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4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4
이종호 외 지음 / 황금가지 / 2009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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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마지막장을 덮으면서 와-하는 탄성을 내면서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을 1편부터 매년 여름 꼬박꼬박 읽어온 나로써는, 우리나라 공포문학 작품들의 4년간의 놀라운 성장이 기분 좋을 수 밖에.
한 작가의 단편집이든, 엔솔로지 형식이든, 단편집이라는 것은 모든 작품이 만족스럽기 쉽지 않은데, 참 놀랍게도 이번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의 네번째 책은 모든 단편이 재밌었다.
이 책의 모든 단편들이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갖추고 있고, 어느 것 하나 떨어지는 것 없이 
소재, 표현방식, 문장력, 재미와 의미 모든 부분에서 세련된 느낌을 받을수 있었다.
지금까지 나온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시리즈 중에서 최고였고, 또 지금까지 읽어본 한국 단편집 중에서도 최고였다.
(그렇게 많은 한국 단편집을 읽지 않았다는 점을 얘기해두어야겠지만...)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초기만 해도 보이던 다소 떨어지는 구성력이나, 초보적인 문장력은 이제와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점이 놀랍고,
귀신이라던가 초자연적인 현상들에 대한 공포에서 머물던 소재가 훨씬 다양해지고 훨씬 더 현실에 가까워진 느낌 또한 놀랍다.
(귀신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공포소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식상한 것은 사실이고
아주 무섭거나 아주 스릴있거나 아주 재밌을 것이 아니라면 "괴담"정도의 이야기로 남기도 하는 것 같아서
나는 그런 소재를 그닥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전형적인 공포에 충실한 작품이 많지 않아서 한 여름밤 공포에 오돌오돌 떨게 만들기에는 부족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말초적인 공포보다는 생각할 거리를 남겨두는 편이 훨씬 더 좋아서 이번 단편집은 흥미진진하고 즐겁게 읽었다.
(어차피 나는 겁도 없어서 왠만해서는 겁도 먹지 않는다....)
그간의 우리 공포문학의 성장을 내 눈으로 계속 확인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몹시 기분이 좋다.
자, 정말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공포문학 단편선들을 한편 한편 들여다볼까? 


첫 출근
시골에서 올라와 첫 첫취직을 하게된 주인공은 으리으리한 건물안에 존재하는 사무실로 첫 출근을 하게된다.
평소 상상하던 회사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사무실에서, 주인공이 해야할 일은 전화로 업무를 지시받고,
전화로 지시받은 명령을 다른 곳으로 전달하는 일이다. 그런데 영문도 알수 없는 기이한 메시지를 전달받고 전달하면서, 주인공은 자신이 이상한 회사에 취직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첫 작품부터 몰입력이 대단하다. 공포요소를 버무려 다소 과장하기는 했으나,
자신에게 주어진 일 이상은 관심을 가지지도, 관심을 가져서도 안될 현실의 직장인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명령만이 살아움직이는 사회.
차갑고 정떨어지지만 그런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에 대한 비판.
과연 첫출근 후에 그는 회사에서 살아남아 승진까지 할수 있을까?
무엇이 진짜 공포일까? 내가 회사에서 짤려 무일푼의 백수가 되는 것?
아니면 내 손이 아닌 누군가의 손에서 이루어질 잔혹한 명령을 그저 전달하기만 하는 것?

도둑놈의 갈고리
등산동호회에서 산행을 나갔다가 도둑놈의 갈고리라는 기이한 이름의 식물을 매개로 한 남자를 알게된 여자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매너좋고 잘생기고, 돈많고, 완벽한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었는데,
어느날 어떤 여자가 다가와 이 남자와 빨리 헤어지는 것이 신상에 좋을거라 충고한다.
이제는 공포문학의 대표작가라고 말할수 있는 김종일작가의 단편으로 호흡좋고 몰입도 좋고, 소재도 좋다.
몰카를 주제로 한 작품인데, 아직 미혼인 여자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이보다 더 소름끼치는 일은 현실에 없을 듯 싶다.
읽으면서 그 놈의 말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에 나까지 치가 떨렸다.
인터넷안에 숨어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현대인의 고질적인 관음증 행각을 소재로한 작품은 뒤에 <배심원>이라는 작품이 하나 더 있는데, 두 작품 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얘기는 들어봤을 듯한 소재를 다루고 있고 또 두 작품 다 설득력 있었다.

