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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취미들
김도언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9월
평점 :
내가 여고생이던 시절, 한 허풍쟁이 친구가 있었다.
도저히 믿을수 없을만큼 부풀려진 그 애의 거짓말을 믿는 아이들은 당연히 아무도 없어서
그애는 소위 말하던 "은따"였던 아이였다.
어떻게해서 그애와 어울리기 시작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혼자 있기를 좋아했던 나를 보고 자신과 같은 부류라 생각했던 것인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그 애의 허풍을 들어주고 있었다.
비교적 눈치가 빠른 편이라, 그애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과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게 되었는지는
쉽게 알수 있었지만, 왜 그런 거짓말쟁이의 말을 내가 다 들어주고 있었을까 하고 곰곰히 되돌이켜보면,
솔직히 말해 나는 그애를 속으로 비웃는 것을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어디까지 뻥을 치나 두고보자.
언젠가 기회를 보다가 몇마디 말로 그 애의 환상을 깨어부수고 당혹함을 느끼게 하리라.
잔인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것 역시 악취미. 두고봤다가 언젠가는 뒷통수 치려는 악의에 가득찬 친절이었던 셈이다.
언젠가 한번쯤을 스치고 지나갔을 기이해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
언제인가는 내가 악의를 품었고, 언제인가는 상대방이 악의를 품었던,
감히 누구에게도 드러놓고 얘기하지 못하는 마음속의 이기적이고 잔인한 감정들-
김도언의 <악취미들>은 그런 감정들을 이야기한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 마음속의 은밀한 욕망과 위악.
그리고 가끔은 살아가는 것이 사람을 망가뜨리고 자신이 쓰레기같은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같은 몹시 위험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다.
요절한 천재시인의 은밀한 변태적인 욕망을 다룬 <권태>
군대 시절에 이루어졌던 상사와의 동성애의 이야기, 사랑과 증오를 묶어버리는
택시 운전을 하며 부부가 함께 매춘을 하는 <택시 드라이버>,
밤새 전화통을 붙잡고 모두를 괴롭게 만드는, 쓰레기같고 그러면서도 가련한 남자의 이야기 <고통의 관리>
열네살짜리 부잣집 삐뚤어진 도련님이 스물네살 짜리 식모여자에게 느끼는 욕망에 관한,
그리고 언젠가 터져버릴 듯한 긴장을 내제한 채 흘러나가는 <나쁜 교육>
한 때, 은밀히 누군가를 비웃었던 나를 떠올리게 해서 무척 부끄러워졌던 <너의 형에게 말해야겠다>
유사 수간, 근친상간에 대한 아주 위험한 이야기 <지붕 위의 날들>
찢어지고 망가지고 터져버린 것들에게서 사랑을 느끼는 여자의 잔혹한 이야기 <잔혹>
오지랖이 너무 넓은, 그래서 기이하기까지한 여자의 이야기 <밤하늘은 호수다>
아들을 질투하는 아버지, 부정이 욕망을 이겨버리는 <톱스타 살인사건 전말기>까지,
"악취미들"에서 다루는 열가지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삐뚤어지고, 내밀하며, 부끄럽다.
드러나있는 모습만 보았을 때는, 몹시 악의적이고 비상식적이며 변태적인 저런 행위들 역시
"취미"중의 하나라 보고 "악취미"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왜 일까.
누가 누구를 처벌할수 없다는 듯이. 저런 행위를 "악행"이라 말하며 처단하고 욕할수 없다는 듯이.
아마도 누구에게나 그런 "악취미"는 하나쯤 있을 것이고,
책속의 주인공들처럼 누구나 잠재의식안의 악취미를 변호하려고 애쓰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이렇게 밖에 할수 없는 이유가 당연히 있다는 듯이 말이다.
꼭꼭 숨겨두었던 잠재의식을 들켜버린 듯이 책을 읽는 내내 당혹함과 부끄러움에 시달리면서 보면서도,
읽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유는 열가지 악취미에서 나의 그림자를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소름이 끼치고, 사람이 짜증스러워졌고, 그러면서도 입안이 쓴 것은 어쩔수 없었던 소설.
우리는 여기에서 인생을 볼수 있다.
위악과 불안, 인간의 사악함과 나약함이 어울어진 우습고 잔인하고 씁쓸한 서커스.
책은 무척 재밌다. 잔인하지만, 무척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