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뱀파이어 연대기 1
앤 라이스 지음, 김혜림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처음 만난 건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로 돌아간다. 새학기를 맞아 잠실에 있는 모 백화점에 친구와 가방을 사러 갔다가, 아무 생각 없이 무슨 영화인지도 모른 채 극장으로 들어갔었다. 이 영화가 내 친구의 선택이었는지, 내 선택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극장에서 나올 때 나는 가슴 벅차오르는 어떤 감정을 느꼈고, 꽤 오랫동안 이 영화에 빠져있었다. 브래드 피트를 좋아하게 된 것, 탑건이나 칵테일같은 영화에 나와서 경솔하고 지혜롭지 못하나, 열정은 불타오르던 젊은이의 이미지로 각인되었던 톰 크루즈를 재발견 하게 된 것도 이 때이다. (하긴, 한편으로는 이 영화에서 톰크루즈의 레스타 또한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거의 사랑에 가까웠으며, 나는 이어지지 않고 멈춰버린 마지막 장면 이후의 이야기를 자꾸만 상상해보게 되었다.
그들은 불사의 존재이고,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존재이니 어쩌면 이후의 이야기가 있다면, 클라우디아가 다시 살아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나만의 환상은 이루어지지 않은 루이스와 클라우디아의 사랑의 완성판이었던 것 같다.
이상형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처음 깨닫게 된 것도 그때 쯤이었다.
나는 언제나 고뇌와 고독에 차있고, 나약하며, 혼자있기 좋아하는 외골수형의 인간을 사랑하고 싶었다. 꼭 루이스같은.
그렇다. 나는 모성애가 가득한 중학생 소녀였던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만난지 15년이 되었다.
내가 그 영화를 처음 보았던 딱 그 나이 만큼 세월이 흘렀다.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를 서점에서 발견하고 낚아채듯 사서 와 읽은 것은 그보다 훨씬 후 20대의 일이었지만, 책장을 펼치는 순간부터 나는 다시 뱀파이어와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고, 정신없이 그때까지 나와있던 모든 시리즈의 책을 사들이고, 정신없이 읽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렀고, 새로운 뱀파이어 연대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번역되지 않아 미처 읽지 못했던 전 시리즈를 다 볼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터질정도로 흥분된다.
딱 이 정도로만 얘기해도 내가 얼마나 뱀파이어 연대기를 사랑하는지 알수 있으리라.
이제부터 써내려가는 리뷰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 스타일의 찬양에 가까운 극찬 리뷰일 것이 뻔하니, 거슬리는 분들은 여기부터 읽지 않으시면 되는 것이다. 으하하하하하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는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 중 첫번째 편으로, 전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한 기자가 밀랍같은 얼굴을 한 뱀파이어를 만나 인터뷰를 시작한다.
그의 영생의 삶과 고독과 그를 지배하고 있던 생각들을 테잎에 녹음해 가면서.
그 뱀파이어의 이름은 루이스라고 한다. 부유한 농장주 젊은이였던 루이스는 사랑하던 동생을 잃은 후 실의에 빠져있다가 뱀파이어 레스타를 만나게 된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고 도도하며 자신만만한 모습에 빠져 정신을 잃은 것은 잠깐, 자신의 재산과 재정관리 능력을 노리고 접근해 동료로 만들어버린 레스타를 곧 증오하기 시작한다.
수수하고 고독함에서 안정을 찾는 루이스와는 달리, 화려한 세계와 예술을 사랑하고 지극히 사치스러운 레스타.
그리고 이들의 사랑인지 증오인지, 아니면 그저 동료의식인지가 이어지는 가운데, 루이스는 괴로움에 차있던 어느 날 죽은 엄마옆에서 울고 있던 6살 짜리 소녀를 만나게 되고, 그녀를 물게 된다.
루이스는 어린 아이의 피를 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무슨 생각인지 레스타는 그 아이를 데리고 와 뱀파이어로 만들어버린다.
그 아이가 클라우디아. 6살짜리 소녀이면서, 귀부인이고, 놀랍도록 아름다운 인형 뱀파이어이다.
처음에 레스타를 피해 클라우디아를 보호하려던 루이스는 곧 클라우디아에게 깊이 빠져들게 되고, 그의 삶에 의미있는 것은 단 하나 클라우디아 뿐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아버지와 딸, 또는 연인과도 같은 관계.
25살의 외형을 가지고 우유부단하고 나약한 루이스와 6살의 외형을 가지고 교활할 정도로 똑똑하며 도발적인 클라우디아.
한결같이 공허하지만 사치스럽고, 비밀스럽지만 끈끈한 이들의 삶이 변하기 시작하는 것은 클라우디아가 레스타를 죽이기로 결심하면서 부터였다.

