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레베카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26
뒤 모리에 지음, 김유경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평점 :
만일 이 소설가가 무언가 잘못해서 반성문을 쓰라고 한다면,
A4용지로 100장도 넘는 반성문을 쓸수 있을 것이다.
매우 화려하고 수려한 문장력이다.
치렁치렁한 스커트 주름처럼 섬세한 문체에 글도 매우 잘 쓰지만,
오랜만에 너무 화려한 문체를 봐서인지 적응하는데 꽤 걸렸다.
고아처럼 자라온 갓 소녀티를 벗은 여자와 20살차이가 넘는 무뚝뚝한 남자의 결혼.
그 뒤에 가리워진 전부인의 미스테리한 과거와 광기.
이 정도 얘기를 들었다면, 누구나 샬롯 브론테의 "제인에어"를 떠올리겠지만,
이 소설 레베카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인에어의 오마쥬이다.
하지만 제인에어쪽에 손을 들어줄수 밖에 없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어쩐지 캐릭터자체의 매력과 음울하면서도 아련한 느낌이 덜하기 때문일수도 있었고,
"제인에어"에서의 로체스터 씨가 전 부인을 집 어딘가에 숨겨놓았던 정도의
광기나 비밀스러운 슬픔이나 공포도 없었기 때문일수도 있겠다.
나이도, 이름도 나오지 않는 주인공 "나"는 중년부인 반홉퍼 부인의 개인비서이다.
말이 개인비서지, 거의 하녀에 가깝다.
갓 여학교를 졸업한 순진하고 어리석고 겁많은 주인공은 반홉퍼 부인의 여행에 따라갔다가
으리으리한 성 만더레이의 주인 맥심을 만나고, 사랑에 빠져 곧바로 결혼한다.
신혼여행후 만더레이로 돌아왔을 때, 주인공을 기다리고있는 것은
만더레이 곳곳에 아직도 넘쳐나고 있는 1년전에 죽은 맥심의 전부인 "레베카"의 환영뿐이다.
아름답고 지적인데다가 상냥하기 까지 했던 레베카.
누구나 이 볼품없는 여자와 레베카를 비교한다.
어째서 맥심이 이런 어이없는 미성숙아와 결혼을 했는지 의아해 하면서.
치욕스러운 가장무도회 다음날, 이미 1년전에 발견되어 묻혀졌던 레베카의 시신이 발견된다.
완전히 썩어서 이제는 뼈밖에 남지 않은채로.
그 일을 계기로 밝혀지는 만더레이와 레베카에 관한 진실은
어쩐지 좀 뻔하게 생각될 정도로 전형적이어서 그다지 독특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정많고 아름답고 지적인 여자가,
사실 알고 보면 악독하고 잔인한 이중인격자라는 것은 꽤 많이 등장하는 소재이니까.
그래도 소설 막바지에는 꽤 흥미진진하고 스릴넘친다.
책표지에는 "낭만적 스릴러"라고 쓰여져 있지만,
사실 추리소설이나 스릴러라고 말하긴 뭣하고, 그냥 아주 잘 쓰여진 영미소설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주인공은 막바지에는 소녀가 아닌 당당한 여주인으로 변하지만,
거의 소설 전체에서 너무 수줍어하고 너무 겁많고 너무 소심해서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읽으면서 답답해 할 정도로, 하인들에게도 비굴하고 남편에게도 비굴하고.
꼭 어디로 끌려가야할 것 처럼.
주인공이 이렇게 비굴해지면 주인공에 대한 호감도가 떨어지는 건 나뿐만일까.
가진것 없지만 오만하고 당당한 제인에어와 괴로운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변덕스러운 로체스터씨와
미친 로체스터 부인의 삼각트리오의 매력에 비해 캐릭터자체의 매력은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그러나 수려한 문체가 인상적이었고,
소설이 거의 600페이지가 되는데도 그다지 지루함을 느끼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런대로 재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