플루토의 후예
이종호작가의 플루토의 후예는 고양이에 관련된 전형적인 공포물이다.
흉가처럼 보이는 집으로 이사하게된 어느 가족은 집주변에 들끓는 고양이들을 보며 치를 떤다.
그러던 중, 소년은 눈부위에 상처가 있는 검은 고양이를 마주치게 되는데, 성깔이 보통이 아닌 이녀석을 길들이기 위해 생선을 받치던 중, 도무지 길들여지지 않는 놈에게 화가 나기 시작한다.
고양이에 대한 흉흉한 괴담들이 소재가 된 것 같은 작품인데, 그럭저럭 재밌음에도 좀 흔한 이야기들이라서 아쉽게도 특별함을 느끼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기본은 해주는 작가라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폭주
SF 호러라고 부를수 있는 작품은 이번 단편집에서 두개인데,
그중 하나인 <폭주>는 행성 충돌로 인류 종말이 몇시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구가 살아있을 수 있는 시간은 단 7시간. 이제 곧 모두 죽는다는 생각에 세계 여기저기에서 무자비한 범죄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동네에서 이제 곧 죽을 거 맘대로 하다 죽겠다는 듯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소년들을 목격하게 되고, 그들에게 어머니를 잃는다.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이미 숫자로 밀리는 상황에서 그는 비겁하게 뒤에 숨어 훔쳐볼수 밖에 없는데, 그 순간 그들이 그를 발견한다.
그냥 그럭저럭 읽을만 하다-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반전에서 피식 웃음이 났던 왠지 유쾌한 작품이다.
그래. 지구가 멸망해도 애들은 애들이지.

불귀
악랄한 시어머니와 며느리. 무턱대고 자신을 괴롭히고 자신이 낳은 아이마저 위협하던 시어머니에게 여자가 돌아갈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얼마전 죽었던 남편의 유언때문이었다.
병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던 시어머니의 꼬장꼬장한 성격은 그대로.
이제 일곱살이된 딸은 시어머니눈에 안 띄도록 하면서 보살피는데, 자꾸 이상한 사건들이 이어진다.
밤에 누군가가 마루를 걸어다니질 않나, 딸이 시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을 목격하질 않나.
죽었다고 생각했던 시어머니가 시체처럼 누운채 삶을 연명하고 있질 않나.
묘한 불쾌감을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다.
우명희 작가의 단편은 이번에 세번째 읽어보는데, 세 작품을 읽고나니 이 작가의 작품의 이미지를 알수 있겠다.
담쟁이 덩굴 너머 어두침침한 그늘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
손에 확실히 잡히지 않는 굉장히 기분나쁜 무언가를 뚫어지게 보고있는 느낌.
작가가 여자라 그런지, 어딘가 여성스러운 면이 있기는 하지만 작품이 결코 연약하거나 나약하지 않다.
실체가 정확하지 않지만, 충분히 공포스러운 이 칙칙하고 어두운 느낌들이 이 작가 작품의 특징이고 개성이며 매력이다.
한국적인 공포란 무엇일까? 나는 아마도 이 작가가 가장 한국적이고 불쾌한 공포를 잘 담아낼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기대가 되는 작가이다.

도축장에서 일하는 남자
폭력적인 성향이 다분한 한 남자가 어느날 깨어나 보니 도축장에 와있다.
기계부품처럼 정해진 일을 할수 밖에 없는 상태이데, 여기가 어디인지, 왜 이곳으로 왔는지 도무지 알수가 없다.
탈출해보려고도 했으나 함께 탈출하던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그는 그저 여기에 머무르면서 기회를 엿보기로 한다.
이 작품의 작가는 악몽을 기록해놓는다고 한다. 이 단편이 꼭 그것과 같은 느낌이라 꿈을 꾸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굉장히 모호하고, 차라리 눈감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공포스럽지도, 그렇다고 공감이 가는 것도 아니지만, 그냥 묘하게 이상한 채로 계속 흘러가는 느낌. 특별히 재밌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끊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재미없지도 않다.
어느 날 내가 꾸었던 기분 이상한 꿈 하나를 소설로 읽는 느낌이다.
이런 여러가지의 모호함이 장점이라면 장점이고, 단점이라면 단점이겠다.
얘기 자체의 모호함을 조금만 줄이고 분위기는 그대로 살린다면,
이런 특징들이 굉장히 매력이 되어 몽환적이고 더 즐거운 얘기가 될수 있을 것 같다.

