느 변방에 살았던 촌장쯤 되려니 ......
왕이나 신분이 높은 사라이 아니면 엄격한 규칙이 완화되어 직접 관찰에 의존한 사실적인 표현을 허용하던 예가 흔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왕의 얼굴임을 알고 비로소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고뇌가 어린 표정이 놀랄 만큼 현대적입니다. 그는 젊지 않지요 아름답지도 영웅적이지도 않지요. 파라오, 하면 흔히 연상되는 모습 대신 그늘이 드리운 얼굴은 감수성이 예민한 예술가처럼 보입니다. 깊게 팬 눈과 입 주위에 도사린 주름은 그리 섬세하지는 않지만 몇 개의 단순한 선이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거인의 고뇌를 전달합니다. 자잘한 주름이었으면 이토록 진지한 우수(憂愁)를 창조하지 못했을 겁니다. 두꺼운 눈두덩, 축 처진 눈초리, 찌푸린 미간, 두드러진 광대뼈,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는, 거리에 나가면 몇 발짝 못 가 마주치는 초라한 얼굴입니다. 중년의 남자인지 겉늙은 아줌마인지...... 신분을 짐작케 하는 머리와 옷이 없이 이목구비만 달랑 떼어놓고 보면 누구든 나이와 성별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지요. 자연스레 닫힌 입술의 양 끝에 찍힌 희미한 보조개 같은 자국에 저는 감탄했습니다. 작은 주름 하나가 그 어떤 말보다도 주인공의 피곤한 삶을 웅변하고 있지요.

여기, 이 깨어진 돌 조각에 새겨진 그는 더 이상 영원불멸의 신이 아닙니다. 왕의 갑옷을 벗고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나약한 개인일 뿐입니다. 크기도 작아 높이가 겨우 16.5m 밖에 안 됩니다. 보존상태가 완벽했다면 감동이 덜했을 텐데. 불완전한 파편이기에, 왕관도 없고 왕을 표시하는 특별한 머리장식도 없는 모난 돌조각이라서 더욱 진한 인간미가 배어 나옵니다. 산우스레트 3세의 생동하는 리얼리티에 비하면 멘카우레 왕은 얼마나 정적이고 경직되어 있는지. 얼굴 위에 한 꺼풀 가면을 쓴 것 같습니다. 몇 천 년간 변하지 않은 완고한 미술의 전통을 깨고 새로운 양식의 왕실 초상을 도입한 그는 어떤 왕이었을까요? 자신을 초라한 범부처럼 표현하다니, 표현하게 용인하다니. 렘브란트에 못지 않은 통렬한 자의식의 소유자였던 그는 대체 어떤 인간이었을까? 그도 노예들을 잔혹하게 다루었을까? 전쟁을 즐겼을까? 아닐 것 같습니다.

(중략)

<산우스레트 3세의 초상> 에 나타난 예리한 심리적 사실주의는 로마로 이어져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같은 뛰어난 초상 조각을 낳았습니다.

 

똑같은 소박함이지만 저는 이 천민 출신 황제의 쏘아보는 듯 근엄한 눈빛보다 산우스레트 3세의 상처받기 쉬운 얼굴에 더 정이 갑니다. 매끄러운 로마의 대리석보다 거친 이집트의 규암 조각이 저를 끌어당깁니다. 그는 자신을 근사하게 포장하지 않습니다. 상대를 압도하려 눈을 부릅뜨지도 않습니다.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연출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더 아름답지요. 그처럼 진정한 고통을 아는 투명한 권력이라면 기꺼이 그 앞에 머리 숙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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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5-10-06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저기. 아이팟으로 강의 그대로 녹음 좀 해오심 안될까? -_-ㅋ

하이드 2005-10-06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

mannerist 2005-10-06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헷- 나중에 cd구워주세요. ^_^o-

비로그인 2005-10-06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이건 말이죠..오해없이 들으셨음 좋겠는데,매너님과 하이드님 사귀시면 너무 재미있는 커플이 되실것 같어요.^^ 하핫.후다닥~~(열공,열공.^^;;)

마태우스 2005-10-06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포 얘기, 저 알고 있었답니다 호호홋. 저도 여기서 놀다보니 꽤 박식해졌어요^^

야클 2005-10-06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이 긴 페이퍼를 다 읽다니.....

하이드 2005-10-06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 저도요. 제가 이 긴 페이퍼를 쓰다니. 정말 오홋!! 입니다.
마태님. 그건 저도 알고 있었어요. 그 다음 말이 좀 미묘했단 말이죠.
흑백TV님 제 주위 남정네들은 다 저보고 '마님' 이라고 불러요.
매너/ 근데, 나 어떻게 굽는지 모른다며? -_-a

panda78 2005-10-06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하이드님이 씨디 구울 줄 모르시다니 무진장 의욉니다! 저도 그거 쫌 들어보고 싶은데 말예요..... ;;;
번즈의 서양 문명의 역사 고 1때 학교에서 책 바자회? 뭐 하튼 그런 거 해서 샀는데 오호, 반갑구만요. ^ㅂ^

2005-10-06 0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히나 2005-10-06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 언젠가 우연히 도서관에서 최영미 시인을 봤는데 미인인 건 모르겠던데..
지적인 사람에겐 점수가 너무 후한 거 아냐.. ㅎㅎ
대신 기억에 남는 건 작가가 읽는 책도 나하고 별 다른 건 없구나 그 정도..

