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자 오리하라 이치의 ○○자 시리즈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선영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소설을 보다보면, 가끔은 작가의 성격을 알수 있을 것만 같을때가 있다.
어떤 작가는 이 사람은 천재구나-느낄수 있는 반면, 작가의 성실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행간에서 읽어낼수 있는 소설가도 있다.
내게 오리하라 이치는 후자쪽의 모습이며, 왠지 이 사람은 호기심많고 이야기하기를 즐기며,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할수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일본 작가들중에서 다음권을 기다리는 작가는 몇 안되어서 손에 꼽을만한데, 오리하라 이치의 소설도 나오는 대로 눈여겨 보게된다.
오리하라 이치의 책은 도착시리즈와 <행방불명자>를 읽었는데, 그 중에서 <행방불명자>쪽이 약간 실망적이었기 때문에 이 시리즈를 읽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내 실수 였나보다. 이제부터 <-자>를 모두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야말로 치밀하고, 서술트릭이란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는 멋진 소설이었다.

젊은 여성을 강간하고 교살하여 불에 태우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다리를 타고 2층창으로 들어와 그런 잔학행위를 했다는 것은 알겠는데, 도무지 이 사건에는 증거가 없다. 이 연쇄살인을 기사로 쓰려던 기자 이가라시 도모야는 사건을 쫓던중, 함께 일하는 동료이자 약혼녀인 마이를 이 연쇄살인범의 피해자로 잃게 된다.
유력한 용의자는 가와하라 데루오. 그러나 명확한 증거물이 없기 때문에 경찰은 오랜 심문 끝에 자백을 받아내고, 가와하라 데루오는 무기징역에 처해지게 된다.
그 사건 후 12년이 흐른다. 이가라시 도모야는 어느날 살인범 가와하라의 편지를 받는다.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는 고백과 함께 자신의 무죄를 위해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해주길 바라는 가와하라의 말에 기가 막히지만,
이미 시간이 흘러서인지, 오래전 연인의 죽음에 대한 분노보다 기자로써의 호기심이 더 먼저 움직여버린다.
그렇게 여러사람의 도움을 받아 가와하라는 무죄판결을 받고 세상에 나온다.
감옥에서 사귀게 되어 결혼까지한 아내는 막상 그의 출옥후, 그를 증오가 섞인 눈길로 처다보고, 가와하라는 늘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쫓기는 느낌을 받게된다.
그리고 알수 없는 사건들이 이어지고, 또다시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사회파 소설의 포장을 두르고, "오리하라 매직"이라 불뤼우는 현란한 서술트릭을 보여주는 소설인데, 이 소설은 좋은 평가를 받는 동시에 사회파 소설인척 하면서 말장난이나 늘어놓는다는 악평도 함께 들었다고 한다.
아마 이 악평을 늘어놓는 사람은 오리하라 이치의 소설의 매력을 잘 간파하지 못한 사람이 아닐까.
치밀하고 현란한 서술트릭 자체가 오리하라 이치 소설의 커다란 장점이고 매력인데 말이다.
이 소설이 도착시리즈와 다른 점이라면 사회파 추리소설로 서술 트릭을 교묘히 감추고 있다는 점으로, 책이 두꺼운 것도, 이야기가 방대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것이다.
가혹한 살인마가 죄를 뒤집어쓴 원죄자인가, 아니면 진짜 파렴치한 살인마인가.
그를 둘러싸고 팽팽하게 맞부딪힌 가와하라를 옹호하는 사람과 피해자의 가족들의 말중 어떤 것이 더 정당한가.
누구의 말이 진실이고, 누구의 말이 거짓이며, 어떤 쪽에 서야 진실을 알수 있는가.
이 모든 것이 어울어져 혼란스러운 지도를 그려내는데, 기나긴 이야기를 모두 읽어내어 마지막에서야 깔끔하게 정리되는 기분을 느낄수 있다.  정말 희한하게도 마지막 한줄까지 다 읽어야 모든 사건의 진상을 알수가 있다. 미스테리가 풀린 후에도 나는 그간 읽었던 방대한 양의 이야기중 모순되는 점이 있어서 께름칙한 기분에 시달렸지만, 막판의 문장 몇개로 완벽히 설득당하고 정말 개운한 기분을 느낄수 있었다.

이처럼 치밀하게 이야기를 짜는 것도 쉽지 않겠다.
그리고 그 치밀한 이야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오리하라 이치가 보여준 서스펜스는 그야말로 미스테리이며, 그 자체가 스릴러이다.
막상 이야기의 정체는 매우 간단하고 단조로운 것으로, 자칫 잘못하면 도가 지나친 단순함이라 생각될수 있는데도, 그것을 퍼즐처럼 조각내어 재미나게 포장하는데 대단한 재능이 있는 작가이고, 이런 사람을 타고난 이야기꾼이라고 하나보다.
그간 오리하라 이치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코드들은 이 소설에서도 여전히 많이 등장한다.
비틀린 이상 심리와 관음증, 스토커와 강간범, 가학적인 성욕, 우연한 계기로 죄를 뒤집어쓸 위기에 처하는 사람, 묘하게 정신이 비틀어진채 시간을 잃어버리는 행위, 다소 얄팍한 깊이의 그로테스크 등, 비슷한 코드가 많이 등장하는데도 지루하거나 뻔해보이지 않는다.
똑같은 코드를 등장시키는데도, 오리하라 이치는 언제나 "마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너무 퍼즐같아서 다소 장난스럽다 느껴지는 <도착>시리즈에 비해, <-자>시리즈는 약간은 더 어둡고 무섭지만, 오리하라 이치가 암흑계 작가는 분명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사회파 추리소설로 갈려다가 다시 그의 본연의 모습으로 싹 탈바꿈하는 모습이 특히 그렇다.)

가물가물하게 <행방불명자>에서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중 한명의 존재를 발견한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역자후기를 보니 <-자>시리즈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지는 않지만, 간간히 이 소설의 등장인물을 다른 소설에 등장시키기도 한단다.
<행방불명자>같은 경우는 반전에 반전이 너무 심한 나머지 서술 트릭에 너무 집착하고 있고, 감정적으로 억지스러운 느낌을 지울수 없었지만, <원죄자>에서 다시 오리하라이치와 "노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으니, <-자>시리즈도 모두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실종자>와 <도망자>.
자, 오리하라 매직에 빠져보자.
오리하라 이치의 장난질에 깜빡 속아넘어가는 기쁨을 또 누려보자!
이런 사기라면 언제든지 당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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