더블
역시 SF 호러라고 부를수 있는 작품이다.
어느 순간 지구가 3초간 정지해버렸고, 세계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모습을 똑닮은 존재들이 하나씩 생겨나게 된다.
자신과 똑닮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도플갱어의 전설과는 다르게, 이 "더블"이라는 존재들은 그저 한번 더 복사된 그 사람 자체이다.
주인공은 어느날 자신의 더블을 발견하고, 주위에 도움을 청하지만 딱히 누구도 도움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더블의 존재는 그녀를 압박해오기 시작한다.
다른 단편들에 비해 분량이 약간 적은 편이고, 읽으면서 조금 심심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마지막 한 문장에 이르러서는 뭔가 생각해보게 만든다.
묵묵히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나. 그리고 내가 꿈꿔왔던 이상향의 나. 그 어떤 것이 나의 진짜 모습일까?
진정한 자아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만든다.

배심원
<도둑놈의 갈고리>와 함께 요즘 크게 이슈화되고 있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인터넷 마녀사냥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족의 불화와 존재감없는 자신의 상황에 절망한 한 여고생이 자살하기로 한다.
삶에 그다지 애착이 없는 아이.
자신이 자주 들락날락 거리던 체팅 사이트에 자신의 프로필을 바꾸면서 자살할거라는 예고를 몰래 집어넣는데, 누군가에게 선포한 것도, 관심가져달라고 소리친 것도 아닌데, 어느새 세상의 중심에 서버리게 된다. 불쾌한 오명으로...
다소 과장된 면이 있어서 납득이 가지않는 부분도 있지만, 심리묘사와 물 흐르는듯한 전개가 탁월했던 작품이다.
그러게. 너무 적은 관심도, 너무 많은 관심도 안좋다니까.

행복한 우리집으로 어서 오세요
제목만 보면 가족잔혹사를 다룬 작품일 것같은데 의외로 좀비물이다.
어느 날 피투성이가 된 채 뛰어들어온 아버지. 집밖은 웅성대고, TV속의 세상은 아비규환이다.
사람이 사람을 뜯어먹게 되어버린 세상.
이윽고 곧 괴물로 변한 아버지를 화장실에 가두고, 열일곱살짜리 아들 하나, 아버지를 가두면서 다리가 부러진 재수생 딸하나,
아버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공주같은 엄마 하나가 집안에 갖혀 생존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좀비물이라고 보기도 모호한 것이, 좀비 비슷한 괴물들이 나오긴 하지만 막상 얘기의 초점은 다른데 맞춰져있어서 재난물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들이 품게되는 과거의 향수와 미처 생각지 못하고 살아왔던 가족애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풀어낸 작품으로, 좀비+재난물이면서도 묘하게 굉장히 감성적이다.(?)
여러가지 장르가 복합된 듯한 느낌이 드는 단편으로, 재밌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감상적이지 않았나 싶기도 한데, 보는 방향이 어떤가에 따라서 호불호가 가려질 작품같다.
공포면으로 보자면 현저히 스릴이 떨어질테고, 가족 재난물로 보자면 감동적일테니.

배수관은 알고있다.
마지막 작품 <배수관은 알고있다> 또한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다.
기러기 아빠가 되어버린 한 남자가 새로 이사를 가면서 배수관을 통해 다른 집의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된다.
자신이 없는데도 잘 살아가고 있는 아내와 딸. 엘리베이터에서 문득 마주친 매맞는 아내. 기억이 사라진 어느 하루.
개연성 없을 것 같은 하나하나의 단편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무섭고 슬픈 결말.
이 단편집중에서 가장 쓸쓸한 느낌이 많이 들었던 작품으로 마지막 책장을 덮는데 기묘한 공허함이 덮쳐왔다.
잘 짜여진 퍼즐을 보는 것 같은 완성도도 마음에 들지만, 지나치게 감상적이지 않으면서도 인물의 감정표현에 인색하지 않아서 소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남자주인공의 쓸쓸한 마음에 동화가 되더라.
멋진 단편이었고 앞으로도 기대가 되는 작가이다.


어느새 여름이면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이 언제 나오나 기웃대게 되었다. 여름이 되면 꼭 하고 지나가야 할 통과의례인듯이...
해가 갈수록 발전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고, 갈수록 양질의 단편을 읽게해준 작가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남몰래 전하고 싶다.
이번 단편선도 좋았지만, 내년에 나올 단편선은 더 좋을거라는 기대감을 품고 또 내년을 기다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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