하이드 2005-10-06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분위기가 너무 멋졌다구. 게다가 난 말 열라 빠르고 어수선화법 구사하는 사람 너무 좋단말이야. ( 오늘부터;;) 게다가 피부는 정말로 예술이라구. 지금 읽기 시작한 '시대의 우울' 도 재밌구려.
판다님. ^^;; 음음음 네이버지식인에 물어보고 필요하면 해야죠. ㅎㅎ

그린브라운 2005-10-06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럽네요..저도 강의 듣고 싶어요 전에 라디오에 나와서 어떤 축구 선수 시합 보려고 일산에서 수원까지인가를 갔다왔는데 너무 허무해서 그 다음엔 안간다 ...뭐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갑자기 굉장히 유쾌한 사람으로 보여서 맘에 들었었어요 시대의 우울은 무지 엣닐 책이라 좀 우울하지요??

marine 2005-10-06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의 지적 욕구에 감탄하는 바입니다 저도 책 읽고 새로운 지식을 알아 가는 걸 좋아합니다만, 돈 내고 수업들을 정도로 열정적이지는 못해요 ^^
그리고 최영미님 사진 직접 찍으신 건가요? 사진만 봐도 피부가 얼마나 좋은지 금방 티가 나요

하이드 2005-10-06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설마요. 인터넷에서 떠도는사진이었는데요, 정말 피부가 환상이십니다. 딱히 열정적이라기보다는, 뭔가 안 배우고 있으면 허전해서요.
다락방님. 얘 안그래도 지금 읽고 있어요. 1995-1996 년의 여행얘기로 시작되네요. 이 사람 참 멜랑콜리해요. 멋져요.

moonnight 2005-10-06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러워요. 부러워요. ㅠㅠ 이럴 때 서울 살고 싶어진다니까요. ;;

미세스리 2005-10-06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서울에만 있었어도,,언니 쫄라 같이 다니자고 떼라도 써볼텐데-;;;;

클리오 2005-10-06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에 이어, 최영미의 강의까지 듣고 나시면, 님이야말로 지적인 미인... ^^
 
변화의 땅 - 딜비쉬 연대기 2, 이색작가총서 3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 너머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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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단편에 비해 장편 딜비쉬는 재미있다. 무척. 많이.
딜비쉬 단편에 목말라하던 팬들의 요청으로 젤라즈니 자신도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딜비쉬 시리즈를 장편으로 완결을 냈다.

변화의 땅을 관장하는 투알루아의 힘을 얻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그 길을 나아가는 마법사, 기사, 엘프. 모든 이들과는 다른 복수를 목적으로 변화의 땅에 나아가는 딜비쉬와 블랙.

전편에서 힘을 잃고 역시 힘을 되찾기 위해 투알루아에게로 향하는 젤라닉.

고대에서 불러낸 아름다운 여왕 세미라마.

젤레락과 딜비쉬의 대결은 밍숭맹숭하나 스팩타클하게 결말을 짓는다. 유머러스하고, 패러디가 많다.( 유명한 SF 작품들을 패러디 했다고 하는데, 작품해설을 보고야 알았으므로 패스) 그래서인지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세부묘사들이나 개념 묘사들은 때로는 너무나 자세하다.

전편에 비해 '블랙'이 덜 나오는 것이 불만이고, 장편을 읽었음에도 단편을 읽은 것 같은 뒷맛이 좀 찜찜하기는 하지만, 로저 젤라즈니의 팬이라면 딜비쉬 시리즈를 놓칠 수 없다. 물론 순서대로 읽을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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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10-05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 비해 리뷰가 너무 허접해도 용서해주시와요. 막상 쓰려니, 쓸말이 없네요. -_-a

하루(春) 2005-10-05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요즘 판타지 되게 많이 읽으시네요

하이드 2005-10-05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_-a
다음에 읽을 책은 아직 안 정했는데, 편식은 그만해야죠.

비로그인 2005-10-06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젤라즈니에 입문할 예정입니다. 앰버연대기가 젤 평이 좋던데요?
 
