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오디세이 - 인간의 몸, 과학을 만나다
강신익. 신동원. 여인석. 황상익 지음 / 역사비평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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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의 진보 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의학의 진보'가 아닐까. 산업혁명만큼이나 의학 또한 '혁명'이란 말을 써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발전을 보여주고, 지금도 계속 나아가고 있다. 인간이 삶의 질을 따지기 시작하는 것 또한 의학의 힘이 큰 몫을 한 것이다. 바로 이 의학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 '의학 오디세이'이다. 주로 인물과 진화 과정의 중요한 키워드로 정리가 되어 있는데 의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부터 없는 사람까지도 전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만하다.

흔히 우리가 아는 '히포크라테스'에서부터 갈레노스, 라마니치 등 생소한 인물까지 정말 의학의 진보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헌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여러 기계를 이용해 편하게 검사받고 또 그 결과까지 신속하고 정확하게 알 수 있기까지는 우연한 발명 및 600여회를 끈질기게 도전한 실험정신등 피땀어린 그들의 노고가 숨겨져있는 것이다. 

과학을 오로지 과학적인 시선으로만 보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안목을 갖추지 않는다면 나치의 인체실험과 제국주의 일본의 인권을 말살한 실험등 수치스러운 역사상의 오점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반인륜적 범죄는 전인류를 위한 의학의 진보를 위한 실험이라고 합리화한다고 해도 지금은 생명의료윤리의 강령에 벗어나는 실험은 절대 허용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이는 진보 그 이전에 '인간'이 더욱 가치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고, 인간본위의 실험이 우선시 되어야 함을 피력하는 것이다. 

의술은 기술이 아닌 인술이라는 점을 많은 의사들이 망각하고 있다. 그들의 이윤을 위해서라면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단순히 형식주의를 벗어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의료윤리는 과연 그들의 마음까지 깊이 새겨져있는지 의심이 든다. 그 어떤 의료실험에도 인간에게 조금이라도 해로움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베르나르의 인본주의 정신을 우린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의사의 권리가 아닌 사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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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브 디거 밀리언셀러 클럽 66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전새롬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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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은 그 화려한 명성만큼이나 훌륭한 작품이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그 작품 하나의 힘일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유령 인명 구조대'에서 무참히 실망하고나서 그의 작품을 다시 읽기가 망설여졌다. 그러나 내가 이때까지 접해 본 밀리언셀러클럽 시리즈의 작품이 내용도 좋고 번역도 깔끔하여 다시 한 번 그의 또 다른 작품 '그레이브 디거'를 펼쳤다.

서양사에서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있는 '마녀사냥'. 마녀사냥을 감행한 이단고문자들을 똑같이 고문해주는 존재인 '그레이브 디거'. 후에 안 일이지만 '그레이브 디거'는 작가가 순전히 만들어 낸 가상의 존재에 불과했다. 소설 속에서 접했을 때의 놀라움과 짜릿함이 조금 김빠지긴 했지만 동시에 작가가 영화 관련 일을 하다가 소설을 써서인지 상상력 하나는 정말 타고났다는 생각도 했다.

인간은 쫓고 쫓기는 숨막히는 장면을 즐기는게 본능인지도 모른다. 얼마전 흥행에 대성공한 영화 <추격자>를 보면 알겠지만 영화로 쫓고 쫓김을 간접 체험한다는건 관객으로서는 대단한 구경거리가 될 수 있다. 주인공에게 감정이입되어서 가슴 두근거리며 보았던 영화가 아직도 나에겐 강한 인상으로 남겨져 있다. 바로 이 '그레이브 디거'도 하룻동안의 쫓고 쫓기는 내용을 다루었다. 살인사건의 중요 참고인과 경찰의 쫓고 쫓김은 비록 책이지만 무척이나 스릴있다. 비록 헐리우드영화에서 많이 본 구성이기에 신선함은 많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단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을 이토록 박진감 넘치게 쓸 수 있는 것 또한 작가만의 훌륭한 능력이리라.

