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내게 있어선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오랜 세월동안 아버지에 대해 내가 가졌었고 또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모습은
콘달 가(街)에서 7페세타에 산 중고 모자를 쓰고 커서 맞지 않는 낡은 양복에 빠져버린 마른 남자의 모습.
아무 짝에도 쓰로 없지만 아들이 세상 전부인 것처럼 느꼈던 행운을 가져다주는 그 만년필을
자기 아들에게 선물할 수 없었던 한 초라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바람의 그림자> 中에서...
이 책을 읽다보면,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는, 이 책이 내게 있지도 않았던 시절을 그리워하게 만든다는 것.
또 하나는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이라는 작가가 무척이나 우아한 필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
아아, 표현 하나하나가 그림처럼 아름답다.
어느 문지기가 한밤중에 무례하게 찾아온 열여섯살짜리 소년에게
지금이 몇시인줄 아냐고 꺼지라는 말 대신
"넌 혐오스런 시간 감각을 가졌구나"라고 얘기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