화이트 노이즈
돈 드릴로 지음, 강미숙 옮김 / 창비 / 2005년 9월
구판절판


"내 걱정은 하지 말게나." 그가 말했다. " 다리 조금 저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내 나이엔 누구나 저니까. 나이가 들면 저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기침하는 것도 신경 쓰지마. 기침은 건강에 좋은 거야. 속에 든 것이 이리저리 움직이게 해주잖아. 그게 한곳에서 자릴 잡고 몇년이나 그 자리에 가만있지만 않으면 아무 해가 없는 법이야. 그러니까 기침도 괜찮아. 불면증도 그렇지. 불면증은 아무 문제 없어. 내가 잠을 자서 얻는 게 뭐가 있단 말이야? 자네들도 1분 더 자면 일할 시간이 1분 줄어드는 그런 나이가 곧 될 거야. 기침하고 다리 절고 할 시간이 줄어든단 말이지. 여자 문제는 신경 꺼. 여자들은 괜찮아. 우리는 카세트를 빌려서 ›스도 좀 하고 그렇게 지낼 거야. ›스는 피를 심장으로 펌프질해 주지. 담배 피운다고 걱정할 필요도 없어. 그럭저럭 잘 넘어가고 있다고 자신하고 싶으니까. 모르몬교도들이나 담배 끊으라고 해. 그들도 담배만큼 해로운 것 때문에 결국 죽을 거야. 돈은 아무 문제도 안돼. 수입 면에서도 완전히 고정적이니까. 연금 제로, 저축 제로, 주식과 채권도 제로야.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없지. 저절로 굴러갈 거야. 치아 때문에 신경쓸 것도 없어. 이는 괜찮아. 이가 헐렁해질수록 혀로 흔들어줄 수 있어. 그러면 혀도 할일이 생기는 거야. 손 떠는 것도 걱정하지마. 누구든지 가끔은 떠는 법이야.-444쪽

그리고 왼손만 떨잖아. 손 떠는 걸 즐기는 방법은 말이야, 그게 다른 사람 손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체중이 원인도 모르게 갑자기 줄어도 걱정할 필요 없어. 눈도 시원찮은데 먹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눈 걱정도 하지 마. 눈이야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가 없지. 정신이 온전할까 하는 걱정은 깡그리 잊어버려. 정신이 몸보다 먼저 가는 법이야. 그렇게 돌아가는 거지. 그러니까 정신이 어떨까 걱정하지 마. 정신은 온전해. 차에 대해선 걱정을 해야만 해. 핸들이 좀 휘어졌거든. 브레이크도 세번이나 리콜된 거고. 푹 파진 곳을 지나가면 후드가 위로 치솟는단 말이야." -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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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10-03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걱정을 하래는 얘기야. 하지 말라는 얘기야. -.- a
 
저주받은 자, 딜비쉬 - 딜비쉬 연대기 1, 이색작가총서 2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 너머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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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읽어 온 로저 젤라즈니의 작품 중 이 작품이 비교적 낯설게 느껴졌다면, 작가도 말하듯이 그의 " SF 대부분이 판타지의 요소를 가지고 있고, 그 역逆 또한 사실이기 때문" 인데, 이 책은 오로지 환타지적 요소만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겠다.

딜비쉬는 악의 대표주자 J 로 시작하는 그분 ( 왠지 V 로 시작하는 그 분 생각나지 않나?) 가 젊은 여자를 제물로 바치는 것을 구하러 끼어들다 J 로 시작하는, 그러니깐 젤레락의 저주를 받아 석상이 되어 버린다.
200여년만에 닥친 흉험한 전쟁에서 그가 해방시켜준 그 석상을 돌보아준 포타로이 사람들이 위기에 처해 전설을 떠올리며 그 석상이 다시 자신들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에 의해, 혹은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지, 혹은 그저 시간이 되어서였던지 조금씩 힘든 발을 떼어 저주를 깨고 다시 살아나게 된다. 그에겐 연못에서 솟아오른 말의 모양을 한 검은 무엇이 함께 한다. 어떤 검과 화살도 침범 못하는 금속의 몸에 말을 하는 그것의 이름은 블랙. 딜비쉬가 어둠의 집에서 고문 받다가 탈출할때 해방시킨 악마다.

이 책은 로저 젤라즈니가 십년이 넘는 기간동안 그가 여기저기 연재했던 딜비쉬를 주인공으로 하는 단편집이다. 딜비쉬는 블랙과 함께 그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 주었던 젤레락에게 복수하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신神들, 마녀들, 마법사들 등과 싸우고, 그들에게 도움받는다.

호기심대마왕인 딜비쉬는 이일저일 다 끼어들고, ( 확실히 이 부분은 내가 기대하는 영웅적 카리스마를 해친다. ) 블랙은 말리고. 죽도록 고생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의 반복이다.

다음에 나온 '변화의 땅' 이 속편격이라고 하니, 더욱 기대된다.  
'내이름은 콘래드' 빼고는 로저 젤라즈니의 작품들을 비교적 최근 작품부터 읽어온 나로서는 좀 성에 안 차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로저 젤라즈니' 라는 이름만으로도 후회는 없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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