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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레오라는 청년이 있었다.
자신의 동성애 성향때문에 청년은 자유를 찾아 그 골무같은 소도시를 언제든 떠나고 싶었단다.
그리고 그는 떠나게 되었다. 소련으로. 강제노역을 하러.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자유를 갈구하던 한 청년이 강제수용소에 들어가면서 눈으로, 감각으로 적어내려가는 일기이다.
이차대전 이후 황폐해진 소련의 재건을 위해 루마니아에 거주하는 독일 소수민족들을 잡아들여 동물만도 못한 환경에서 강제노역을 시키다니, 악행에 악행으로 답하는 참 유치하고 추악하기 짝이 없는 역사에 휘말린 사람들은 끊임없이 배고픔에 지고 만다.
먹기전에도 배고프고, 먹어도 배고프고, 다 먹고 나도 여전히 배가 고프다. 이 책의 수많은 단어들은 어쩌면 그 "배고픔"을 위해 존재한다고 봐도 무방할지도 모른다. 언젠가의 희망을 품기전에 살아있어야하고, 살아있기 위해서는 먹어야한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누군가의 죽음이 더이상 슬픔이 아니게 될 때에도 배고픔은 여전히 함께 있고, 배고픈 천사는 그들을 조롱한다. 공기속에 배고픔이 머물고, 그들은 그 배고픔을 매일같이 들이마신다.
그럼에도 그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마지막 이성과 한조각의 희망정도는 가지고 있다.
그게 의미 있을지 없을지, 수없이 번민하고 고민하면서도.
자신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누군가에게 받은 레이스 손수건. 다시 돌아오게 될거라는 할머니의 말.
그런것들에 기대어, 레오는 배고픔의 연속이던 5년간의 수용소생활을 마치고 돌아온다.
강제수용소를 다룬 책들은 참 많았고, 저마다 비극적이고, 괴롭고, 잔인하기 그지 없지만, 이 책은 그 수많은 괴로움들을 현실로 이끌어오고 있다. 어쩌면 단지 5년뿐이라고 할수도 있지만, 청년은 수용소에서 젊음을 빼앗기고 평생을 굶주림속에서 헤메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배가 고프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무엇에 굶주려있는지 알수 없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괴롭고 배고프던 상황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사악하게도 길들여져 또 다른 추억처럼 기억되는 것이다.
늘 허겁지겁 먹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린 레오를 보며, 그의 어머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을 동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을 느끼면서 레오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돌아온 고향은 또다른 의미로 낯설고 고통스러운 곳이 되어버리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겉도는 레오는 또다른 굶주림에 시달리며 또다른 향수를 놓치 못한다.
참으로 참혹한 일이다. 지옥에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지옥을 추억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과거에서도 존재할수 없는 슬픈 존재감과 돌아갈 곳이 없어진 비참한 현실속에 놓인 한 인간의 끝을 알수 없는 영혼의 굶주림은 이 소설을 관통하는 진짜 주제였다. 그래서 수용소생활같은 건 해본 적 없는 사람들까지도 그 현실의 연장선으로 끌고 와 한없는 고독과 상실감을 느끼게 만들어버린다.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써내려간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자유롭게 변형되고 엉기는 단어들을 통해 수용소의 참상과 그로인한 평생의 상실감과 갈망을 감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들숨과 날숨이 오르락 내리는 숨그네(숨+그네)처럼 몇가지 단어를 엮어서 함축적이고 개성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겉돌지 않고, 글에 착 달라붙어 고통스러운 비극을 아름답게 장식해준다.
아름답기 떄문에 더 비참하다. 자유는 빼앗기고 옷은 비루하고 배가 고파서 아무 생각도 할수 없는 현실은 감옥인데, 그 감옥마저 추억처럼 되뇌이며 자신을 그 감옥속에 가둬버리는 남자는 슬프고 가여운데, 단어는 아름답고 문장은 우아하다. 그래서 더 강렬하게 참혹하다.
인간이란 참 기묘한 존재이다.
끔찍한 상황에 놓여있을 때는 겁에 질리고 숨이 막혀서 살아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수 없는데, 그 지옥같은 시간들 마저 시간이 흐른후에는 추억하게 된다. 언젠가 꾸었던 기분나쁜 꿈들, 가지고 있던 아픈 순간들, 나를 지배하고 있던 나쁜 트라우마들이 나를 떠나지 않는 것은 왜 일까. 잊어버려야 마땅한 것들을 왜 의도적으로 떠올려 자신을 기억의 감옥에 가둬버리게 되는 것일까.
이 책은 내게 그런 고독한 내면의 감옥에 대한 답을 주지는 못했지만, 감히 그 누가 그걸 알수 있으랴.
삶이 대체 뭐예요? 라고 물어봐도 알 수 없는 것처럼, 인간으로써는 명쾌히 밝혀낼수 없는 이유없는 마음의 숨그네들을 감히 누가 규정할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