작가 앤 라이스는 이 소설을 6살짜리 딸을 읽고 술독에 빠져지내다가 정신차리고 쓰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녀는 소설에서나마 죽은 딸의 영생을 바랬던 것은 아닐지 모르겠으나, 소설을 차차 써내려가면서 어쩌면 그녀도 이런 삶이 결코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않았을까.
지독히도 고독하고, 방관자적인 뱀파이어의 삶은 인간의 삶과 너무나 다르다.
그들에게 희열과 열정이 존재하는 것은 식사할 때, 그러니까 인간의 피를 빨 때 뿐.
아무리 고독하고 상념에 자주 잠기고, 지혜롭다 하여도 결국은 식욕이 가장 중요한 짐승이 되어가는 것이 그들의 창백하고 아름다운 얼굴 속의 정체였다.
루이스가 자주 괴로워지는 이유는 인간과 뱀파이어 그 사이에서 오느 괴리감이 너무 크게 때문이다.
인간이었던 루이스는 온정을 바라고, 선을 바라는 착실한 청년인데, 뱀파이어가 된 루이스는 살기 위해 또는 잠깐의 쾌락을 위해 인간을 죽여야하는 짐승이 되어버린 것이다. 평생 가지고 있는 선에 대한 결벅증적인 관념과 피를 원하는 욕구 사이에서 한없이 괴로움과 고독에 젖는 루이스의 모습은 이 소설 이전에는 볼수 없었던 뱀파이어의 모습이었다.
내게 이 소설이 압도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그런 점 때문이다.
한도 끝도 없는 영생의 공허함과 박재된 아름다움, 인간성을 잃어가는 과정의 거인과도 같은 상실감.
결코 가볍지도, 천박하지도 않은 채 더할나위 없이 깊이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들의 짐승같은 행위, 잔학하고 교활한 술수 또한 그 깊이감으로 인해 한없이 우아하고 또 쓸쓸하다.
또 아무리 생각이 깊은 척 하고, 세상의 온갖 철학과 감정을 느껴본 듯 말하지만 결국은 인간의 피를 빨고 사는 한마리 짐승에 가깝다는 점 또한 허망하게도 아름답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그 어떤 멋들어지고 가슴 벅차오르는 씬들 보다도, 루이스가 한없이 고뇌하고 절망에 빠져있는 순간이 내게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 또한, 이런 아이러니한 감정에서 비롯되리라.

나는 뱀파이어를 다루면서, 인간의 감정과 상실감을 이야기하는 이 <뱀파이어와의 인터뷰>가 뱀파이어 연대기 전 시리즈중에서 가장 좋다. 이후의 이야기는 레스타의 모험에 가까운 이야기이고, 그것이 결코 지나치게 가볍고 경박한 것은 아니지만, 그 어느 시리즈보다 더더욱 마음속에 깊이 박히는 것은 이 소설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인간성에 대한 성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이 점은 루이스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려 가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성격이 완전히 다른 레스타가 화자로 등장하면 이야기는 더 화려해진다.)
내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뱀파이어 이야기. 이전에, 또 이 후에 어떤 뱀파이어 소설이나 영화가 나온다 해도, 내 마음속의 최고봉에 오른 것은 바로 뱀파이어 연대기이고,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그 생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앤 라이스의 우아하면서도 공허한 문장들 또한 내게는 피할수 없는 매력이다.
흠모하고 또 흠모하는 뱀파이어 연대기를 오랜 시간 기다린 끝에 이번에는 반드시 그 끝을 확인할수 있기를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책장을 다 덮고나서 꼭 매우 슬픈 꿈을 꾸고 일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루이스가 그랬듯, 나는 그 슬픔을 사랑하고, 그 슬픔속에서 안정적이서 슬픈데도 마음이 벅차올랐다.
이제 락스타가된 레스타의 조금더 명랑한 이야기로 넘어갈 차례.
올 가을은 뱀파이어들과 그들의 허망한 영원속에서 헤매일란다.

p.s 책을 받아들고 뒤늦게 깜짝 놀랐다. 안에 만화가 박희정씨의 일러스트가 권두에 하나씩 들어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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