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글을 잘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보통 사람들이 "아, 이 작가는 글을 참 잘쓴다"라고 말하는 것의 기준이 무엇일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추리소설에서 수려한 문장이라던가, 정교하고 장황한 묘사를 바라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몰입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나로써는 다카노 카즈아키의 <13계단>은 그야말로 "글을 잘쓴"
소설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어제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지하철에서였는데, 20페이지쯤 읽기 시작했을때
"아, 이건 또 뭐지?"하는 신선한 충격부터 주었던 소설이 바로 <13계단>.
책을 펴자마자 몰입했고, 이틀내내 용무로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기회만 되면 손에서 놓치않고 결국은 다 읽어버렸다.
 
제목의 13계단은 죄인이 사형으로 이르는 13단계의 절차를 뜻한다.
동시에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는 중요한 순간에도 13개의 계단이 존재한다.
원죄와 사형, 과연 죄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비인간적 행위이고,
죄에 대한 처벌 또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깊은 통찰이 더해져
더할 나위없이 철학적이고 중후한 느낌이 드는 이 책이,
작가 다카노 카즈아키의 처녀작이라는 사실이 믿을수 없을 정도로 놀라울 따름이다.
(무슨 처녀작이 이렇게 무지막지할 정도로 압도적이란 말인지-)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이라는데, 심사위원 전원이 비교할 필요없이 만장일치로 이 작품을 뽑아놓은 것을 보면,
이런 압도적인 감정은 나만 드는 것이 아닐 것이다.
 
 
27세의 미카미 준이치라는 청년은 2년전 우연히 벌어진 청년들의 몸싸움에서,
실수로 상대를 살해하게 된다.
덕분에 (아마도 많은 청소년들이 경험했을) 청소년기시절의 방황이나 반항은
마치 미카미 준이치 자신의 인격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준듯 부풀려져버려
다분히 폭력적이고 자기절제가 부족한 사람처럼 타인의 눈에 비치게 되었지만,
길거리나 술자리에서 많이 일어날수 있는 젊은이들의 치기어린 폭행사건에서의
실수였다는 점이 여실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2년 징역을 받고 복역을 마친후 사회로 돌아온다.
 
2년동안 고립되어 있다가 사회로 돌아왔을때 느끼는 감정은 괴로움과 슬픔뿐이다.
사람을 죽인 아들의 죄를 대신 갚느라 전재산을 탕진하고 빚쟁이가 되어버려도,
자식이라는 타이틀 하나만으로 살인자 아들을 따뜻이 맞아주는 늙은 부모님,
살인자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해 고등학교를 중퇴해버리고,
결국은 형을 증오하게된 동생을 바라보면서,

준이치는 끝없는 슬픔과 괴로움을 느낀다.
 
 
또 한 사람의 주인공 난고는 준이치가 복역하던 교도소의 교도관.
교도관 중에서는 악랄하게 범죄자를 괴롭히는 타입이 있는가 하면,
인간적으로 편의를 봐주는 자원봉사원같은 타입도 있는데,
난고는 이도저도 아니다.
그는 공정하다. 죄인을 혐오하지도, 동정하지도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죄를 지었으면 죄를 값아야한다"는 정의 뿐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교도소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법의 이름하에 그는 두번의 살인을 저질렀다.
죽어 마땅한 인간을 죽이는- 어쩌면 당연한 듯한 죄인의 사형임에도,
사형집행중에 죄인의 목에 밧줄을 걸며 평생 씻을수 없는 상처를 받아버린 난고.
두번의 사형 집행으로, 가족도 산산히 부숴져버린 중년의 난고가 강력히 바라고 있는 것은
평생의 상처로 남을 두번의 살인을 씻을수 있을 만한 양심적인 정의 구현이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범죄자의 원죄를 밝히는 것.
10년전의 살인사건의 강력한 용의자로 현재는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이 사형수는,
사건 당일 오토바이를 타고가다가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죽다 살아났지만,
당시 오후 5시 이후의 기억을 상실했다.
그러나 이 사형수 사카키바라가 범인이라고 단정짓기에는 사건이 매우 이상하다.
강도살인처럼 꾸며진 사건의 정황중에 희한하게도 범인이 가지고 도망친듯한
예금통장과 카드, 도장등이 사라져버렸고, 그 예금을 한푼도 건드리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미심쩍다.
 
누군가의 의뢰로, 사형수 사카키바라의 원죄를 밝히기 위해 변호사사무실에서
증거를 모집할 행동대원을 찾던 중, 교도관 난고가 지원을 하게되고,
난고가 마침 출소를 해있던 준이치에게 자신의 파트너가 되달라고 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된다.
 