'13계단'에서는 '사형제도'에 대해 다시금 고찰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면 '그레이브 디거'에서는 '추악한 권력'에 대해 생각해 볼 거리를 던져준 것 같다. 정치인의 겉에서 드러나지 않는 배후의 탐욕과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온갖 추악한 행동이 사실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권력과 인간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가 아닐까. 역사 속에 남겨진 추악한 인간의 권력욕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시 다카노 가즈아키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야베 미유키 못지 않은 그의 작품성에 또 다시 이 이름만으로도 기대가 생긴다. 추격의 박진감을 느끼고 싶다면 '그레이브 디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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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독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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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밋밋했다고나 할까. 미야베 미유키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반전을 끝까지 찾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 찜찜한 사건해결과 억지스런 결말이 조금 아쉬운 소설이다. 두께 자체에서라도 질릴 것 같은데,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이 두껍다면 오히려 더 기대가 되고 흥미가 생기는건 내가 그녀의 골수팬이 되었다는 증거이리라. 아무래도 대작 '모방범'을 보고나서 그녀의 두꺼운 작품만 보면 반사적으로 생기는 흥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내게 사실 <이름 없는 독>은 실망이 컸다. 그녀 작품의 특징인 탄탄한 구성, 박진감 그리고 빼놓지 않는 '사람을 향햐는' 인간애에서 인간애를 제외한 나머지 두 부분은 조금 탄탄하지 못한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너무 기대를 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역자의 말을 통해 알게 된 이 작품의 주인공을 내세운 시리즈물을 만들고 있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주인공은 내가 아직 보지 못한 작품 <누군가>의 주인공으로 먼저 선보였다고 한다. 시리즈물의 주인공 치고는 너무 캐릭터가 약한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명확한 성격 설정이 없고, 다른 인물들이 평하듯 그저 착하기만 한데다가 다소 우유부단하기까지 한 주인공이 과연 결말에 이르러 앞으로의 직업 전환을 암시한 탐정으로서의 역할을 잘 소화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드는 건, <이름 없는 독>에서의 사건 해결도 순전히 우연과 직감에 의존한 채 조금 개연성이 결핍되어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의 소설을 처음 읽는 것이라면 이렇게 혹평하지 않겠지만 시험기간에 그래도 꿋꿋이 이 작품을 다 읽은 보람이 없어지려고 하는 실망스러움 때문에, 더군다나 미야베 미유키를 엄청나게 사랑하는 독자이기에 더욱 평이 가혹해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난 미미여사 작품의 열혈독자이니  <모방범>과 <화차>같은 명작을 다시 접할 수 있기를 고대하며 미야베 미유키 팬의 몫을 열심히 수행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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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의 개
캐롤린 파크허스트 지음, 공경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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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와이프가 어느날 사과나무에서 떨어져 죽고, 그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유일한 목격자인 개에게 말을 할 수 있게끔 훈련시킨다. 내가 그녀의 흔적을 쫓아가며 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내용의 구성이 자못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의 무거운 주제의 가벼운 접근에 대해 조금은 억지스러움이 느껴지고, 좀 더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주기보다는 그저 느슨하게 매듭이 풀린 채로 끝나버렸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저 강한 매듭은 슬픔이라는 감정뿐이라서 아쉬움이 느껴진다.
 
사과나무에서 떨어져 죽은 렉시에 대해서는 주인공과 독자 모두 알 수 없다. 그녀 내면의 무엇이 그토록 그녀의 감정을 흔들리게 했는지, 그리고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게끔 했는지 끝끝내 밝혀지지 못했다. 차라리 간단히 '우울증'과 같은 병명으로 결론지어졌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역자의 말마따나 소설을 읽는 이유는 다른 이의 감정을 쫓아가보며 경험해보지 못한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해보는것이 아니겠는가. 아주 가끔 누군가의 예상치못한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죽음이란 우리와는 동떨어져 있는 무엇이 아닌, 바로 우리 삶의 연장선의 그 어느 한 지점에 있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로 내일 일도 알 수 없는 우리에겐 사실 그 죽음을 어느때나 무섭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도 없고, 생각도 하지 않고 살고 있다. 그러나 가끔은 죽음이 나를 빗겨가지 않을 것임을 난 불현듯 느끼곤한다. 때문에 한때는 유서를 미리 써놓고 항상 주변을 정돈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행동으로 옮기려고도 했었지만,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던건 나도 사람인이상 죽음을 태연히 받아들일 자신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책을 덮고 난 후의 먹먹함이 아직도 전해지는 것 같다. 우린 모두 알고 있지만 그 진실을 보기 싫어서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세상 속 아름다움과 따뜻함과 좋은 것만이 진리처럼 여겨지기 위해서는 어느 하나 그에 어긋남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래서 우린 세상을 포장하고 나를 포장하는게 아닐까. 렉시는 그 이면의 어떤 것을 보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것이 그녀에겐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책 속의 나에겐 따뜻함과 원만함의 장애가 될 수 있는 두 개의 심장 중의 하나인 차가운 심장일 것이고.

감추지 않고 왜곡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사실 진실은 그리 따뜻한 것이 못되니까. 완벽히 포장된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의 포장이 한 꺼풀씩 벗겨지는 모습을 볼 용기는 아직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알아야 할 것임을. 그리고 지금도 알고 있기에 보이지 않는 그 내면때문에 더 공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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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풍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
장 지오노 지음, 박인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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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비극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운명에 순응할 수 밖에 없는 인간과 이에 맞서는 인간이 있지만 장엄한 자연 속에 인간은 결국 나약한 존재밖에 되지 못하듯 운명 또한 그와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그리스 비극의 영향을 받아서 비극에 관심을 갖기시작하고 쓴 장 지오노의 '폴란드의 풍차'는 기구한 운명이 주어진 한 가족의 5대에 이어지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죽음으로밖에 귀결될 수 없는 이 가족들의 운명 속에서 결국 홀로 남은 한 여인, 그리고 완결짓지 못한 이야기로 우린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즐겨 읽지 않는 까닭은 난해한 번역투의 문장 때문이다. 이 책 역시 역자 나름 성심껏 번역했겠지만 독자로서는 읽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을 읽다보면 소설이 마치 학술도서 한 권을 읽는듯한 느낌이 드니, 다시는 손길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대표작가 '장 지오노'의 작품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기에 이 책을 선택했는데, 비극적인 줄거리 때문에 인간의 유한함에 대해 새삼 겸손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기구한 운명으로 태어났지만 그럼에도 이 기구한 운명의 가족과 인연의 끈을 닿았던 인물을 통해서 우린 무엇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역자의 말대로 그들이야말로 진정 인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간사한 인간들에겐 그저 익명성으로 통칭한 것을 보면 '장 지오노' 역시 운명에 대항할 수 있는 인간에게 더욱 큰 의미를 부여했다고 본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은 얼마나 용기있는 존재인지, 한계를 알면서도 앞으로 나갈 수 있기에 인간이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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