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 The Gorgon's Look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0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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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휴일 낮, 허리가 뻐근할 정도로 잠을 자고 일어나 여유롭게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왜 였을까. 제목에서 오는 느낌탓인지, 나는 이 책을 "트릭깨기" 위주로 흘러가는 다소 가벼운 두뇌놀이 스타일의 소설일거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아니 왠걸? 반쯤 읽어가다보니 트릭이고 나발이고,  이 미스테리한 일련의 사건들의 배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못참게 될 지경이라, 꽤 두꺼운 분량에도 단숨에 읽어버리게 되었다.
작가와 동명의 이름의 주인공을 탐정격 인물로 내세운 것이라던가, 탐정격인물과 함께 아버지가 보조 탐정격으로 등장하는 점이라던가, 작품의 스타일도 엘러리 퀸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한 노리즈키 린타로는 솔직히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앞으로는 가장 기다리는 작가중 하나가 될 것 같다.

천재 조각가가 오랜 슬럼프를 극복하며, 투병생활 중에서도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딸을 주인공으로 한 석고상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세상에 선보이기 전, 조각가는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그리고 조각가의 장례식 후 그 마지막 작품의 머리가 사라진다. 조각가의 회고전을 준비중이던 미술 평론가는 이 사건을 경찰에게 알리기보다는 조용히 해결하기를 바라고, 그렇게 노리즈키 린타로라는 추리소설가가 이 사건에 개입하게 된다.
사람을 모델로 해 만들어진 석고상의 머리가 잘려나갔다는 것은 일련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고장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조각가의 딸 에치카의 주변인물들을 조사하던 중, 예전에 그녀를 스토킹해왔던 질나쁜 사진가 도모토 슌의 존재를 알게되고, 사건이 점점 알수없는 미궁에 빠져들어가는 새에, 에치카가 실종된다.

최근 읽었던 일본 소설들 가운데 가장 꼼꼼한 소설이 아니었나 싶은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제목만큼 사건이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그 사건들의 내막에 깔린 이야기의 충격과 무게감에서 깊이를 느낄수 있는 작품이다.
노리즈키 린타로는 추리소설가이기 이전에, 추리소설 평론가라고 하던데 이러한 내력 때문인지, 간간히 일본 추리소설에서 느낄수 있었던 얄팍한 깊이감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노력을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는 내내 작가 자체가 갖가지 예술에 대한 정보가 풍부하다고 느꼈고, 그로써 무척 지적인 소설이라는 느낌도 받았다.
반면, 탐정격으로 등장하는 노리즈키 린타로의 존재는 여타 다른 소설들의 탐정격 존재들과는 다른 무척 평이하고 다소 어리석은(탐정이 속아넘어가기도 한다!) 캐릭터로 만들었는데, 이 점 또한 현실적이고 신선했다.
또, 여타 다른 일본 추리소설처럼 굳이 잔혹성을 필두에 세우지 않고, 다소 냉정하고 담담하게 사건의 내막을 파고들어가는데도, 소설속 인물들의 유기적인 관계를 탄탄히 만들어놓았기 때문인지 내내 긴장감을 가지고 볼수 있었다.
전형적인 트릭깨기 스타일의 추리소설처럼 시작해 소설 중반을 지나면 질펀한 악연들과 그 악연들이 펼쳐내는 끔찍한 인간의 모습들에 전율을 느끼게 된다.

의심과 오해, 오랜 증오와 잔혹한 이기심.
이 책의 키워드라고 할수 있는 이런 감정적인 문제들이 꼼꼼하게 만들어진 인물들의 관계성과 공정하게 주어지는 복선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나타난다. 사실 초반부의 이야기들이 다소 늘어지고,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흩뿌려 놓기만 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는데, 책의 마지막을 다 확인하고 나서는 그런 것들이 모두 필요했던 과정임을 알게되었다.

나는 일본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본 추리소설을 좋아할 뿐이다.
그리고 그나마도 좋아하는 일본 추리 소설도 무척 한정적이다.
몇년간 읽었던 일본 소설들의 대부분이 다소 가벼운데다가, 언어적 유희나 사고방식의 전환을 통한 막판 반전 한방을 노린 소설이 많았었는데, 그런 소설은 킬링타임으로 읽기에는 괜찮을지 몰라도 그런 소설을 좋아한다고는 말할수 없겠더라.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내 눈을 쏙 잡아끌었던 무척 즐거운 소설이었다.
이 책의 주요 사건의 내막들은 유행하는 반전 소설들처럼 한방에 속아넘어가는 카타르시스를 주지는 않는데, 차분히 어떤 이야기들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간의 모든 복선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스쳐지나갔던 말한마디들이 꼭 들어맞는 퍼즐처럼 맞춰져서 책의 마지막 한장까지도 버릴 이야기가 없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의 시초이자, 마지막이 되는 결말부분의 론도 형식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작가 자신이 흥분하지 않되, 세련되고 차분하게 사람을 흥분시키는 매력을 가졌던 소설인데, 아마도 이런 건 재작년에 읽었던 <제물의 야회>이후로 처음으로 느끼는 흥분감이었던 것 같다.

이 대단한 소설을 덮으면서 나 역시 기시 유스케의 찬탄에 동감할수 밖에 없었다.
정말 잘 만들어진 소설이다! 라고.
노리즈키 린타로의 다른 소설들이 또 언제 출간 될지 모르겠지만,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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