 
 
다카노 카즈아키는 자기절제력이 뛰어난 작가이고, 정확하고 정교하게 감정을 표현할줄 아는 작가이다.
어떤 소설들에서는 주인공의 괴로움에 독자가 동화되지 못하기도 하고,
어떤 소설들에서는 주인공의 괴로움을 독자가 괴로울 정도로 오버된 채 받기도 하지만,
<13계단>에서 독자가 느낄수 있는 감정은 딱 표현한 그대로, 주인공이 느꼈을 만한 감정의 깊이 그대로 전달된다.
모자르지도, 넘치지도 않게 딱 그만큼.
그래서 매우 차분하고 지적이나, 전혀 차갑다거나 딱딱하지 않게도 인간미가 흘러 넘친다.
죄를 진 아들을 등에 업고 가는 초라한 부모님의 모습에서 준이치가 느끼는 슬픔이라던가,
두번의 사형집행으로 되돌이킬수 없는 상처를 받고 죄를 진 사람을 갱생시키고자 노력하는 난고의 죄의식은
너무도 잘 표현되어서 보는 동안 내가 상처입은 양 마음이 아팠다.
사형 집행중에, 사형을 당하는 사람도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도 괴로운 풍경에서 또한
사실적이고 인간적이라 마음이 아팠다.
 
<13계단>의 두 주인공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원래 똑똑한 사람도 되지 못한다.
방법은 단지 열심히 들고 뛰는 방법 뿐, 머리를 쥐어짜서 증거물을 맞춰보는 방법 뿐이다.
"타고난" 무언가를 가지지 못한, 아니 어쩌면 타인보다 조금더 상처입어서 모자를지도 모르는
이 두 주인공들의 성격과 추리는 다분히 인간적이라 매우 공감된다.
천재형 주인공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내게는,
이런 다소 모자르고 평범해 빠지고 상처입은 주인공들은 한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범죄를 접한다.
그 중에는 죽여야 마땅할 놈이라는 소리가 나올수 밖에 없는 파렴치한의 범죄도 있고,
무섭도록 이해할수 없는 병적인 사이코의 범죄도 있지만,
가끔씩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하는 범죄도 있다.
처자식을 차마 굶길 수가 없어서 몇푼 안되는 돈을 훔치고 타인을 살해한 가장,
죄를 지었으면 당연히 죄값을 받아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받은 상처를 감당하지 못하고 복수를 저질러버린 사람.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
사람을 죽였지만, 복역하면서 마음깊이 죄값을 뉘우치고 새사람이 되었는데 사형을 언도받아야하는 사람.
이런 모습들은 분명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을 시리게 한다.
그리고 이것이 죄인가하고 다시 되물어보게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한사람의 인생을 파멸시킬 정도의 상처를 주는 사람도 분명 있는데,
정작 "죄"라고 이름붙여질만한 범죄는 짓지 않았다면, 그런 사람들은 과연 죄인이 아닌가.
책을 보면서 여러가지를 생각했고, 인간의 판단 기준이라는 것의 모호함과 법이 가진 모순점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다.
결국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죄를 지었으면 당연히 죄값을 치루어야한다는 것이 정석이지만,
세상에는 단순히 정석으로는 이해할수 없을 만한 사건도 많이 일어나고,
살인이나 절도, 강도 등, 표면적으로 나타난 결과물을 가지고는 이야기 할수 없는 사건도 많다.
궁지에 몰려서 범죄밖에는 갈 길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가슴아픈 모순이면서 동시에 어쩔수 없는 사실이다.
 
독자로 하여금, 사형이라던가 죄에 대한 의식을 다시한번 상기시키는 작가의 능력은 탁월하다.
보고나서 많은 생각이 떠오르지만 결국은 어쩔수 없는 현실의 모순일 수 밖에 없어서
책을 다 읽고 났을때는 무척이나 슬프고 우울해졌다.

아, 이 세상은 도대체 왜 이런거야- 라고 한탄해봤자,
이 모순을 고칠 "정석"이라는 것이 도무지 없을수 밖에 없기 때문에 더더욱 슬프다.
"어쩔수 없어"라는 무기력한 말은 사람을 참 초라하고 지치게 만든다.
어쩌면 이렇게 많은 모순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도,  반전에 목매는 사람도, 슬프고 우울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사회의 문제의식을 느낄수 있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도 모두 만족할 만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감히 별점을 내릴수 있다면, 만점을 주고 싶다.
2005년이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읽은 너무나 멋진 소설이다.
다가오는 2006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소설이고,
아무쪼록 다카노 카즈아키의 다른 소설도 우리나라에서 볼수 있었으면 좋겠다.
과연 앞으로도 나올지는 의문이지만, 기대해도 좋을만한 작가 아닌가.
앞으로의 가능성을 봐서가 아니라, 이대로도 충분히 훌륭하다.
 
 
 
 
p.s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은 표지 디자인이다.
조금더 예쁜 표지였더라면 좋았을텐데, 너무 투박한 느낌이 들어서 다소 성의없어 보인다.
 
p.s 2. 젊은 준이치를 냅두고, 나는 왜 이렇게 난고 아저씨가 좋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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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달 2006-01-10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검사님이 좋아요!<-

Apple 2006-01-11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