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 - 상 스티븐 킹 걸작선 7
스티븐 킹 지음, 정진영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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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일화 중 하나.
동네 언니를 따라서 가다가, 공터에 내버려진 반쯤 썩은 개를 발견하고 불이나케 집으로 도망쳤던 기억.
이것도 아주 오래된 일화 중 하나.
친구들과 뒷산에 올라가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곳에 아지트를 만들어놓았지만,
그후로도 종종, 악몽속에서 등장하는 그 산속의 아지트.
 
스티븐 킹의 "그것"은 오래된 유년시절의 음울했던 기억 몇가지를 떠오르게 했다.
상큼 발랄한 유년시절이 아닌, 내 기억속에 어쩐지 으스스하게 존재하는 이상한 기억의 순간들.
아주 충격적이지는 않아도, 기억에 남아 종종 이상한 기분에 빨려들어가게 하는 음울한 기억들.
어린 시절의 회고가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은 것은 나뿐일까.
책 속의 아이들처럼, 외면당하거나 크게 상처받은 기억도 없는 어린시절이지만,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좋은 기억보다 으스스한 기억이 많이 떠오른다.
 
이 이야기는 간단히 말하자면, 악마 페이와이스와 싸우는 어린아이들, 혹은 성장한 아이들의 이야기.
그 안에는 어린 시절 저마다 놀림당하고 괴롭힘당할만한 결점이 있는 아이들이
똑같이 괴롭힘당하는 아이들을 만나 서로 의지하며 성장해가고 강해지는 모습이 담겨있고,
폐쇄적인 마을 "데리"에서 눌러붙어, 아이들을 잡아가는 페니와이스와의 악몽과도 같은 기억이 담겨있다.
말을 더듬는 아이, 엄마의 과잉보호로 나약하게 자라날수 밖에 없었던 아이,
아버지에게 구타당하는 아이, 쉴세 없이 떠드는 아이, 흑인아이, 유대인 아이-
책속의 차별당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미국내에 존재하는 수많은 인종차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결점있는 아이들을 괴롭히는 "헨리"로 대변되는 폭력을 되물림 받은 아이의 모습도,
우리 사회에서 많이 볼수 있는 형태의 인간이다.
 
왕따클럽 7명의 아이들은 평생 씻을수 없는 데리에서의 악몽과도 같은 기억을 딛고,
저마다 성공을 이룬 성인이 되고, 어느 순간- 데리가 또다시 도살장으로 변하는 순간,
다시 데리로 돌아와 어떤 모습으로든 변할수 있는 악마 페니와이스를 쫓는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학살극. <그것> 페니와이스 자체가 데리이다.
어느 순간이 되면, 모든 어른들이 변하고, 페니와이스를 위한 어린이 살육장이 되어버린다.
27년동안 저마다 뿔뿔히 흩어져 있던 7명의 왕따클럽 아이들은 중년이 된 지금,
다시 페니와이스와 끝장을 보기위해 하나둘 데리로 몰려든다.
 
 
스티븐 킹의 소설은 무섭지 않다.
공포 소설가인데도 무섭지 않다면 좀 아쉬운 얘기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동양과 서양의 공포코드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느낄 것이다.
지하실 냄새가 날것처럼,  오래된 물비린내가 날 것같은 음울하고 섬뜩한 공포가 저변에 깔려있을 뿐이다.
거의 1800페이지의 대용량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같은 이야기도 재밌게 풀어낼수 있는 작가의 역량.
그것이 스티븐 킹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또한 단점이기도 하다.

이 소설이 이렇게나 길 필요는 없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세밀한 묘사는 후반부로 가면 맥이 빠진다 싶을 정도로 지나치다 싶어서,
이런 묘사를 조금만 더 줄였다면 좀더 밀도 높은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또, 내 개인적인 취향인지 모르겠지만,
주인공들의 현재의 이야기보다는 어린시절의 이야기가 훨씬 재밌었는데,
아마도 약한 존재인 어린아이와 공포라는 두가지 코드가 접합되는 순간,
좀더 아슬아슬한 스릴이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스티븐킹은 심리묘사를 잘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을 보면서 유일한 여주인공인 비벌리에게 전혀 동질감도, 매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소설에서도 많이 느꼈지만, 여성심리에는 너무 약한 것이 아닌가.
여자는 남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성적인 호감으로 남자를 대하지 않는다.
또한, 비벌리의 친구 페미니스트 "케이"의 경우도, 페미니스트라는 명칭과 걸맞는 모습은
아무것도 없는 매력 0%의 등장인물이었다.
페미니스트의 전형성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남자 할렘을 만들어놓고 살고, 모든 남자를 성의 노리게로 보는 페미니스트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
있다해도 꼴불견이다. 그래서 매력이 없다는 것이다.
조금 더 여성 심리에 섬세했더라면, 여주인공인 비벌리도, 중요한 등장인물인 케이도
매력적인 여자들로 다가왔을텐데...하는 아쉬움이 든다.
 
참 재밌는 소설임에도, 후반부로 갈수록 단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소설이었다.
600페이지 정도만 분량을 줄였더라면, 이런 단점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을텐데.
분량이 긴 소설인만큼, 후반부의 기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었다.
그래도, 딱 여름에 읽기 좋은 재밌는 공포소설.
주인공들의 회고를 통해 어린시절의 나를 돌아보고,
나 역시 공포스러웠던 순간을 떠올렸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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