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량의 상자 - 상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스포일러 있음>

 

해냈다!!!!!!!!!!!!!!!!!!!!!!!!!!!!!!!!!!!!!!!
라는 말이 나왔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방금 마라톤 골인지점에 도달한 것처럼 보고나면 무척이나 피곤해지는 소설이다.
상,하 두권 합치면 거의 1100페이지가 넘어가는데다가
후반부의 숨막히는 전개는 가히 압도적이라고 할정도로 사람의 진을 빠지게 한다.
압도적이다. 이책은 정말 압도적이다.
이렇게까지 읽고나서 피곤한 소설은 없었다.


상자라는 지옥. 지옥이 담긴 상자.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은, 열리는 순간 모두를 파멸시키는 상자.
"망량의 상자"라는 제목이 걸맞게
상자라는 말로 도배가 되어있는 책이다.
망량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 있나?
아마도 거의 보통사람들은 나처럼 희미하고 허무한 느낌을 받을뿐, 정확히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감을 잡지 못할것이다.
망상이나, 망향이나, 망령, 망연자실, 망자....
뭐 이런것과 비슷한것을 떠올릴것이다.
일단 국어사전에 나와있는 정의는 "도깨비"또는 "이매망량"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이런걸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었을것이다!


책에서 "망량"이라는 존재는 내가 단어의 뜻을 알기전에 단어의 이미지에서 받았던 느낌과 비슷하게 등장한다.
정체 모호하고 희미한, 그야말로 형태없는 무언가의 이름인데, 그걸 확실히 정의내릴수가 없다.
설화속의 "망량"은 아이같이 천진난만한 얼굴로 시체를 파먹는 무시무시학 요괴이기도 하고,
단순히 사람에게 붙어서 부채질 하고 다니는 악동같은 요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어떤 귀신이다-라고 말할수 없는 형체도 알려지지 않은 모호한 악령의 형태이다.
책에서 주로 설명의 역활을 맡은 교고쿠도 역시 "망량"을 귀찮은 존재라고만 설명할뿐 무엇무엇이라 정확히 찝어 말하지 않는다.
교고쿠도는 소설 마지막에 이런 설명을 덧붙이기도 한다.



"망량은 본래 늪에 살면서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사람을 현혹시키는 존재일세.
형태는 있어도 내용물은 없어. 무슨 짓을 하는 것도 아닐세.
현혹되는 것은 사람 쪽이지."


그래서 뭐가 어떻단 말인가?
무슨 짓을 하는 것도 아니라면, 요괴로 알려질 리가 필요도 없을텐데.
(말할 만한 거리가 있어야 소문을 타고 이름도 알려질테니.)

책을 다 읽고나서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나는 망량의 정체를 깨달았다.
누구의 마음속에나 다 존재하는 순간적인 광기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1초도 안되는 시간, 순간적으로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무섭게도 비현실적인 광기.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옥상에서 아랫층을 내려다볼때 "여기서 뛰어내리면 죽을까?"하는 생각을 잠시나마 해본적이 있을 것이다.
그건, 단지 죽고싶어서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그게 궁금했기 때문이다.

또, 지하철을 기다리며 철로를 보고서는 "여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되지?"라던가,
"앞에 있는 사람을 밀어버리면 어떻게 되지?"하는 순간적인 호기심이 들떄도 있을것이다.
아주 잠시 잠깐, 이성을 잃고 터져나오는 순간적인 광기-
그것이 "망량"의 정체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순간적인 광기를 이길수 있다.
마지막 교고쿠도의 "망량"에 대한 정의는 그렇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순간적인 광기 자체는 악이 아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상상한다고 해서 경찰이 잡아가는 것은 아닌것 처럼.

하지만, 그 망량의 순간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정말 옥상에서 떨어지면 죽을지가 궁금해 떨어져 보거나,
지하철에서 사람을 밀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 사람을 밀어버린다면?
그때엔 "악"이 되는 것이다.

순간 자체에는 죄가 없되, 거기에 현혹되는 인간은 "악"이 되는 것이다.


내가 느낀 "망량"의 정의를 제대로 설명을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정체모호한 "망량"의 단어뿐만이 아니라,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매우 어렵다.

망량의 정체만큼이나 사건의 행방도 모호하고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보고 난 다음에 확실히 정리되는 것도 아니고,
교고쿠도의 말대로 이 사건들은 "뒷맛이 깔끔하지 못하다".
의학지식이라던가, 전문용어도 꽤 나오기 때문에, 뒤쯤 가면 뇌가 터질것처럼 머릿속이 복잡다난해진다.


소설 전체적으로 네가지 사건이 벌어진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1. 가나코 살인미수사건

천사처럼 예쁘고 고귀한 14살의 소녀 가나코는 절친한 친구 요리코와 가출을 한다.
지하철을 기다리던중, 가나코는 철로로 떨어져 전차에 치이는 바람에 크게 다친다.
죽지 않았다. 그러나 가나코는 사경을 헤맬 정도로 크게 다친것이다.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았을때 이것은 자살임이 분명하지만,
가나코는 자살을 할 만큼 불행한 소녀는 아니었다.
자살일까, 아니면 타살일까?


2. 가나코 유괴사건

혼수상태에다가 온몸에 깁스를 하고 있는 가나코를 유괴하겠다는 예고장이 도착하고,
경찰의 살벌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나코가 사라졌다.
공기중에서 뿅! 사라져 버린 것처럼.


3. 상자교주 온바코

사이비인지, 아니면 진짜인지,
사람들의 망량을 거두어 들여 상자에 봉해넣는 온바코님이 있다.
대부분의 사이비교의 목적이 돈인데에 비해 온바코님은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의 "망량"의 원인인 돈을 상자에 집어넣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청렴하게도 그 돈은 쓰지 않는다.
사이비일까, 진짜 일까?


4. 연쇄토막살인사건

가나코가 병원에 누워있을때 쯤 다른 곳에서는 소녀 토막살인사건이 일어난다.
팔, 다리만 발견되기 때문에 신원을 알기도 힘들다.
이렇게 발견된 시체가 몇구.
대부분의 토막살인은 옮기기 불편할때 일어난다고 한다.
시체를 처리하기 곤란할때, 토막내서 자루나 상자에 담아놓는 형식인것이다.
그러나, 이 토막살인사건은 죽인 다음 처리하기 위해 잘라 상자에 담은 것이 아니라,
상자에 담기위해 잘랐다. 즉- 살아있는 상태에서 토막쳐버린 것이다.
이런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누구?



얼핏 사건들은 아무 관계 없어보인다.
독자들은 이 것이 뭔가 기묘한 운명처럼 엮여져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이코 범죄자가 저지른 두서없는 사건이라고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교고쿠도의 말대로 이사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그 말을 풀이하자면, 범인은 한 사람이 아니고, 사건도 동시다발적이 아닌,
마치 피라미드처럼 점진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네가지 사건이 모두 결과물인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관계에 있어서,
그래서 사건을 정리하기가 무척 어려운 것이다.

교고쿠 나츠히코의 소설 두개를 읽고나니, 이 사람 소설의 특징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는 요괴 사건과도 같은 가면을 쓰고 현실에서 일어난 일을 규명한다.
얼핏 일본색이 짙은 요괴소설이라고 생각될수 있으나, 분위기만 그럴뿐,
언제나 철두철미하게 요괴의 정체를 부인하고 인간의 심리와 현실의 범죄를 강조한다.
그것은 참 잘 어울어져, 귀신나오는 소설처럼 뜬금없지도 않고, 범죄만 다룬 소설의 느낌처럼 딱딱하지 않다.
요괴적인 신비로운 분위기를 품고, 철저히 이성적인 소설인 것이다.
전혀 관련없을 듯한 소재들을 흩뿌려놓고, 묘하게도 잘 마무리 짓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작가이고,
소설들이 정말 미칠듯이 길지만, 묘하게도 군더더기는 하나도 없다.
그의 소설에서 사건을 전말을 설명하려면, 사건의 주요인물들의 기나긴 가족사까지 모두 설명해야만
사건 풀이가 가능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참 마음에 드는 작가이다.
교고쿠도 시리즈 다음편은 언제쯤 나오려나?

교고쿠도 시리즈 1편 "우부메의 여름"과 비교해 보자면,
우부메의 여름에 깔려있는 비장미는 조금 사그라 들었으나,
훨씬 유머넘치고 상식을 깨는 소설이었다.
시리즈에 늘 등장하는 교고쿠도와 아이들(?)에 대한 세부정보도 점점 쌓이니,
주인공들이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그래봤자 모두 30대 아저씨들이지만.)

그러나 지나친 분량과 후반부의 급박한 분위기와 용량이 매우 큰 설명때문에
소설을 다 보고나면 매우 거북해지고, 피곤하다.
(사건자체의 엽기적임도 있지만, 사실 그런 엽기보다 물고 물리는 관계를 듣다보면
매우 지치고 역겨워진다.)

비위가 약한 사람이라면, 긴 소설을 절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읽으라고 추천해주고 싶지 않다.

소설 후반부에서는 머릿속에서 "메모리 부족!!!"이라는 말이 깜빡대고,
뒤가 궁금함에도 불구하고 속이 메스꺼울정도로 피곤해졌다.

신비로운 그로테스크 소설.
"세상에 설명하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교고쿠도의 말처럼,
세상에는 이성으로써 다스릴수 없는 문제에도 원인과 결과가 있고 찬찬히 생각해보면 알수 있다.
하지만 아는 것이 나을까, 모르는 것이 나을까.
언제나 사건을 설명하기 앞서 "안듣는 것이 좋을걸세"라고 말하는 교고쿠도의 말처럼,
설명할수 있는 일도, 해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게 나은 사건들도 세상에는 참 많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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